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목협 제26차 열린대화마당

오늘날 한국교회는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 위기의 본질은 사회로부터의 단절과 신뢰의 상실이 가장 치명적이라는 발제자의 지적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필요와 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필요를 채우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교회 쇄신의 1차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란 제안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런 방향제시에 걸맞는 구체적이고 뚜렷한 대안은 중지를 모아 더 논의해봐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발제자들의 지적대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는 △ 교회가 물질적 성장주의에 빠져 공동체적 삶에 무관심한 왜곡된 신앙을 조장한데다 △ 교회지도자들의 끝없는 교권 다툼과 갈등, 비리로 신뢰가 추락했으며 △ 교회가 시대변화의 징후를 읽어내지 못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교회는 사회성(역사성), 영성, 가난성 3가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1. 사회성(역사성) 회복

1) ‘개신교 공동체’ 회복과 ‘가치 선교’

그동안 개신교회는 ‘개인-하나님’의 종적 관계에 집중하고 ‘개인-이웃’의 횡적관계는 소홀히 했으며, 그 결과 교인들이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적 삶에 무관심하게 됐다. 바꿔 말하면, 사회생활에서 왕따 당하는 신앙인들을 많이 양산해낸 것이다. 이젠 개신교가 사회성(세상)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도 교회가 아니라 사회의 관점에서 교회의 역할과 기능을 숙고할 때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과 과제를 개신교회가 우선 파악해 실천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이 부분에서는 이웃종교인 가톨릭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가톨릭은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2000년대 이후 생명운동 평화운동 ‘내탓이오’ 운동 등 그때그때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캠페인을 펼쳐왔다. 그리고 이런 캠페인을 가톨릭용어가 아닌 일반국민 누구나 알기 쉬운 사회적 용어로 바꾸어 가톨릭교인만이 아닌 일반국민들도 널리 동참할 수 있는 폭넓은 캠페인으로 전개해왔다. 그 과정에서 일반국민들이 생명 평화 등 가톨릭의 가치를 깨닫도록 해 가톨릭 전파에 활용하는 고도의 선교정책을 폈다. 이 시기에 개신교는 길거리와 전철 안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고함만 질러댔다. 지식인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이를 외면하고 고상하고 가치 있어 보이는 가톨릭으로 넘어간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가톨릭은 이런 ‘가톨릭 가치 확산’을 사회운동으로 포장한 캠페인으로 성장과 대 사회 영향력 제고에 활용해왔다.

개신교가 이런 가톨릭의 ‘가치 선교’를 빌려온다면 오늘날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와 과제는 무엇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개신교의 가치는 어떤 것이 있으며, 이를 사회적 언어로 풀어내 일반국민들도 동참하는 캠페인으로 전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한 별도의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

돌이켜 보면, 개신교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 의료 사회복지 등 공공의 영역에서 많은 일을 해왔고, 소외계층을 위해서도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개신교가 우리 사회에서 역할한 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발제자가 지적했듯이, 그 이유는 개신교가 교단과 교회들로 뿔뿔이 흩어져서 산발적으로 일을 해왔고, 그로 인해 힘이 결집되지 못해 대 사회.언론 관계에서 영향력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는 ‘개신교 공동체’ 회복을 통한 단합과 결집이 필요하다. 개별 교회가 아니라 교회 간 연대와 교단 간 연합을 통해 ‘말씀공동체’ ‘복음공동체’란 이름으로 ‘개신교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사회에서는 어느 교회냐가 아니라 개신교라는 큰 범주의 카테고리로 우리를 묶어서 분류하고 판단하는데도, 우리는 이런 현실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교인이 사회와 만나는 접점은 개별교회가 아니라 개신교라는 범주인 것이다. 목회자나 교인 모두 ‘00교회 목회자, 교인’이란 인식보다는 ‘개신교 목회자, 교인’이란 자각을 우선할 때 개신교가 사회성을 회복하고 ‘가치 선교’를 통해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란 선교적 비전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의 카테고리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혼자, 개별교회만 잘 하면 된다고 판단할 때 그 교인이나 교회는 결국 자신이 서 있는 근거지가 무너져 내려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개신교계의 일치운동이나 교회연합운동은 이 같은 ‘개신교 공동체’를 회복할 때 성공할 수 있다. 교회나 교단보다는 복음을 우선할 때 ‘개신교 공동체’는 회복될 수 있다. ‘개신교 공동체’의 대표기구로서 교회연합기구가 새로 발족해야 하고, 이 연합기구는 각자 독립성을 갖는 중견 교단들 간의 느슨한 연대형태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연합기구 아래에는 강력한 집행기구와 싱크탱크가 설치되어야 한다. 이러한 제도가 마련된다면 교회연합기구의 수장은 한국 사회와 교회가 두루 인정하고 존경하는 상징적 인물이 맡아 한국 개신교계는 물론 한국 사회를 이끄는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또 집행기구와 싱크탱크에는 뛰어난 평신도 전문가들이 포진해 개신교의 가치를 다양한 사회적 언어로 포장한 ‘가치 선교’를 수행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 개신교의 비중과 영향력을 제고해 나가야 할 것이다.

2) ‘사회선교사’ 제도 도입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인적 물적 자산이 대형교회를 비롯한 일부 교회 내부에 너무 집중돼 있기 때문에 생긴 병변이다. 인체로 보면 신진대사가 막혀 소화불량과 변비가 생긴 양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사람과 돈이 많이 몰리다보니 이를 둘러싸고 갈등과 분란이 끊이지 않고, 툭하면 화려한 큰 건물을 짓는다. 이제는 교회로 들어온 인적 물적 자산을 교회 밖으로 내보내고 나눠주어야 한다. 교회는 각 분야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전문선교단체들에 인적 물적 자원을 내주고 그들을 후원함으로써 선교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교회-사회’ 관계로는 교회가 사회를 알고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사회를 잘 알고 선교활동을 잘 하고 있는 전문선교단체를 가운데에 넣어 ‘교회-선교단체-사회’의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교회가 직접 대 사회 선교를 하기가 어렵고 전문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해당분야의 전문성과 전문인력을 갖추고 있는 선교단체를 통해 사회 참여와 발언을 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교회는 오히려 신앙이 좋은 교인들을 잘 양육하고 길러 이들을 선교단체에 파견해 일을 돕도록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교회가 해외에만 선교사를 보낼 게 아니라 국내 선교단체들에도 보내 사회문제들을 해결토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선교사’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의 그늘진 곳에 교회가 사회선교사를 파견해 개별적으로 사명을 감당토록 함으로써 개신교의 가치를 실현하고 사회문제도 해결해나가자는 것이다. 이 때 각 교회에서는 정년퇴임하거나 조기 은퇴해 집에서 쉬고 있는 베이비부머 등 5060 신중년 교인들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교회가 선교단체를 후원하거나 사회선교사를 파견할 때 북한 교육 환경 문화 언론출판 등 전문분야를 두어 집중 지원하도록 함으로써 인적 물적 자원이 한 곳에 몰리고 다른 곳에는 씨가 마르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개신교연합기구가 ‘가치 선교’를 실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사회선교사’ 제도의 도입과 교회간의 역할분담 및 조정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3) 언론선교기구 활성화

개신교가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교회연합기구를 설치할 때 우선적으로 함께 운영해야할 기구가 언론과의 창구역할을 하는 언론선교기구이다. 언론을 통한 사회와의 올바른 관계 설정과 소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교단별로 개교회별로 뿔뿔이 흩어져 대 사회적 영향력이 감퇴한 결과 교세 축소로 이어진 반면, 가톨릭 불교(조계종) 원불교 등은 최근 10년간 단일종단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언론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선교에도 활용해 교세 확장으로 이어졌다. 서로 상반되는 결과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개신교는 아직 언론과의 소통 및 상호이해를 위한 체계적 조직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하고 활동도 미미한 형편이다. 2001년에 창립한 ‘한국교회언론회’는 교권옹호 차원에서 언론과의 관계설정을 하는 바람에 언론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나아가 언론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그 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2012년 새로 출범한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은 그러나 아직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해 본격적인 활동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기독교언론포럼 중심으로 교계의 힘을 모아 언론과의 소통창구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발제자의 발표 중 “지상파 TV방송에서조차 교회를 해롭게 할 수 있는 방송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언론의 사명이라고 하지만 객관성의 상실과 형평성의 유지도 차치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방영하고 있는 것이다”고 한 부분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TV에서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후 사후약방문격으로 뒤늦게 TV방송사에 프로그램 내용을 가지고 시비 걸고 항의하는 게 언론선교 본연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이 나오기 전에 취재동향을 파악한 뒤에 충분히 대화하고 자료를 제공하며 서로 협력하여 좋은 프로그램이 TV에 방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에 비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배경을 파악하고 그 근원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언론선교에는 미디어에 대한 충분한 이해,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공동선과 공공의 목적을 실현한다는 동역자의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2. 영성 회복

교회는 교인들에게 영성 교육을 강화해 물질만능주의 세상을 이겨낼 전사를 길러내야 한다. 발제자가 제안한 ‘도심중산층의 수도원운동’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중세 수도원운동을 오늘날 개신교의 입장에서 되살려보는 것도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역사성을 회복할 때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이후의 역사만 개신교의 역사가 아니라 그 이전의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역사도 개신교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특히, 중세의 수도원 수도회운동은 오늘날 한국교회현실에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한다. 예수원, 모새골, 다일영성수련원 등 기존의 영성훈련기관들 이외에도 새로운 영성기관들을 전국의 도심과 도시근교로 확산시켜 많은 개신교인들이 이런 곳에서 영성을 단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새로 발족하는 교회연합기구가 해야 할 중요한 사업의 하나일 것이다. 

3. 가난성 회복

1970, 80년대 한국 사회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함께 교세가 급팽창한 한국 개신교회는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에 휩쓸려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양심적인 불신자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국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돕는 ‘가난성’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사를 보면 중세의 거지수도사들은 철저한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교인의 지표로 삼았다. 이들은 재산을 포기하고 맨바닥에서 잤으며 선물이나 사례를 일체 받지 않았고, 내일 먹을 것조차 준비하지 않았다. 특히, 두 수도회가 유명했다. 그 중 하나인 도미니크수도회는 학문연구와 토론으로 지적으로 뛰어난 훈련을 받은 수도사들이 많았으며, 이들이 당대 지성계를 이끌었다. 도미니크수도회는 가르치기 위해 가난해졌지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빈곤 그 자체를 중요한 신앙의 행위로 가르쳤다. 성자 프란치스코는 언제나 넝마같은 옷을 걸치고 빈곤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소일했다. 집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들고나가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가 창립한 프란치스코수도회의 수도사들은 복음서대로 생활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갈아입기 위한 여벌의 옷 하나는 허용되지만 거칠고 싼 것이어야 했다. 수도회에 가입하려는 자는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했다. 절대로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여행했으며, 설교보다는 중노동을 한 뒤에 천한 음식과 잠자리를 구걸했다. 거지수도사들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세상을 등진 수도원의 정신을 세상 한가운데로 이끌어냈으며, 이들의 자기부정은 자신 뿐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수단이 되었다. (김기홍 저 ‘이야기 교회사’에서 인용)

이런 프란치스코를 존경해 교황 중에서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딴 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항상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한다는 복음의 가르침에 투철하다. 최근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중동 방문에 나선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은 성지 순례 도중에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과 자리를 많이 만들었다. 외신들은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도착하는 교황을 압둘라2세 국왕이 만찬에 초청했지만 교황이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교황은 대신 예수가 세례 받은 곳으로 알려진 ‘베다니’를 방문하고, 경기장에서 열리는 미사에 참석한 뒤 시리아 난민들과 만났다. 이어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 인근 구유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현지 가난한 기독교인 가족들과 점심을 함께 했다. 교황의 보좌 주교는 “교황이 추기경이나 주교, 정치인 등과의 식사는 피하고 가난한 가족들과의 식사를 희망했다”며 가난한 가정을 선발하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고 말했다. 이런 교황이 오는 8월 한국에서는 어떤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지 벌싸부터 언론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처럼 가톨릭은 새 교황을 통해 상징적으로 가난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개신교는 이 시점에서 어떤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지도자를 비롯해 모든 교인들이 나서서 가난성을 회복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이를 위해 전 개신교인들은 교회에 내는 십입조 외에 ‘가난한 이웃에 수입의 십일조 기부하기’ ‘가난한 삶 존중하기’ ‘스스로 가난하게 살기’ 등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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