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밤에 우리 가족은 최근에 화제작으로 떠오른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 초반부터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고 웃음보를 자극하기도 하더니 때로는 흐느낌을 애써 참아야 할 정도로 동감(sympathy)과 공감(empathy)에서 오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곁눈질로 보니 아들 녀석도 슬쩍슬쩍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낸다.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 덕수를 통해 내 인생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또 앞으로 살아내야 할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들 녀석도 하는 말이 영화를 보면서 아빠를 많이 생각하게 되더란다.

가장…, 어린 덕수를, 청년 덕수를, 남편이자 아버지인 덕수를 항상 긴장시키고 끊임없이 노동의 현장으로 자신을 내던지게 했던 이름은 바로 '가장'이었다. 가장 덕수는 삶의 순간 순간 힘들어하기는 했어도 가장으로 사는 삶을 결코 싫어한 것 같지는 않다. 자기가 가장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으로 운명지어진 것을 받아들였고 가장으로서의 삶에 그의 전 생애를 바쳤다. 영화 말미에 덕수의 후손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행복한 시간들을 갖는데 덕수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아버지의 유품을 끌어안고 눈물을 쏟으며 독백처럼 말한다. "아부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 그런데 저는 진짜 힘들었거든예~" 그러면서 눈물을 쏟아낸다.

아부지…, 덕수는 아부지를 그리워한 아부지였고,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드리기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아부지였고, 아부지 앞에 당당하게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라고 말할 수 있었던 아부지였다. 즉, 덕수로 하여금 덕수되게 하였던 것은 덕수의 마음 속에 늘 살아계셨던 '아부지'였던 것이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아침에는 유럽배낭여행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마중하였고, 오후에는 어르신들과 아이들과 직원들이 함께 하는 음악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니 '아, 이렇게 매일매일 나를 바라보고 나를 믿고 나를 따르는 식구들이 이렇게 많구나. 그리고 아들의 아버지여야 하고 딸의 아버지여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그렇게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가장으로 살아왔고, 가장으로 살고 있으며, 가장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내가 덕수처럼 나이를 먹지 않았으니 감히 아버지에게 '아부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에~?'라고 여쭐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정도 말씀은 드릴 수 있지 않나 싶다. "아부지예~, 고마 내사마 열심히 잘 살고 있으이 걱정 마이소~"

덕수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시절 세상에 던져져서 이 공장 저 공장을 전전하면서 기술자 형아들에게 얻어터지기도 많이 했었다. 육두문자와 함께 몽끼가 날아오고 뺀찌가 날아오고 했었다. 궁댕이도 몇 번 발로 걷어차인 적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호시탐탐 공부할 기회를 노리다가 결국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에 덜컥 붙어서 덕수와 달리 대학에도 대학원에도 다녔다. 덕수야 위로는 어머니와 아래로는 형보다 공부를 훨씬 잘하는 동생과 돈 잡아먹는 하마(?)인 여동생이 있었으니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는데, 나는 내 몸 하나 잘 간수하면 되었기에 덕수보단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어찌어찌 살다보니 그만 나도 덕수처럼 가장이 되어 있다. 지금 이 순간 내게로 향해 있는 아이들 눈과 어르신들의 눈과 직원들의 눈을 보면서 아무래도 내가 앞으로도 계속 '덕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글치만, 난 덕수와 다르다. 고모 가게 인수와 동생 끝순이의 결혼 비용 마련을 위해 월남 파병 문제로 부인 영자와 다툰다. 영자는 덕수가 월남 참전을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독일에 광부로 갔을 때처럼 자신을 희생시켜 가족 잘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울부짖는다. "당신 인생인데, 왜 그 안에 당신은 없냐구요~?" 그렇다. 덕수는 가장 노릇을 하느라 정작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 발칙한(?) 가장이라서 내 인생도 부지런히 살고 있다. 허허허…. 그러고 보면 난 가장이기도 하고 자칭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남은 로맨티스트이기도 한 것 같다. 할 수 있는 한 가장으로도 살며 김동문의 삶도 살아야 할 터.

나의 시장…, 덕수에겐 국제시장이 인생의 주무대였지만 난 남양주가 내 인생의 주무대이다. 덕수 역시 '굴러들어온 돌'이듯이 나도 굴러들어온 돌이다. 덕수에게 국제시장은 만만한 시장이 아니었듯이, 그동안 경험한 바로는 나에게 남양주도 만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무슨 무슨 피아가 딴 동네에만 있는 게 아니고 우리 남양주에도 없지 않아 있다. 이런 저런 조직의 쓴맛도 직접 본 사람이고…. 덕수가 수입잡화점 '꽃분이네'를 삶의 터전으로해서 국제시장을 주름잡았다면, 난 해빌리지 공동체를 삶의 터전으로 해서 오지랖 넓게 남양주시를 발로 뛰어다니면서 오늘까지 오는 중에 그만 나이에 걸마지 않게 흰머리 중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덕수는 '꽃분이네'만 가지고는 가족의 필요를 다 채울 수 없었기에 독일 광부로 혹은 월남전 참전으로 가족을 위한 가장의 역할을 다했다. 그 와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때로는 나도 해빌리지 공동체만으로는 식구들의 필요를 다 채우지 못해서 (대학 동기의 말을 빌면) 낮무대 밤무대를 뛰어서 필요를 채운다. 다시 필요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딴엔 가상한(?) 노력을 기울인다. 앞으로 더 많이 그러해야겠지….

아버지…, 솔직히 영화 중에 나는 덕수가 부러웠다! 그래도 덕수는 절체절명의 위험스런 순간이었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주면서 비장하고 애절하고 닥칠 일에 대한 두려운 눈길로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면서 "아바이가 없으믄 덕수 니가 가장이지? 그러니 가족 잘 지키라우~!" 그러면서 꼬옥 안아준다. 나는 이게 부러웠다. 덕수는 힘들고 또 힘들 때에도 그때의 아버지의 깊은 눈동자, 거친 호흡과 함께 나오는 가슴에서 나오는 가장으로서의 '거룩한 미션'을 부여받던, 아버지와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그러나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소통을 기억하면서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그게 정말 부러웠다. 내게도 아버지에 대한 그런 소통이 있었더라면, 어쩌면 힘든 순간들에 직면하여 덜 힘들어할 수 있었을 수도, 고독의 무서움에 치를 떨면서 밤거리를 배회하지 않았을 수도, 마음의 병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내 '아부지'가 되어주셨다. 그래서 하나님 아부지의 은혜로 나의 시장에서 해빌리지 공동체를 지키며 가장으로, 애비로 살아왔다. 덕수가 '아부지'를 가슴에 품고 삶을 이겨왔듯이 나도 '아부지'를 가슴에 품고 삶을 이겨내야 할 터. 그렇게 가장으로, 아버지로 살아내야 할 삶을 다 산 후에 덕수가 아버지에게 "아부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한 것처럼, 나도 "하나님 아버지, 이만하면 사명 감당 잘 했지예~?" 이렇게 아뢸 수 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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