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어떻게 이 노인을 돌봐드릴 수 있을까..

삼복염천, 8월 3일 아침 9시.
교인 열다섯이 남녀 좌우로 나눠 앉아서 주일예배를 드린다.
피아노 소리도 없는 다섯 명 찬양대 찬송. 강단에 서서 예배를 인도하는 나는 울컥하며 눈물부터 나온다. 소록도의 이런 예배. 주님께서 이 성도들을 얼마나 측은히 여기실까.

한 평생, 외로운 섬에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 그리고 하늘을 흐르는 흰 구름과 물새를 벗 삼아 이렇게 살았다. 이제는 다 늙어 불편해진 몸으로 예배당에 올라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선 거룩한 백성들. 눈물도 마르고, 한숨도 그치고, 세상 미련도 사라지고, 믿음의 형제들 먼저 천국 보내고,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예배 시작이다.

뒷줄, 항상 그 자리에 앉은 할머니, 구 집사님 얼굴빛이 어둡다. 잿빛이다. 언뜻 생각하니 나이 90이 다 된 것 같다. 예배당에 들어서면 두 손 내밀고 반기며 손잡아 주던 집사님. 예배당 아래, 집으로 찾아가면 무척이나 좋아하던 다정한 할머니. 남편의 이름이 적힌 빛바랜 편지봉투를 성경책에 넣어놓고, 먼저 세상 떠난 남편 장로님을 그리워하던 쓸쓸한 할머니, 아침 햇살 비추는 창가에 엎드려 밝은 얼굴로 기도하던 기도의 사람, 그 성스러워 보이던 모습이 그림자처럼 식어졌다.

“하나님이 날 안 데려가. 어서, 천국 가야지.”
“집사님, 오래 살아야지요. 옛날이야기도 들려주시고...”
나이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치매기가 더러 보인다는 권사님 말씀이 맞는갑다. 누가 어떻게 이 노인을 돌봐드릴 수 있을까.

1960년대, 4, 5백 명이 모였다는 예배당.
2층은 창고로 쓰고, 신발장에는 늙은 주름살 신발만 쓸쓸하게 놓여있다. 예배를 알리는 차임벨 소리도 녹음테이프가 늘어져서 소리가 늙었다.

주님께서 오늘 아침, 이 성도들에게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하실까? 잠시 목이 메인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창세기 24장을 읽고는, 아브라함은 늙기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말씀하고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를 찬송한다. 인생 황혼, 부름 받는 날까지 은혜에 붙들려 살자는 강론이었다.

예배시간은 40분. 더 길면 안 된다. 한 시간 전에 나와서 기도했고, 30분 전부터는 찬송했다. 예배 40분이라도, 줄잡아 한 시간이 훨씬 넘는다. 70, 80 어르신들, 몸 성한 분이 없다. 집중력도 떨어진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분들 손을 잡아드린다. 몽당손이거나, 손가락 잃은 손이다. 허리는 낫처럼 굽어서 굳어졌다. 지팡이 의지하여, 아니면 작은 전동차를 타고 돌아간다.

7월 한 달 그리고 8월 몇 주간. 주일과 수요일이면 소록도교회 강단을 지키고 있다. 주일이면 3개 또는 4개 교회를 순회하며 담당한다. 광주에서 이른 새벽에 출발해서 7시쯤에 도착한다. 수요일은 오전 9시에 나선다. 쉽지 않은 운전이었다.

장로님이 봉투를 내민다.
“목사님, 먼 길 다니는데 기름 값이나 드려야지요.” 머뭇거리다 받았다. 이번에는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감사합니다. 차비로 쓸게요.” 봉투에 지폐 한 장이 들었다. ‘한센인들에게서 여비를 받다니...’ 눈물 사랑이다.

금년 여름은 소록도교회 담임이신 김선호 목사님이 나를 불렀다.
그래서 특별한 사역을 할 수 있었고, 소록도 교역자들을 도울 수 있었고, 소록도 성도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나를 부르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특별한 지역에 나를 파송하셨고, 소록도 가족과 낯 익은 나를 강단에 세워주신 것이다. 은혜와 감동의 날들,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때를 따라 은혜 베푸시는 삼위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바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 42:5

▲ 소나무 상처 - 일제 강제노역으로 송진 땄던 흔적이다. 소록도 사람들 마음의 상처도 이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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