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9/20) 제85회 총회 수요예배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7장 25-34절

우리 총대들은 대부분 50, 60대에 해당됩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했던 우리들이 지금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넘어가는 틈바구니에 끼인 어정쩡한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보사회에 적응할 능력이 부족해 남모르는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펴 놓은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있던 '시집가지 아니한 자'와 '처녀'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두 그룹의 여성들의 결혼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환란이 임박하니 결혼을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눈을 뜹시다

저는 이 말씀 안에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우리 모두가 변화를 예측하는 영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래지 않아 환란이 임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예측대로 얼마 후 로마 제국 전역에서 파상적으로 시작된 환란은 놀랍게도 3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미래를 예언하는 특별한 계시나 은사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갈 것인가를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는 영안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영적으로 세대를 분별하는 영안은 지도자의 자질에 있어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난 변화가 생활 전반에 불어 닥치고 있습니다. 삶의 본질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치관, 여성의 지위, 결혼관, 교육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통과 풍속들이 골동품처럼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의식이 모르는 사이에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를 더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변화의 속도가 갈수록 더 빨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생존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말은 이미 상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기업에만 통하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에도 그대로 통할 수 있습니다. 변화에 둔감하거나 적절한 대응을 게을리 하면 교회의 생존자체가 위협당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변화를 거부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1982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 언론인협회 세미나의 슬로건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망하고 싶거든 변화를 거부하라는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환란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무서운 영적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통이니 보수니 하는 깃발을 흔들면서 내일의 변화에 둔감한 사람은 오늘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목표를 수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처녀들에게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환란이 오면 결혼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첨가해서 이런 말씀까지 하고 있습니다.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처럼 해라.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마음을 비우고 생활을 단순화시키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정보사회다 지구촌이다 하며 어떤 모습으로 그 옷을 갈아입어도 우리의 이 목표만은 절대로 수정되면 안 될 것입니다.

셋째는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환란의 대응책은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과 궁극적인 목표를 수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옷을 갈아입어야 되면 갈아입어야 합니다. 말을 갈아타야 하면 갈아타야 합니다. 숨 가쁘게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필요하다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선택의지가 필요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변화를 거부하는 완강한 세력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떠납니다. 부흥이 안 됩니다. 씨름하지 않아도 될 문제를 가지고 긴장하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변화를 직시합시다

21기에 한국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몇 가지 선택이 있는데 그 가운데 세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먼저 열린 리더십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위주의는 닫힌 리더십의 전형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어려워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있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권위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권위는 섬김의 권위이지 다스림의 권위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형태의 다스림이든 모두가 섬김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건강하지 못한 권위주의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사회전반에서 권위주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건강한 리더십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열린 리더십입니다. 평신도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지도자라면 그의 리더십은 닫혀 있습니다. 평신도와 '함께'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지도자라면 그의 리더십은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열린 리더십을 추구하는 지도자는 제자훈련을 통해 평신도가 지닌 잠재력을 발굴하여 최대한 활용하는데 역점을 두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의 체질이 바뀝니다. 목사, 장로, 집사가 바뀌면 교회 체질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 체질이 건강해지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미국의 리차즈라고 하는 목사님이 미국 목사 5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21세기에 교회가 살아남고 제 구실을 하기 위해 목회자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거짓말처럼 한사람 예외 없이 대답이 똑같았다고 합니다. 평신도를 발굴해서 훈련시켜 사역의 동역자로 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열린 리더십입니다.

다음은 예배문화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배문화는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서 함께 변한다는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은 그 자체가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100년 전에 사역했던 알렌 선교사가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습니다. 한국말을 이제 갓 배운 그가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을 안내하면서 "숫놈들은 저쪽으로 가시고 암놈들은 이쪽으로 오시오" 라고 했답니다. 용어를 잘못 선택해서 우리를 웃게 만들지만 그 당시는 남녀가 함께 앉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의 예배 문화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그것이 경건한 예배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교회가 이것을 강요하면 새로운 세대를 다 잃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의자만으로 부족해서 바닥과 등받이에 쿠션을 입힌 고급 의자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 문화 중에서 가장 예민한 것이 찬양인 것 같습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성곡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것이 성곡이고, 어느 것이 세상곡이냐 구별하기는 어렵습니다. 19세기 곡은 거룩하여 대예배에서 부를 수 있고 20세기 곡은 덜 거룩해서 기도모임에서나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넌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노래는 시대적 정서를 표현합니다. 정서의 표현은 시대마다 바뀝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유행을 타는 의상과 비슷합니다. 지금은 일세기 전에 비해 정서의 표현과 반응이 너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내 주를 가까이'란 찬송곡을 가지고 젊은이들을 끌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우리들 대부분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이상한 찬양만 골라 가면서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는 것을 자주 봅니다.

얼마 전에 여러 학교의 신학생들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매우 좋은 교회에서 찬양 인도팀이 와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신학생들과 함께 서태지 그룹에서 부르는 랩과 거의 유사한 찬양곡을 열정을 다해 부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이런 곡을 부르지 않으면 감정표현이 어려운 시대가 올지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하려면 그들에게 유효한 정서적 접촉점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문화 가운데 찬양곡은 앞으로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될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끝으로 우리가 선택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갱신입니다. 장로교의 원리, 정신, 신앙 고백은 모두가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담고 운영하는 제도가, 이제는 그 순기능의 힘은 잃어 가고 대신 역기능이 위험 수위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제도이든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장로교 제도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적절히 손질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 이 제도에서 노출되는 여러 가지 약점과 헛점을 이용한 역기능이 교단의 양심을 멍들게 하고 더럽히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의 도덕성이 보통 실추된 것이 아닙니다, 마비가 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성총회라고 하는 모임에서 돈봉투와 거짓말이 난무하고 있다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교단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환자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의사들은 파업해서 나타나지 않고 한두 명의 간호사만 지키고 있는 중환자실의 환자 말입니다. 얼마나 불안합니까? 만일 우리가 섬기는 지역교회에서 장로 권사 집사 선거를 하면서 후보자들이 돈봉투를 이리 저리 건네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당선이 되는 기막힌 풍토가 만연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총회는 교회가 아닌가요? 제가 총회 와서 개인적으로 만나면 모두가 이래서는 안 된다며 탄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지능적이고 음성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말까지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21세기의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교단과 교회를 지킬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총대의 한 사람으로 지금 저는 칼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가지고 이 말씀을 드립니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외쳐도 안 들어요. 그러지 말자고 아무리 유인물을 돌려도 통하지를 않습니다.

저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잘못 하는데도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합니다. 저는 지금도 촛대를 옮기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확신합니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우리 모두 잘못 될 수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음도 할 수 있고요, 죽이고 싶도록 무서운 증오를 가슴 속에 묻어 두고 거룩하게 설교할 수 있고요, 돈을 사랑해서 탐욕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죄값을 따라 갚지 아니하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용하심을 비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새로운 총회장과 부총회장이 선출됐습니다. 또 새 임원들이 모두 뽑혔습니다. 나름대로 제가 존경하는 분들입니다. 기대를 걸어 봅니다. 우리 교단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 모두 변화를 예견하는 영안을 날마다 깨끗이 닦읍시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우리의 목적을 바꾸지 맙시다. 때로는 결혼을 포기할 정도의 값비싼 대가를 치루는 일도 주저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래서 21세기에도 크게 쓰임 받는 우리 교단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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