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잡힌 신앙체계 형성을 위하여 체계적인 교리교육 필요

“나 떨고 있니?” 약 20여 년 전에 인기를 모았던 TV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주인공이 사형을 앞두고 했던 유명한 대사다.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과 집요함으로 교회를 공격하는 이단들 앞에 노출된 한국 교회를 생각하면서 불현듯 이 대사가 떠올랐다.

선교 130년을 맞이하는 한국 교회는 그동안 탄탄대로를 달리며 단기간에 수적 성장을 이뤘지만 내실에 있어서는 건강한 신앙의 면역 체계를 유지했다고 평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국 교회의 영적 면역 체계가 튼실하지 못한 결과 이단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단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을 포교 대상으로 삼고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교회는 예배당 앞에 ‘이단 출입을 금한다!’라는 문구를 내걸고 교인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이에 대한 현실을 잘 말해주는 연구가 있었다. 최근에 한국기독교이단상담연구소는 ‘한국에는 재림주가 40여 명이 있고 200여 개의 이단 단체와 200여 만 명의 신도가 활동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발표했다.1 결국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이단들의 날카로운 눈초리 앞에 ‘지금 나 떨고 있니?’라고 물으면서 맥을 못 쓰는 모습이 지금 한국 교회의 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일까? 한국 교회, 균형 잡힌 기독교 신앙 교육이 있는가? 우리 시대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해박한 깊이와 논리를 제공하는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는 기독교는 일시적으로 느끼는 단순한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풍성한 신앙의 내용이 있다고 밝힌다. 맥그래스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신뢰의 감정을 뛰어 넘어 예수님에 대한 일정한 내용을 믿는 것을 의미하고, 자신에게 전해진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며 신뢰하는 삶을 통해 그 믿는 내용의 옳음을 증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힌다.

결국 기독교의 성패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과 신앙의 정수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교육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공교회에 의해 검증받은 신앙고백, 즉 교리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지속적으로 교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읽을 뿐만 아니라 기억 속에 부단히 각인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는 교리 교육에 있어서 균형 감각을 상실했다.

이에 대한 근거가 있다. 지난해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출간한 ‘2013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의식조사 보고서’를 보면 “현재 목사님의 전체 사역 비중을 100%로 볼 때, 목사님 교회의 경우 ‘예배·교육·전도·친교·봉사’ 각각의 비중이 어느 정도입니까?”를 묻는 항목이 있다. 이에 대해 응답한 목회자의 절반에 가까운 46.4%가 ‘예배’ 사역에 집중한다고 밝혔고, 그 다음이 ‘전도’(17.2%), ‘교육’(14.4%), ‘봉사’(11%)와 ‘친교’(11%)의 순으로 나타났다.4 교회가 예배 사역과 설교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의 기능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 결과에 따르면 체계적인 신앙 교육은 부족하다.

같은 맥락에서 ‘목회자의 설교 주제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설교는 오직 하나님 말씀만 전해야 한다’ 라는 항목에 41.0%로 가장 많은 응답률을 보였고, 다음으로 ‘설교에서 현대사회의 주제들을 다뤄야 한다’(34.0%)에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반면에 ‘교리적 주제와 교육적 주제들을 다뤄야 한다’는 응답은 12.6%에 불과했고, ‘윤리와 생활을 강조하는 설교가 필요하다’ 라는 응답은 12.2% 수준이었다.

이 결과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교리가 신앙의 굳건한 토대가 되지 못한 채 빈곤한 신앙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이단들은 정통 기독교가 믿는 바른 신앙의 내용을 변질시켜가며 성도들을 신앙적, 윤리적으로 미혹해 활개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믿고 있는 신앙을 진술한 교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교회의 사명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책무다. 성경 공부와 교리 교육은 병행돼야 한다.

미국의 작가 제임스 보트킨(James Botkin)이 성공한 사람들의 시간 사용 패턴을 분석하면서 발견한 ‘15:4의 법칙’이 있다. 어떤 일이나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15분 동안 생각하면 4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이 법칙은 경영학 분야를 비롯해 여러 영역에 널리 알려졌다. 신앙생활 역시 같은 맥락이다. 신·구약성경 66권을 창세기 1장부터 차례대로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적용해서 신앙의 체계를 잡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는 말씀은 우리가 성경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할 필수적인 이유며 전제 조건이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만으로 충족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성경 본문 자체를 연구해서 신앙의 내용으로 정리한다고 할 때 ‘방대한 성경 본문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습득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성경은 주제별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기술돼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핵심 요의를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목회자들의 입장에서는 교인들에게 교리 교육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할 수 있다. 피교육자의 입장인 성도 역시 성경의 광대한 범위 앞에서 허둥대기 십상이다.

실례로, 목회자가 ‘교회론’을 단지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가르친다고 해보자. 창세기에서 시작해 계시록에 이르는 긴 여정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접근해서 교육한다면 교회에 대한 총제적인 이해들을 단기간에 효율적이고 논리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 성도들에게 성경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경(성경 공부)과 신학(교리)을 연결하는 작업이다. 교리는 큰 그림을 보여주고, 성경은 그림의 세부적인 면을 드러내준다. 즉 교리는 각 성경 구절이 성경 전체에서의 위치와 성경 구절의 난해한 단어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맥락에서 존 스토트는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바를 완전하게 계시했다고 해서 지적 탐구의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고 말했다. 기독교 역사상 복음의 본질을 가장 명확하게 정리한 교리 신학서, 기독교 강요를 저술한 칼뱅 역시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지혜의 무한한 보화를 보여 주시기로 의도하셨지만 여전히 성경을 학습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방황하지 않고 확실한 길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책의 저술 동기를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 구약성경과,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에서 영감된 문서로 인정한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독교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며, 동시에 기독교 신자들이 믿음을 가지는 내용이고,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따라야 할 삶의 규범과 절대 표준이다.

결국 기독교와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경은 신앙의 내용과 체계에 있어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이 성경을 사람들이 습득하기 쉽도록 체계화하고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교리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규범이 되는 성경을 통일성 있게 종합한 것이 교리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성경은 ‘원초적인 규범’(norma normans)으로 작용하고, 이 성경에서 정리된 교리는 ‘2차적인 규범’(norma normata)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 성경을 통해 구원의 길에 이르는 것이 우선적이면서도 그 구원의 교리를 더 세밀하게 알기 위해서는 성경 자체를 연구하는 것과 동시에 반드시 교리 교육이 병행돼야 한다. 교리 교육의 목적을 알고 가르치자.

그렇다면 교리 교육이 왜 중요한가? 먼저 기독교 역사에서 교리가 정립된 배경을 이해하면 교리 교육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리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역사적 이유다. 초대교회 역사가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몰락당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도 함께 없어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주후 1세기의 기독교회는 소수집단이었다.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집대성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정된 예배 형식도 없었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지식도 정돈되지 못해 혼란을 겪었다.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에서 떠난 이단들이 예수와 사도들이 가르쳤던 복음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왜곡해 유포했다. 그러므로 당시 기독교 공동체는 이단들로부터 정통 신앙을 방어하고 성도들에게 분명한 정통 신앙을 교육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둘째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이 가진 본성의 요구 때문이다. 즉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식을 정리하고 통일성 있게 이해하는 것을 좋아하는 본성이 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교리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을 조직적으로 정리한 모든 것이 교리로 인정받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의 교회들이 공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교회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보편적인 것이라고 공인할 때 비로소 교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나온 교리들은 많이 있으나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로 간주하는 것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회의(325, 381)에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라고 정리한 삼위일체교리와 칼케톤회의(451)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참하나님이시고, 참사람이시다’라고 정리한 기독론 교리다. 이 양대 교리 외에도 기독교 역사에서 합리성을 띤 인간 지성이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성경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한 것이 교리다.

이렇게 정리된 교리에는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간에 대한 교리, 인간 구원에 대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한 구원 교리,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신 교회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교회에 대한 교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뤄질, 마지막에 될 일들에 대해서 정리한 종말에 대한 교리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이 어떤 것에 근거하는지 계시와 성경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계시와 성경에 대한 교리가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교리를 교육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회와 성도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필요하다. 교회가 이 땅에 생긴 이후 세상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당신들의 정체가 무엇인가?’라고 물어왔다. 그리고 이 물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이 물음 앞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에 대해 해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무엇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면서 ‘당신들은 왜 그렇게 사는가?’라는 물음에 일관성 있고 효과적으로 대답할 방안이 필요하다. 그런 대답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인 기독교 교리다. 이런 점에서 교리 교육은 꼭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목적을 갖는다.

둘째, 성경을 논리적으로 정리한 교리를 체계적으로 알 때 신앙이 성숙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은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부속품 정비도 완벽하고 기름 탱크에 연료가 가득 채워진 스포츠카라도 목적지가 없거나 방향이 맞지 않으면 잘 달려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다. 열정을 품고 열심히 사역하고 땀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왜 영적인 일을 감당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깨달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특별히 성경에 대한 파편적인 지식을 갖고 가다 보면 영적으로 탈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에 반해 사람은 어떤 존재며, 사람에게 얼마나 구원이 필요한지, 구원을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무엇이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구원자가 되시는지, 이 땅의 교회는 무엇인지, 또 죽음 이후에 이 세상과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알 때 그 믿음의 사역은 지속성을 띨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성숙을 멈추지 않는 내적 연료를 갖게 된다.

셋째, 이단들에게 미혹되지 않고 부도덕과 신앙적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세계 교회 역사상 한국 교회만큼 이단의 발호가 극심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8 진리를 호도하고 왜곡해 전하는 이단을 구별하고 배격할 수 있는 면역 체계를 갖추려면 성경이 드러내려는 전체 그림을 파악할 수 있는 교리 공부가 필수적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교리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은 성경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편파적으로 이해한 이단들 때문이었다. 결국 이단들과 기독교를 의도적으로 폄훼하는 안티기독교 대응을 효과적으로 해야 할 한국 교회의 상황으로서는 교리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할 것이다. 특히 사람의 모든 행동의 배후에는 그 행동을 일으키는 생각이 있게 마련인 만큼 바르고 균형 잡힌 생각을 형성시켜 주는 바른 신앙의 내용인 교리는 바른 행동을 하게 하는 힘이 된다. 이런 점에서 상식과 보편적 윤리 기준마저도 순간적으로 파멸시키는 이단과 사이비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의 교리 교육은 필수이며, 성도들의 성경적인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넷째,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서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독특하게 지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서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차원의 특성도 갖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이성적이고도 논리적인 방식으로 계시하시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을 제시하시는 방식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위임 명령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파악해서 논리적으로 전달할 책무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기독교를 알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교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도들로부터 종종 ‘목사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교리적으로 맞나요?’하는 질문을 듣는다. 그럴 때마다 감성을 자극하고 듣기 쉬운 말랑말랑한 복음과 균형을 상실한 편향적인 성경 본문만으로 설교했다는 자책감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큰 공헌은 사제들의 손에만 들려있던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성도들의 손으로 옮겨준 일이다.

그렇다면 개혁신앙의 전통과 삶을 계승하는 우리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이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신학자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져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는 막연히 어려운 것으로 인식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건전한 교리를 성도들의 손에 들려주고 그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교리와 신학이 잘못되고 뒤틀렸을 때 삶의 모습도 웃음거리가 된 것을 교훈한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신학이 있는 신앙, 신앙이 있는 신학’을 지향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마시멜로 복음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균형 잡힌 신앙 체계를 형성하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교리 교육의 목적을 깨닫고 체계적인 교리 교육의 교과과정을 구성해서 목회 현장에 적용해 보자. 그리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는, 복음에 깊이 뿌리박을 수 있도록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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