아들러 VS 김동문? 풉~! 김 목사, 디게 우낀다. 감히 아들러라는 심리학 거장에 맞짱을 뜨려고 하다니…! 김삿갓이 들으면 一笑 一宵 又 一笑(웃긴다 웃긴다 또 웃긴다)하지 않을까 싶네….

세간에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라는 일본 사람이 정신의학자요 심리학자인 아들러의 심리학 이론을 토대로 쓴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인기란다. 행복한 삶?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바라는, 인간이 죽기 직전까지 바라는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게지. 그런데 그렇게도 행복한 삶을 바라면서도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게 또한 인간이 아닌가 싶어. 나도 학교 다닐 때, 아들러의 심리학을 얼핏 다룬 것 같은데 지금은 아들러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그가 주장한 이론은 다 잊어버렸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으면 아마도 내가 심리학 박사가 되었지 않나 싶어. 아들러라는 이름도 잊고 살고 있는데 일본 학자 두 사람이 아들러의 심리학 이론을 토대로 쓴 ‘미움받을 용기’라는 발칙한(?) 제목의 책을 쓰는 바람에 다시금 아들러의 심리학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더군.

우야둥둥~,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을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 캬~ 통쾌한 레토릭이 아닌가 싶어.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안 받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에 관한 일반통념이지.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들(objects)로부터 미움을 안 받기 위해 발버둥치다보면, 정작 자기(self)를 포기하거나 잃어버리기 쉽지. 어쩌면, 우리 사회는 그동안 자기를 포기하는 삶을 가르치고 요구해온 면이 많은 것 같애. 그것이 정말 자기(self)와 다른 사람들(objects)을 합친 자기대상(selfobjects)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아름다운 자기포기일 수가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말로는 모두의 행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소수의 특권층이나 기득권층의 행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해온 면이 많은 것 같고, 그 가운데 그 요구에 부응해온 자기(self)는 점점 불행해져가는 경우가 많았지 않나 싶어. 그런 점에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동안 자기에게 포기와 희생을 요구해왔던 ‘그들로부터 미움받을 용기’를 내라는 것은 그들이 보기엔 발칙하고 가당치도 않은 것이겠지만, 그에게는 투지가 생기게 하는 역설적 파워 레토릭이 아닌가 싶어.

아들러에게 있어서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용기’라고 해. 그러면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지. 당신은 자유로워질 용기를 가졌는가? 당신은 평범해질 용기를 가졌는가? 당신은 행복해질 용기를 가졌는가? 당신은 미움받을 용기를 가졌는가?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은 참 좋은 말 같지만 정작 실제로 용기를 내기는 어려운 같애. 자유로워질 용기?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는 게 분명해. 그렇지만 의외로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유를 주는 지도자를 무능하다고 하면서 강력한 사슬(?)에 묶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애. 세속의 사슬로도 만족이 안되면 종교의 사슬에라도 묶이고 싶어하는 속성들이 있는 것 같아.

평범해질 용기? 사람에겐 자신이 평범한 존재이면서도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건방을 떠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애. 평범한 존재로 생각하면 이런 저런 싫은 말도 들을 수 있잖아? 그런데 듣기 싫은 소리하면 열부터 내는 게 요즘 사람들인 것 같아. 자칭 믿음 좋다고 하는 사람도 설교 듣고 삐져서 교회 나오네 마네 하는 사람들,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많지. 자기를 평범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평범한 대우(?)를 받아도 크게 열받을 일 없어. 그러나 자기를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쉽게 열 받게 되지. 열 받으면 받는 만큼 자기도 불행해지고 덩달아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거고. 결국, 평범해질 용기를 낸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 중의 하나인 ‘내려놓음’을 실천한다는 것인데, 이게 어디 쉽간?

행복해질 용기? 오 주여~, 내가 행복을 간절히 바라나이다! 어디 이게 나만의 절절한 바람이겠는가? 모든 사람들의 바램인게지. 이런 말이 있어. 쌈박질하는 것을 보고 자란 사람은 오히려 평화가 지속될 때 더 불안하다고. 어느 싸움 잘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그러더군. 교회가 평화로우면 괜히 불안하다고. 쌈박질을 해야 겪을 거 겪었다는 생각과 함께 안도가 된다더군. 참으로 웃픈 일이야. 행복, 진짜 행복은 행복해질 용기가 있는 사람이 누리는 복인 거 같애. 그런데 사람들은 불행과 행복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의외로 불행을 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이해보다는 오해를 택하고, 협력보다는 분열을 택하고, 사랑보다는 미움을 택하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해질 용기를 내어야 하는 것이거늘! 용기를 내어 행복을 주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거늘!

미움받을 용기? 애나 어른이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치는 발버둥, 에혀~ 가련한지고…. 물론 사람이 사회 속에 살면서 ‘재수없는 인간’ 소리를 들으면서 미움받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일게다. 그렇지만 말이다. 나보다 힘 센 인간에게 미운 털이 안 박히기 위해, 그 인간이 이기적인 행복을 누리게 하는데 나를 소진시키고 나를 병들게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신앙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 진정으로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설령 이기적인 권력자에게 미운 털이 박히더라도, 무식하고 비정한 종교지도자에게 은혜가 없는 자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미움받을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하지.

아들러? 김동문? ‘김동문 보다는 아들러’도 아니고 ‘김동문이 아닌 아들러’도 아니다. 아들러는 아들러고 김동문은 김동문이다. 글쎄, 둘 다 누군가에게는 재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는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조차 버리고 절대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인생의 분깃을 누리며 사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걸 말리는 사람은 세상의 지도자건 종교지도자 건 간에 나쁜 잉간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가 되려면, 우리 한국교회가 좀 더 나은 교회가 되려면, 지도자들이 공익 운운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이기적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그 욕망을 내려놓고 각자에게 행복을 위한 ‘용기’를 내도록 등 두드려주면서 삶의 현장으로 들여보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런 발칙한(?) 말을 하는 나도 실은 그런 용기가 없어. 기존의 기성세대 보다는 ‘용기’가 있는 사람 축에 끼는 것은 맞는 거 같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과거의 전통으로 회귀를 해. 그렇지만 내 자식들에게는 ‘용기’를 심어주고 싶어. 아니, 비단 나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 세대는 다 자식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봐.

애비의 삶의 현장 깊숙이 들어와 함께 협력하는 경험을 해본 아들과 딸, 그 경험이 속박과 강제의 아픔을 준 불행한 경험이 아니라, 애비의 삶을 넘을 용기를 내어 너희들의 행복한 삶의 지경을 더욱 넓히는 기회가 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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