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C 교계전망대

※ 주 토요일 오전11:05~11:50에 FEBC(극동방송)에서 송출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 '교계전망대'(제작: 김용환, 진행: 이상화 목사)에서 세월호 침몰사고를 보며 "교회, 어떻게 상한 마음을 보듬을 것인가?"를 주제로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교갱뉴스에서는 극동방송의 동의를 얻어 이날 진행한 대담 전문을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 지난 25일 극동방송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교계전망대' 녹음현장. 좌로부터 진행자인 이상화 목사(드림의교회), 권수영 교수(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최의헌 원장(연세로뎀정신과의원)

이상화 : 세월호 참사 이후 온 나라가 비탄과 슬픔에 잠겨있는 상황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어서 마주하면 몸은 살아있되 마음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전 국민이 고통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 주님의 교회는 과연 어떤 응답을 해야 할까요? 이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전 국민들이 울고 있는 이때에 과연 어떻게 해야할 지를 짚어보기 위해서 FEBC 교계전망대에서는 “교회, 어떻게 상한 마음을 보듬을 것인가?”를 주제로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두 분을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권수영 교수,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 원장 나오셨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살아가면서 고난, 혹은 인생의 여러 문제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크리스천조차도 인생의 난제 앞에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인데요. 고난을 겪을 때 가장 자주 묻는 질문은 “왜?”인 것 같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런 질문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권수영 : 상담하다 보면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가? 이유를 찾아보니까 하나님이 나한테 벌을 주신거라는 그런 고난에 대한 인과론적 해석이라고 할까요?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도 못할 뿐만 아니라 상담자도 답을 주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에 이미 그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자가 누구 때문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데 이런 질문들이 결국은 우리에게 공허할 뿐이고 고난의 깊은 의미를 헤아리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최의헌 : 상담적으로 대개 “왜?” 라고 질문할 때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죠. 이게 나한테는 없어야 되고 말도 안 된다는 입장에서 질문하는 경향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이유를 알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설령 이유를 알아도 이유를 꼭 해결되지 않고, 이유를 알 때 더 허탈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상화 : 성경은 “왜?” 라는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고 있습니까?

권수영 :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성경은 ‘때문에’ 신앙보다는 ‘위하여’ 신앙을 먼저 강조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도 보면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위함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또 다인가 하고 생각해 보면 성육신 사건은 우리의 구원만을 위해서 오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듯 함께하는 신앙이 고난에는 중요한  신학적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의헌 : 같은 본문을 생각할 때 결국은 구약적인 방식은 ‘왜’라는 질문에 하나님의 방식은 징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늘 생각했던 기준이 한계들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예수님의 말씀이 결론이라는 것은 또 아니거든요. 그게 어떤 식으로든 고정화 될 때 그걸 탈피할 수 있는 생각을 가져야 된다고 봅니다.

이상화 : 결국은 개인적인 고난도 있지만 사회 시스템에서 오는 고난도 많지 않습니까? 이건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죄성이 중첩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적 시스템 때문에 오는 재난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왜 이러실까?’를 질문하는데 그것도 물론 물어야 되겠지만 그 이전에 인간들이 가진 탐욕들이 점철되어서 시스템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라는 해석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최의헌 : 구약성경에서도 외국의 침략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이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은 자기네들의 문제들이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처럼 이 시스템도 결국은 생각해 보면 우리의 많은 잘못과 죄들이 가중되어 이뤄진 부분이 충분히 인정됩니다.

이상화 :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고난을 만난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관련한 부분인데요. 어떤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이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겠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권수영 : 고난을 당한 분들 중에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분이 있음을 간혹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 보면 참 멋진 표현이 나옵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는 말인데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과 함께 가기 원하고 절대 혼자 두지 않음을 굉장히 크게 얘기하시는데 우리는 그 메가폰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고난의 시기에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고 이웃의 고통에도 더 민감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의헌 : 말씀하신 대로 고난에는 분명히 현상이 있습니다. 그 현상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그 현상 밑에는 의미가 있는데 그 의미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나 성경적으로 고난의 이유를 결론 내리다 보니까 엇박자가 생기는 것인데 어떤 때는 그 결론이 맞는데 너무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게 되면 못 받아들이죠. 그래서 고난을 당한 본인이나 주변에 할 수 있는 얘기는 ‘정말 이 고난의 의미가 뭘까?’라는 의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 의문 속에서 의미를 같이 한 번 찾아보자는 표현이 많은 부분에서 위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화 : 단견으로 보지 말고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조망해 보자는 것 같습니다. 현실의 고난과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 사람들마다 다 다를 수도 있지만 상당히 지난한 과정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정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최의헌 : 퀴블러-루스(Elisabeth Kubler-Ross)가 예를 들어서 사람이 암에 걸려 죽게 될 때 과정이 있다고 해서 5가지를 말했는데 대개 단순하게 얘기하면 일단은 안 받아드리죠. 그래서 무조건 거부합니다. 그 다음에는 씨름을 하죠. 설득을 하기도 하고 항의를 하기도 하고 조건을 내걸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절망에 빠지고 누그러집니다. 그리고 완전히 바닥을 치는데 거기에서 희망은 대부분이 수용할 때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거부할 때는 이런 여러 가지 과정이 있지만 고난을 수용할 때는 빛이 비춰지고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권수영 : 여러 고난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분들의 애도의 과정을 보면 일부러 사회적 고립을 자초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혼자 있기 원하고 혼자 있는 동안에 비극적인 장면을 떠올리면서 혼자 아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인조차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웃음을 봐도 상처가 돼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가기를 꺼리게 됩니다. 신앙을 가진 분들도 내가 이렇게 고통 받는데 이 고통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때 하나님은 잠자코 관찰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 한 때 성부가 수난 받는다는 것을 거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고통의 신학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가셨고 우리의 고통을 공감하셨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 기독교인의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 그 고난을 통하여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 그래서 이전보다 하나님과 더 친밀한 경험을 하게 될 때 그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고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화 : 대부분이 거부의 과정에서 씨름의 과정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칠 것 같은데 그 과정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참 중요할 텐데요. 주위 분들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최의헌 : 고난에서 애도나 여러 과정들을 빨리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분명히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을 회피하다 보면 기간도 길어지고 너무 늦게 경험하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이 과정 자체는 피할 수 없다는 것들을 말해 줍니다. 씨름이라는 과정을 비유로 얘기한다면 씨름에도 기술이 있는데 만약 싸우는 과정이라면 잘 싸우게 도와줘야 됩니다. 또 한 가지는 경기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부부싸움도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그건 경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과정도 분명히 거쳐야 하고 그 과정 속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데 그 규칙을 잘 지키면 과정이 순탄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복잡해집니다. 애도를 돕는 상담사들은 애도를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애도를 충분히 하고 오히려 더 잘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더 할 수 있게 기술도 가르치고 규칙도 가르쳐 줍니다.

이상화 : 그 과정은 꼭 지나야 하는 필수 과정이네요. 그 필수 과정을 거칠 때 규칙을 잘 지키면서 기술적으로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와 닿습니다. 그러면 어떤 기술이 있는지 조금 더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권수영 : 가끔 상담을 아주 잘하는 분들이 사회적 약자들, 소외 계층을 상담하고 오면 제가 상담을 받은 분들에게 만족도 조사 같은 것을 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너무 기분 나쁘다고 말씀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공감과 동정은 다른데 우리가 너무 쉽게 이해한다고 하고 너무 쉽게 내가 당신께 다가갈 수 있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죠. 어떤 면에서 정말 바닥까지 내려가는 그들의 얘기를 오랜 시간동안 들어주고 함께 해야 진실이 통하는 공감이라고 느끼지, 안 그러면 너무 값싼 동정처럼 느껴지고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술이라고 하면 어색하지만 공감이라고 하면 진정성을 가지고 함께 바닥까지 내려가려고 하는 애쓰는 경험이 쌓일 때 어느 순간에 그 진심이 알아지고 뜨거운 공감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상화 : 이번에 일어난 아주 어려운 문제를 앞에 놓고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도 돌아보신 분들이 많이 계신 것 같고 교회도 역시 이런 상황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데 신앙의 힘이 뭔지, 또 신앙한다는 것이 뭔지를 목회자들이나 크리스천들이 질문을 던지는데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권수영 : 발달 심리학적으로 보면 교회가 좀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밖에 보지 못합니다. 엄마한테 선물을 하는데 눈깔사탕을 사준다는 거죠. 그게 이기적인 게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틀이 그거 밖에 안 되는 거죠. 우리나라 종교인들의 실태조사를 해보면 왜 종교를 믿느냐고, 왜 교회에 가고, 절에 가느냐고 물으면 똑같이 대답한답니다. 70%가 ‘마음이 편안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다른 사람들을 본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회를 쳐다보고 약자를 쳐다볼 수 있다는 거거든요. 대한민국의 교회들이 그동안 두 번째 스테이지로 옮겨갔었는가? 물론 여러 가지 사역들은 많이 합니다. 선교도 많이 하는데 이번에 정말 국가적인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신앙도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서 나뿐만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의헌 : 인간의 무기력은 종교를 떠나서 실제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해도 어쨌든 인간은 현실에서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만 봐도 그런데 과연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부분에서 종교를 갖는다고 무기력을 탈피하고 넘어서지 않는다는 게 더 중요한 사실입니다. 또 권 교수님 말씀을 들으며 생각을 해보았을 때 우리가 정말 너무 이기적인 신앙 생활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최근에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와 비기독교적인 인간 이해를 비교해 보았는데 비기독교적인 인간 이해가 훨씬 더 인간의 자발성이나 능력을 중요시합니다. 인간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강조하거든요. 근데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는 인간이 할 수 없음을 아주 냉정하게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 비로소 산다고 얘기하거든요.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은 결국은 희생부분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냉정하게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화 :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독특성은 성육신하신 십자가 신앙인데 이게 실제적으로 어떤 힘이 있고, 치유의 과정에서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요?

권수영 : 지난 부활절 때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하기가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냐면 배후에는 그런 게 있는 겁니다. 십자가는 이미 고통과 죽음을 극복한 경축의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절은 축제인 거죠, 근데 한 여성 신학자가 아주 흥미로운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 신앙을 트라우마로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거예요. ‘트라우마’라는 것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상처지만 의미 있게 기억하고 받아들이면 어마어마한 변화와 변혁의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거든요. 십자가가 기독교인에게 단순히 장식품이나 값싼 은혜를 말하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고 함께 아파하고 상처를 보듬고 또 계속해서 기억해야 할 하나의 치유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 십자가는 더 많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터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화 :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의 희생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불량했던 여러 시스템, 탐욕으로 물질만을 추구했던 것들에 경종을 울리는 정말 좋은 동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요?

최의헌 : 십자가의 큰 힘은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과 동시에 개인을 변화시키는 거잖아요. 저는 부활절에 나름의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 진도에서 분명히 기독교인 부모님 중에 애타게 자기 자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분명히 그중에서는 삼삼오오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했을 텐데 십자가 찬양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저희가 생각하는 십자가와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찬양하는 찬양이 진짜 십자가의 의미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화 : 최 박사님이 울고 계신데 이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이 피해자 가족들 가운데 크리스천들에게는 정말 생생하고 절절하게 다가왔을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권 교수님, 이 ‘십자가 신앙’을 진짜 기억한다는 것은 삶 속에서 어떻게 표현이 되어야 될까요? 

권수영 : ‘십자가 신앙’은 그동안 오해했던 죽음의 극복으로서, 천국 소망으로서의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쉽게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그래서 고통에 너무 쉽게 답을 주는 신앙은 아니었는가?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은 그 고통에 오래 함께 하고 하나님께서 이 바닥까지 내려오셔야 했던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그런 깊이 있는 신앙의 단계로 이어질 때 그 십자가가 값싼 은혜의 상징이 아니라 진정 개인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신앙의 핵심이 될 것 같습니다.

이상화 : 이렇게 보면 신앙의 영역에서도 공감을 말하고 정신의학의 영역에서도 공감을 말하고 심리학 영역에서도 공감을 말하는데 실제적으로 십자가가 가진 독특성은 우리의 문제 안으로 뛰어 들어오신 예수님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이 부분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최의헌 : 이것을 종교 안에서만 설명할 건가? 아니면 비기독교에서도 원리를 설명할 거냐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종교 밖에서 아무리 설명을 하려고 해도 십자가의 구원의 요소는 종교 안에서 설명하는 것을 커버할 수 없다는 거죠. 그건 분명한 거고 종교 밖에서 원리 삼아 사용하는 것 중에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실제로 상담이론에서도 ‘비폭력 대화’라는 방식이 있는데 상대방이 화를 내고 불쾌하게 해도 서로 싸우지 않는 대화 방식들을 얘기하거든요. 결국은 십자가는 많은 것들을 흡수합니다. 모든 고통과 모든 아픔과 모든 죄성을 흡수하고 정화시키지요. 그런 부분에서 어떤 원리들이 우리가 십자가를 들으면 소설에나 나올법한 그런 사건인데도 신앙인들은 그것이 현재화되거든요. 마찬가지로 이 원리가 현재화될 때는 사람이 풀어지고 누그러집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의학, 심리학은 결국은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는데 다만 신앙인들은 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생각하는 이 부분이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수영 : 상담학이나 심리학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욕구는 인정 욕구라고 합니다. 남이나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에게 인정받지 않으면 굉장히 불행해 하고 부모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다고 합니다. 결국은 상담을 왜 받느냐 하면 자존감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고 일반 심리학에서는 자기가 제대로 서기 위해서 상담을 받는다고 합니다. 결국 상담의 끝을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평가받을 때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인간적인 인정 욕구는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종교의 영역에서 말하는 영적인 자존감,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 그래서 십자가 사건도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의롭다 여겨지는 칭의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어떤 상담학이나 심리학이 줄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경험, 신앙의 성숙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화 : 마지막으로 삶의 문제와 고난을 지닌 분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길을 제시해야 할까요? 그것을 통해서 사회를 치유하는 힘이 분명히 나올 것 같은데 마무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의헌 : 제가 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자살 가족을 위한 슬픔 극복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슬픔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과정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처럼 아직은 가지 않은 길이지만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있고 어디에 도착하는지 알게 되기에 안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모든 고난에 대한 내비게이션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 부분을 잘 정리해서 보여주면 그 분들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이지만 그 길을 걸어가면서 충분히 그 과정을 이겨내리라고 생각합니다.

권수영 : 가끔 교회에서 “믿습니까?” 하고 물을 때가 있는데 믿어져서 “아멘” 하시는 분도 있지만 그 중에 굉장히 당황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분들은 고난을 당한 분들입니다. 아직까지는 고민하고 의심하고 계신 거거든요. 그래서 쉽게 “믿습니까?” 하고 묻기보다는 어떻게 다시 저분들이 믿을 수 있도록 기다리고 함께할 지를 고민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상화 : 정말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면서 두 전문가를 모시고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시간이 아무리 길어지더라도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 당하는 분들과 함께해야 되고 함께 공감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빛을 던져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 원장님, 연세대학교연합신학대학원 권수영 교수님 두 분 수고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