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18) 한목협 성탄예배

누가복음 2:8-14

우리는 또 다시 2015년도의 성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성탄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물으면서, 이 성탄을 맞이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여는 짧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밖에서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아들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어디서 난 옷이냐? 어서 사실대로 말해 봐라." 아들이 살 수 없는 고급 브랜드의 청바지를 본 순간, 아버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아들을 다그쳤습니다. 자신은 환경미화원이고 아내는 작은 고물상을 운영하고 있기에, 아들이 그런 큰돈을 쓸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결국 아들은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죄송해요. 버스 정류장에서 지갑을 가져왔어요." 아버지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내 아들이 남의 돈을 훔치다니..."

잠시 뒤 아버지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습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경찰서로 데려가 자수를 하게 했습니다. 자식의 잘못을 감싸기만 바쁜 세상에 뜻밖의 상황을 대면한 경찰은, 의아해 하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아들의 범죄 사실이 하나 더 밝혀졌고, 결국 아들은 법정(法廷)까지 서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아들이 남의 돈을 훔친 것에 가슴 아파하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 한목협 상임회장 최부옥 목사(기장, 양무리교회)가 소망교도소에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제목으로 성탄예배 설교를 전하고 있다.

재판이 열린 날, 어머니는 법정에서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바랬던 남편의 뜻대로, 안타깝지만 아들에게 엄한 벌을 내려 주십시오." 아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한 행동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흐흐흑."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드디어 판결(判決)의 시간. 판사는 입을 열었습니다. "불(不) 처분하겠습니다." 뜻밖의 판결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에게 판사가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훌륭한 아버지의 뜻을 따를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재판, 그 이후의 자식의 삶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그 자식 때문에 일어난 아버지의 죽음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만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의 잘못을 알고도, 처벌을 두려워해서 은폐하려고 했다면, 그 자식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사람 하나 올바르게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참, 짧은 사례 하나지만, 생각할 일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음은, 오늘의 성경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의 복음서를 써낸 인물인 누가는 본 직업(職業)이 의사(醫師)였던 사람입니다. 의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육체의 생명(生命)을 다루는 특별한 기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의사는 한 치의 실수도 없이 각종 질병으로부터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사인 누가가 언젠가부터 어느 특별한 인물에 대하여 깊고도 뜨거운 관심(關心)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를 자기가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차원의 큰 의사였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큰 인물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오랫동안 추적(追跡)하고 모으면서, 그 인물에 관련된 두 편(篇)의 장문(長文) 보고서(報告書)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라는 이름으로, 데오빌로라는 당시의 유력(有力)한 인물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면, 누가가 그토록 관심을 쏟았던 인물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갈릴리 나사렛 출신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시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던 예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의 행적(行蹟)을 추적(追跡)했던 누가가, 그 예수의 탄생(誕生)과 생애에 관한 일체의 모든 소식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자체가 ‘기쁜 소식’인 복음(福音/유앙겔리온)이 된다는 것을 힘주어 강조한 일입니다.

무슨 이유로 누가는 예수의 행적을 그 정도로 보았을까요? 우리가 그 대답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게 된 그의 증언서인 누가복음 2장 14절에 그 답이 명확히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의 가축우리 같은 천(賤)한 곳에서 탄생하시는 순간에, 그가 바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심을 알리는 매우 범상(凡常)치 아니한 놀라운 일이 그곳 베들레헴 지경에서 노숙(露宿)하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牧者)들에게 나타났습니다(11-12).

그것은 하늘의 영광의 빛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아기 메시아의 구유 탄생을 알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홀연히 그들 앞에 나타난 하늘의 천군 천사들의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웅장한 찬양을 드렸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榮光)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平和)로다”(14)

사랑하는 여러분, “영광(榮光)과 평화(平和)”, 이 두 주제(主題)는 우리 인류가 진정으로 갈망(渴望)하는 삶의 목표가 아닙니까! 그런데 천사들이 이렇게 ‘하늘의 영광과 땅 위의 평화’를 외침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땅, 즉 하나님이 은혜로 통치하시는 이 땅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영광(榮光)이 가득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자비를 힘입고 사는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에게는 마땅히 평화(平和)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실재(實在) 상황(狀況)은 어떠했습니까?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광도 탐욕에 찬 인간들이 가로채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풍성히 누려야만 할 평화도 힘 있는 자들에 의하여 강탈을 당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영광과 평화로 가득해야할 우리네 세상적인 삶은 자기 탐욕(貪慾)과 욕망을 위해 서로 죽이고 이용하는 나쁜 세상과 인간들로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세상은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절망에 늪에 깊이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그 어디에도 희망(希望)을 둘 수 없는 형편이 됐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帝國)의 치하에 있는 당시의 정치 제도나 그 권력과의 공생(共生)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비(非) 신앙적인 세속의 타락한 권력(權力)과 한 통속이 된 당시의 유대교인 율법 종교(宗敎)까지도 말입니다. 모두가 힘과 권력(權力)을 가진 자를 위한 것이지 힘없는 자들을 돌보고 살려내려는 것이 아니어서, 대다수의 힘없는 백성들은 정말 ‘길 잃은 어린 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그럴수록 바라는 것은, 딱 하나가 있었습니다. 참, 메시아 구세주가 어서 오셔서 자기들의 외롭고 고단한 삶을 위로(慰勞)해 주시고 기쁘고 행복한 평화의 삶을 항구적으로 되찾아 주는 일이었습니다.

처음 크리스마스의 밤에 나타난 천사(天使)들은 바로 그 지구촌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그 해답을 주실 분이 이 땅에 태어나셨음을 통보한 것입니다. 그것도 베들레헴 가축의 구유에서 태어나셨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면, 왜 천사들은 예수의 성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로 인한 성탄 때문에, 하나님은 비로소 온 세상에 하나님이심을 확고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또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예수의 성탄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모르고, 다만 귀신들이나 잡신들을 섬기고 사는 우매무지한 자들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성탄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얼마나 사랑이신지를 확실하게 계시하심으로써, 세상과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되찾게 되신 사건도 된 것입니다.

 

▲ 한목협 상임회장 최부옥 목사(기장, 양무리교회)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제목으로 성탄예배 설교를 전하고 있다.

성탄은 실로 하나님이 친히 창조해내신 탁월하고 놀라운 계시(啓示)의 혁명(革命)이었습니다. 그 까닭은, 그 어떠한 신도 스스로 인간되어 내려온 적이 없었고, 도리어 인간이 신 앞에 나와 섬기도록 강요하던 판이었는데, 성탄하신 하나님은 전혀 그 방법이 달랐습니다. 

오셔서 낮고 천한 죄인된 인간들을 섬기고, 돕고, 살려내고, 고치고, 그들의 더러운 발까지 씻기다가, 나중에는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제거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 받은 깨끗한 자녀들로 만들기 위하여, 그들이 당한 형벌을 지고 저 흉악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메시아였습니다. 앞에서, 아들의 거듭남을 위해 희생했던 그 아비처럼 우리 주님도 십자가에서 우리는 위해 죽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내시는 이곳은 분명히 세상과는 차단된 곳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탄하신 주님은 이곳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으로부터도 당신의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 문제만 이루어지면, 여러분의 앞날은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도움을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주님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응답하시고, 분에 넘치는 큰 기쁨도 안겨 주실 것입니다.

영광은 오직 세상과 인생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돌려야 마땅합니다. 인간이나 우상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은 허망한 짓입니다. 반드시 불행해지고, 인생이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영광은 세상의 진짜 오너(Owner)가 받으셔야지, 어찌 객이나 나그네에게 영광을 돌리는 짓을 해야 합니까? 가짜 오너에게 돌리는 영광에는 비굴함과 함께 그 부작용(副作用)이 엄청납니다. 하지만, 진짜 오너에게 영광을 돌릴 때에는 영광을 받는 오너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함께 행복해집니다. 이것 자체가 세상 변화와 성숙에 준 영향은 지대(至大)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왜 예수의 성탄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平和)가 된다고 외쳤습니까? 예수께서 세상에 안겨 주신 평화는 그 방향과 내용에서, 기존의 세상과 아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대체로, 힘과 강요된 질서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오실 때, 구유를 통해 오신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란, 그런 한쪽의 일방적(一方的)인 평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약자와 힘없는 자까지도 평화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쌍방적(雙方的)인 평화를 이룰 때에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이사야 11장 7절에,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은 사자의 세계입니다. 소를 잡아먹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세계는 사자가 자기가 먹은 고기를 포기하고, 약한 소가 먹은 풀을 함께 먹기 시작하는 감동의 세계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꿈같은 모습입니까? 하지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지식을 품은 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이처럼, 섬김이 가능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이 가능합니다. 예수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존재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유도 바로 그런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 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성탄을 다시 맞이합니다. 나는 무슨 영광을 구하며 살아왔는지, 깊이 묵상합시다. 내가 올릴 소중한 영광은 날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신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영혼도 기쁘고 내 삶도 복을 받게 됩니다. 동시에, 주님이 주시는 평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살고 있는 조그만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상대를 섬기고, 함께 잘되도록 평화란 가치 실현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찾아야만 합니다.

평화는 평화의 가치를 알고 그 가치 실현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옵니다. 이번 성탄에 하나님께 영광, 땅에 임한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