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설교의 관점에서

세월호의 참사로 말미암아 느끼고 있는 피해 가족의 고통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지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고, 온 국민들은 남의 일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일처럼 모두 가슴 아파하며 진행되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앞선 발제자들을 통해서 세월호 참사로 말미암아 아파하고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이 백성들의 마음을 ‘정신의학적인 관점’과 ‘상담학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어루만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이제 ‘강단 설교의 관점에서’라는 마지막 세션(session)을 통해 세월호 참사 사건을 고민하면서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지난 5월 22일 서현교회에서 진행된 설교세미나에서 이규왕 목사(수원제일교회)가 "고통의 시대 목회자, 무엇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유성문

세월호 참사는 남은 실종자들을 다 찾기만 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 후유증은 아주 오래갈 수 있다. 또한 직접 연관이 있는 가족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정신적인 문제와 심리적인 문제와 종교적인 의문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불신 등 복합적인 양산으로 확산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마치 종합병원처럼 정신의학적, 심리학적, 성경적인 입장에서 더불어 풀어가면서 이 복합적인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재난을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복이 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사고를 겪은 초기에는 불안과 악몽 같은 정신과적 증상과 정상적인 애도 반응을 경험한다. 증상이 1개월 후에도 지속되고 증상으로 심한 고통을 받으며 대인관계 유지나 사회생활을 하기에 지장이 있을 정도가 되면 비로소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분들은 깜짝깜짝 놀라고 공포와 불안을 느끼며 사고의 순간을 재경험하거나, 악몽을 꾸고 수면장애가 발생하며 무기력함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병의 경과가 악화되고 만성화되면 심한 우울증, 알코올중독, 자살 사고가 동반된다. 무엇보다 이런 상태로 진행되지 않도록 초기에 잘 대응해서 악화를 막고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사고 발생 후 약 6개월까지 기간에는 생존자와 유족을 포함한 위험 인구집단에 대한 심리적 지원 서비스가 실시돼야 한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이므로 불안과 공포를 경험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과도한 죄책감과 후회를 갖지 않도록 유도해야 한다. 또 중요한 결정은 안정된 후로 미루고 사고와 관련된 불필요한 자극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명상이나 종교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 기선완(중독정신의학회 이사장), 국민일보, 2014.5.18 -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금번 세월호 참사의 배후에 구원파라는 종교집단이 문제의 핵심주체로 드러나고 있고, 그들이 똘똘 뭉쳐서 종교탄압이라는 이름으로 순교까지 불사하겠다면서 강력하게 반발함으로 말미암아 온 국민 정서에 기성 교회에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에 좋지 않은 인식을 끼치고 있다. 이 문제는 기독교 전반에 걸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러한 우려는 지나친 염려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설교자가 강단에서 어떤 설교를 해야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마음에 치유와 회복과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설교자가 반드시 풀어야 하는 과제이며, 이로 인해 설교자들은 더욱 깊이 고민하고 있다.

1. 설교자의 고민

목회자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역은 설교 사역이다. 이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과연 ‘설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설교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마다 다양하게 내려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설교를 무엇이라고 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다.

현대 설교학에서는 설교의 설득이라는 측면을 많이 강조한다. 정인교는 “정보화 시대 목회자의 설교는 30분의 설교에서 선포는 단지 5분에 불과하고 나머지 25분은 설교의 핵심 내용을 청중들이 무리 없이 받아드리고 이해하고, 동의하고, 전달되도록 설득해 나가는 것이다”(정인교,『정보화시대 목회자를 위한 설교 살리기』, 34-35)라고 말했다. 즉 설교는 ‘설득하는 행위’라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 설교가 설득이라면 세월호 참사로 인해 전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논리로 설득을 해야 할까? 어떻게 설득하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그들의 깊은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설교자가 이미 회중이 잘 알고 있는 흔한 정보나 그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마치 자신의 의견인 것처럼 논리적으로 구성해서 회중들을 설득하려고 한다면 이는 오히려 회중들을 식상하게 만들고 상처에 흠집을 내어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면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하는 주제를 놓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목회자들이 정말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문제는 ‘설교의 방법론이 아니라 설교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어야 한다. 설교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탁월한 설교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목회하면서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던 것과 같은 고민이다.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사도 바울이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던 이유는 외부적인 박해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회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만회하려고 인간의 지혜로 설득하려고 할까봐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기를 소원했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여기서 ‘전도’라는 말(khvrugma)은 예수님께서 요나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사용했던 단어다.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마 12:41)에서 사용한 단어는 ‘전도’와 똑같은 단어(khvrugma)로 ‘선포하다, 고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쉽게 말해 설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두고 설교자들이 가장 고민해야 할 문제는 바로 바울과 같은 고민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설교는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임재 하셔서 회중들에게 메시지에 대한 이해와 확신과 감동을 주실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설교자의 심정

설교는 단순히 회중에게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거나 성경에 대해 이해시켜주는 학습의 시간이 아니다. 설교자는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회중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회중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깨닫고 주님의 마음과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한다.

구약의 호세아는 거룩한 선지자였다. 선지자인 그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을 해서도 안 되었다. 그래서 음란한 자식을 낳는 것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선지자요 나실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참담한 심정을 호세아가 경험(체휼)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호 1: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로 인해 가장 가슴 아픈 사람들이 피해자 가족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가슴 아파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창조주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왜냐하면 부모가 그들을 낳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먼저 그들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실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탐욕과 부주의와 무책임이 어린 학생들과 다수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음으로 내몰았을 때 창조주 하나님은 누구보다 가장 가슴이 아프셨을 것이다. 설교자는 이를 깨닫고 그 하나님의 심정으로 말씀을 전해야 한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지도, 교회를 다니지도 않았을 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월호 사건을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을 편 가리기 식으로 설교하지 말고 그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그와 같은 생명 사랑에 비해 인간은 탐욕과 죄악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을 경시 여기는 존재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게 되었다. 이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무참하게 죽은 사건을 두고 우리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설교자는 그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설교해야 한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의 설교자의 사명 중에 선지자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세월호의 사건을 통해 무엇을 예언하고 가르치려는 마음이 아니라 참담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던 선지자들과 같은 심정으로 말씀을 전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에스라는 성전 재건의 놀라운 은혜 속에서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죄를 지을 때, 그들을 비방하기보다 ‘우리의 죄’라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스 9:6~15). 혹시 우리가 죄를 지적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죄여야 한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가 짓는 죄의 결과의 한 단면일 뿐이므로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현대 사회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남의 아픔을 진실로 나의 아픔으로 절감하지 않는다. 내 옆에서 누군가 죽어도 지금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더 고통스럽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변의 아픔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문제와 이웃의 고통이 바로 나의 문제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을 나누고 슬픔을 대신 지고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벌어진 사건과 그 가운데 있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 문제와 고통 속에 있는 가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도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인간의 마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픈 마음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누구보다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시는 분이시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 지난 5월 22일 서현교회에서 진행된 설교세미나에서 이규왕 목사(수원제일교회)가 "고통의 시대 목회자, 무엇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유성문

3. 설교의 내용

1) 주의 백성을 위로하라

설교자들이 이번 세월호 사건을 설교할 때에 가장 가능성 있는 접근이 바로 죄와 벌의 인과론적인 설명이다. 어떤 큰 사건이 벌어졌을 때 누군가의 죄와 연결시켜서 죄의 문제를 지적하려는 시도는 목회자가 가장 쉽게 받을 수 있는 유혹이다.

물론 이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와 사건과 부정적인 일들은 다 죄의 결과이다. 그리고 분명 많은 사건과 질병과 전쟁과 기근과 고난은 분명히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거나 역사하신 사건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건마다 그 연계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모든 고통을 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고통의 원인을 무작정 죄 때문이라고 연결하는 습관이 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졌을 때 모든 사람들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 반어적인 질문을 통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같은 본문에서 갈릴리 사람 중에 누군가 성전에서 로마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갈릴리 사람 중에서 가장 악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당연한 인과론적 귀결을 질타하셨던 것도 기억해야 한다.

(눅 13: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우리는 이런 인과론적 결론으로 누군가의 죄를 지적하고 질타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겪은 사람이 있다할지라도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하신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함으로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아주 버리시지 않았다. 오히려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셨다.

(사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위로하라’는 말(hj;n:)은 노아 홍수 심판 때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6)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로 ‘위로하다, 후회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심정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단어이다. 

노아 홍수 심판 때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들은 120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무시하고 타락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전부 타락했었다. 세상에는 유일하게 노아의 가정만 남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을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을 때 그 세상을 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셨다.

(창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물론 세월호의 참사를 가져온 사람들의 죄를 낱낱이 밝혀서 엄벌하여 유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슬픔에 젖어있는 가족들과 더불어 슬퍼하는 국민들을 위로하는 일이다.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의 박해로 말미암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자비한 사람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면서 위로의 사명을 당부했다.

(롬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설교자들은 고통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며, 또한 함께 아파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우선적인 사역이다. 또한 혹시 누군가의 죄를 지적해야 한다면 설교자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말씀으로 돌아보게 해야 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죄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해야 한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설교자는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의 엄위하심을 세상을 향해 선포할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포함한 성도들 자신을 향해 선포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2) 아름다운 이야기를 설교하라

설교자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나쁜 사람들의 부정적인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정반대로 미담의 주인공들을 설교를 통해서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분노의 감정보다 마음속에 희망의 에너지를 갖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람들에게 몰인정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비난하거나 질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미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고 결론을 내리셨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타락한 아담의 자손의 피 속에는 부정적인 DNA가 있다. 그래서 긍정적인 이야기보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또 더 좋아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문제를 해결하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지 못한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설교자들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식의 부정적인 설교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정죄하고 비난하는 설교를 잘한다. 그래서 그러한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그들의 의식속에 자리잡은 비판과 불신과 정죄감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세월호의 참사로 말미암아 허탈감에 빠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의를 덮고 가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교회는 세상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미움을 몰아내고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교회도 정부나 세상을 향해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고 비난하고 정죄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구태여 교회가 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제도권 속에서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벌을 받게 될 것이고, 잘못된 시스템은 점차 고쳐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깊은 불신감과 상처받은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자존감은 무엇으로도 회복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담당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금번 세월호 참사에서 미담을 찾아서 세월호를 침몰시킨 나쁜 사람들만 사는 나라가 아니라 그러한 와중에서도 아름답게 헌신한 사람들의 미담과 영웅담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가) 지난 12일 보건복지부는 이날 오전 열린 ‘2014년도 제3차 의사상자심사위원회’에서 故 박지영씨(22), 故 김기웅씨(28), 故 정현선씨(28)를 의사자로 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한 사람마다 가슴 찡한 미담 주인공들입니다.

의사자들의 헌신적인 죽음과 더불어 믿음의 학생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던 모습이 담겨진 동영상은 마치 타이타닉호의 이야기처럼 두고두고 회자될 수 있도록 설교의 좋은 예화로 사용하여 불신으로 얼어붙은 마음 들을 녹여내야 한다.

나) 목항에서 ‘햄버거 아저씨’로 불리는 이 남성은 “슬픔을 함께하는 모든 분께 햄버거를 드리고 싶지만 하루에 만들 수 있는 분량이 한정돼 있어서 안타깝다”면서 “이분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기계와 재료를 트럭에 싣고 직접 내려왔다”고 말했다. 이 남성이 하루에 만든 햄버거는 1000개가 넘는다. 실종자 가족들과 바지선 위의 잠수사 등에게 배달된다. 벌써 25일째다. 날짜로만 계산해도 어림잡아 2500여만 원의 큰 돈이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햄버거를 가져다 드리면 그분들이 잘 드셔주니까 정말 행복하다. 내가 그들에게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무척 다행인 것 같다”고 말했다.

- 국민일보, 2014년 5월 15일 -

3) 미래의 희망을 설교하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 민족과 국가를 지금까지 섭리하신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설교자는 이 하나님을 설교하여야 한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불신과 불순종의 죄는 인류에게 파멸을 가져다주었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서 둘째 아담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는 빌미가 되도록 섭리하셨다.

(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미국 여행을 하면 가장 불편한 것이 공항을 통과할 때 철저한 안전검사다. 그러나 13년 전만해도 이 일이 상당히 느슨했었다. 13년 전 9.11 테러 이후에 미국 정부는 정신을 차리고 타국민이 미국에 들어갈 때에 검색을 철저히 강화하게 되었다. 이 9.11 테러의 인재와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천재는 미국 정부를 강하게 했고 많은 면에서 재난을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는 선진국이 되게 했다. 이 사건들은 연방정부 조직과 주.지방 정부간의 실시간 의사소통과 협력을 강화하는 법률 제정과 규정을 개정하고 각종 재난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확립하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무신론 공산주의인 북한의 핵위협 속에서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무사태평한 삶을 살고 있다. 이 와중에 금번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 2의 세월호 사건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만일 금번 세월호로 인해 국가를 재개조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못했던 국가적인 대개혁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린학생들의 그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금번 세월호의 참사로 말미암아 국가의 안전과 재난 대응 체계를 개선시켜 나가길 원하실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사회가 달라지길 원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로 인한 어린 학생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민족구원의 밀알들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것이며, 설교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해 설교해야 한다.

이 나라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다. 그리고 개 교회들 안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저 북한의 지하교회에도 생명을 걸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예수를 믿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일로 인해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를 더욱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더욱 소망 있는 민족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마지막 교훈은 바로 각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착하고 충성된 종처럼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하는 충성된 사람들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결론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참혹한 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부활이라는 소망을 가져다 준 희망의 종교이다. 지금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대한민국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던 죄악의 족쇄를 끊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과 성실한 마음으로 다시 일어서자고 전 국민 동원령을 내리는 설교를 해야 할 때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예산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국민적 충격에 따른 경제성장 정체 등 국가 경제에 미칠 악영향이 최소 2조~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학계 등 전문가들은 1) 당장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최소한의 안전설비 투자를 소홀히 하다가 결국 천문학적인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될 뿐 아니라, 2)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명 피해와 국가 브랜드가치 하락 등을 고려하면 전체 피해 규모를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과거 IMF 사건이 있을 때,국가는 침몰 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 국민이 단합하여 금모으기 운동을 벌리는 등 단합된 힘으로 위기를 극복함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금번 세월호 참사는 우리 민족의 치부를 드러낸 부끄러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내지 말고 냉정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온 국민이 단합하여 대한민국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고 그것이 신앙의 힘이었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되게 해야 한다. 설교자들은 이 희망과 비전을 설교해야 한다. 

여리고성을 정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보다 훨씬 적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했었다. 이는 수치였고 부끄러움이었고, 그들은 이 작은 싸움의 패배로 인해서 가나안 전쟁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깊은 좌절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아간을 색출하여 사형을 시키게 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셨다.

(수 8: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WakingTimes 행복한 사람들의 15가지 특징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다.

1) 행복한 사람들은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이를 거부하려고 하는 대신에 ‘이번 일을 통해서 뭘 배울 수 있을까?, 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부정적인 측면 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에 집중을 한다.

2) 행복한 사람은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 이를 비판하기 보다는, (어쩌다 한 번) 원하는 대로 행동했을 때 칭찬을 함으로써 긍정적인 행동을 더 하도록 유도한다.

3) 행복한 사람들은 흉측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골치 아픈 문제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기회를 발견하고, 궁핍해 보이는 곳에서 풍요를 볼 줄 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를 표현할 줄 안다.

오늘의 교회와 설교자는 깊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는 회중들에게 여호수아처럼 주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서자는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모든 설교들이 사도 바울의 염려와 근심처럼 설득력 있는 인간의 지혜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과, 오직 성령의 위로와,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만 가능하다는 겸손한 믿음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세월호 참사와 그로 인한 아픔들을 이기고 다시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설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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