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초, 페이스북 뉴스피드에서 한 목회자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를 개척하여 6년 동안 목회를 하다가 교회 문을 닫은지 2주가 지나서 목사와 사모 두 내외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사모의 말인즉슨, 자신은 강요된 신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말 잘 듣는 모범생으로 살고자 했던 것 같단다. 그러면서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알고’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전인적인 신앙고백없이 ‘남보기에 신앙 좋은 사람’으로 살아왔단다. 그러면서 이제 깨달은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단다. 어쩌면 혹자들은 ‘사모가 뭐 저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사모의 남편 목사도 자신의 부인이 하는 말의 깊은 의미도 알고 나도 안다. 이제 그리스도인(a real christian)으로 서게 된 것임을! 지난 인생의 실패에서 오는 자조섞인 한탄이 아니라 실패를 딛고 일어선 승리의 고백임을! 그렇게 지난 주 초에 한 여인이자 사모의 고백이 내 마음을 짠하게 하며 뭉클하게 했다.

▲ © 해빌리지 살렘교회

주 중반 무렵에는 역시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라온 영화배우 박신양의 스타특강 쇼의 일부분을 보게 되었다. 거기서 박신양 씨는 자신의 러시아 유학시절에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세상에 하고 싶은 일 하다가 굶어죽은 사람이 있나?”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얻은 답은 “없다”였단다. 그리고 삶이 많이 힘들다고 생각되었을 때, 자신의 교수가 전해준 시 한편 중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내용을 공부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은 항상 힘든 인생이 아니라 행복한 인생을 꿈꾸는데, 실상 인생은 힘든 것의 연속이며 그 힘든 인생도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나의 힘든 시간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장 힘든 시간까지 사랑하는 법을 배우세요”라고 하더라. 나는 그 박신양 씨의 말을 들으면서 목사인 나보다 훨씬 낫군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는 금년 하반기 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재정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치매예방 서포터즈 시범사업 결과발표회가 있었다. 나는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데 그 일을 왜 했을까? 답은 내가 하고 싶어서…!

나는 천성적으로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이 강하다. 내 인생을 반추해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만들었고, 죽이 되건 밥이 되건 그 일에 내 열정을 불살랐다. 이유는 ‘~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참 힘든 인생을 살고 덩달아 옆 사람들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안 죽고 지금 시퍼렇게 살아있다! 그러고보면, 박신양 씨가 한 말 “세상에 하고 싶은 일 하다가 굶어죽은 사람이 있나? 없다!”는 맞는 말인 것 같다. 적어도 내게는….

우울…, 현대인들…, 특히 보다 나은 내일을 열어가려는 의지와 에너지가 많은 사람들일수록 이 우울을 경계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 생각대로 내일이 열리기를 바라는 욕구가 강하고, 내 생각대로 내일이 열리지 않으면 좌절감이나 절망, 피해의식이나 분노 같은 병적 심리증상을 나타내기 쉽고 그 와중에 치명적인 우울증에 걸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은 항상 힘든 것을!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 그래 그래 인생의 현재는 그런 것이거늘. 푸쉬킨은 또 이렇게 삶을 노래했지. “슬픈 날에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 절망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오리니”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찌보면, 도발적인(?) 질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목사가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진중하게 받아들이는 교인들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해도 서푼어치 은혜를 받으러 온 교인들은 ‘목사가 왜 저래? 내가 교회에 은혜 받으러 왔지, 그런 발칙한(?) 말이나 들으러 온 줄 알아?’ 이딴 식으로 반응하는 교인들도 있을 터. 그런데…, 사실 푸쉬킨의 시는 지극히 성경적이며 한편의 멋진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속 신앙의 위인들이나 예수님의 ‘현재’는 항상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 믿고 오늘 힘들지 않은 인생, 딩가~ 딩가~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그러한 바램이 투영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헐~ 너무 센가? 그래도 그게 맞는 걸 어쩌랴~!

각설하고..., 솔직히 난 내가 금년 하반기를 안 해도 될 일을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가진 영적 정신적 물적 에너지를 죄다 투입할 수 있었고, 중간 중간에 힘에 많이 부치기도 했지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고,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 거리지 않고 웃으면서 마칠 수 있었다는 게 좀 자랑스럽다. 어쩔~?

난 자칭 산전수전에다가 공중전과 수중전, 그리고 해물파전까지 다 겪은, 그 와중에 흰머리소년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항간에 ‘국가 돈은 눈먼 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국가 돈은 눈먼 돈이 아니다. 국가 돈 눈먼 돈이라고 착각했다간 큰 코 다친다. 그리고 받을 사람은 항상 더 많이 받고 싶어하고, 줄 사람은 항상 덜 주고 싶어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흘린 땀만큼의 정직한 댓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복이다. 싸구려(?) 신앙인들은 일 적게 하고 많이 받는 것을 은혜로, 일 많이 시켜놓고 적게 주는 것을 은혜로 여긴다. 그런데, 성경은 겉옷을 달라는 이에게 속옷도 주고, 오리를 가자하는 이에게 십리를 같이 가주라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믿음이 별로 없어,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우얄꼬~. 그런데, 금년 하반기 동안 내가 신앙심을 토대로 한 마인드와 열정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는 동안 이렇게 살아있어서 감사하고, 힘들어도 중간에 때려치지 않고 마침표를 잘 찍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근데..., 왜 박수소리가 들리지 않지? 풉~!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굶어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 인생의 현재는 항상 힘들며 그 힘든 시간조차도 사랑하면서 이겨내는 과정…, 나는 이게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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