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수상의 취임식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왕이 새로 취임하는 수상에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서약하자고 요구하자, 수상이 곤란하다는 듯 대답했다. “폐하.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하는 일 따위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받아 덴마크 왕이 말했다. “이보게. 너무 염려하지 말게. 사실은 하나님도 자네를 조금도 믿지 않으신다네.”

‘사람들이 돈에 대해 얼마나 정직한가?’라는 문제를 놓고 미국 경제 잡지인 <실비아 포터스 퍼스날 파이낸스>(Sylvia Porter’s Personal Finance)에서 전국 규모의 설문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만약 당신에게 세무서가 알 수 없는 1만 달러의 수입이 생겼다면 세금을 보고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청년층 51%가 보고하지 않겠다고 대답했고, 장년층은 34%가 보고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쇼핑을 할 때 점원이 실수로 10달러를 더 거슬러 주었다면 다시 돌려주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장년층 96%가 돌려주겠다고 대답했고, 청년층 83%가 돌려주겠다고 대답했다.

“공중전화가 고장나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밤이라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그 돈을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59%는 그 돈을 그냥 자기 주머니에 넣겠다고 대답했고, 20%는 동전은 자기가 갖되 전화국에 그 전화가 고장났음을 알려주어 고치도록 하겠다고 했다. 20%는 쏟아져 나온 돈을 모두 전화국에 돌려주겠다고 대답했다.

빅토리아 여왕 당시의 수상이었던 팔머스틴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팔머스틴이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건너가던 중 한 가난한 소녀가 우유 한 병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깨진 우윳병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서 있는 소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팔머스틴은 지금은 지갑을 두고 나와 돈을 주지 못하지만 내일 이 시간 이 다리로 다시 오면 자기가 그 우유 값을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이튿날, 내각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팔머스틴의 머리에 갑자기 어젯일이 떠올랐다. 수상은 장관들을 자리에 남겨둔 채 급히 웨스트민스터 다리로 달려가 기다리고 있던 소녀에게 돈을 건네준 후 다시 돌아와 내각회의를 주재했다.

오늘 우리는 맹세를 우습게 여기고, 진실이 사라져 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서로를 드러난 대로 믿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해도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말 뒤에 어떤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가를 항상 생각한다. 누가 친절이라도 베풀면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내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가를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 한복판에서라도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신앙고백에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한다. 서머나교회 지도자 폴리갑이 총독에게 체포된 때는 나이 90이 가까웠다. 총독이 그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모른다고 하면 당신을 놓아 줄 의사가 있소.”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오. 절대로 모른다고 할 수 없소.”

“당신이 마음으로 믿는 것은 상관치 않겠소. 다만 이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만 모른다 하시오.” “나는 이제까지 86년간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단 한 번도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셨소. 그런데 어떻게 이제 와서 내가 그분을 모른다 할 수 있겠소. 어서 나를 죽이시오.” 그래서 폴리갑은 주후 156년 2월 22일, 화형으로 순교 당했다.

우리는 사회 정의 문제에 대해서도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한다. 종교개혁 당시의 루터의 이야기는 우리가 가져야 할 사회생활의 태도와 관련된 중요한 지침을 제시한다. 그가 속죄권 판매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 종교개혁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 독일 국회는 루터를 소환하고 교황청에서 파송한 엑크 대사제와 토론을 펼치게 했다.

그 자리에서 루터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성서와 명백한 이성에 의해 설득되지 않는 한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 있습니다. 내가 양심을 어기고 행동한다면 그것이 더욱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에 섰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어두운 것은 결코 어두움 때문이 아니다. 어두움은 원래 어둡다. 그래서 어두움을 보고 왜 그렇게 어둡냐고 나무랄 수 없다. 문제는 사회의 빛이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그들이 말이나 맹세나 약속에 있어 진실하지 못하고, ‘예’와 ‘아니오’의 중간 지대, 회색지대에서 정권과 타협하고, 이권과 타협하고, 안전과 타협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어두운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 루터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 있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거짓으로 가득 찬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진실을 살며 정직을 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에 회색지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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