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교회 60주년기념 다음세대 특별세미나

청년실업이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청춘담론이 확산되었으나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계 경제의 불황은 우리 청춘들에게도 예외 없이 밀려와 ‘88만원 세대’, ‘3포 세대’, 심지어 일자리, 소득, 집, 연애(결혼), 출산,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6무(無) 세대'란 가혹한 이름이 붙었다.

최근엔, 어떤 뚜렷한 목적 없이 방황하는 젊은 세대의 총칭으로 ‘잉여 세대’란 말을 사용한다. 잉여의 사전적 의미는 ‘쓰고 난 나머지’로, 동시대 청년들을 젊으나 쓸모없는 백수들로, 사회 변화와 발전에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해석한다. 때문에, 어설픈 힐링 보다 차라리 ‘어차피 뭘 해도 망하니까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문화비평가 최태섭의 조언이 이들에게 더 속시원할지 모른다.

1. ing+투기; 우리는 싸우는 중이다!

작년 말 잠깐 스치듯 지난 간, 엄태화 감독, 엄태구 주연의 영화 <잉투기>는 잉여들의 격투기의 준말로, 우리는 싸우는 중이라는 중의적 의미도 담고 있다. 영화는 2011년 디씨인사이드에서 실제 개최된 바 있는 잉여들의 격투기 대회를 소재로 하는데, 영화에 출현하는 청춘들은 하나같이 무력한 잉여들이다.

서른 살이 다 되도록 백수에 키보드 워리어인 태식은 ‘칡콩팥’이라는 아이디명으로 인터넷 격투기 커뮤니티에서 찌질한 자기 과시에 빠져 있다. 어느 날 자신과 대립하던 아이디명 ‘젖존슨’에게 게임 아이템을 팔러 나갔다가 속아서 폭력을 당하게 되고, 현피(現實+Player kill의 줄임말로, 온라인상에서 일어난 다툼이나 분쟁이 현실에서 직접 만나 물리적 충돌을 벌이는 일을 가리키는 인터넷 용어) 동영상이 유튜브 등 온라인 상에 급속히 퍼져나간다. 이 사건으로 태식은 ‘안면 타격 공포증’이라는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게 생기게 되고, 이후 복수를 위해 격투기를 배우며 젖존슨을 찾아다닌다.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져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너무나 진지한 이들의 모습, 그러나 목표도 투지도 없이 살아가던 잉여들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고, 현실과 부딪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결국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담아 막을 내린다.

승자독식의 경쟁사회에서 생산력이 없는 사람들을 잉여로 규정하고 무시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느새 자리했다. 그러나 현실은 잉여 인간을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가 아닌가!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스펙을 갖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은 생산력이 없는 잉여들이 아니라, 사실은 생산력을 가질 기회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아닌가!

상황이 이러한데, 교회는 청년사역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학복협 상임대표 권영석 목사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 헌신하려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에서 당분간 현상유지만 해도 선방일 것이라 말한다. 그저 열심히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급변하는 상황에 부응하되 장차 미래를 이끌고 가야할 청년 세대에게 심어야 할 핵심가치를, 기술적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할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다른 방식의 생산력을 찾아야 한다. 농부가 있는가 하면 비즈니스맨이 있고, 배우도 있듯이 꼭 무엇을 만들고, 컨설턴트나 의사가 되는 것만이 생산이 아니지 않는가! 무시당하고, 무능력한 잉여 인간으로 규정짓기 전에, 하나님의 창조성으로 그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사실, 한글이 그 우수성과 효율성을 맘껏 발휘하게 된 것은 기독교를 만나 가능했던 일이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이후에도 4백년 넘게 한자를 숭상하는 보수세력에 의해 잊혀진 글로 남아 있다가,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나라 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신구약성경이야말로 한글이 만들어진 이래 한 권의 책속에 가장 많은 어휘와 문장을 담은 책이며, 이윤재, 최현배, 김윤경을 비롯한 기독교인 학자들의 한글연구와 기독교문서가 있었기에, 소외당했던 이들에게 능력개발의 기회를 제공하며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시민사회가 건설될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현재를 가능케 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갈 사회 지도력을 갖고 있었다. 이제 상황의 급변 아래, 시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게 된다. 특별히 청년세대에게 제시할 수 있는 현재와 미래는 무엇일까?

2. 제자훈련; 또 하나의 자기계발서인가?

위기에 처한 청춘을 구출하기 위해 서점가에는 청년들을 위한 '자기계발서'가 즐비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 청춘의 멘토를 자처하는 강연도 쏟아진다. 이들에게 자기계발이란, 당연 취업준비로 받아들여진다. 즉 외국어공부, 학점관리, 자격증 취득, 인턴, 봉사활동, 공모전 참가, 체력관리, 외모 가꾸기, 자기소개서 작성 연습, 프리젠테이션 및 스피치 훈련 등을 말한다. 전인적 계발(啓發)이라기보다는 기능적 개발(開發)의 성격이 짙다. 당연히 자기희생이 따르고, 성과도 쉽게 나타나지 않아 답답하지만 언젠가 잘 될 것이라 자신을 위로하고 긍정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식이다.

오찬호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이같은 자기계발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청년들에게 자기계발이란 취업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자아실현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취업을 위한 활동만이 자기계발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 둘째, 결과가 보장되지 않지만 다른 대안이 없어 그저 계속 할 수밖에 없다. ‘S전자 합격=성공한 삶’이란 틀을 깨지 못하는 한, 주문 제작한 기성품이 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래서 셋 번째 특징이, 이 고통을 버티기 위해 그들은 자기보다 열심이지 않는 게으른 자와의 비교에서 현재에 대한 위안과 만족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론 취업을 못 하고 있는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면서 또 한편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반대하는 이율배반적이다. 자기보다 게으른 자들에 대한 부당한 평등에 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방대생의 차별에 찬성하고, KTX 여승무원들의 정규직 요구에 차가운 태도를 보인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동정은 하되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열등감을 나 보다 못한 자들에 대한 우월감으로 스스로 위로하면서.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셈이다.

구원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며 제자도를 구현하는 교회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절박한 현실을 외면한 천상의 구원이 되어서도, 그렇다고 지나친 공감에 거룩한 잉여를 묵인하며 위로하는 값싼 은혜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3. 복음의 날개짓으로

잉여세대라 하여 대책 없이 놀지만 않는다. 자기계발 논리에 장악된 청춘들은 죽어라 노력하며 악착같이 살아간다. 빈농의 자식이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었고(정주영), 청소부를 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고(이명박), 비닐하우스 집에 살면서도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는(양학선) 식의 자기계발서의 논리 안에서 고통의 비교법칙에 통제 당하기도 하지만, 주류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그들만의 새로운 방식의 생산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최근 기윤실에서 발표한 ‘2013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한국교회 신뢰도는 5점 척도를 기준으로 ‘신뢰하지도 불신하지도 않는 수준’인 3점보다 낮은 2.62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6년 동안 4회의(18.4%, 19.1%, 17.6%, 19.4%) 반복측정에도 불구하고 낮은 수준에 머문 것으로 그 원인이 특정 상황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임을 시사한다.

특히 가장 신뢰하는 종교로 가톨릭(29.2%)>불교(28.0%)>개신교(21.3%) 순으로 나타났는데, 세대별로 볼 때 20대는 불교(33.4%)>가톨릭(26.6%)>개신교(18.9%) 순으로, 20대에서 불교는 평균 이상의 신뢰를, 개신교는 평균 이하의 신뢰를 보인 것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위기는 기회라 하지 않는가! 지금이야말로 세상이 말하는 힐링과 다른 소망과 구원이 선포되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교회는 주류에 매뉴얼 화 된 제조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성에 기초한 새로운 매력을 제시해야 한다. 승자만 살아가는 세상에 또 다른 방식의 삶의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필자는 이런 고민에서 지난 2년간 ‘세나비(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비전)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이른바 복음의 나비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프로젝트의 개요는 간단하다. 요사이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청년들의 꿈과 비전에 힘을 실어주면서 동시에 그들을 자극할 바람으로 그 형식을 차용했다.

우선 소재와 형식에 제한 없이,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이 모여 소정의 신청서를 작성한다. 신청서는 여느 공모전 못지않게 구체성을 요구했다. 서류심사에 통과한 팀은 청년예배 후 저마다 프로젝트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했고, 이에 청년들에게 공감을 얻은 팀이 최종 선택되는 방식이었다. 최종 선택된 팀에는 적게는 2백만원에서 많게는 9백만원까지 프로젝트별로 지원했다.

선정된 팀 중에는, 아이티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청년이 주축이 되어, 여러 가지 필요한 것 중에, 그 나라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동화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동화제작에 관심과 재능이 있는 친구들이 모여, 성경적 세계관으로 그 나라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 동화를 제작, 책으로 출판하여 보급한 팀이 있다. 다녀 온 후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껏 아이티에 많은 구호품과 도움이 있었지만, 자기 언어와 자기 나라 아이들의 모습을 주인공으로 한 동화책을 만들어 온 경우는 처음이라며 반겼다고 한다.

그 외에, 안양지역 고등학교에 학습의욕은 없으나 배우를 지망하는 친구들을 모아 그들의 이야기로 뮤지컬을 창작하고 지도하여 공연을 한 팀도 있었고, 자살예방 단편영화를 제작한 팀도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현지 어린이들의 탁월한 미술성을 보고, 현지 아이들의 그림을 패턴으로 안경을 디자인하고 제작, 판매하여 수익금으로 마다가스카르 어린이 예술교육을 지원한 팀도 있다.

리얼 캐롤팀은 상업성에 물든 크리스마스를 되돌려보고자, 크리스마스에 생일 축하를 받으실 분은 예수님이심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장르의 생일 축하곡을 만들어 앨범으로 제작, 쇼케이스를 통해 뜻을 알리며 판매했다. 처음 6명으로 시작한 이 팀은 앨범 제작에 80여명이 재능기부로 참여했고, SNS를 통해 총 2300여명이 이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비단, 도시 중대형 교회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얼마든지 상황에 맞게 변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몇몇 교회들이, 선교단체들이 연합할 수도 있다. 이제 교회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다른 매력으로, 동시대 청년들을 끌어안고 복음으로 날개를 달아주어야 한다.

4. 틈새에서 전면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발행한 <한국 기독교역사 100선>이 말해주듯, 한국 근대화를 말할 때, ‘조선YMCA’를 빼 놓을 수 없다. 기독교 청년운동 단체로서 한국 근대화 곳곳에 족적을 남기며 한 몫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조선YMCA가 사업을 펼쳐 가는데 있어 두 가지 기본 정신이 있었다. 하나는, 청년 개인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며, 그 청년들을 연합하여 하나로 묶기를 추구한다는 ‘파리선언’이었고, 또 하나는 정신적, 지적, 사교적, 신체적 요소를 모두 전인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4중 목적사업인데, 그 일환으로 지덕체의 균형 잡힌 인간형성을 위해 체육 사업을 확대한 것이다. 야구, 축구, 배구, 농구 등 근대 스포츠 종목의 절반 이상이 YMCA를 통해 시작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YMCA뿐 아니라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가 김교신이었다는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기독교는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미치며 지도력을 이어왔다. 이에 작금의 청년사역도 변화한 환경에 부응하여 청년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드는 새로운 청년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얼마 전 시민운동 활동가로 있는 청년을 만났다. 청년들의 주거문제에 대해 꾸준히 제기해 온 ‘민달팽이유니온’이나, 배달 아르바이트생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도미노 피자의 ‘30분 배달 보증제’ 폐지에 앞장선 ‘청년유니온’같은 2030세대 청년 활동가들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청년이다. 외가로 따지면 5대째 신앙의 내력을 이어온 자랑스런(?) 후손인데, 지금은 ‘가나안 교인’이라 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 생각하고 생활고에 힘들어도 사명감으로 하고 있는데 주위 반응이 너무 싸늘하다는 것이다. 차라리 해외선교사가 되겠다 했으면 교회든 가족들에게 축복을 받았을 텐데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이내 ‘앞으로 이런 일도 축복받으며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하며 다시 웃었다.

역사가 요청하는 새로운 청년운동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청년들의 삶의 틈새로 깊숙이 파고들 때, 들불처럼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청년 그리스도인의 감소에 한탄만 아니라, 예전 같지 못한 역사인식과 전인적이지도, 치열하지도 못한 운동성에 대한 각성과 꾸준한 노력으로 교회의 지도력과 영향력이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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