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근거한 바른 신학적 인식을 세워야"

▲ 6/24 대전새로남교회에서 열린 한목협 제16회 전국수련회에서 한목협 신학위원장 지형은 목사가 기조강연을 전하고 있다.

1. 상황 인식

이번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주제가 “한계점에 선 한국교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이 주제 구성에서 먼저 ‘한국교회가 한계점에 섰다’는 명제에 대하여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조금은 길게, 소천하신 옥한흠 목사님 얘기를 하면서 현재의 한국교회 상황에 대한 제 인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는 다양한 입장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 비관적인 쪽에 서 있었다고 보입니다. 단적인 예가 2007년 7월 8일 상암동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운동 백주년 기념대회의 설교입니다. 옥 목사님은 요한계시록 3장 1-3절을 본문으로 설교했습니다. 제목은 “주여,살려 주시옵소서!”였습니다. 먼저 본문 내용입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옥 목사님의 설교문 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우리가 왜 100년 전의 부흥을 다시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입니까? 가장 절박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100년 전과 같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교회 안에 있는 악한 것들,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쓸어내는 회개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데 교회는 사람들 보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교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열심도 뜨겁고 봉사도 많이 하고 예배도 감동적이고 흠잡을 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꽃과 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그 교회의 행위가 죽어있었습니다. 행위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수 십 년 동안 기적과 같은 부흥을 이뤘고 5만이 넘는 교회, 천만의 성도, 세계 제일의 교회, 새벽을 깨우는 대단한 열심, 남에게 뒤지지 않는 헌신 등 자랑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절대로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목회자들과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더 힘쓰는 평신도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가 한국교회를 너무 불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신뢰도는 오래 전부터 하위권입니다. 전도를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랑, 사랑하면서 왜 그렇게 잘 싸우냐고 비아냥거립니다. 사회 각종 스캔들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끼어도 이제는 놀라지 않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우리는 이런 비난을 받으면서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짠맛을 잃으면 우리보다 더 악한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도록 놓이는 것이 주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보시고 이름은 살았으나 행위는 죽었다고 책망하지 않으실까요.”

설교하고서 사흘 뒤 옥 목사님은 이태형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설교와 관련된 상황과 마음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기자의 질문과 옥 목사님의 대답입니다.

질문 : 이구동성으로 설교가 감동적이었다고 말합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죄업을 놓고 가슴치는 목회자의 회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모두가 동감한 것 같습니다.

대답 : 사실 나이 들고 병든 저에게 이 중요한 대회의 설교를 맡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심 끝에 승낙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을 8년간 맡으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교회일치 작업이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 일치를 위해서 씨름했는데 이번에 연합집회가 가능하게 됐습니다. 이런 가운데 마침 제게 설교 부탁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뜻이구나’라는 확신을 하게 됐고 결국 수락했습니다.

질문 : 성령 10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의 자리에서 목사님이 선택한 설교 본문과 내용이 너무 무겁지 않았는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대답 : 설교를 준비하는 데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데교회를 주제로 한 내용은 설교 수락을 한 뒤 제일 처음 마음속에 들어온 본문이었습니다. 축제와 같은 집회에서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말씀 같았습니다. 강단 위에 오르는 순간까지 진통을 했습니다.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먼저 내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또한 성령이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여 제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절 하나하나를 놓고 신경을 썼습니다. 저로서는 하느라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하나님 손에 있는 것이겠지요.

질문 : 목사님은 설교에서 교회의 거룩함을 가장 강조하셨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이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닌데요.

대답 : 100년전 이 땅에 부흥이 올 때,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지금과 비교해보면 당시의 교회는 훨씬 거룩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선조들이 회개하고 거룩함을 위해 통곡했던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의 거룩함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 때와 비교해서 엄청난 성장을 했습니다.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교회를 바라보면 참으로 통탄스러운 점들이 많습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모두 눈 감고 기도할 때는 회개하지만, 눈을 뜨면 세상 유혹을 좇아 살며 자기 밥그릇을 위해 싸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한국교회를 보시고 원하시는 것은 교회성장이 아닙니다.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제가 사데교회를 본문으로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현재의 한국교회 상황을 보는 다양한 입장에서 상당히 비관적이라는 점에서 저도 옥한흠 목사님 쪽입니다. 한국교회의 상황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현상적이고 제도적인 교회가 심각하게 위축되고 심지어 붕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을 정도로 대단히 심각한 위기’라고 보입니다. 성서적인 신앙의 식견과 양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는 말과 ‘한계점에 섰다’는 표현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위기는 그 안에 기회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점이란 말은 뉘앙스가 다릅니다.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어떤 지점을 생각하게 하면서 절망적인 느낌을 갖게 합니다. 굳이 해석하지 않은 채로 말하자면 한국교회가 한계점에 서 있다는 점에서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는 아닙니다. 하나는 성서에 근거한 신학적 개념으로 볼 때,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를 전체적으로 볼 때는 한계점에 서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신학적인 인식입니다. 건물과 조직과 재정을 중심한 교회의 현상적인 제도는 신학적인 교회 개념에서 일부이지 다는 아닙니다. 현상적인 제도로서는 교회는 실패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령의 피조물인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땅의 교회가 당신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교회가 계속된다고 해도 어느 특정한 지역과 문화권 안의 교회는 역사 속에서 쇠퇴하고 사그라지기도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종종 있는 일입니다. 한국교회도 여기에서 특별한 예외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의 언어로 말하면 이른바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는 것’입니다.

건물, 직책, 재정 등을 중심한 제도의 측면에서는 한계점에 직면한 징후가 뚜렷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까지 건강하고 희망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입니다. 비제도적인 영역에서는 아직도 복음 안에 있는 생명의 흐름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의 비리와 타락에 대하여 비판하고 항거하는, ‘성경과 교회 역사에 근거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순교를 포함한 순례의 길을 묵묵히 걷는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대안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작은 교회 운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 한계점에 선 영역

넓은 의미로 정치란 말은 사람의 삶에서 필요하며 또 긍정적입니다. 사람이 함께 살면서 이루어지는 모든 영역의 모든 일을 정치로 정의하면 말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인식되는 정치는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이런 상황이 한국 교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인식되는 좁은 의미의 부정적인 정치를 이렇게 정의해 봅니다.

‘공적인 법치 조항에 근거하여 선거나 임명을 통해서 맡게 되는 어떤 직책들, 그리고 재정과 인사를 포함하여 그 직책들에 연관되는 권력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적이고 비법치적인 갈등과 다툼의 이해관계에 얽힌 사회현상.’

이런 의미의 정치에 연관된 영역에서 한국교회는 한계점에 서 있습니다. 적어도 세 영역에서 그렇다고 보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총회 임원선거 및 그에 따른 주도권 싸움과 연관된 각 교단의 상황과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과 한교연(한국교회연합)으로 얼른 인식되는 연합기관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장로 직을 중심한 권사와 안수집사 직분, 그러니까 이른바 ‘중직’에 연관된 개교회의 상황도 상당한 정도로 한계점에 서 있다고 보입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교단이나 연합기관의 비관적 상황과 같은 정도의 상태에 있는 교회도 상당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영역이 어느 정도 이하로 병들고 타락하면 그 갱신이나 개혁은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습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영역의 병리현상을 그냥 놔둘 수는 없습니다. 가능한 방법을 찾아내어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이런 영역에 지나치게 많이 쏟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2001년 6월에 교계신문에 ‘한목협, 이년 반 결산’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썼습니다(지형은, ‘인용구’, 말씀삶, 123-125). 여기에서 한목협에 대하여 말씀드린 제 생각은 지금의 한국교회 안에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얘기도 됩니다. 칼럼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한목협이 바라고 있는 갱신과 일치를 실질적으로 이루려면 좀 더 명확한 방향잡기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말하고 싶은 게 두 가지다.

하나는 목적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도전과 충격인가, 아니면 실질적인 개혁과 변화인가? 기구적으로 한국 기독교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식의 지평에 도전을 주는 데는 유용하지만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로는 비현실적이다. 교회 역사적으로 이런 발상이 현실화 된 경우가 없다.

실질적인 개혁과 변화가 목표라고 보고 두 번째 얘기를 한다면, 어떤 길을 통과해서 목적지에 갈 것인가를 전략적으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매우 복합한 현실 정치 구조 속에 존재하는 교회협과 규모의 논리에 근거를 둔 한기총에 신학적이며 지사적(志士的)인 순정이 통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하다. 아주 강력하지 않고는 운동이 정치를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목협이 걸어가야 할 바람직한 길은 젊은 세대에 투자하는 것이다. 현장 정치 구조에 대고 소리치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이런 분야에서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하라. 그러나 큰 틀에서는 방향을 돌려라. 20대 후반과 30대의 젊은이들, 신학생과 목회자와 평신도 꿈나무들에게 가라. 어차피 한목협이 ‘혁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언어 사용에서도 ‘개혁’이라는 단어가 과격하다고 보고 ‘갱신’이란 단어를 더 선호하는 편 아닌가 말이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젊은이들에게 에너지를 쏟는 것이 어쩌면 가장 확실한 투자다.”

3. 일치 운동과 연관하여

이제부터는 이번 전국수련회의 주제에 포함된 항목에 대하여 제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는 일치 운동에 대한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힘써온 일치는 대부분이 현실적인 제도와 연관된 부분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한국교회 전체를 사회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기구를 구성하자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급하게 필요하고 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현실적으로는 공적으로 내건 목표만큼 그리 큰 성과가 있는 일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기구의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선거’의 문제입니다. 모든 선거에는 돈이 들어갑니다. 교계 선거도 예외는 아닙니다. 선거와 돈 봉투, 아마도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뿌리까지 뽑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선거 횟수를 줄여야 합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기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선거 횟수를 줄이는 만큼 현실적인 부작용은 작아집니다.

구체적으로 봅시다. 각 교단의 임원 선거는 어차피 치러야 합니다. 그러면 이미 뽑힌 각 교단의 임원을 중심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구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교단장협의회’또는 ‘교단협의회’입니다. 이 기구를 구성할 때 선거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절한 방식을 만들어서 큰 교단과 중소 교단을 안배한 순환을 제도화시키는 것이 방법일 것입니다.

각 교단장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것 때문에 교단협의회는 현실적으로 강한 대표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중요한 현안이 하나 있습니다. 각 교단에서 현실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총회장을 지낸 사람들이 의미를 느끼고 처신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단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총회장을 지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치적 힘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 연합기관의 부정적인 문제는 상당 부분 이것과 연관돼 있습니다. 이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마당을 열어놓지 않으면 교단협의회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일치 운동과 연관하여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문제를 주목해야 합니다. 성서에 근거한 본질적인 일치의 문제입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은 교회의 일치가 근본적으로 이미 십자가 사건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교회라는 제도에서 분리와 분열이 있는 게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매달리느라 더 근원적인 영적인 일치를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이미 하나임을 인식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근원적인 성서적 일치가 현상적인 사회적 분열보다 우선한다는 믿음이 일치 운동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근원적인 일치가 신앙적 이론만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교파를 초월하고 사적이며 소집단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신앙 운동은 이런 근원적인 일치를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오늘날 시대정신의 흐름을 생각하면 이런 방향의 일치 운동이 필요하고 또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은 교회 운동이나 독립교회 현상은 이런 현상과 연관된 단면의 한 측면을 갖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4. 갱신 운동과 연관하여

갱신은 참으로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저는 목회 현장에서 늘 ‘교회 갱신’을 중심에 놓고 걸어왔습니다. 특히 집중적으로 그렇게 걸은 15년을 생각해 보면 갱신이라는 주제가 한 개교회의 사역 현장에서는 어려운 상황으로 작동할 때가 많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교회에나 부정적인 현상은 있게 마련인데, 목회자의 마음과 사상과 믿음에 갱신이 자리 잡고 있으면 설교를 비롯한 목회 행위에서 부정적 현상에 대한 비평이 있게 마련입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성도들이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으레 제도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집단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지금 목회하는 교회의 경우는 제 전임자 목사님이 만 37년을 목회하고 은퇴하셨는데, 그분의 목회는 ‘교회 성장’이 중심이었습니다. 부임한지 10년이 되는 제 목회 철학은 ‘교회 갱신’입니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작게는 차이점이 그리고 크게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어느 개 교회는 가족이니까, 그 안의 사역에서는 갱신보다는 보듬고 감싸는 사역을 한다고 해도 지방회나 연회나 노회 또는 총회 차원으로 가면 상황이 금방 달라집니다. 그리고 개 교회가 모인 이런 상회 구조에는 개 교회의 목사뿐 아니라 그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의 장로나 다른 직분자도 같이 활동합니다. 말하자면 어느 목회자 한 사람이 가진 갱신의 신학과 철학이 숨겨질 수 없는 산 위의 동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갱신은 근본적으로 보면 목회적인 지혜나 기술의 문제를 넘어선, 근원적인 문제라고 보입니다.

한국교회의 갱신에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를 하나 짚어보겠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하면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의 문제입니다. 신앙인의 외적인 종교 형식과 내면적인 신앙 인격의 분리 또는 분열 현상입니다. 한 마디로 이분법적 신앙인데 이 문제는 성경에서부터 나오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약해지고 병들고 타락할 때마다 늘 중심에 도사리고 있던 문제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이 미성숙의 문제를 이렇게 한 번 상황을 가정해서 표현해 봅니다.

“어느 한 그리스도인 정치인이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마가복음 11장을 읽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산헤드린 의원들의 모습이 곧 내 모습 아닌가!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사안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져서 행동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지금 논의되는 돈세탁방지법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

이분은 성경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습니다. 고민이 시작됩니다. 정치적 소신과 신앙적 확신대로 행동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이 나라의 정치 현실이니까요. 출근하는 차 안에서 이분은 결단합니다.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 정치 자금이 돈세탁방지법에 포함되는 것이 당신의 뜻인 것을 제가 인정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겠습니다. 그쪽으로 표를 던지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 나라의 정치 현장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게 신앙의 소신대로 밀고 나갈 힘을 주십시오.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주십시오!’”
(지형은, 위의 책, 114-115)

이 발제 처음에 인용한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문 표현을 빌리면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며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교회 안에서의 신앙 행위와 연관되는 신앙의 정체성이 일상의 삶이나 사회적인 영역에서 작동하는 신앙의 관계성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신학의 용어로 말하면 칭의와 중생이 성화나 성결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 개인의 내면 성찰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참으로 오래된 신앙훈련 방법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막교부들의 신앙에서 내면 성찰이 중심이었고 교회 역사에서 발생한 여러 수도원 운동에서 그 힘이 아름답고 깊었던 때에도 그랬습니다. 청교도 신앙의 핵심이 또 이것이고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영성 운동에서 거품을 빼고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바로 내면 성찰입니다.

한국교회의 갱신과 연관하여 좀 더 넓은 시야로 바라봐야 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연관된 특별계시에 강력합니다. 반면, 일반계시의 측면은 약합니다. 신앙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강력한 확신과 집중력이 있는 것은 장점이기는 하지만, 그 반면으로 나타나는 신앙의 세계 연관성의 약화 현상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회적 지도력에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별계시에 강력한 것은 한국교회의 ‘소수자 의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어느 종교나 사회 집단이든 자기 집단의 수가 그 사회 전체에서 소수일 때는 자기 응집력과 정체성이 강해야 생존합니다. 한국교회의 강한 신앙 정체성은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이런 상황과도 연관된다고 보입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처음 전파된 이래 한국교회의 저변에는 늘 소수자 의식이 깔려 있었습니다. 소수자 집단일 때는 그 사회 전체에 대하여 책임을 질 상황이 아닙니다. 자연히 사회나 국가 전체에 대한 시야를 갖기 힘듭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인의 수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서 상당한 수를 갖게 되면서도 한국교회는 소수자 의식을 버리지 못했다고 보입니다. 중요한 요인 하나가 개교회주의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전체 인구로는 다종교 상황인 이 사회에서 상당한 집단이 됐는데도 개별 교회로 보면 늘 소소수자 의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우리 사회 전체가 나가야 할 큰 시야를 갖지 못하는 데 이런 구조적인 약점이 깔려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중장기 과제, 동아시아와 태평양 시대에 대한 신앙적 인신과 세계 경제 시스템에 대한 기독교적인 평가, 지구행성의 기후와 환경문제를 중심한 기아와 전쟁 문제 …… 오늘날의 교회가 마땅히 관심을 갖고 살림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상당히 제한된 영역에 머물러 있고 이런 문제들에 대한 전문성에서 상당히 순진하고 때로는 비상식적인 인식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심각하고 또 당혹스러운 것은 목회자나 평신도 지도자가 이런 인식에 머무는 경우입니다.

한국교회는 일반계시 또는 자연계시적 측면에 연관된 삶의 영역에 대하여 분명한 성경적 신학적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 주제로서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는 인륜적 인도주의, 둘째는 법치적 민주주의, 셋째는 상생의 시장경제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계시적 진리가 구체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구체적이 모습은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크게는 인도주의인데 그 중심이 인륜(人倫)이어야 합니다. 인륜은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사람이 마땅히 존재해야 할 모습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신 뜻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입니다. 오늘날의 민주정치의 현실이 조악하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민주주의 말고 다른 그 어떤 정치체제가 더 성경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법치입니다.

이 문제와 연관하여 기독교인이 사회 법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을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사회 법정에 가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제한적으로나마 사회 법정의 기능을 인정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와 신학에서 가장 정통적인 견해는 하나님이 사회의 모든 것까지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그 사회의 일반법이 성서적이며 인륜적으로 발전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법의 사회적 집행이 공정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이 책망할 때마다 등장하는 주제가 사회적으로 법이 불공정하게 집행되는 상황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경제 문제와 연관해서는 시장경제인데, 중요한 것은 상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반세기 정도 미국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진행돼 온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은 기독교적 시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명백합니다.

한국교회는 이 세 가지에 대한 명확한 성서적 신학적 근거를 구축하면서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지구촌에서 이 가치를 주도해 가야 한다고 봅니다.

5. 사회봉사 운동과 연관하여

디아코니아 곧 봉사라는 주제에서 현재 한국교회에 시급한 현안은 사회봉사입니다. 사회봉사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신학적으로 깊은 인식이 필요합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이어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17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에서 이 흐름의 창시자라 불리는 필립 야콥 스페너는 삼백여 년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을 더 풍성하게 우리 속에 있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 스스로에게는 원래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만일 우리에게 무엇인가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러한 역사를 위한 강력한 수단입니다.” (스페너, ‘경건한 요청’, 1675).

“목회자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와 믿음을 심령에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참된 것이며 그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가진 보배는 지나가 버릴 이 세상의 보배 곧 세상이 가지고 있고 우리 육체적 본성이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영원한 심령의 보배입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여러 가지 가운데서 이런 보배를 알게 되며 차지하게 됩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덕은 아닙니다. 위와 같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나중에 그 믿음의 뿌리에서부터 강제되지 않는 열매가 맺히는데 이것이 참된 선행입니다.” (스페너, ‘마지막 신학 묵상’, 1711)

외면적인 사회적 봉사는 내면적인 믿음의 뿌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적으로는 존재가 행위보다 먼저라는 말입니다. 먼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 상황에서 보수든 진보든 전체적으로 사회봉사 곧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이 필요하다는 것에 이견이 없습니다.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윤리를 진지하게 인식하지 않고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없다는 절박한 인식이 뚜렷해졌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교회 침체와 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부흥을 경험하고 사회적 리더십을 가지려면 사회윤리에 대한 각성과 인식의 전환, 총체적 전략과 종합적 접근, 현장의 실천과 이를 위한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는 데 교계 리더들 사이에 전반적인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었습니다.

사회윤리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오직 믿음으로’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그룹의 신앙 일변도에 대한 자성 또는 비판이 또 일반적인 공감을 얻은 듯합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기독교(개신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강조하다가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행동의 문제를 소홀히 했다는 교회사적 지적은 이런 논의에서 으레 따라붙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와 연관하여 믿음과 기독교적 실천의 관계에 대하여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신학적 표현으로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입니다. 기독교적 실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있듯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감격에서 기독교적인 사랑 실천의 동력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행동의 동력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회적 실천과 윤리적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나오는 원천인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좋은데 윤리적 삶이 나쁘다’는 논리는 신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서 믿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믿음은 선행을 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묻기 전부터 선행을 해왔고 또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1520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루터는 믿음이 그 안에 윤리적 행동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도 같은 것을 말씀하신다. 곧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마12:33). 이것은 마치 ‘좋은 열매를 가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나무를 심는 것으로 시작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공적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그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신앙으로 시작하게 하라. 그것은 신앙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며, 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선행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선을 다하여 이것을 소중히 여기며 가르친다. 우리가 업적을 정죄하는 것은 그 업적 자체 때문이 아니고 거기에 덧붙여진 이러한 사악한 부가물과 이것을 통하여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외람된 생각 때문이다.” (지원용역, 종교개혁3대논문, 288-290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로마가톨릭과 치열한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믿음과 상관없는 선행이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반박했습니다. 루터의 삶의 자리를 감안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읽는다면 루터가 그리스도인 선행의 중요성을 몰랐다든지 과소평가했다든지 하는 것은 바른 평가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14장에서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제목으로 믿음과 선행의 관계에 대해 논하면서,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선행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계속해서 15장, 16장에 칼빈의 논의가 이어지는데 16장 1절에서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이렇게 단언합니다.

“그들(교황주의자)은 이신칭의를 통해서 선행이 폐기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이 선행에 대해서 얼마나 열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 추악한 생활로 온 세계를 제 마음대로 더럽히면서도 이렇게 떠드는 그들을 우선은 내버려두겠다. 믿음을 찬양하면 행위의 가치가 낮아진다고 하면서 그들은 이 일을 슬퍼하는 체한다. 만일 행위를 장려하려 강화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곧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칭의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곧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분이요 우리의 믿음은 그로부터 힘을 얻는다. …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만드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와 거룩함이 문제가 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더 자세히 말하려 한다. 우리는 둘을 구별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두 가지를 다 포함하시며, 그 둘은 서로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둘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 (기독교강요 중권, 생명의말씀사, 338-339)

성경에 근거한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루터와 칼빈은 얼마나 정확하게 같은 이해를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이 이미 그 안에 선행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17-1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에서도 뚜렷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스페너는 당시 교회가 타락한 원인이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Der wahre und lebendige Glaube)이 없기 때문이며 갱신과 부흥을 위해서는 이 믿음이 회복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페너가 말하는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은 교리와 삶, 말씀과 삶, 믿음과 실천이 한데 어우러진 것을 뜻합니다. 복음적인 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강조함으로써 스페너는 일반적인 선행과 기독교적인 선행을 구분합니다. 일반적인 선행을 인정하고 격려하지만 중요한 것은 복음에서 나오는 믿음의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침체에서 벗어나 갱신과 부흥을 경험하려면 ‘윤리적인 삶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사도행전 6장 1-7절에서 보는 것처럼 ‘성서적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 오늘날 삶의 현장과 역사적 흐름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바로 그 믿음이 약하다고 지적해야 한다고 봅니다.

영성과 사회성, 믿음의 확신과 윤리적 삶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교회의 자기 정체성’이 영성 또는 믿음의 확신에 연관된 문제라면 ‘교회의 타자 연관성’은 사회성 또는 윤리적 삶의 문제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습니다. 교회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타자 연관성을 실천합니다.

교회의 갱신과 개혁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이 필요합니다. 영성이라는 개인의 심령 변화와 사회성이라는 사회 구조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한 가지 근원에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확신과 윤리적 삶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에서 통전적인 구조로 작동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적 동력이 작동할 때는 늘 그랬습니다.

6. 그리고 ‘신학의 문제’

통일 문제에 대하여는 깊은 숙고가 부족해서 그냥 넘어갑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신학의 문제’를 언급하려 합니다. 이 마지막 주제에 따옴표를 붙인 까닭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신학은 신학의 본디 기능에 대한 것입니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현재 한국 교계 안에 있는 각 신학교육 기관들의 현실적인 이런 저런 상황들 얘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학을 일반적으로 이렇게 정의해 봅니다.

‘기독교 신앙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중심으로 피조세계 전체의 마땅한 실존에 대한 성서적 논리와 그 실천을 위한 이론.’

그렇다면 (신학교육 기관의 모든 현실까지 포함해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의 실천과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보면 신학이 바르지 않다는 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의 문제’가 됩니다.

갱신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언급한 이분법적 신앙의 문제를 지금 이 항목의 핵심적인 소재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2013년 11월 22일에 열린 한목협 24차 열린대화마당에서 저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갈등과 해결 - 한국 사회와 교회의 갈등을 보는 기독교적 한 관점’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발제의 마지막 덩어리에서 저는 한국교회의 내부적 갈등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외부적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서 가설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핵심은 ‘이분법적 신학과 신앙의 문제’입니다.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의 역사적 흐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특히 지난 40-50년의 역사 흐름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것은 지금 우리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느냐에 연관돼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의 일반 사회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갈등이 있다. 교회 안의 갈등에서 상당 부분은 사회적 갈등의 구조와 거의 같다고 보인다.

한국교회의 최근 역사를 말하면서 별 이견 없이 말하는 관점이 있다. 70년대가 한국교회 부흥의 초석이며 80년대에 한창 부흥을 누리다가 90년대 중반에 꺾이기 시작해서 현재는 여러 가지 점에서 하락세라는 것이다. 이 논지에서 특히 70년대를 살펴봐야 한다.

1973년의 빌리그래함전도대회, 74년의 엑스플로대회 등을 비롯한 대형전도 집회가 5·16광장(현재의 여의도공원)에서 열렸다. 100만 명에서 200만 명까지 모인 이 집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신앙을 가졌고, 선교사나 목회자로 일생을 헌신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한국교회의 흐름은 70년대의 헌신과 부흥 덕이었다고들 본다. 여기에 근거해서 이런 논리가 일반적이다.

(1) 70년대의 헌신과 신앙적 열정은 좋았다.
(2) 현재 한국교회의 여러 문제점들은 그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지가 맞는가를 물어야 한다. 문제제기는 이런 것이다.

(1) 70년대에 신앙을 가졌고, 그때 헌신했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한국교회의 리더가 되었고 그들이 지금 50대부터 80대까지 아직도 한국교회에 있다. 이른바 70년대의 헌신자들이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천 년대로 넘어와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대형교회를 비롯한 중심적인 목회 현장과 선교와 사회적 활동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2) 그런데 현재의 한국교회는 윤리 도적적인 약점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신앙 자체의 명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 그 앞에서 리더십을 갖고 끌어가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언감생심으로 보인다.
(3) 그렇다면,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은 결국 70년대에 헌신한 리더들의 문제 아닌가? 그리고 더 깊이 들여다보면 70년대에 한국교회에 강렬하게 확장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형태에 어떤 약점이 있는 게 아닌가?

이 가설을 한 번 이런 식으로 표현해 보자.

어느 공직자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공직자들이 일주일 정도 공무로 출장 갈 때, 사실상의 업무 내용은 2-3일이면 끝나는 정도고 나머지 2-3일은 출장지에서 놀거나 아니면 집에 돌아와 며칠을 쉬다가 출근한다. 물론 출장 수당은 일주일 치를 다 받는다. 이런 것이 공직 사회에서 오래된 관행이고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대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공직 사회에서 오래된 이 관행은 하나님 앞에서 본다면 정직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보실까? 신앙인으로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출장 문제와 연관해서는 어떤 것일까 ….’

이 사람이 그 뒤로는 2-3에 공무를 마치고 다시 직장에 출근하면서 일했다. 어떤 파장이 있었을까? 동료들에게 질타를 받고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는다’고 말이다. 만일 이 사람이 국장급 정도의 직위에 있다면 적어도 자신이 권한을 갖고 있는 부서 내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현실적인 변화가 있기도 할 것이다.

70년대 한국교회가 받은 신앙은 어떤 점에서 ‘이분법적인 신앙과 신학 형태’가 있는 것 아닌가? 교회 안에서 받은 직분은 하나님의 일이지만 사회적인 활동이나 직장에서 하는 일은 세상의 일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한창 양적으로 부흥할 때 한국교회의 리더들은 사회적인 공정함과 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아닌가? 물론, 한국교회의 진보적인 그룹에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헌신한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를 놓고 하는 말이다.

더구나 국민의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이슈가 뒤로 밀리면서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법치적 민주주의, 상생의 시장경제, 인도적 인륜도덕에서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근거한 바른 방향을 이끌어갈 전망이 부족했던 것 아닌가?

오늘 발제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갈등’에 대한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나 이분법적 신앙은 갈등의 원인을 구조적으로 그 안에 품고 있게 마련이다. 특히 신앙과 신학에서 이분법적인 입장은 그 집단 자체를 확장시키고 방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사회 전체를 이끌고 가는 통합적 리더십은 발휘하지 못한다. 신앙의 위기 상황에서 순교적 신앙은 가능하지만, 일반 사회 전체에 하나님의 큰 섭리를 전하는 데는 약점을 가진다.
7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한국교회 역사와 연관된 이 가설의 구조는 신학적으로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신앙적 정체성과 사회적 연관성 사이의 문제다. 신앙과 행위 또는 믿음과 윤리의 문제다. 기독교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어온 문제다.

이 발제 초두에서 말한 본질적인 의미의 신학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교회 안에 있는 갈등의 원인은 어쩌면 상당부분 신학적 입장과 태도에서 발생한다고도 보인다. 본질적인 의미의 신학과 진실하고 헌신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한국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란 주제가 논의된 까닭이 이런 것이다.

다시 한 번 바라기는 본 발제의 세 번째 덩어리의 한 가설이 한국교회 현장과 신학계에서 본격적으로 토의되었으면 한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병리 현상들, 그래서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결국 한계점에 서게 만든 문제들의 근원에는 성서에 근거한 바른 신학적 인식의 결핍이 있다고 보입니다. 신학이란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계시적 진리인 성경에 근거하여 늘 새롭게 복음을 해석하는 작업이라고 본다면, 한국교회는 신학적 작업의 중요성을 소홀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삶과 세계를 보는 눈 곧 시야와 지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적 지평과 역사적 지평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타락할 때마다 신앙의 선배들이 외쳤던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근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체적으로는 성서와 교회 역사의 교훈 특히 초대교회의 삶이었습니다.

7. 다시 상황 인식

기독교라는 종교 현상이 한국이라는 한 사회에서 어떻게 인식되느냐 하는 문제는 아주 현실적인 사회적 구조와 연관돼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사회 인식은 교회의 내적인 건강 상태가 기본이겠지만,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사안에서 결정되기 마련입니다. 교회의 내적인 상황이 부정적으로 기울어가도 처음에는 사회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내적인 병리 현상이 사회적인 사건으로 터질 때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사회 인식이 형성되고 증폭됩니다.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사회적 사건은 1999년의 옷로비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회청문회까지 열리게 만든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워낙 첨예했고 세간의 관심이 온통 집중된 상태에서 모든 언론 매체를 통하여 현장 중계까지 했는데, 거기 연루된 양쪽 편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더구나 전국으로 현장 중계되는 한가운데서 한쪽에서는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한다’고 했고 반대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2014년, 한국교회는 또 한 번 세간의 관심이 무섭게 집중된 사건 하나에 휘말렸습니다. ‘문창극 사건’입니다. 교회의 장로로서 교회 안에서 했던 강연이 사회 정치적으로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양쪽 집단의 분쟁에서 먹잇감 또는 소재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한국교회는 더 힘든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기간, 한 10여 년 정도 말씀과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나며 아무 말 없이 내면을 성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하나 됨을 소중하게 누리면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제 길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발등에 떨어진 현안 문제야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받은 소명대로 묵묵히 감당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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