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차] 한국교회 생명보듬기,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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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차] 한국교회 생명보듬기, 어떻게 할 것인가?
  • 조성돈 교수
  • 승인 2014.08.19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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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9) 교갱협 제19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1. 대한민국, 자살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자살로 죽는 사람은 한 해 1만 4160명이다. 이는 하루 39명이 자살로 죽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숫자로 나열하면 사람들이 잘 실감하지 못한다. 육군 1개 사단이 1만 명이다. 그러면 한 해에 육군 1.5개 사단이 자살로 죽는 것이다. 다시 말해 2년이면 3개 사단이 자살로 인해서 사라지는 것이다. 요즘 초등학교 교실을 보면 학생이 25명 정도 된다. 그러면 하루에 초등학교 1.5개 반 정도가 자살로 인해 사라지는 것이다. 역시 이틀이면 초등학교 3개 반이 사라지는 것이다.

매년 9월이면 통계청에서 사망원인통계라는 것을 발표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사람들이 죽은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12년 통계를 보면 자살은 전체 사망원인 중에 4위에 있다. 1위가 암이고, 2위가 뇌혈관질환, 3위가 심장질환이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얘기다. 그 다음으로 당뇨병과 폐렴 등이 나온다. 심지어 교통사고는 9위에 있다.

자살로 인해서 죽는 사람이 당뇨병 환자보다 더 많고, 교통사고로 인해서 죽은 사람보다 많다면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환자나 사고자보다도 많은 자살사망자나 생존자들을 보아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 특히 당뇨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자살로 인해 죽었다면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그 당뇨병 환자보다 많다고 보아야 한다. 당뇨병 환자라고 다 그 병으로 죽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그로 인해 죽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 가운데 자주 보게 되는 당뇨병 환자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고자 하는 유혹과 괴로움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자살의 위험 가운데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만약에 없다면 우리는 그 만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것이다. 결코 그러한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그들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고, 그들은 우리에게 터놓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자살은 사회적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죽어 가는데 그것을 개인적인 문제라고 이 사회가 방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생명이 스스로 죽어 가는데 그들을 이 사회가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다른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이 사회가, 특히 정부가 나서서 돕고 있다. 그러한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계몽하고 예방하고 있다. 특히 건강보험을 통해서 그들의 질병을 사회가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에 대해서는 이 사회가 냉담하다. 도우려는 마음도 없고, 심지어 외면하려고 한다.

자살예방활동을 하면 가끔 듣는 질문이 있다. 그런다고 자살이 줄겠느냐는 것이다. 죽으려는 사람은 죽게 되어 있는데 굳이 예방한다고 죽으려는 사람이 안 죽겠느냐는 비관론이다. 그러며 예를 들어 설명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인해서 죽는 사람이 많았다. 교통사고가 사망원인의 4-5위를 다툴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교통사고가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교통문화가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교통문화가 개선되어 신호를 지키고, 정지선을 지키니 사망숫자도 줄어든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교통문화가 개선되었는가. 개인적으로는‘이경규의 양심냉장고’라는 프로그램이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캠페인이 성공하니까 우리나라 교통문화가 개선되었고, 교통문화가 새로워지니 사고가 줄고 인명이 구원된 것이다.

현재 이 나라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죽음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것이다. 이를 생명문화로 변화시키면 현재 이 나라의 심각한 자살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 생명문화는 누구보다도 교회가 앞장 설 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이다. 생명을 이해하고, 생명을 깨달아 품고 있는 우리 교회가 이 사회에 생명문화를 일구어간다면 ‘자살’이 아니라 ‘살자’의 문화가 일어나리라 믿는다.

 

2. 자살의 경향

자살에는 경향성이라는 것이 있다. 자살에 있어서 어떤 흐름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살을 연령대별로 분석을 해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10대, 20대, 30대에서는 자살이 사망원인 1위이다. 이 나이 대 사람들이 죽는데 있어서 자살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30대에서는 자살이 2위였다. 그런데 약 3년 전부터 30대에서도 자살은 사망원인 1위가 되었다. 40대와 50대에서는 자살이 사망원인 2위이다. 이 나이 대부터는 암으로 죽는 이들이 가장 많다. 이제 60대부터는 그래도 자살에 의한 사망은 그 순위에서 좀 밀려난다. 그래도 60대에서는 4위, 70대에서는 6위, 80대 이상에는 9위이다. 상당히 기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연령대별로 자살률을 살펴보자. 자살률이라고 하는 것은 인구 10만 명당 자살로 인해서 죽은 사람의 숫자를  말하는데, 이를 보면 10대 5.1명, 20대 19.5명, 30대 27.3명, 40대 30.9명, 50대 35.3명, 60대 42.4명, 70대 73.1명, 80대 104.5명이다. 즉 연령대에 비례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특히 노인 연령층으로 가면 이 자살률이 가히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살률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인구에 비례한 숫자이다. 그러다 보니 노인층에서는 자살률은 높지만 그 절대적인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다면 가장 많이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연령은 어디일까. 그것은 40대이다. 그 이후에 50대와 30대에서 그 숫자가 많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 나온다. 먼저는 노년층의 자살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어르신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에 병이 더해지면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도 싫고, 사는 것이 버거워서 자살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이 가운데는 자녀들이 잘 돌보지 못해서 외로움에 의해 돌아가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노년층에서 자살률이 높은 것은 당연한 것인가. 아니다. 우리 근처에 있는 일본의 경우는 노년층 자살률이 20명 수준이다. 일본 역시 결코 자살률이 낮은 나라는 아니라. 대한민국 이후에 헝가리와 2위 자리를 다투는 곳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는가. 그것은 노년층에 대한 복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일찍부터 노령화사회에 대한 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일본의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 잘 준비된 연금을 받으며 여유롭게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지역의 공동체들이 잘 발달되어 지역에서 서로 돌보고 있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노년이라고 특별히 자살률이 높지는 않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노년층의 자살률은 평균보다 3배 이상 높다. 결코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한창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야 할 30, 40, 50대의 자살이다. 이들은 주로 아이들의 부모세대이다. 취학연령과 대학생, 그리고 좀 큰 아이들은 결혼을 할 나이다. 그런데 이들이 가장 많이 자살로 죽는다. 이것은 이 사회의 커다란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이들은 이 부모의 자살로 인해서 큰 짐을 안고 산다. 그 뿐만 아니라 부모의 자살로 인해서 이들 역시 자살의 큰 위험 가운데 사는 것이다. 자살을 유전이라고는 하지 않지만 그 부모는 아이들에게 자살의 위험을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다.

 

3. 자살에 대한 신학적 논쟁

1) 어거스틴의 입장

고대에 있어서 자살은 상당히 관대하게 받아들여졌다. 물론 우리들에게 서민들의 자살에 대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알려진 인물들의 자살이 전해지는 것이라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에 대해 전해지는 입장은 명예나 용기에 관한 가치가 덧입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살에 대한 태도는 그러나 기독교가 사회의 다수가 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5세기 초에 쓴 “신국론 De Civitate Dei”에서 그는 자살에 대해서 단호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누구든 범죄자조차 개인적으로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어떠한 법도 이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은 누구나 명백한 살인자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난에 대하여 스스로 결백할수록 자살을 통하여 죄를 더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유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고 자기 파괴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구원을 얻게 하는 기회를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는 비록 죄 때문에 자살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죽임으로써 또 다른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자살을 금하는 이유는, 첫째 자살은 자신에 대한 살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자는 ‘네 이웃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분명히 저촉된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은 인간, 즉 다른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 적용된다. 자신을 죽이는 것도 인간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1권 17장)
우리가 말하고 우리가 확인하는 것, 그리고 온갖 방법을 다하여 우리가 증명하는 것은 결코 일시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생명을 포기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이 없는 세계에 빠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1권 26) 

자살에 대해서 교회가 가지는 입장을 명백히 보여주는 신국론의 논리를 정확히 보면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만이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을 그의 손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욥 12:10) 즉 자살이라는 것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여도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권리조차도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행위는 결국 자신에 대한 살인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살에는 살인의 죄가 더해지는 것으로 이해를 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그는 설명하기를 자살이 일시적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세의 어려움이 있을 지라도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자살을 한다면 이후에 있을 영원의 세계에서 더한 고통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2) 교회사의 입장

자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따라서 563년 브라가 공의회와 580년 오세르 성직자 회의에서는 모든 자살자를 처벌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세 스콜라 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대표작인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에서 자살에 반대하는 세 가지 이유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첫째 그는 만물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자살은 이러한 자연적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공동체에 속한 일원으로서 자살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손해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해 주신 선물이기에 인간의 마음대로 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과 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아퀴나스의 견해는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에 있어서 그 특별함이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중세를 이어왔다. 1917년 구 교회법전까지도 이러한 논리에 따라서 ‘데리베라토 콘실리오 Deliberato consilio’, 즉 자기 맘대로 생명을 해치는 권한을 행사한 자로부터 교회에서 행해주는 장례의 혜택을 박탈하였다. 이로써 자살한 자들은 죽어서도 보통 사람들처럼 교회묘소에 묻힐 수가 없었다. 이들은 살아 있는 자들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의 공동체로부터도 떨어져 묻혀야 했다. 더군다나 자살은 이러한 종교적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유일하게 법과 권한을 행사하고 그 법의 권위를 지키고 공소를 유지해야할 군주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에 대한 불경죄, 즉 형법상의 범죄로도 간주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시체에 대한 재판’, ‘공개적인 시체처벌’, ‘부관참시’(部棺斬屍, 무덤에 묻힌 시체를 꺼내어 형을 가하는 것), ‘자살한 자의 재산의 몰수’ 같은 형벌이 가해졌다.

시체에 대한 재판이나 형벌은 마을 공터 혹은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시체를 나무에 매달거나 물에 빠뜨리기도 했고, 파리와 보르도에서는 시체가 보이도록 그물망 같은 것에 사체의 얼굴이 땅에 닿도록 거꾸로 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이나 진흙탕 길을 끌고 갔으며, 릴르에서는 시체를 쇠스랑에 찔러서 골목을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다. 또 어떤 지역에서는 여자들의 시체를 불에 태우기도 했으며 독일의 어느 지방에서는 시체를 소가죽에 싸서 나무에 매달아 썩게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교회는 전통적으로 자살에 대해서 심각한 수준의 형벌로 대응해 왔다. 이것은 범죄로서의 자살에 대한 징계와 함께 현재의 자살이 영원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살 앞에 사람들로 하여금 심각하게 대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이러한 태도들이 교리적으로 확정된 형태는 아니다. 물론 가톨릭에서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가르침이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담겨져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자살을 구원의 문제와 연결짖지는 않았다. 단지 왜 자살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서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의 논리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3) 자살하면 지옥간다?

자살예방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자살한 사람은 지옥 가는가이다. 그러면 내 대답은 ‘자살한 사람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갈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모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회를 얻은 듯 따지며 달려든다. 분명히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가는데 어떻게 그렇게 대답을 하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내게 이단이라고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부터 시작해서, 구원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까지 듣는다. 심지어는 당신 지옥 간다는 협박까지 받는다.

자살예방활동을 하면서 드는 생각은 한국교회가 구원에 대해서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성경 어디에도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는 없다. 먼저 당겨서 이야기한다면 교리적으로도 그러한 내용은 없다. 자살을 지옥과 연결한 것은 중세시대의 산물이며, 우리 개신교에게는 통설에 불과하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 이야기할 때에 그 근거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은 가톨릭의 교리이다. 가톨릭에는 용서 받지 못하는 대죄라는 것이 있다. 그러한 죄를 지으면 영생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다. 여기에 자살도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개신교에는 그러한 죄의 개념은 없다. 개신교는 전적인 타락에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정답이다. 그 전적인 타락에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큰 죄일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으며,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생각으로 인해서 우리는 죄의 경중을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어떠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회개했다면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심지어 우리 가운데 연쇄살인범이라고 하는 이가 회개하였다고 해서 간증집도 내고 하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조직폭력배의 두목이 회개했다고 해서 집회를 인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고문전문가라고 이름이 붙은 어떤 이는 회개했다고 목사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죄인들이 회개했다고 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곤 한다. 그런데 유독 한 가지 예외가 있다. 그것이 바로 자살이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죄하지 않는데 딱 하나 자살한 자는 꼭 지옥에 가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 사람을 판단하여 지옥에 보내고, 천국에 보내는 것은 개신교에는 없는 전통이다. 구원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이에 반하여 가톨릭은 교황이 마련한 근거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 대죄가 있다고 하고, 소죄가 있다고 한다. 고해성사를 하면 그 죄에 대해서 이러한 대가를 치르면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사제가 말한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러한 비성경적인 교회의 전통을 깨뜨린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자살한 자는 지옥 간다는 것은 우리가 교황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행위로 구원을 판단하는 행위는 가톨릭적인 전통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단이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연재로 나누어 하고자 하며, 그 시작은 이렇게 연다.

4) 자살자의 장례

자살한 사람의 구원에 대한 논쟁 이후에 나타나는 것은 자살로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어도 되는가이다. 중세의 관점에서 볼 때 구원 받지 못한 자, 또는 죄를 저지르고 회개하지 못하여 죽은 자의 장례를 교회에서 치러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 한국교회에서 많이 사라지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

실제적으로 살펴보면 많은 교회들이 사인을 밝히지 않고 장례를 치르는 경우들이 가장 많다. 유가족이 숨기는 경우도 있고, 교회 차원에서 숨기는 경우도 있다. 그 사인을 공식적으로 밝힐 경우 교인들 중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교회가 엉뚱한 논쟁에 휩싸이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다. 또는 적지 않은 경우 자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장례를 피할 수는 없고, 담임목사는 피하고 부교역자를 시키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전도사가 장례를 인도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담임목사도 그 죽은 이의 구원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가 천국을 갔는지, 지옥을 갔는지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인데, 이 부교역자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면서도 아이러니한 문제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그가 동네사람이던 또는 교인의 가족이던, 죽고 교회에 장례를 의뢰하면 대부분 교회는 그 장례를 치러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입장이 꽤 난처하기 하지만 목회자들은 그 장례를 맡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법은 없다. 그런데 한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고 한 하나님을 믿었던 형제요, 자매가 자살로 인해서 죽으면 그 장례를 거부하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 가운데 그 어떤 사인으로 인해서 죽었던, 그 장례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던가. 그런데 비록 그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의 모든 신앙생활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했던 그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가능할까. 아니 하나님은 정말 그를 그 저주 가운데 그냥 놔두셨을까.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우리는 그의 은혜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장례를 치러줄 수 있는가의 판단도 결국 그 은혜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요즘처럼 대한민국에서 자살자가 많은 상황에서 교회는 자살자의 장례에 대한 논의를 해 놓아야 한다. 자살예방활동을 한다고 하기 때문에 가끔 받는 전화는 상담전화 외에도, 교회에서 갑자기 자살한 사람이 생겼는데 장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장례절차는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의이다. 많은 교회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이야기는 들어도, 그것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을 안 한다. 그러다 직접 자살한 사람이 교회 공동체 안에 나타나면 우왕좌왕하게 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자살은 이제 사회적 현상이다. 자살예방과 함께 교회는 교회 안에서 나타나게 되는 자살자의 장례에 대해서 준비해야 한다. 그 때에 구원에 대한 판단 이전에 그가 그 교회 공동체의 한 일원이었고, 우리의 형제, 자매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 결론

대한민국의 자살문제는 교회가 나서야 할 것이다. 생명에 대해서 가장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여기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에 속한다. 또한 요즘처럼 교회가 무엇을 해도 욕을 먹는 상황에서 교회가 할 때 가장 박수 받을 수 있는 일 역시 자살예방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고,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과거에는 자살예방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특히 교인들이 다들 무슨 불순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피했다. 그러나 요즘은 교육프로그램을 해 보면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떻게 보면 정말 인식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를 통해서 어쩌면 한국교회는 이 사회에 소통할 수 있는 귀한 통로를 하나 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생명의 주가 되신 우리 주님의 귀하심이 모든 이에게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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