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차] 교황 한국 방문의 의미와 개혁신학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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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차] 교황 한국 방문의 의미와 개혁신학적 이해
  • 심창섭 교수
  • 승인 2014.08.1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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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8) 교갱협 제19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I. 서론

266대 교황 프란체스코 1세가 한국을 방문한다. 그는 제 3세계의 초대 교황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고 있다. 그는 2013년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적인 인물로 발돋음하였다. 뉴욕 타임지는 “2013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였고 포춘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호평하였다. 교황은 10-13억의 천주교인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 지구촌의 어느 통치자 보다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 한국 천주교는 교황 방문을 호기로 삼고 천주교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 연예인들이 동원되어 교황 방한의 축하를 위한 찬양대가 조직되어 찬양 연습에 들어갔고 백건우 피아니스트는 광화문 광장에서 축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 사제들은 교황 프란체스코 1세의 일생에 대한 연구를 하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어느 나라 대통령이 국빈 방문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한국사회는 교황 방문의 환영 분위기에 들떠 있다. 그리고 매스컴에서도 교황 방문의 행사를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이번 교황의 한국 방문으로 천주교는 100만 명의 전도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주장도 있다. 심지어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세가 바뀌어질 것이라는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교황이 오늘날 이처럼 세계적인 인물로 부각되고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 합당한 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오직 교황 방한의 결과로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될 것이라는 추측들만 난무하다. 신기한 것은 16세기 개신교를 통해 중세의 교황 정치의 부패성이 폭로되었고 천주교의 실상이 드러났지만 천주교의 교세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천주교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수많은 역사적인 과오와 추문에도 불구하고 건재하는가? 천주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얼마든지 자기의 색깔과 모습과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가톨릭 체제는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정동수 역, 천주교 사상 평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2011, pp.19-22)

로이드 존스 박사의 지적은 가톨릭의 정체성을 말하는 대표적인 정확한 표현이다. R. 우드로우 박사도 로이드 존스 박사와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다.

“우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다양한 사상과 전통을 취하고 그것들을 혼합시켜 자신의 특정한 종교 체제로 만드는 데 전문가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우드로우, 정동수 역, 천주교의 유래, 예수그리스도 안에, 2011, p.114)

위의 두 학자의 표현은 천주교가 변신의 기재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에 잘 적응해 진화하는 종교임을 암시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와 개혁교회의 큰 차이점에 바로 여기에 있다. 개신교는 성경의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주장을 수용할 수 없다. 그러나 천주교는 성경 외에도 ‘온갖 첨가물’들을 진리로 수용하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여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다. 교황의 한국 방문을 맞아 이러한 변신을 토대로 형성된 교황제도의 역사를 고찰하고 그들의 신학과 신앙을 조명하므로 개혁교회의 참된 진리와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본고의 논지는 두 부분으로 나눌 것이다. 첫 번째는 교황제도의 역사적인 발전 과정과 특징을 다룰 것이며 둘째는 천주교의 비 성경적인 가르침을 논할 것이다. 그리고 위의 두 논제는 교황의 한국 방문의 의미와 개혁 신학적 콘텍스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II. 본론

1. 교황제의 기원과 발전 과정

1) 근거 없는 주장

교황제도(papacy)는 서구에서 가장 오래된 제도이다. 교황제도는 베드로의 ‘사도좌’를 중심으로 발달한 역사적 산물이다. 성경에는 ‘교황제도’라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천주교에서는 베드로가 로마교회에서 사역하였고 순교하였다는 주장한다. 그래서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사도적 수위권을 주장한다. 베드로의 사도좌에 대한 근거로 마태복음 16장 18절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로마의 주교들이 그들의 교권을 높이기 위해 만든 것이며 해석된 것이다. 즉 3세기 초에 로마주교 칼릭투스(218-223년)가 로마주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태복음 16장 18절을 인용하여 로마주교를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4세기 로마 주교 다마수스 1세가 같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처음으로 ‘로마 주교좌의 우위’를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베드로가 로마의 감독이 된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 베드로가 로마교회에 사역하고 순교하였다는 성경적 역사적 근거도 없다. 오직 후대에 로마주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전승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사역하였다는 전승은 4세기 경 친 로마교회의 학자로 벌게이트(Vulgate) 성경을 번역한 제롬의 기록에서 시작된다. 제롬은 베드로가 주후 42-67년까지 25년간 로마의 주교로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제롬의 전승과는 달리 베드로는 주후 44년에는 예루살렘에 있었고,(행15) 주후 53년에는 안디옥에 있었다.(갈 2:11) 베드로가 로마에 없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바울서신에서 알 수 있다. 바울은 58년에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는데 베드로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아니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로마교회의 대표적인 인물 27명의 이름을 거론하지만 베드로의 이름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만약에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면 그 유명한 사도의 이름을 바울이 언급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베드로는 이 기간 동안 바벨론과 소아시아에서 전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전승은 사도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 베드로였기 때문에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신비해석자와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짓 종교지도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우드로우, 정동수 역, 2011, p.113) 사람들은 갈대아의 신비 해석자 베드로(Peter)의 칭호를 사도 베드로와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였다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배교에 눈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교황이 사도 베드로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으나 기독교로 입교한 이교도들에게는 그가 단지 그들의 알려진 신비들을 해석하는 베드로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우드로우, 정동수, 2011, p.113)

베드로의 이름을 가진 신비해석자와 더불어 1세기에 시몬의 이름을 가진 종교지도자가 로마에 있었다. 그가 바로 사도행전 8장 9절에 언급된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이다. 마법사 시몬은 로마에 건너가 위장기독교를 세웠던 것이다. [가톨릭 백과사전]에 기록된 시몬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순교자 저스틴과 그 밖의 다른 초기 저술가들은 시몬이 후에 로마로 가서 거기서 마귀들의 권능으로 기적을 행했으며 로마와 자기 나라에서 신의 영광을 받았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비록 후에 이 시몬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많은 전설이 생기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스틴이 제기하고 유세비우스가 받아들인 설명에는 사실 어떤 근거가 있음이 분명하다. 역사적 인물인 시몬 마구스(Simon Magus)는 의심의 여지없이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면서 거짓 기독교를 창설했다.”(우드로우, 정동수, 2001, p.114)

시몬 마구스가 유사기독교를 로마에서 창설하였고, 신적인 영광을 누렸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여 많은 사람들부터 추앙을 받았다면 이러한 사실들이 후기 기독교 전통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몬은 후에 시몬 베드로와 혼동되어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로마 주교들이 지상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직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러한 주장을 한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우드로우, 정동수, 2001, p.114)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반석은 베드로(petros)가 아니고 단순히 반석(petra)이란 의미이다. 전자는 남성명사로서 베드로를 가르키지만 후자는 여성명사로서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petros)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개념을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베드로의 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위에 세워진 것이다. 천주교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베드로 67년경 순교하기 직전에 로마에 왔다고 추정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베드로 전서의 마지막 인사말에 나오는 베벨론이 로마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세기 동안 그 유명한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역사적 근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교회 사가인 필립 샤프도 “초기 로마 주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계승되었는가에 대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하였다.(제임스 G. 멕카티, p.373)

또한 성경에 나타난 베드로에 관한 기록을 보면 베드로는 교황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첫째,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이었으므로 교황처럼 독신으로 사역한 목회자가 아니었다. 둘째,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을 때 고넬료가 자기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할 때에 이를 거부하고 나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황의 발에 누구라도 입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은 베드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셋째, 베드로는 교황들처럼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지 아니했다. 베드로는 조상들로부터 전승한 전통을 거부하고 오직 말씀만 증거하였다. 넷째, 베드로는 교황들처럼 왕관을 쓴 적이 없다. 베드로는 세상의 왕관이 아니라 ‘시들지 않는 영광의 왕관’을 사모하였다.(벧전 5:4)(벧전 1:18)(천주교의 유래, pp.107-108)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죽은 후 사도의 계승을 인정하지 아니했다. 교회의 책임자로 감독과 집사를 두었지 사도를 두지는 아니했다. 바울은 교회를 전도 개척하면서 디모데와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도 사도라는 명칭을 부여하지 아니했다. 만약에 베드로가 로마에 사도로 있다고 가정할 지라도 로마의 감독이나 주교들이 베드로의 사도좌가 그대로 전승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베드로는 베드로였고 로마의 감독들은 로마의 감독에 불과했던 것이다. 로마의 감독을 사도 베드로와 같은 위상에 놓은 것은 인위적인 결정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직분을 논할 때 감독(장로)과 집사에 대해서만 언급하였고 사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딤전 3:1ff)

만약에 천주교의 주장처럼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로 사역하다 순교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준 것과 동일한 권위와 의무를 로마주교들에게 준 것은 아니다. 베드로 이후의 로마 주교는 베드로와 전혀 다른 인물인 것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준 권한을 로마의 주교들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다. 그러나 교황 전승의 역사적인 불확실성과 모순 더 나아가 허위적인 전승을 토대로 천주교는 교황의 사도좌를 주장하고 있다.

2) 발전 과정

비역사적인 전승으로 발달되고 진화한 교황제도의 발원과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돌아가신 후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하셨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사실 즉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 일을 감당한 대표적인 예수의 직속 제자들은 12명이었고 사람들은 이들을 ‘사도’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역자들과 구별하였다. 그리고 12사도들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크리스챤이라 불렀다. 이때의 교회는 교회의 집(Domus Ecclesiae) 즉 주택교회로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정기적으로 모여 기도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었다.(교황의 역사 도시에서 세계로, 프란체스코 키 바오로, 제라르 베시에르, 시공사, 2009, p.14) 그러나 사도들의 전승을 위협하고 주택교회에 혼란을 가져온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사도들의 죽음이었다.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므로 초대교회는 신앙의 메카인 예루살렘 교회를 상실하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는 일찍이 순교하였고, 신앙의 기둥인 바울은 64년경에 로마에서 처형되었고 베드로 등 사도들도 모두 순교하였다. 사도들이 죽은 후 A.D 80-90경에 이르자 주택교회는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사도시대 이후에 교회는 유대의 공회당(synagogue)처럼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즉 장로, 집사 혹은 감독체제로 구성되었고 모든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들을 선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에 이단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치점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이때 교회는 분쟁을 최소화하고 공동체의 일치를 가져오기 위해 사도들의 가르침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신약성서의 필사본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온 권위자들의 말에 의존하였다. 신약성경의 목록이 기록된 문서인 무라토리움은 180년경이었다. 이렇게 성경이 정경화되기 전에 교회의 권위의 출처는 사도들 중 주로 베드로, 바울, 요한의 전승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의 전승인가? 무엇을 믿는가? 가 중요했다. 특히 영지주의라는 이단의 출현하므로 사도들의 가르침은 중요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가짜 복음서, 사도들의 가짜 서신, 그리고 가짜 요한계시록 등이 등장하여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그리스도, 현세와 천국에 대한 사변들이 난무하였다.(같은 책, pp.17-18)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정통신앙에 대한 확신과 다짐이 필요했다. 정통신앙의 기준은 아직 성경이 정경 화되지 아니했기 때문에 사도들이 직접 전해 준 정통신앙을 간직한 ‘사도교회’가 우선시 되었다. 이때 거론된 사도교회는 에베소, 안디옥, 고린도, 로마, 그리고 서머나 교회 등 다섯 교회였다. 이 교회 중에서 베드로가 세웠다는 안디옥, 로마,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신앙의 정통성을 가진 교회로 유력하게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이 세 교회 중에서 로마교회가 가장 유력한 신앙의 정통성을 가진 교회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이 이곳에 순교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 시는 당시 제국의 수도라는 유리한 점도 있었다. 교회의 통일과 정통성을 바라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로마교회를 지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사람들은 로마교회를 ‘사도들이 전승한 건전한 정통교리’를 갖고 있는 최적의 교회로 삼았던 것이다. 실례로 2세기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로마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하였다.(같은 책, p.20-21) 180년 경 리용의 이레니우스도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세운 교회이자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교회, 즉 로마교회’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같은책, pp.22-23)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또한 초기 ‘집단 지도자’의 공동책임 체제에서 ‘군주제적 주교단’으로 발전되어 갔다. 즉 지도층의 수장 한 사람이 공동체의 유일한 책임자로 발전되어 갔던 것이다. 물론 로마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이 제도를 늦게 실행하였다. 초기 로마교회가 초대교회의 집단지도체제의 전통에 더욱 충실했음을 볼 수 있다. 로마교회의 첫 주교의 등장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2세기 후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로마주교 칼릭투스(218-223년)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을 인용하여 로마주교가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주장하였다. 최초로 기록된 로마의 ‘군주제적 주교교회’는 46명의 신부와 부제 7명, 차부제 7명, 시종 42명, 구마자 56명, 독경자들과 수문자가 존재하였고, 그리고 1500명의 고아와 과부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이때 주교의 대표자는 코넬리우스(251-253년)와 스테판 1세(254-257년)로 기록되어 있다.(같은 책, p.23)

이러한 로마 중심의 군주제적 주교 중심에 대해 반대한 인물도 있었다.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였다. 키프리아누스는 군주제적 일인 지도체제가 아니라 주교단의 형성을 통한 ‘화합과 사랑’이 보편교회의 일치에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교가 동요 주교에게 결정을 강요할 ‘주교 중의 주교’란 폭군처럼 된다고 하였다. 이해 반해 로마교회는 주교가 자신들의 신앙과 성직자 징계문제에 결정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로마교회가 주교에게 교황이란 명칭을 부치지 않았고, 마태 16장 18절을 인용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추론하지는 않은 상태였다.(같은 책, pp.24-25)

로마주교의 수위권은 313년 기독교의 공인으로부터 가속화되어 갔다. 콘스탄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황실 종교로 만들었고 당시의 로마주교였던 실베스타 1세를 대신해서 313년 로마회의, 314년 아를회의, 그리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도하였다. 교회의 분쟁도 황제가 주도할 정도이므로 교회는 황제의 정치적인 힘에 의해 막강한 종교로 부상하였고 로마 시는 기독교 시로 성시화되었다. 로마교회는 황제의 후원으로 315년 라테라노 대 성당(현재의 로마 대성당)을 건축하였고 지금까지 이 교회를 ‘모든 교회의 머리이자 어머니 교회’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교회 외부의 보편적 주교’ ‘사도들과 동등한자‘ ’기독교 창시자’ ‘하나님의 대리자’로 부르기도 하였다. 330년 로마의 수도가 콘스탄틴노풀로 옮긴 후 로마 교회와 주교의 역할은 더욱 확대해져 갔다.(같은 책, pp.26-30)

이후로 로마주교는 이태리에서 황제의 역할을 감당할 자로 등장하게 된다. 4-5세기 사이에 완전한 기독교 도시가 된 로마 시는 많은 귀족들의 재산이 교회에 유입되고 대성전들과 세례성당들이 건축되었다. 343년에 개최된 소피아공의회(진정한 의미의 최초공의회)는 동방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임된 주교를 로마주교가 해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주장한다. 로마교회와 로마주교의 수위권을 확보한 법률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교황 다마수스 1세(366-384년)때 와서 로마주교를 ‘사도좌’로 명명하였다. 교황 다마수수 1세는 마태 16장 18절을 인용하여 베드로의 교회 즉 로마 교회만이 참다운 그리스도의 교회로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380년 황제의 칙령을 선포하여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제정한 것이다. 이로 인해 로마교회의 신앙을 곧 베드로의 신앙으로 부각시킨 것이다.(같은 책, pp.26-34)

교황권이 증폭된 또 하나의 계기는 다마수스의 후계자들인 시리키우스와 인노센트 1세 때 교황령을 선포하면서부터였다. 교황령은 주교들의 질문에 교황들이 답신한 것을 말하며 이것은 로마교회의 문서고에 보관되었고 로마가톨릭교회의 판례 역할을 한 것이다.

교황사에서 교황의 권위와 위상에 큰 전환점을 가져온 최초의 교황들은 교황 레오 1세와 교황 그레고리 1세이다. 교황 레오 1세는 교황으로서 로마교회와 정부를 대신하여 훈족(452년)과 반달족(455년)의 왕들을 만나 외교활동을 통해 로마를 수호하였다. 교황 레오 1세는 ‘기독교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베드로의 ‘교황좌’가 로마교회와 국가의 평화를 책임 맡는다고 주장하였다. 교구의 모든 주교들은 로마의 주교(교황)에게 협력해야 하며 로마주교 만이 ‘충만한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선포하므로 그는 최초로 교황의 수위권을 확고히 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노풀의 총대주교를 로마 다음의 제 2의 주교로 인정한 칼케돈 공의회의 규정 25번을 취소하기도 하였다. 교황 레오 1세의 후임자로 등장한 교황 젤라시우스 1세도 494년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였다. 교황 젤라시우스 1세의 주장은 수위권의 공법화를 표명한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두 개의 권한 뿐 입니다. 그 하나는 축성 받은 주교권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을 통치하는 세속권한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권한 중에서 전자가 더 무게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 권한에 관한 한, 왕들조차도 하느님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공공질서, 즉 세속의 일에 관해서는 고위 성직자들일지라도 황제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같은 책, p.36)

이러한 세속 왕들과 주교들과의 관계에서 기계론적인 교황의 수위권을 내세움과 더불어 영적 도덕적인 힘으로 교황의 수위권을 성취한 교황은 교황 그레고리 1세(590년)였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를 거절할 정도였다. 그는 수도사의 기질을 발휘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종중의 종’이라고 하였다. 그의 재임기간 중 콘스탄틴노풀의 총대주교가 자신을 ‘세계총대주교’라고 선포하자 ‘불경하고 오만한 칭호’라고 반대하였다. 그는 860여 통의 편지를 통해 배고픈 민중, 롬바르디아와의 전쟁, 교회의 재산관리, 홍수와 같은 재난 등이 발생했을 때 애정 어린 심정으로 로마와 시민을 보호하려는 신의 카리타스(Caritas)를 보여 주였다. 그는 프랑크족과 서코트족에게 존중의 관심을 보였고, 브리타니아를 개종시키려고 선교사 어거스틴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그 중에서 목회자들을 위한 교육지침서인 [사목법규]는 중세시대 사제교육의 교과서로 쓰이기도 하였다.(같은 책 pp.38-39)

교황 그레고리 1세 이후의 서구사회는 새로운 변화의 도전에 접하게 된다. 그것은 이슬람의 등장이었다. 로마제국의 중남부가 이슬람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부 아프리카가 이슬람화 되었다. 718년에는 이슬람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왔고 서방 세계는 엄청남 위협을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게르만 민족의 남부 유럽의 정착은 유럽의 정치 판도에 새로운 지각변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교황권은 수많은 격동과 유여곡절을 경험하면서 중세 유럽의 정치와 사회의 중심 기둥으로 부상하게 된다.(같은 책, p.41) 

로마교황은 동로마제국인 비쟌틴제국의 황제들로 부터도 교황권의 수위권을 인정받으려 했다. 7-8세기는 여전히 교회와 이태리의 영토는 비잔틴 황제의 치하에 있었다. 교황들은 황제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을 시도했다. 독립운동을 시도하다 교황 마리티누스 1세는 콘스탄틴노풀에 끌려가 재판을 받고 공개 처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교황들은 동시에 롬바르디족과 같은 야만족의 위협 속에 있었다. 739년 그레고리우스 3세는 프랑크 왕인 챨스 마르텔에게 헙조를 구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의 궁재였던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의 실권을 장악하므로 교황과 프랑크 왕과는 특별한 관계로 발전한다. 당시 교황 이었던 자카리아는 실케리크 3세를 내쫓고 권력을 장악한 피핀의 구테타를 승인하여 주고 751년 수아송 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선출하게 만든다. 교황 자카리우스의 이러한 친 프랑크 왕 정책은 교황 스테파누스 2세에 와서 빛을 보게 된다. 프랑크 왕과 교황 스테파누스 2세는 서로간의 협약을 통해 교황은 카로링가의 왕위를 인정하고 왕은 롬바르디의 침략으로부터 교황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한다. 피핀 왕은 실제로 두 번에 걸친 롬바르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태리의 영토를 성 베드로의 무덤위에 헌납한다. 이것이 교황령의 단서가 된 것이다.(같은 책, pp.45-46)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갑작스런 피핀의 행동에 분노하여 피핀이 헌납한 영토는 비쟌틴의 고유의 재산임을 선포한다. 이때 피핀의 결정을 뒷받침하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콘스탄틴누스 증여문]라는 허위 문서였다. 이 문서의 내용은 콘스틴티누스가 문둥병에 걸렸는데 당시 교황이었던 실베스타 1세가 330년 그에게 세례식을 베풀어 치유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에 황제는 감사의 뜻으로 실베스타 1세와 그 후임자들에게 라테라노 궁, 황제의 문장들, 로마와 이태리의 도시, 지방, 영토 그리고 서구 지역을 헌납했다는 엄청난 내용의 증서였다. 이 허위 문서는 중세 1000년간 교황의 독립성과 우월성의 근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는 퀴즈의 니콜라스 추기경과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에 의해 15세기에 거짓으로 판명되었다.(같은 책, pp.45-46)

프랑크 왕국과 교황과의 유대가 극도로 강화된 사건은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 사르마뉴 대제에게 로마의 황제관을 축성하므로 시작되었다. 교황 레오 3세가 이태리의 귀족들에 의해 감금되었을 때 샤르마뉴대제가 그를 보호하여 주었던 것이다. 800년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방문하여 레오 3세를 다시 복귀 시켰던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은 샤르마뉴 황제를 로마인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로 인해 교황은 황제를 축성할 권한을 확보하였고 황제는 교황의 축성으로 인해 교회를 간섭할 권한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교회의 수장이 되었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었던 것이다. 제 2의 콘스탄누스 대제가 탄생한 것이다.(같은 책, p.46)

사르마뉴 대제 이후 프랑크 왕국은 아들에 의해 삼분되어 통치하였고 제국의 힘이 서서히 약화되어 갔다. 이때 황제의 약화된 권한을 틈새로 교황 니콜라스 1세가 등장하여 교황권을 신장시켰다. 그는 세속권력이 교회에 간섭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였고 대신에 교회가 국가권력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모든 교회의 권한은 로마 주교의 손에 있으며 교구회의는 교황이 내린 결정을 시행하는 기관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니콜라스 1세를 제외한 당시의 교황들은 타락한 로마 귀족들의 정쟁에 휘말렸고 그들의 노리개 역할을 하는 소위 중세교회의 암흑시대에 접어들었다.(904-1046년)

이 시기는 교황청의 갖은 추문과 부도덕한 행위로 점철되어 있다. 교황 스테파누스 6세는 자신의 전임 교황인 프로모수스의 시신을 꺼내어 교황 옷을 입히고 교황 좌에 앉혀 놓고 종교회의를 열어 재판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형언도를 내려 죽은 교황에 대한 분노를 삼킬 수 없는 시민을 위해 로마의 거리에 시체를 끌고 다니다가 티베르 강에 던져 버렸다. 이 시기에 44명의 교황이 교체되었고 9명은 살해되었으며 9명은 해임되고 7명을 추방되었다. 그리고 ‘창녀정치’(pornocracy) 시대로 테오필락투스 가문 출신의 데오도라와 두 딸의 치맛바람에 교황청이 농락당한 시기였다. 예를 들면 큰 딸 마로치아와 교황 세르지우스 3세의 불륜으로 태어난 교황 요한 11세는 전형적인 족벌정치의 전형이었다. 교황 요한 12세는 유부녀의 침대 속에 있다가 습격을 당해 피살당하기도 하였다. 베네딕투스 7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은화 1000달란트를 받고 교황직을 매매하기도 하였다.(같은 책, pp.49-50)

이태리 고황청의 타락은 결국 독일 황제 헨리 3세에 의해 교황이 임명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게르만 민족에게 빼앗긴 교황청의 권력 회복을 위한 투쟁과 교회 개혁은 수도원 출신의 힐데브란트에 의해 실시되었다. 힐데브란트는 교황 니콜라스 2세와 알렉산드 2세의 자문인으로 교황 선출을 위한 로마의 고위 성직자로 구성된 추기경단(13세기 이후에는 콘클라베로 알려짐)을 만들었다.(1059년) 그리고 추기경단이 교황을 선출케 하고 황제는 선거결과만을 통보받도록 하였다. 그는 교회 개혁을 위해서 속권의 성직 임명을 막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속권의 성직임명권을 반대하는 교황령을 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진정한 교황권을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유럽각국의 반대에 부딪쳤고 특히 독일 황제 헨리 4세와의 갈등은 심화되었다.(같은 책, pp.52-53)

독일 황제는 헨리 4세는 교황 그레고리 7세의 속권의 성직수임권 반대 결정에 불복하였고 1076년 브름스에서 황제주도의 종교회의를 열어 ‘교황은 커녕 못된 수도승인 힐데브란트’를 폐위시켰다. 이에 교황은 보복으로 황제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함을 알게 된 헨리 4세는 1077년 1월 25일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놋사에 도착하여 참회의 옷을 입고 성문 앞에서 교황의 용서를 빌며 3일간 간청하였다. 이는 교황의 승리로 끝났지만 용서받은 헨리는 그 후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교황을 살레르노로 귀향을 보내었고 교황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1085년) 그는 운명하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했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추방당한 채 죽어간다”라고 하였다. 그의 입에 관례에 따라 시편 44편 8절의 성구를 넣었다.(같은 책, p.54)

성직수임권 논쟁 후 교황의 통치 구조는 더욱 강화되어 갔다. 1098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로마교황청’이란 용어를 문서에 남겼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오스만 투르크 족에 의해 성지와 동로마제국이 위협을 당하게 되고 성지 순례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1095년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동로마 형제들을 이방인들의 위협에서 구하고 예루살렘 성묘의 회복을 위한 전쟁의 당위성을 연설하였다. 이 연설을 들은 청중들은 십자군 동원은 ’하나님의 뜻‘(Deus Vult)이라고 외쳤다. 그 후 무려 200년 동안 지속된 십자군 운동은 유럽의 정치, 경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교황권의 신장도 최고조에 달했다. 바로 제 4차 십자군을 동원한 인노센트 3세 때였다. 그는 중세의 가장 중요한 제 4차 라트란 공의회를 개최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종교재판을 법제화하고 화체설을 확정하였다. 인노센트 3세는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에 비교하기도 하였다. 교황 인노센트 3세 이후에 보니파키우스 8세가 등장하여 ’우남상탐‘이란 칙서를 발표하여 교황의’‘신정정치’를 선포하였다.

모든 인간이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그의 신정정치는 프랑스 왕 필립과 대립을 불러왔다. 필립의 세력에 밀린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아나니로 피신을 갔지만 필립의 명령을 받은 자들에 의해 교황은 따귀를 맞고 망신을 당하였다. 그는 로마에 돌아온 후 곧 숨을 거두었고 교황청은 필립에 의해 프랑스 아비뇽에서 70 년 간 유배당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출신의 교황들로 선출되었다. 이 기간에 교황들은 엄청난 월급을 받으면서 부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각국들은 프랑스가 교황청을 지배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지 아니했다. 막대한 재정난에 시달린 교황청은 다시 로마로 귀환하게 된다. 1377년 로마로 귀환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죽은 후 후계자 선출을 위해 70년 만에 콘클라베가 열렸다. 로마인들은 다시 프랑스 출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무장병사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비 프랑스인으로 우루바누스 6세가 로마의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선출과정의 부정으로 인해 추기경단은 클레멘스 7세라는 프랑스 출신의 교황을 다시 선출하였다. 클레멘스 7세는 다시 아비뇽으로 귀환하였다.

이로 인해 두 명의 교황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양분된 교황청과 부패한 교황정치를 쇄신하기 위해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 ‘’공의회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대학의 학자들과 뜻있는 추기경들이 함께 하여 일어난 운동이다. 평신도들이 발언권을 가진 공의회를 조직하고 공의회가 교회의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황 알렉산드 5세를 선출하였다. 이로 인해 3명의 교황이 한꺼번에 존재하게 되었다. 1417년 스위스의 콘스탄츠에서 만국공의회가 소집되었고 공의회가 보편교회를 대표하고 그리스도의 권한을 직접 위임 받았음을 선포하였다. 로마 교황도 공의회에 복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한 교황은 사퇴시키고 두 교황을 해임하였다. 22명의 추기경들과 5개국 대표들 30명으로 구성된 콘클라베를 구성하여 마르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같은책, pp.66-68) 

16세기에 접어들어 교황청은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에 의해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된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해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교황 중심의 중세정치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로마교회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어 갔다. 마틴 루터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고발 하였다. 칼빈도 같은 맥락에서 교황정치의 부패성을 폭로하고 성경적인 교회의 회복을 위한 종교개혁에 앞장서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위기 의식 속에 트렌트 공의회(1545-1563년)를 통해 교회의 새로운 정책과 변모를 갖게 된다. 교리와 성직자의 규율에 대한 조항들이 제정되었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종교개혁으로 로마교회의 보호를 위한 모임이었다. 트렌트 공의회 이후 3명의 교황들이 카토릭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파이우스 5세는 교황이 된 후에도 청빈한 도미닉 수도사 생활을 계속하였고 도미닉의 수도복인 횐 옷을 입고 다녔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교황들이 흰옷이 입게 된 이유였다. 교황 파이우스 5세의 후계자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유럽각 지역에 교황대사들을 두었고, 각 지역에서 이들을 교황권을 위한 사역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를 서구사회 전체가 수용하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와서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에 의해 교황의 세력이 도전을 받게 되었고 교황들은 이에 맞서 교황의 권한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860년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지면서 교황령의 대부분은 이태리아 왕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교황권의 속권에 대한 힘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가톨릭 신자들은 속권을 상실해 가는 교황 파이우스 9세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가톨릭의 로마교회의 세상국가를 지배하는 권력의 위용이나 사도들의 무덤을 위한 순례가 아니고 교황을 동정하는 행렬이 이어졌다.(같은 책, pp.96-97)

그러다가 교황의 위상에 대한 전기가 마련된 것은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였다.(1870년) 트랜트 공의회 이후 300년이 지난 대공의회였다.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는 700명의 성직자들이 회집 하였고 자유주의, 유물론, 범신론, 자유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성서관 등을 거부했지만 이를 위해 교황의 권위가 최고조로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오류성과 수위권을 교리로 확정하였다. 그래서 교황을 영원한 목자(Paster Aeternus)로 호칭하게 되었고 533대 2로 이 조항을 통과 시켰다. 그리고 교황의 무오류성의 확인과 교황을 모든 사람들 위로 들어 올리는 의미로 중세부터 유래한 가마를 타게 했던 것이다.(같은 책, p.98)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교황의 위상은 점점 신성화되어 1984년 12월 8일 교황 파이우스 9세는 성모무험시태 교리를 확정하였던 것이다.

세계 1, 2차 대전을 지난 후 지구촌에 발생한 문제들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의 발현, 선진국과 후진국과의 빈부의 차이 등이다. 교황들은 이런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방송매체를 통해 교황의 권위를 부각시켰다. 이러한 시류 속에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는 변화하는 세대에 대처하기 위한 혁명적인 결정들을 했다. 이 공회는 ‘교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차원을 넘어 완전히 의식변화를 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에서 수용으로 전환하였다. 세계평화라는 이름으로 보편주의 가치를 활용했으며 개신교와 희랍정교와의 대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 자유, 정의, 가난에 대한 관심 등을 크게 표현하였다. 바티칸 공의회 이후 두 교황이 지난 후 교황 아드리아누스 2세 이후 첫 번째로 비 이태리 출신으로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1978-2005년)으로 선출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현재는 비 라틴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남미 출신 프란체스코 1세가 등극하여 보편주의 가치관을 최대치로 확대하면서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그는 평신도 수도사 프란체스코의 이름을 따라 교황명을 칭하게 하므로 교황이 시류에 얼마나 변신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연구한 교황의 역사에서 교황권은 시대가 감에 따라 점점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주교(감독)가 교회의 지도자로 존재하였다. 그러다가 주교가 갑자기 ‘베드로의 후계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단지도체제’에서 ‘로마주교중심의 군주제’로 발달한다. 교황 레오 1세는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였고,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주교에게 ‘교황’(pope)이란 칭호를 붙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을 ’베드로의 대리자‘로 칭하였고 인노센트 3세는 교황을 ’하나님의 대리자‘ 호칭하였다. 그리고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무오류성‘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교황은 작금에 와서 무오류성과 더불어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교황의 위상은 로마교회가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든 인위적인 결정이다. 즉 교황권위는 하나님께서 준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시대가 감에 따라 점점 발달하였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초기 로마교회는 주교만 존재하였다. 영지주의와 같이 이단들을 교회가 대항하기 위해 사도들의 정통성이 찾기 시작하였고 이 정통성을 위해 로마 주교의 위상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둔갑하였다. 교황 레오 1세는 혼족과 반달족과 협상하면서 정치적으로 ‘교황 좌’를 로마교회와 국가의 평화의 책임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교황 레오 1세는 로마 주교만이 ‘충만한 권한’을 갖고 있으며 모든 주교들은 로마의 주교(교황)에게 협력해야 함을 선포하므로 최초로 교황의 수위권을 확보했던 것이다. 6세기에 교황 그레고리 1세는 ‘교황’(pope)이란 칭호를 붙였다. 이로 인해 영육 간에 교황이 보편교회의 대부로 인식되었다. 11세기에 그레고리우스 7세는 독일 황제 헨리 4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교황을 ‘베드로의 대리자’로 호칭하였고, 그 후 인노센트 3세는 십자군을 동원하면서 교황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호칭하였다. 그리고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무오류성’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의 무오류성은 사실 오래 전부터 믿어왔던 것으로 1870년에 법제화 한 것뿐이다.(마틴 로이드 존스, 정 동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평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2011, p.25) 이렇게 교황의 권위는 성경에 아무른 근거가 없이 역사적 산물로 만들어 졌고 교황 우상화가 진행된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변신해 온 교황의 한국 방문의 의미는 무엇일까?

교황의 위상은 역사적인 산물이며 성경에 아무른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대변하는 세계적인 지도자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러한 교황의 한국 방문의 의미를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교황의 한국 방문은 한국 천주교의 위상을 높여줄 것이다.
둘째, 교황의 한국 방문은 한국 천주교의 교세확장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셋째, 교황의 한국 방문은 한국의 일부 종교 간의 대화와 유대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촉진시킬 것이다.
넷째, 교황의 한국 방문은 한국의 기독교 간의 갈등을 유발시킬 우려가 있다.
다섯째, 교황의 한국 방문은 천주교의 실상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킬 것이다.
여섯째, 교황의 한국 방문은 개신교회의 자기 성찰이 있을 것이다.
일곱째, 교황의 한국 방문은 천주교의 오류들이 숨겨지거나 미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여덟째, 교황의 한국 방문은 교황에 대한 이미지를 높여줄 것이다.
아홉째, 교황의 한국 방문은 교황 우상화를 촉진시킬 것이다.
열 번째, 교황의 한국 방문은 천주교인들의 사회적 인지도를 높여줄 것이다.
열한 번째, 교황의 보편적 가치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은 한국천주교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2. 비성경적 가톨릭 신앙의 허와 실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은 마틴 루터의 칭의의 교리를 강의하기도 한다. 사제들은 개신교가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들을 말한다. ‘거듭남’, ‘구원 경험’,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와의 만남’, ‘성령 세례’, ‘그리스도를 영접함’, ‘은사 체험’, 그리고 ‘케리그마’ 등의 표현이다. 사제와 수녀들은 복음적인 집회에도 참석하고 기독교의 찬송가도 배운다. 그들은 지역교회의 모임에도 얼굴을 내 민다. YMCA의 모임에도 참석하고 개신교의 메시지와 신학용어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그리고 개신교 목사들에게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로마 가톨릭교회 내의 가르침의 실상은 이와는 정 반대이다.(마틴 로이드 존스, p.62) 심지어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도 제 1,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로마가톨릭교회가 많이 변화했다고 말하면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전혀 변화된 것이 없고 도리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개신교와 타 종교를 포섭하기 위해 위장된 모습으로 대화의 창을 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대주의에 부응하여 보편적 가치를 위한 교황의 행보가 로마가톨릭교회의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 특히 프란체스코 1세의 권고문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은 보편적 가치론의 범위를 넘어 경제적인 마르크시스트라는 평을 받고 있다. 천주교의 가르침이 얼마나 비 성경적인 것인가는 아래의 설명에서 숙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신칭의, 성인숭배, 교황제도, 사제의 직무, 성례의 의미는 개신교와 확연히 다른 비 성경적인 교리를 갖고 있다.

1) 미신행위와 우상숭배 신앙의 온상

중세기독교는 성 유물(relics) 숭배가 만연한 민간 신앙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유럽 전역의 교회마다 성유물들이 난무하였다. 이러한 성 유물을 제후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더 많이 보유하도록 하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십자군 운동을 통해 성유물들이 난무하게 되자 교황청에서는 감리사를 보내 진품 명품을 가리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성유물들이 기적이 일으킨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성인들의 잉여공로가 전달된다고 믿었다.(마틴 로이드 존스, pp.30-31) 예를 들면, 구약의 광야의 만나, 세례요한의 머리카락, 예수님의 치아, 표피, 제자들의 발을 씻기운 물그릇, 십자가 나무 조각, 그리고 성인들의 유골 등 수많은 종류의 성 유물들을 유럽의 교회가 보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유물 숭배 전통은 오늘날 성인의 날 숭배 신앙으로 만연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은 이교도의 신앙 전통을 기반으로 발달한 것이다. 직업의 종류대로 성인의 날이 정해져 있다. 무려 43 종류의 성인의 날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세무원은 성 마태의 날을 9월 21일에 지킨다. 그리고 배우는 성 게네시우스의 날을 8월 25일 지키고 건축가는 성 토마스의 날을 12월 21일에 지키고 있다.(우드로우 같은책, pp.45-46) 로마가톨릭교회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성인들이 있다. 임신을 못하는 여인을 위한 성인은 성 안토니, 맥주를 마시는 사람을 위한 성인 성 니콜라스, 임신한 여인을 위한 성인은 성 게라드, 독신녀를 위한 성인은 성 안드레 등 무수한 성인들의 숭배 신앙이 존재한다. 그리고 병 치유를 위해 성인들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관절염을 위해서 성 야고보, 개에게 물렸을 때는 성 후베르트, 뱀에게 물렸을 때는 성 힐라리, 눈 먼 것은 성 라파엘, 암은 성 페레그린, 가슴 병은 성 아가씨, 눈병은 성 루시, 목구멍 병은 성 불라세, 간질은 성 비투스, 열병은 성 조오지, 담석증은 성  리베리우스, 두통은 성 데니스, 심장병은 성 요한, 정신 이상은 성 딤프나, 그리고 피부병은 성 로치 등이다.(우드로우 같은책, p.47)

이와 같이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보호성인을 두고 신앙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성인들을 우상화하고 그들에게 기도하면서 죽은 성인들과 연결된 이교도적인 신앙을 지속하고 있다. 가톨릭 백과 사전은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전설들은 기독교 이전 시대의 종교 이야기들에서 발견되는 개념들을 반복하고 있다... 전설은 기독교적이지 않으나 단지 기독교화 된 것이다... 많은 경우 전설은 신화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영웅들에 대해 그 본질적인 요소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고대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성인들에 대한 많은 전설의 경우가 이와 같다... 고대 사람들인 자기들의 영웅에 대해 간직했던 개념들을 취해 기독교 순교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성인들이 지역의 신이 되고 기독교 예배가 고대의 지역 신 예배를 대신해서 들어서게 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증진되었다. 이는 (고대의) 신들과 성인들 사이에 유사성이 매우 많음을 잘 설명해 준다.”(우드로우, 같은책, p.48)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가 가장 큰 우상으로 섬기는 미신행위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다.

성모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431년, 에베소 공회의)로 승격한 이후에 점점 발전하여 오늘날은 ‘성모무염시태’(1854년), 그리고 ‘성모몸소승천’(1950년)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성모무염시태(The Immaculate Conception)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말한다. 예수를 원죄 없이 잉태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마리아 자신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마리아는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으로’ “일생 동안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교리서 493, in 제임스 G. 멕카티, p.273) 로마가톨릭교회는 또한 마리아의 완전한 처녀 동정성이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동정(처녀성)이 조금도 다침이 없이 그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 태양 광선이 유리의 고체 물질을 조금도 깨뜨림 없이 뚫고 나가는 것 같이, 그렇지만 더욱 고귀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하셨을 때는 당신 어머니의 동정을 완전무결학 본래대로 보존셨다.”(교리서 499 in 제임스 G. 멕키티, p.274)

로마가톨릭교회는 마리아의 동정성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의 동생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이들이 아니고 요셉이 데려온 자녀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를 ‘축복의 마리아 동녕녀’, ‘ 동정녀 중의 동정녀’, ‘온전히 거룩한 동정녀’, 그리고 ‘하나님의 어머니’로 칭한다.(교리서 499 in 제임스  G. 멕카티,  p.275)

이렇게 원죄 없이 태어나서 동정을 보존한 마리아는 죽어도 육체가 부패하지 않았다는 신앙으로 진화되었다. 결국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녀를 엘리야처럼 승천한 인물로 둔갑시킨 승모몽소승천(Assumption of Mary)교리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원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없이 깨끗하신, 펴앵 동정이신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지상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리심을 받어셨다는 것을 신적으로 계시된 교의로서 정의하며 선포하는 바이다.”(제임스 G. 멕카티, p.275)

마리아 숭배 사상의 비판에 대해 로마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구별하고 성인보다는 공경한다는 것뿐이지 절대 숭배는 아니다 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실제로 로마가톨릭교회는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모시고 숭배하는 신앙을 갖고 있다.(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평가, p.29) 그리고 천주교 예배는 예수님 보다 마리아에게 더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천주교에서는 성모마리아의 축일로 연간 14번의 기념 축제일을 정해 놓고 기념하고 있다.(http://mirror enha/wiki/) 천주교에서 성모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에게 직접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이 넘치는 예수의 친모 마리아를 통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와 인간과의 중보자로 우리를 대신하는 존재로 숭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로마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죄 없이 잉태되었고, 온전하게 죄가 없고, 몸으로 승천하였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제임스 G. 멕카티, p.290) 특히 마리아가 예수와 신자들 사이의 대중보자로 인식된 초대교회의 흔적은 없다.

2) 제사장직의 보편성 부인과 사제직 주장

로마가톨릭교회는 사제들을 사도적 계승으로 인식하고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복음의 증거에 따라, 하나님의 전 교회를 다스리는 최고의 지위가 주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축복된 사도 베드로에게 수여되었다고 가르치고 선언한다.”(제 1차 바티칸 회의 in 제인스  G. 멕카티, pp.345-346)

천주교에서는 사제들을 평신도와 철저하게 계급적, 존재론 적으로 구분한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제사장(사제)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교회에서 성직수임을 받은 이 사람들만이 사제입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p.26)

그리고 주교 제도는 신적 제도이며 주교나 사제들을 배척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죄를 범한다고 가르친다.

“... 주교들이 신적제도에 따라 사도들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가르친다. 주교들은 교회의 목자들이므로, 주교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고 주교를 배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제 2 바티칸회의  in 제임스 G. 멕카티, p.344)

이러한 주장은 곧 대단히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이다. 천주교의 주교들이 하나님이 제정한 신적제도라는 표현은 주교의 권위를 높이는 억지 주장이다. 그리고 평신도로 하여금 주교들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만드는 제도이다.
“... 신자들은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린 자기 주교의 판단에 일치하여야 하고, 마음의 종교적 순종으로 그를 따라야 한다.”(제 2차 바티칸 회의 in 제임스 G. 멕카티, p.387)

또한 주교는 사제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 사제들인 주교 자신들이 평신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구약의 사제나 제사장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고백이란 제도를 통해 평신도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제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제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제사장으로 면죄를 선언하고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권능을 가졌다는 것이다.(마틴 로이드 존스, p.27)

더 중대한 문제가 있다. 성만찬 때 포도주와 떡을 사제가 축성하여 예수의 피와 살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화체설이 나온 것이다. 포도주와 떡은 겉모양과 색깔은 그대로 있지만 본질이 변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특별한 방법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가 성사성체를 통해 자동적(기계적)으로 주입된다는 것이다. 또 성만찬시에 포도주를 일반성도가 마시지 못하게 하는 특이한 교리를 갖고 있다.(마틴 로이드 존스, p.27) 결국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하면 평신도가 직접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는 만인제사장직의 권한을 박탈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마틴 로이드 존스, p.26)

3) 칭의 교리의 오류

종교개혁자들이 중세의 미신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교리가 칭의의 교리이다. 칭의는 믿음으로 우리가 의인이 된다는 교리이다. 그런데 로마가톨릭교회는 인간이 선행이나 공적을 쌓아서 자신의 칭의에 무엇인가를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칭의는 세례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례를 통해 원죄가 말소되고 하나님의 의를 받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이 세례 수혜자에게 베푸는 의가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 결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다는 개신교의 칭의의 교리를 위험한 교리라고 비난하고 있다.(마틴 로이드 존스, pp.32-33) 그래서 교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다. 세례를 통해 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례를 베푸는 교회와 사제가 절대적인 위상을 갖게 되고 신도들이 그들을 의지할 수 밖 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신도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기 위해 중보자로서의 교회와 사제를 절대로 필요하게 만든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마리아, 교황, 사제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가 중보자로 역할을 하고 있다.(마틴 로이드 존스, p.33)

은총, 협력, 믿음, 선행의 4단계로 이루어지는 가톨릭교회의 의롭게 되는 과정은 성경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가르침이다. 성경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롬 3:24)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가톨릭교회의 칭의 가르침은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의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며 선물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신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면 주저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음의 두 인용구를 비교하면 그들의 주장의 상반됨을 알 수 있다.

“의롭게 되는 것을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믿음이나 행위나 의롭게 되는 것을 선행하는 어떤 것도 의롭게 하는 은총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트렌토 회의 in 제임스 G. 멕카티, p.75)

“은총의 영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그러므로 회개와 용서와 의화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가톨릭교회 교리서 in 제임스 G. 멕카티, p.75)

“만약 어떤 사람이 의롭게 되는 믿음이 단지 그리스도를 인해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트렌트 종교회의 in 제임스 G. 멕카티, p.77)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은 믿음은 의롭게 되는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하며 그 뒤에 행위가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믿음이 의롭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이고 의롭게 되기 위해 믿음 외에 다른 단계가 있다는 주장은 없다. 성경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단 하나의 필요충분의 조건은 믿음뿐이라고 말한다.

4) 잘못된 성례의 의미

천주교에서는 성례 대한 이해는 기계론적이다. 성사에 참석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주입받는 행위라고 가르친다. 특히 세례(영세)의 성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세례의 성사가 없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례가 영혼으로부터 원죄를 제거하고 영혼 안에 성화케 하는 은총을 주입하는 행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교리서 262-1266 in 제임스  G. 멕카티, p.476) 즉 세례의 성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어 죄인이 의롭게 거듭난다는 것이다. 세례가 단순히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외적 징표가 아니라 의롭게 되는 채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가톨릭교회의 의롭게 되는 신앙은 나머지 여섯 단계의 성사를 통해 보존되는 것이다. 두 번째 성사가 성사중의 성사라고 부르는 성체 성사이다. 성체 성사는 사제들의 축성에 의해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를 먹게 된다. 예수의 몸과 피를 직접 먹고 마시므로 의로움이 보존되며 하나님과 연합된다.(교리서 1391 in 제임스 G. 메카티, p.477) 세 번째 성사는 견진성사로 의롭게 됨을 보존하기 위해 성령의 은사를 받는 성사이다. 이 성사를 집례하는 사제는 오른 손가락을 거룩한 기름에 넣었다가 성사를 받는 사람의 이마에 십자가 성호를 긋고 “성령의 은사로 인침을 받으라”고 선언한다.(교리서 1300 in 제임스 G. 멕카티, p.477) 견진 성사는 개인적인 오순절 성령체험으로 간주하며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특별한 힘을 받고 의롭게 된 신앙을 보존하는 수단인 것이다.

천주교는 의롭게 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네 번째 성사인 고해 성사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가르친다. 세례 받은 후 치명적인 죽을 죄를 지은 자는 사제에게 고해 성사를 통해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고해 성사는 개인적인 고해 성사와 공동으로 신부 앞에 하는 집단 고해 성사가 있다. 집단적인 고해의 기도가 이루진 후 신부는 참여한 집단 고해자들에게 죄가 사하여 졌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은 이 집단 고해에 참여하여 죄 용서함을 받드라도 1년 안에 다시 그 죄를 신부에게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교리서 1536-1600 in 제임스 G. 멕카티, p.478)

고해 성사까지 행한 성숙한 신자가 된 교인은 이제 두 가지 혼례 상사를 치르게 된다. 하나는 성품 성사이고 다른 하나는 혼배 성사이다. 성품 성사는 주교나 사제 혹은 집사로서 부제직에 종사하게 되는 직분을 받는 성사다. 혼배 성사는 결혼 성사로서 이 성사를 통해 부부 생활을 돕는 특별한 은총을 받게 된다.(교리서 1601-1666 in 제인스  G. 멕카티, p.479)

천주교의 마지막 성사는 종부 성사(Extreme Unction)이다. 이 성사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에게 영적이고 육체적인 힘을 제공하여 의롭게 하므로 신자의 영혼을 천국에 가도록 준비시키는 성사다. 이 성사는 고해 성사와 성체 성사를 병행한다.(교리서 1499-1532 in 제임스 G. 멕카티, pp.478-479)

천주교의 7성례는 한번 의롭게 된 신앙이 얼마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천주교는 세례 성사를 통해 의롭게 된 구원의 신앙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성사를 통해 인위적으로 칭의를 지속하도록 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7성례를 통해 신자들의 사제들이 족쇄에 묶어 두는 종속신앙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의롭게 된 신앙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단번에 이루어진 완전한 것이며 신자의 신앙생활을 통해 재생산 되는 인위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효력도 영원한 것이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교황 한국 방문의 개혁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일부에서는 한국가톨릭교회와 개신교와의 직제와 신앙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런 주장은 외형적으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연합과 화합을 위해 바람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일치와 화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아집에 고착된 반 평화주의자로 폄하될 것이다. 이러한 일치와 화합의 불가능한 시도의 배경에는 다른 세력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토마스 리스는 [인사이드 바티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가 교회 일치 토론에 참여하는 것은 교황 통치권으로 장려되는 동시에 감독을 받는다.”(토마스 리스, 이경상 엮, 인사이드 바티칸, 가톨릭 출판사,  2005년, p.15)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일치와 화합의 운동은 로마가톨릭교회가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만든 대대적인 가톨릭교회의 홍보로 인식되기도 한다. 두 교회의 일치와 화합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루어지길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논리가 성경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불가능한 것이다. 개신교는 교황의 방한을 맞이하여 가톨릭 중심의 많은 홍보 행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교인들이 혼돈하지 않도록 개혁신학의 의미를 더욱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국개혁교회는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신앙의 오류들을 교인들에게 확실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많은 개신교 교인들이 천주교로 개종되는 것은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의 오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개혁교회는 개혁신학의 교리교육을 철저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많은 개신교 교인들은 개신교의 교리와 신앙에 대한 무지로 인해 신앙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다.
셋째, 한국개혁교회는 청소년의 건강한 신앙교육을 위한 청소년 교리학교를 부활해야 한다.
넷째, 한국개혁교회는 천주교의 교황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추구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다섯째, 한국개혁교회는 한국의 개신교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III. 결론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 이것은 교황을 교회의 수장으로 삼고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수위권을 보호하기 위한 주장이다. 사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 없이 교회는 없다’라고 주장해야 옳을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이 주도하는 교황중심의 교황 교회이며 국가이다. 즉 교황의, 교황에 의한, 교황을 위한 교회이다. 그래서 교황중심의 전제군주제 같은 체제를 갖고 있다. [국부론]를 쓴 아담스 스미스(Adam Smith)는 그의 저서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교황의 세력에 대해 “로마 교회는 국가 정부의 권위와 안전에 반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복지에  대적하는, 인류가 산출한 가장 가공할만한 조직체이다”라고 하였다.(로이드 존스, p.59) 또 14년간 예수회 사제로 지낸 휀스브뢰흐(G.P.Von Honsbroch)는 [사회 문명에 미친 교황권 제도]에서 “교황권 지상주의는 종교의 탈을 쓴 세속 정치 조직으로서 그 자체는 범세계적인 세속 권력을 추구해 오고 있다... 교황권은 그리스도로부터 그 존속 근거를 찾고 있는 신성한 기관이라 지칭하지만... 그 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이 뱉어내고 있는 무수한 허위로 둘러싸여 있다”라고 비난하였다.(로이드 존스, p.59)

지적된 바와 같은 비 성경적인 교황권지상주의의 우산 아래 펼쳐지는 성유물 숭배와 마리아 숭배는 기독교 신앙을 오도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형성된 성모 마리아와 사제들의 중보자적인 사역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신자의 보편적인 권한을 박탈하고 있다. 세례와 성찬예식이 구원의 은혜가 주입되는 통로라는 기계론적인 이해는 성경에 전혀 근거한 이론이 아니다. 사제들이 기적을 통해 포도주와 빵을 실질적으로 예수의 피와 살로 축성할 수 있다는 주장도 가공할 만한 억지 주장인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또한 성경 외에 많은 위경과 전통을 근거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로마가톨릭교회의 허위 권위와 거짓 신앙은 개신교의 정통교리로 위장되어 나타나므로 더욱 두려운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성육신, 기적, 대속사역, 육체의 부활, 승천을 믿는다. 그리고 성경의 영적영감과 권위를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한다. 이런 면에서 개혁교회처럼 확실한 정통교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확실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이 모든 것에다 ‘저주 받아 마땅한 첨가물’ 즉 전적으로 비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을 첨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우리가 그들이 가리키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는 그 체제의 거짓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다시 말해 로마가톨릭 체제의 교리는 그럴듯한 위조품이며 성경이 기록한 대로 로마가톨릭 체제는 다름 아닌 계시록의 음녀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표현이 과격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로마가톨릭교회의 실상을 면밀히 연구해 보면 성경이 말하는 정통기독교와는 다른 이질적인 신앙의 요소들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개혁교회 신도들은 외형적인 로마가톨릭교회의 화려한 허상에 유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말씀만으로 만족하고 진리를 외치는 개혁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마틴 로이드 존스, 정동수 역,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평가 (서울: 예수 그리스도 안에, 2011)
- 박도식, 천주교와 개신교 (서울: 가롤릭 출판사, 2012)
- 우드로우, 정동수 역, 천주교의 유래 (서울: 그리스도 예수안에, 2011)
- 제임스 G. 멕카티, 조남민 역, 가톨릭에도 복음이 있는가? (서울: 한인성경선교회, 2006)
- 토마스 리스, 이경상 엮, 인사이드 바티칸 (서울: 가톨릭 출판사,  2005년)
- 프란체스카 키바오로, 제라르 베시에르, 김주경 역. 교황의 역사 도시에서 세계로 (서울: 시공사, 2009)
- 호르스터 푸어만, 차용구 역, 교황의 역사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서울: 도서출판 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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