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며 회개하고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설교하였다(눅 3:3-14). 예수님께서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치며 당시 유대교지도자들의 죄상을 일일이 지적하시며 무섭게 책망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다(마 23:1-36).
만약 두 분께서 한국교회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필자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그리고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통분과 눈물을 금할 수 없다.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의 죄상을 지적하고 있는 마 23장의 말씀을 읽으면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을 금할 수가 없다. 여기 지적되고 있는 죄에서 과연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1. 교인들에게 무거운 짐을 다 지우고 자신은 오직 영광과 명예를 얻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목회자들.(마 23:4)
2. 경건한 체하며 외식의 가운을 입고 사역하는 목회자들.(5)
3. 어딜 가나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목회자들.(6-12)
4. 하나님나라의 문턱에 걸치고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목회자들.(13)
5.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회당에 모아서 저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목회자들.(15)
6. 황금 곧 돈에다 최고의 가치로 두고 교인들의 헌금을 받아내는데 전문가가 된 목회자들.(16-22)
7. 십일조를 강조하고 이것은 열심히 하면서도 이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린 목회자들.(23,24)
8. 겉은 아름답게 치장하고 거룩한 체하면서도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목회자들.(25,26)
9. 선조들의 아름다운 신앙을 칭송하고 기념하면서도 교회에서 바른 말을 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축출하는 목회자들.(29-36)

이와 같은 죄악에서 자신은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될까?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선포하셨다. 그래서 당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런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만약 오늘 어느 젊은이가 목회자들 앞에서 이런 설교를 했다면 과연 그가 교회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교회의 타락은 전적으로 교회지도자들의 책임이다. 교인들을 탓할 수도 시대를 탓할 수도 없다. 우리 목회자들이 한국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어느 집사는 필자에게 “예수를 진짜로 믿는 목사”를 찾아다니다가 지쳐서 이제는 자신도 “가나안 신자”가 돼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자기 눈에는 목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목회자들이 “돈, 이성, 명예”라는 - 어쩌면 가장 일반적인 이런 유혹도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넘어지고 있다. 아니 유혹에 넘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것들을 추구하며 거기에 목숨(soul)을 거는 목회자들까지 있을 정도다.

돈 문제로 교회를 시험들게 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이미 돈 문제가 곪아터져 온 세상에 다 알려진 목회자들 말고도 돈 문제 하나에도 교인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왜 행정과 재정을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하지 못할까? 왜 공개하기를 무서워하는가? 왜 목사들이 교회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까? 왜 목숨 바쳐 주의 일하겠다고 나선 목회자들이 투명치 못한 얼마의 돈 때문에 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떠나야 하는 것일까?

담임목사직 세습은 세속적 욕망으로 일어난 바벨탑운동의 연장이다. 자신이 이룩한 성공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욕심이다. 하지만 하나님나라는 그렇지 않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다. 목회자나 교회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이 약해지면 이런 세상적인 행위도 큰 부담 없이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각 시도의 교회연합회의 임원들이 성시화운동이나 복음화를 위한 연합집회 등을 가진 후에 지역교회들의 후원금과 집회 현장에서 교인들이 헌금한 돈으로 해외여행을 가고, 심지어 남은 돈을 수고비조로 서로 나누어 갖는다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목회자들이 이런 수준에까지 추락해버린 것이다. 불신자들이라도 만약 어떤 행사를 하고 남은 돈으로 이렇게 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사직당국에 고발을 당했을 것이다.

성적 스캔들은 사건 자체에 비해 그 여파가 엄청나다. 드러난 한두 목회자들의 스캔들이 목회자들 전체에 대한 신뢰도를 뒤흔들고 있다. 목회자들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일반적인 나쁜 현상들이 있는데, 목회를 잘 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이성문제에 실수하는 경향이 높고 목회가 어려운 목회자들은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둘 다 복음전도의 문을 막는 심각한 장애들이다.

“명예”에 대한 욕망은 목회자들을 망치는 최고의 유혹인 것 같다. 높아지고 유명해지려는 마음 때문에 자기인생의 마지막을 추하게 만들고, 복음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이 많다. 평생을 통해 이룬 교회부흥의 업적을 보다 몇 배나 더 손상시키고 무대를 내려가는 목회자들이 더러 있다. 지금도 총회장이나 연합기관의 대표회장이나 혹은 대학의 총장이 되겠다고 목숨이라도 건 듯 덤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 모두에게 이런 죄와 죄의 욕망들 -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 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필자도 지금 남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숨겨진 내면을 고발하고 있다.

큰 교회 만들어 보겠다고 목숨 건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언필칭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전도”라고 내세우지만 사실은 “사람모으기 장사”이며 “판촉”이라고 교회 안팍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장사”이기에 사람들을 많이 데려온 교인들에게는 파격적인 상을 주며, 부교역자들에게는 공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주어 서로 경쟁하며 싸우게 하는 것이다. 목회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하여 교회부흥운동은 바벨탑운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사람들을 많이 모아 교회당을 크게 짓고 유명해지자는 운동이다. 필자는 “ㅊ” 교회의 교인으로부터 “내가 보기엔 우리 목사님은 유명해지고 싶어 미친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교회당을 크게 지어 큰 교회 만들고 유명해지자는 유혹에 빠져 목회자의 본분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무리해서 큰 교회당을 짓고 부도난 교회들이 300여 교회가 된다고 모 일간 신문이 보도한 적이 있다.

회개해야 산다. 우리 목회자들이 통회자복하면 주께서 한국교회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필자는 5월25일 부산에서 있었던 “5·25 회개의 날, 해운대성령대집회”에서 큰 희망을 보았다. 그야말로 순수한 회개집회였다. 그리고 대회를 준비하고 이끈 사람들이 전혀 전면에 나타나지 않은 순수한 교회연합집회였다. 특별한 조직도 “대회장”도 없었고, 준비위원장이 있었지만 사회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인사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진행된 집회였다. 그러나 비오는 가운데도 10만 명이 모여 눈물로 회개하였다. 교인들의 눈에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렸고 목회자들은 더 크게 울었다고 들었다.

우리 한목협에서도 이런 회개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지금은 부흥과 성장을 위해 기도할 때가 아니라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이다. 전도를 할 때가 아니라 윤리운동부터 먼저 해야 할 때이다. 목회보다 목회자 되는 일을 먼저 그리고 다시 먼저 시작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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