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19) 교갱협 제18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로마서 1장 8-15절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서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그 복된 소식, 복음을 위해서 바울은 로마서를 썼습니다. 로마서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 1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그 짧은 절 안에 바울은 ‘복음’이라는 말을 일곱 번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교인들을 잡아서 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디모데전서 1장 13~15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 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악행과 불순종을 용서하시고 오히려 그를 주님의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자기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은혜에 빚진 자인가를 깨달은 바울은 그 때부터 은혜에 빚진 자 되어 로마서 1장 14절 “다 내가 빚진 자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빚진 자된 심령으로 주님 앞에 가는 그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바울은 굉장히 의미 있는 고백을 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교회를 향해서 보내는데 인사말을 마치고 난 다음 곧바로 하는 얘기가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복음은 주로 누구에게 전하는 것이죠? 복음은 안 믿는 자들에게 전하는 건데 바울은 인사가 끝나고 나서 곧바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로마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 로마교회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지요.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6절과 7절에 있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제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6절에서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누구인가? 6절과 7절에 보면 너희가 누구인가를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예수그리스도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 말이지요, 두 번째 7절에 보면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로마에 있는 너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세 번째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성도, 거룩한 백성,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내 백성으로 따로 구별 지어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에 있는 너희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될 정체성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처음 질문으로 다시 되돌아가겠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렇게 예수의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이상하잖아요. 바울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더군다나 8절에 보면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로마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소문이 났다는 말입니다. 로마교회는 믿음 있는 교회였습니다.

또 그런가 하면 로마서 16장 19절에 보면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지금 고린도에서 로마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소문이 들려오기를 로마교회 교인들이 순종함, 행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종함이 소문이 나서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그 말이 들려 왔습니다. 바울이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이 참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로마교회는 행함도 순종도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교인들을 보고 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심각하게 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서 1장 10절에 보면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이렇게 여러 번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아직까지 그렇게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5절에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이런 집요한 의지를 보아서 바울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는 무슨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가지고 성경학자들 사이에 굉장히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성경 주석을 찾아보니까 의견이 열 가지가 넘었습니다. 그것을 지금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너무 쉽고 당연합니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너무 쉽고 당연해서 우리는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결론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계속해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내가 복음을 전하겠다는 이 말은 복음이 로마교회 또 다시 들려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들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알려면 로마교회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이 말하기를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쓸 당시의 로마교회는 이미 역사가 20년에서 25년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누가 세웠나는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학자들이 해석하는 것을 보니까 사도행전 2장 말씀을 가지고 해석했는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3대 절기가 되면 전 세계에서 예루살렘으로 와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보이고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는데 성령강림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각 나라말로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의 사람들이 그 지역의 말로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0절에 보면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왔다가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고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로마에 가서 로마교회를 개척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강림이 주후 33년경이라고 하면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때는 주후 58년경이기에 약 25년이 차이가 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곧 바로 개척을 했으면 25년이 되었을 것이고 교회를 개척하는데 몇 년이 걸렸으면 20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20년에서 25년 사이의 역사를 가진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뭐냐 하면 벌써 로마교회 안에 교회 역사가 20년에서 25년이 되다 보니까 그 교인들 가운데 첫 믿음의 순수성과 첫 열정을 잃어버린 성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교회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로마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방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혼합공동체였습니다. 이 혼합공동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중에는 초대교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지만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누가 구원받느냐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갈라졌습니다. 소위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지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로마교회 안에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갈라디아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이방 지역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로마교회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하는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던 두 번째 이유입니다.

세 번째는 그 당시의 로마는 전 세계의 죄악을 다 모아놓은 듯한 그런 도시였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이 극에 달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교만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아니하고 온갖 죄악의 물결이 넘실대는 곳이 로마였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보면 그 당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던 세상 사람들의 죄악 된 모습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그것이 그 당시 로마사람들의 죄악 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1장 28절부터 보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끝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26절과 27절에서 로마는 그 시대에 동성애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로마는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는 전 세계의 죄악을 다 모아놓은 죄악의 진열장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곳에 세워진 로마교회는 유혹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로마교회는 세워진 지 25년이나 되었고 순종이 소문난 교회였지만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문제가 많았고 믿음이 흔들릴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외적으로 그 당시 로마의 환경은 도전적이고 유혹이 많은 상황이었고 또한 내적으로는 믿음과 율법이라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 첫사랑의 열정과 감격을 잃어버린 문제 등 로마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말미암아 신앙이 흔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천년 전 로마교회를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로마서 1장 11절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 말은 로마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는 곧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통해서 믿음의 감격과 믿음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여러 가지 세상의 유혹에 직면해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를 흔히 ‘교회갱신의 성경’이라고 합니다. 이천년의 교회사를 보면 로마서를 읽다가 영적 혁명을 경험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30살이 넘도록 방탕한 삶을 살다가 로마서 13장 13~14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에 거꾸러졌습니다.

그 다음에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 그는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웠고 고민이 많았고 어렸을 때부터 기도하고 금식하며 굉장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루터의 아버지가 굉장히 엄한 아버지여서 루터가 조금만 잘못해도 야단을 치고 매를 때리는 무서운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육신의 아버지가 투사가 되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에 의해서 강제로 법대에 갔는데 21세 때 그 유명한 낙뢰 사건이 벌어집니다.

여름에 친구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쳐서 그것을 피하려고 큰 나무 밑으로 들어갔는데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그들이 나무 밑으로 들어가는 순간, 벼락이 나무를 때리면서 루터 옆에 있는 친구를 동시에 때렸습니다. 루터가 보는 앞에서 친구가 새까맣게 타 죽었습니다. 루터는 무서운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판의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그래서 그 길로 다 내려놓고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됩니다. 아버지는 펄펄 뛰었지만 더 이상 아버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기도하고 금식하고 온갖 종류의 금욕생활을 하는데 문제는 그러면 그럴수록 고통 받는 양심은 더 힘들어져서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기쁨이 없고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신학박사가 되었는데도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515년에 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됩니다. 거기서 로마서 강의를 하다가 참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말씀이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 그렇구나! 오직 믿음이구나! 행함이 아니구나! 율법이 아니구나!’ 그래서 그는 종교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을 Luther's Work이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나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의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게 해주신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나는 내가 중생했고 낙원에 이르는 열린 문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은 내가 하늘나라에 이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200년 뒤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의롭게 된다는 로마서의 말씀은 저 유명한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로마서는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영적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 받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성도로, 사역자로서 부름 받은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복음이 다시 들려져야 하지 않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오늘날 교회 밖에 보다 교회 안에 더 많이 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요즘 한국 교회를 바라보면서 정말 십자가의 복음이 다시 필요한 사람들은 오늘날의 한국 교회와 목회자 안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깨어져야 할 사람이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 앞에서 그 교만한 마음이 녹아야 할 사람이 교회 안에 더 많이 있고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할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더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 가지를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목회자 여러분, 오늘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는 확신과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바울이 로마서 14장 8절에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입술로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고백하지만 아직도 때때로 순간순간 내가 내 삶의 주인 되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인들에게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설교하고 가르치지만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 앞에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내 뜻, 내 계획대로 아직도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제가 한동안 담임목사로 섬겼던 교회에서 당시 46세였던 어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심한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분이 있었는데 주일 저녁예배까지 다 마친 뒤 교역자들과 함께 그 댁에 심방을 갔는데 집사님도 갔습니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성도의 등을 두드리면서 “우리 나중에 시간 내서 기도원에 가서 기도합시다” 하며 웃으며 위로하던 그 집사님이 닷새 뒤에 그렇게 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금요일에 연락이 왔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이미 의식이 없고 그날 그는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얼마나 황망했던지요.

그러나 그 황망함 가운데서도 그 분이 가신 곳이 어딘지 너무나 분명히 알았기에 그 분을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많이 배운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분이었지만 정말 맑은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분이 저한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같은 것, 나 같은 죄인,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것, 그냥 내버려두면 지옥의 땔감으로밖에 쓸 수 없는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나를 예수의 것 삼아주시다니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목사님, 나는 예수의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에게 감히 도전적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만약 오늘 밤에 부름을 받는다면 “아멘, 주님. 저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저를 주님 계신 곳으로 불러주시니 주님, 감사합니다” 고백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이 시간 우리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이 질문에 고백할 수 없다면 그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됩니다. 교회에서 10년, 20년, 30년, 전도사, 목사, 신학교 교수, 다 소용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됩니다.

두 번째, 내가 하나님 사랑받는 자라는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하는 감사와 감격이 여러분의 심령에 남아 있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부를 때에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흐르는 눈물이 있습니까?

또 한분이 생각납니다. 미국에 있을 때에 저는 예배설교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늘 목회를 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제가 보스턴에 있을 때인데 박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한 3년을 목회했습니다. 그때 교회에 어느 부부가 한 두 시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한인교회에 출석하겠다고 주일이면 두 시간을 차를 몰로 오는 것입니다. 근데 아내 되는 여 집사님은 얼마나 예쁘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남편 집사님은 주일에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신앙생활은 안했습니다. 이 남편은 신사여서 주일에 자기 부인을 옆자리에 모시고 와서는 예배당 안에 잘 모셔놓고는 자기는 안 들어옵니다. 교회앞 주차장에서 책을 보고 있든지 하면서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권했습니다. “신앙생활 같이하고 예수 믿읍시다” 해도 대답을 안 하고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돌립니다. 그 때 속으로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분이 계속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서 종합검진을 했는데 암이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수술을 했는데 열었다가 도로 닫았습니다. 이미 혈관을 통해서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버린 것입니다. 병원에서 더 이상 할 게 없으니 돌아가서 삶을 정리하라고 보냈습니다. 저도 일주일에 한 번씩 장로님, 권사님들과 차를 몰고 갔습니다. 가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십자가의 복음, 피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즈음에 그날도 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목사님, 제가 오늘 간증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첫 마디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저 이번에 수지맞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나 잘난 줄 알고, 내가 제일 똑똑한 줄 알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교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그 교만한 삶을 살아서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질 뻔 했는데 이번에 암에 걸리고 여러분과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 영생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제 제가 갈 곳이 어딘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지맞았습니다.” 그 말을 한 다음에 그 분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저희 일행은 그날 그 찬송을 정말 기쁜 감격 가운데 불렀습니다.

그분은 원자력공학 박사였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렇게 똑똑한 분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그분 장례식에서 미국인 회장이 조사를 하는데 너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일하던 분야가 미국에서 당시 10명 정도밖에 안 되는 가운데 손꼽히는 한 명이었습니다. 그 분은 어렸을 때 이민 가서 천재, 신동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자기 분야 최고의 권위자가 된 것입니다. 그 분의 “저는 그동안 나 잘난 줄 알고, 내가 제일 똑똑한 줄 알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교만한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했던 고백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목회자 여러분, 그렇다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감사와 감격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있습니까? 더 나아가 목회자로 불러주심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까? 만약에 단 한분이라도 그 심령 가운데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메말라 있다면 그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다시 붙잡아야 됩니다.

이상하게도 오늘날 믿음생활을 오래한 사람일수록 신앙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 율법적인 신앙으로 반들반들해진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저처럼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저렇게 관심이 없을까? 왜 저렇게 움직임이 없을까? 안타깝고 염려되는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피리 불어도 춤추지 않습니다. 노래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다 안다고 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수십 년 교회 다니고 권사, 장로도 되고 전도사, 목사도 되었지만 그 심장 속에 주님의 뜨거운 보혈이 말라 버렸습니다. 감격을 잃어버렸고 눈물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복음의 뜨거운 열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흐르고 내 심령 깊은 곳에서 감사와 감격이 넘쳐나던 모습이 시간이 지나면서 차가운 돌덩어리로 변하고 있다면 누구의 탓입니까? 내 탓입니다. 내 마음이 은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를 잃어버린 것을 모르고 아직도 신앙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복음은 다시 들려져야 됩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성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받은 거룩한 백성,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성도로서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목회자로서 구별된 삶을 살고 있냐는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는 성도인 것 같은데 문 밖에만 나가면 구분이 안 됩니다. 똑같이 싸우고 거짓말하고 시기하고 욕하고 저주합니다. 이 사회에서 부정적인 사건이 터지면 꼭 교인들이 있습니다. 권사, 장로, 목사, 사모할 것 없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작은 공동체였지만 영광스러운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쓰러져가는 나라의 희망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 천대받는 사람들이 교회로 나왔습니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3·1운동 당시에 기독교인이 20만 명, 인구의 1%였습니다. 그런데 3·1운동 대표 33인 가운데 절반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금연, 절주, 애국 운동의 중심에 기독교인,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초대교회는 민족의 고난을 온 몸으로 받아내었고 민족의 중심에 서서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하는 영광스러운 교회였습니다. 안창호, 김구, 이승만, 조만식, 이동휘 등 대부분의 민족 지도자들이 거의 다 교인들이었습니다. 인구의 1%밖에 안 되는 기독교인들이 이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천주교인까지 합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30%가 넘습니다. 초대교회의 1%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지만 오늘의 교회는 거룩함을 잃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경고의 종이 울리고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정말 솔직히 너무 두렵습니다.

2011년에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16년 동안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예배설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하다가 작년 12월 첫 주에 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로 갔습니다. 근데 제가 8년 동안 소망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2011년 첫 주일 2부 예배에 참석했는데 갑자기 목사님이 스크린으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스크린 설교를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연말연시에 너무 힘들어서 감기몸살이 심하게 왔나?’ 하면서 걱정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담임목사님 방에 갔더니 목사님은 병원에 가셨고 비서가 놀래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까 1부 예배 마치고 부목사 둘이 와서 담임목사를 폭행한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주일에 목회자가 목회자를 폭행한 것입니다. 부목사가 담임목사를 폭행했습니다. 제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하나님 한국 교회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자화상이라면 우리는 다시 십자가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게 살라고 부름 받은 한국 교회가, 지도자들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오늘 우리는 정말로 구별된 자라고 하는, 성도라고 하는 자의식이 있는 것인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다시 듣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창한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셨는지 늘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를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 가지.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값을 다 치러 주시고, 내가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예수의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23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6장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7장 23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내 인생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때가 많습니다. 아직도 얼마나 많은 순간순간에 어떤 일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기보다는 내 뜻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고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까?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두 번째, 복음을 다시 듣는다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쉬지 않고 감사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빚진 자들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과 그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 더군다나 사역자로 부르심을 입은 것을 늘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2년 전에 한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2011년 11월에 8살짜리 예쁜 여자아이의 천국환송예배를 집례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후배 목사의 딸이었습니다. 장신대 신학교 교수는 담임목회를 3년 이상 의무적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교수로 사역하면서 4년 동안 담임목회를 했는데 그 때 저하고 같이 섬기던 후배 목사였습니다. 지금은 서울 영등포에 있는 큰 교회에서 담임으로 사역하고 있는데 딸이 셋입니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급하게 딸아이가 급성소아백혈병이라고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밤늦은 시간에 급하게 전화가 와서 오늘밤을 넘기기가 힘들다고 중보기도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달려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일종의 의료사고인 것 같았습니다. 치료 중에 관을 혈관 속에 집어넣다가 혈관을 건드려서 혈관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피가 속에서 흐르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백혈병이어서 지혈이 안 되는 것입니다. 피가 계속 흐르니까 병원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나중에는 하다하다 안되니까 등을 열고 그 안에 고여 있는 피를 닦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오늘밤을 넘기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저는 중환자실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교회 교인들은 24시간 릴레이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새벽에 오늘을 넘길 것 같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또 연락이 왔는데 아이의 천국환송예배를 제게 집례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피가 폐까지 스며들어간 것입니다. 호흡을 하게 하려고 기계를 넣어서 강제로 생명을 연장시켰지만 그러다가 폐 기능이 완전히 멈추었습니다. 병원에서는 포기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하면서 온 몸에서 기계를 다 떼었습니다. 기계를 넣어서 애가 아프니까 수면제를 넣었던 것 같습니다. 기계를 다 떼고 나니까 아이가 엄마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는지 눈을 떴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가슴이 찢어지는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예은아, 너는 이제 예수님한테 가는데 거긴 천국이야, 너 알지? 거긴 더 이상 아프지도 않고 눈물도 없어. 거기는 예수님이 계시니까 너 먼저 가서 거기서 놀고 있어. 엄마 아빠도 곧 따라갈게” 그랬더니 아이가 눈물을 주욱 흘리면서 아빠를 보면서 뭐라고 말을 하는데 귀를 아무리 갖다 대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는 죽어가고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고 가슴이 찢어지는데 순간 이 목사님이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이 말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이렇게 사랑한 것이었습니까?” 갑자기 하나님 아버지의 십자가에서의 처절한 사랑이 너무너무 사무치게 다가오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이가 죽어가는데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찢어지는 아픔으로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 순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처절하게 울부짖는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며 저와 여러분의 죄를 사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그 찢어지는 가슴이 불현듯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딸 아이 앞에서 주님 앞에 가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전하라고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저와 여러분이 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전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 아버지의 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지내는지 모릅니다.

세 번째,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임을 매순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탄은 ‘그래도 네가 목사야? 전도사야?’ 공격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내 것이야. 내가 너의 그 연약함 때문에, 그 죄 때문에 내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거야. 그리고 예수의 피는 너의 과거의 모든 죄, 연약하여 짓고 있는 죄, 앞으로 지을 지도 모르는 죄, 네가 고백하기만 하면 내 아들 예수의 피는 너를 구원하고 너를 용서하고도 남음이 있어. 너는 누가 뭐래도 내 것이야. 너는 거룩한 내 백성이야.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야.’

베드로전서 2장 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 복음입니까? 내가 값없이 예수의 것이 되었다는 것, 나를 무조건 사랑해 주신 그 은혜, 더 나아가 사역자로 불러주신 이것이 복음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때때로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말라비틀어진 심령에 은혜의 단비가 내립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심령이 소생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고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흐르고 심령 깊은 곳에서 감사와 감격이 넘쳐나고 마침내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된 심령으로 자기 부모님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초등학생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정말 복음에 빚진 자된 심령을 소유한 아이였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그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구원받아야 되는데’ 하며 늘 빚진 자된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엄마 아빠한테 예수 믿자고, 주일이면 교회 가자고 조릅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은 늘 그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 너 먼저 나가. 너 먼저 믿어. 엄마, 아빠는 나중에 시간 있으면 갈게” 하고는 적당히 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너무나 가슴 아프게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부모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아빠가 죽은 아들의 방에 들어가서 유품을 보는데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입던 옷도 만져보고 아이가 읽으며 즐거워하던 동화책도 만져보고 아이의 손때 묻은 장난감도 만지면서 아픈 마음으로 있는데 문득 아빠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의 일기장이었습니다. 그 일기장을 본 아빠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습니다. 그 아이가 죽기 며칠 전에 적어놓은 내용인데 기도의 형식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엄마 아빠 꼭 예수 믿게 해주세요. 하나님, 엄마와 아빠가 예수 믿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죽어도 좋아요. 내가 죽어서라도 엄마 아빠 예수 믿게 해주세요.” 아들은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아들의 유언과도 같은 기도문을 읽다가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었던가? 예수를 믿는 것이 이렇게 생명을 내어놓고 믿어야 했던 일이었던가? 그는 마침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교만을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도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고백기도를 했습니다. 자기의 구원과 아들의 생명을 맞바꾼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실화입니다. 지난 4반세기 동안 수많은 대학 청년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던 C.C.C 국제본부 부총재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복음에 빚진 자된 간절한 심령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와 여러분은 복음을 다시 들어야 됩니다. 제 심령이 메마르고 기도의 문이 막힐 때마다 되새기는 명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에 반대하시다가 순교하신 할아버님, 고 주기철 목사님이 남기신 십자가 고난의 명상입니다. 목사님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늘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셨다가,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은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목사님은 고난의 세월을 보낸 분이었습니다. 저는 주기철 목사님의 셋째 아들의 아들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희 아버님과 숙부님과 삼촌들을 통해서 할아버님 얘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지금은 소천하신 저희 숙부이신 영락교회 주광조 장로님은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한번은 평양형무소에서 목사님을 면회 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평소에는 면회를 안 시켜주던 사람들이 면회를 오라고 해서 달려갔더니 그날 따라 형무소장이 밖에까지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면서 하는 얘기가 목사님이 너무 고생을 해서 이제 내보내 드리려고 하니 모시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감사하다고 했더니 형무소장이 말하기를 자기들이 차까지 대절해 드릴 테니 가다가 평양신사 앞에서 목사님이 차에서 내릴 필요도 없이 고개만 까딱해 주시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무도 본 사람 없으니까 목사님 체면도 서고 목사님이 그렇게 해주셔야 자기들도 체면이 선다고 그렇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저희 할머니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렇다면 모시고 나가지 않는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형무소장이 안색이 확 바뀌더니 그 당시 평양형무소는 면회소가 3층에 있었는데 지하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어둑어둑한 지하실 바닥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옆에 보니까 큰 유리문이 있고 방이 있었습니다. 누런 등이 희미하게 켜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밧줄이 있고, 검도가 있고, 칼이 있고, 몽둥이가 있는데 거기가 평양형무소 고문실이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목사님이 간수의 등에 업혀서 나오는데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업혀 나오시다가 가족이 있는 것을 보시고는 반가워하고 숙부님도 “아빠” 하면서 손을 흔들었는데 형사들이 갑자기 “주 목사, 반갑지?” 하면서 목사님 팔을 잡더니 위에다가 대롱대롱 그네처럼 매달아 놓고는 몽둥이를 들고 빙 둘러서서는 그중에 검도를 들고 있는 한 명이 기합을 넣으면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공중에 매달려 있으니까 반대편으로 가면 그쪽에서 몽둥이로 내리치고 사방에서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숙부님은 자기 아버지가 얻어맞는 모습을 보면서 벌벌 떨고 할머니는 눈감고 “주여, 주여” 하며 기도하시고 증조할머니는 당신 아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맞는 것을 보고는 졸도하셨습니다.

숙부님이 보니까 아버지가 20대 맞으니까 기절하시더랍니다. 그러니까 찬물을 끼얹어서 정신을 차리게 하고는 의자에 앉혀서 가족하고 마주보게 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형사가 씩씩거리며 나와서는 할머니한테 “네 남편 빨리 회유하고 신사참배하게 하고 데리고 나가!” 하며 막 윽박지르고 욕을 하는데 할머니가 눈 감고 안 듣고 기도하고 있으니까 한 놈이 약이 올랐는지 발로 차서 저리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쫓아가면서 몇 녀석이 차고 짓이기고 별의별 욕을 다 하는데 나중에는 무슨 짓을 한 지 아십니까? 어린 자식 앞에서 소위 성고문을 했어요. 어린 자식 앞에서 옷을 벗기고 별 짓을 다 한 것입니다.

초등학생인 숙부님이 너무 놀라서 아빠를 봤더니 목사님은 눈 감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숙부님은 엄마가 저렇게 당하는데 왜 안 도와주는지 아빠가 너무너무 밉고 원망스럽더랍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온몸을 웅크리고 기도만 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지독한 년!”이라고 욕을 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더니 유리문 안에 큰 책상이 있는데 거기에 목사님을 뉘어놓고는 물이 가득 든 주전자에다가 고춧가루를 풀기 시작하더니 온 몸을 강제로 찍어 누르고는 입을 벌리게 하더니 고춧가루 물을 들이붓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처음에는 괴로우니까 고개를 흔들면서 반항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기도로 들어가니 숨을 못 쉬고 기침을 하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걸 초등학생이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조금 있으니까 기절을 한 건지 축 쳐졌습니다. 숨을 쉬려면 그걸 받아 마셔야 되니까 아버지 배가 농구공처럼 부어올랐습니다. 한 주전자를 다 붓더니 조금 있다가 목사님 배 위에다가 의자를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더니 형사들이 희죽거리면서 가족들보고 보라고 하더니 형사들 두 놈이 목사님 배 위에 주저앉으니까 목사님 귀에서, 입에서, 코에서, 눈에서 붉은 게 흘러나오는데 피인지 고춧가루 물인지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숙부님은 그걸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때부터 실어증이 걸렸습니다. 몇 년 동안 말을 제대로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증조할머니는 밖에 나와서 길바닥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주 목사 살려주세요! 내 아들 살려주세요!” 하며 거의 실성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고문 끝에 순교하셨습니다. 시신을 가져가라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서 사과 궤짝 두 개를 엮어서 온 몸이 시커멓게 썩어있고 피골이 상접한 시신을 모시고 와서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몇 분 오셔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당시 아버님 17살이고 숙부님은 12살이셨는데 할머니가 시신을 염을 하는데 손발이 나와서 보니까 손톱발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고문하면서 대나무를 잘라서 쑤셔 넣었습니다. 그리고 발은 망치로 얼마나 때렸는지 형체가 없이 뭉그러져 있었습니다. 숙부님은 그걸 보니까 또 엄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어린 마음에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내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보이는가 속상하고 창피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고문당한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님이 그 모진 고문을 견디고 끝까지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어릴 때부터 들어온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 교회가 말하는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아니었습니다. 강인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과 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문당하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하는 인간이었습니다.

한번은 아버님이 말씀하시는데 목사님이 감옥 안에 있었던 기간은 만 5년 4개월이었고 7년 동안 5번 끌려갔습니다. 7년 환난의 세월이었는데 한번은 가석방되어 나오셨는데 가족들도 너무 고생을 했습니다. 배급도 끊고 학교도 퇴학시키고 거의 굶어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버님도 어릴 때를 생각하면 지긋지긋해서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고 하실 정도로 너무 배가 고팠는데 아버지가 오시자 어머니가 어디서 밥을 구해 오셨는지 상을 차려드려습니다. 아버님하고 숙부님이 옆에서 먹고 싶어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데 목사님이 밥이 너무 맛있다고 하면서 허겁지겁 드시더랍니다.

식사 중에 밖에서 왁자지껄 소리가 들리는데 “주기철! 나와!” 하면서 형사 한 녀석이 신발을 신은 채로 문을 뻥 차고 수갑을 빙빙 돌리면서 들어오는데 목사님을 보니까 식사하시다가 손을 벌벌 떨고 계셨습니다. 그러더니 당시 팔순이신 어머님 방에 도망치듯 달려가더니 “어머님, 나 같은 약한 몸은 장기간의 고문은 견딜 수 없습니다. 어머니 제가 중간에 변절할까 너무 너무 두렵습니다.” 목사님하고 증조할머님 둘이 부둥켜안고 엉엉 울다가 끌려갔습니다.

목사님이 강하게 “왔냐? 가자” 그러지 않았습니다. 고문당하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했던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사실 집안에서는 목사님이 순교할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목사님이 순교하기 이틀 전에 증조할머님 꿈에 목사님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오셔서 절을 하고 가셨습니다. 그 얘길 듣고 할머니가 순교하실 것을 직감하셨습니다. 1944년 4월 21일 밤 9시에 순교하셨는데 오후 4시에 마지막으로 면회를 가서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뭐냐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세 마디를 하셨습니다. 첫째는 “어머님하고 아이들,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미안합니다.” 팔순의 노모를 힘들게 해서 괴로워했던 아들이었고 아이들을 제대로 못 먹이고 퇴학당하고 하는 양육하지 못하는 것을 가슴아파하는 아비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내가 주님 앞에 가면 조선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이 죽음이 한 알의 밀알 되어 많은 열매 맺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러고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너무 섭섭해서 그래도 또 하실 말이 없습니까? 했더니 간수 등에 업혀 가시다가 뒤돌아보시면서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마시고 싶소.” 이게 그가 이 땅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그는 영하 20도, 25도 내려가는 평양의 추운 감옥 안에서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을 그렇게도 마시고 싶어 했던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그 모진 고문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힘과 인간의 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는 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할 때마다 고백했습니다.

주님을 위한 고문을 피하였다가 나중에 주님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한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은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그는 고문을 당할 때마다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에 빚진 자된 심령을 소유할 수 있었고 그러기에 그 모진 고문과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할머니께서 면회를 가셨는데 면회를 안 시켜주던 사람들이 그 날은 면회를 시켜주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 보니까 목사님이 할머니를 보자마자 “여보, 나 간밤에 주님 만났어.” 두 달을 잠을 안 재우면서 고문하는데 정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감방으로 돌아와서 쓰러져 있는데 어디선가 “주기철”하고 부르더래요. 처음에는 간수가 또 부르는 줄 알고 놀랐는데 또 “주기철” 해서 이상한 느낌이었는데 또 “주기철” 하기에 “누구십니까?” 하고 겨우 몸을 돌려보니 우리 주님이 슬픈 얼굴로 서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너 마저 날 버리겠느냐?” 그러셨습니다.

그때가 아마 1938년 제27차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 이미 모든 교단들이 신사참배하기로 다 넘어갔고 고신교단이 마지막으로 남았을 때인데 그때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들을 감옥에 미리 가두고 강제로 통과시켰습니다. 그때 주님이 나타나셨던 것 같습니다. “너 마저 날 버리겠느냐?” 그때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주님. 주님은 나 위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셨는데 내 어찌 주님 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 아닙니다. 주님.” 그는 감옥에서 고문당할 때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빚진 자된 심령을 소유할 수 있었고 끝까지 충성할 수 있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심령 속에 다시 한 번 영적 부흥과 회복이 일어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다시 감격해야 되고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해야 됩니다. 메마른 감사와 감격, 눈물을 회복해야 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네가 처음 나를 만났을 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며 흘리던 눈물은 어디로 갔느냐? 네가 나를 위해서 살겠노라고 내 부름에 네가 응답하면서 주님 위해서 이 한 목숨 받치겠노라고 결단하고 눈물 흘리던 그 순간의 감격과 감사는 어디에 다 잃어버렸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 주님께서 그 구원의 감격을, 그 첫사랑의 순간을, 그 소명의 순간을 그리고 그를 위해서 십자가의 보혈을 다시 한 번 붙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 십자가의 복음을 다시 한 번 붙잡고  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이 민족을 향해 나아갑시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지금 이 자리에 부르신 것을 기억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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