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와 교회의 갈등을 보는 기독교적 한 관점

한국 사회와 교회에는 갈등이 많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그 해결을 구하게 만든다. 갈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갈등의 해결책이 없는 것이 문제다. 근본적으로 보면 어떤 문제든지 거기엔 해결 방법이 있다. 다만 해결책을 찾지 못하든지, 찾아도 실천하지 못할 뿐이다.

이 발제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갈등과 그 해결에 대한 기독교적인 한 관점이다. (1) 먼저는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2) 다음으로 갈등의 해결에 대한 세 단계를 살핀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갈등에 연관된 구체적인 한 시각 곧 가설을 전개한다. 특히 이 부분은 문제제기 차원에서 논지를 전개하는 것이니 앞으로 한국 교회 안에서 깊은 토론이 있으면 좋겠다.

1. 갈등과 그 해결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

기독교 신학을 어의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지식’이라고 보고, 구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 설명과 그에 따른 삶의 실천’이라고 정의한다면 기독교적인 모든 표현은 근본적으로 신학적일 수밖에 없다. 신학을 이렇게 본디 뜻으로부터 이해한다면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모든 문제와 그리고 거기에 연관될 수밖에 없는 사회와 세계의 모든 문제는 어떤 신학적 시각과 입장을 갖고 있느냐에 걸려 있다. 그리고 신학은 본질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한다.

갈등과 그 해결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의 성서적 근거에서 창세기 1장이 근원적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근원적으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라고 볼 수 있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혼돈’ 곧 카오스란 단어를 주목하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은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를 질서와 보기에 좋은 상태로 바꾸신다. 엿새 동안 진행되는 작업은 말씀의 명령에 따라 혼돈에서 아름다운 질서가 창조되는 과정이다. 일곱 번 반복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기록은 혼돈이 극복된 후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다. 하나님의 뜻 곧 말씀이 다스리는 상황이 이루어진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성경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나라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당신의 다스림을 사람에게 맡기신다. 창세기 1장 27-28절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복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성서적인 복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과 연관된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복의 개념에서 중심이다.

창세기 1장의 상황을 구조적으로 성경 전체에 연결시켜 조금만 더 살펴보자. 처음 아담(사람)은 하나님이 맡기신 다스림에 실패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보내셔서 이 다스림을 성취하신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과 로마서 5장 17-19절을 보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취적(先取的)으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을 교회 공동체에 위임하셨다. 창조 때 있었던 말씀의 명령이 존재의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 위임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분부한 모든 것"은 말씀을 뜻한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은 말씀이 삶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말씀에 따라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신 창조의 작업을 다른 상황에서 다른 표현으로 명령하고 있는 것인데, 근본적인 흐름은 같다.

창세기 1장을 근거로 전개한 위의 내용에 이 발제의 주제를 연결시킬 수 있다. 갈등은 혼돈에, 갈등의 해결은 창조의 질서와 아름다운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뤄가는 과정에 대입할 수 있겠다. 사회 전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전체로 볼 수 있고, 교회는 하나님이 당신의 다스림을 맡기신 공동체라 할 것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는 갈등을 일으키는 주체가 아니고 해결의 주체여야 맞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교회까지도 갈등을 생산해내는 원인인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깊이 이해하고 갈등에서 회복되면서 교회는 비로소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갈등의 해결에 대한 세 가지 틀

견제와 균형 - 법치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견제와 균형’으로 작동한다. 삼권분립이란 고전적 정의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견제와 균형을 현실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근거는 법이다. 입법, 행정, 사법의 세 분야가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법에 근거한다. 사회의 각 집단이 서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연관되는 상대를 견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관련 당사자의 논의를 거쳐 법을 제정하고 제정된 법을 집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견제와 균형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에 더 익숙하다. 법(法)보다 정(情)의 문화가 더 강하다. 지역감정이라는 문제도 우리나라의 이런 문화적 특성과 맞물려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독일에도 지역적 특성과 지역 집단이 있다. 바이에른 지방은 그런 색깔이 워낙 강해서 ‘바이에른 공화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에 주로 근거를 두고 있는 정당이 기독교사회당연합(CSU, Christlich-Soziale Union)이다. 그러나 이 정당의 존재나 이와 연관된 활동을 지역감정으로 보지 않는다. 독일의 법치 구조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워낙 정과 사람 관계에 따른 문화가 깊어서 혈연, 지연, 학연 집단이 아주 쉽게 법치적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고 파괴하는 쪽으로 작동된다. 귤나무가 회수를 건너면 귤이 아니라 탱자가 열리는 식이다. 사람에 따라서 변하는 고무줄 법이 아니라 계속해서 훨씬 더 공정하게 법치 구조가 작동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견제와 균형을 세우는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조화와 공존 - 덕치

법치보다 덕치(德治)가 더 상수다. 견제와 균형이 기초적인 골격이요 나무의 가지라면 조화와 공존은 그 기초에서 성숙하면서 자라는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와 사회 통치의 방법에서 법치보다 더 뛰어난 것을 지향해왔다. 중국이나 조선의 유교적인 통치 사상이나 플라톤의 철인(哲人) 정치사상 또는 16세기에 저술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등이 그런 것이다. 조화와 공존이라는 두 개념은 서로 깊이 연결돼 있다. 조화 없이는 공존이 불가능하고, 무릇 모든 종류의 공존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나름의 조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전 지구적인 상황과 연관된 공존이라는 개념은 20세기 후반의 산물이다. 인류 역사에서 지구 행성 전체와 그 가운데 사는 사람이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한 최초의 시기가 20세기 후반이다. 경제구조, 기후 변화와 환경문제, 군비, 민족과 인종 간 인구 이동 등 여러 사안과 연관하여 인류가 한 배를 탔다는 것을 분명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중동을 비롯한 전 세계의 각 지역 내에서도 공존하지 않으면 서로 심각한 위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의식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조화는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공존이 가능하다. 법치를 넘어선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제적으로 넓어지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남북의 분단과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대립돼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 국제적인 이런 인식이 충분히 넓어지지 못하고 있다.

사랑과 상생 - 하나님 나라

법치에 근거한 견제와 균형이 법의 공권력을 위임받은 정부가 주로 할 일이라면, 덕치에 근거한 조화와 공존은 많은 부분 시민단체가 담당할 몫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양자가 같이 협력하여 협치(協治, governance)를 지향하면 사회적으로는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법치가 덕치를 배제하면 공권력의 통치(統治, government)만 남고, 덕치를 지향한 운동이 제도적인 법치를 부정하면 혁명을 통한 변혁으로 가게 된다.

법치와 덕치가 사회적인 발전과 인류 역사의 경험에서 나온 산물이라면, 종교와 신앙의 측면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사랑과 상생’의 사회다. 기독교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이다. 사랑과 상생은 조화와 공존보다 한 걸음 더 높은 또는 신앙적으로 승화된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 이에 대한 구조적인 틀을 찾을 수 있다.

예수는 당시의 두 대립항인 유대교 정통주의와 로마 제국주의 양자에서 어느 쪽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양자의 대립을 뛰어넘어 양자를 같이 끌어안는 제3의 가치를 제시했다. 그것이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상호대립과 적대적 관계가 해소되는 사랑과 상생이다. 예수는 이것을 하나님 나라로 표현했고, 그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활동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한다. 성경에서 세 구절을 보자. 세 구절은 각각 예수의 사역 일성, 사역의 중간, 지상에서 하신 마지막 일을 표현한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5).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20).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사도행전 1:3).

3. 한국 교회 갈등의 근본 원인에 대한 한 가설 - 이분법적 신학과 신앙의 문제

한국 교회의 현재 모습의 역사적 흐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특히 지난 40-50년의 역사 흐름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것은 지금 우리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느냐에 연관돼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의 일반 사회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갈등이 있다. 교회 안의 갈등에서 상당 부분은 사회적 갈등의 구조와 거의 같다고 보인다.

한국 교회의 최근 역사를 말하면서 별 이견 없이 말하는 관점이 있다. 70년대가 한국 교회 부흥의 초석이며 80년대에 한창 부흥을 누리다가 90년대 중반에 꺾이기 시작해서 현재는 여러 가지 점에서 하락세라는 것이다. 이 논지에서 특히 70년대를 살펴봐야 한다.

1973년의 빌리그래함전도대회, 74년의 엑스플로대회 등을 비롯한 대형전도 집회가 5·16광장(현재의 여의도공원)에서 열렸다. 100만 명에서 200만 명까지 모인 이 집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신앙을 가졌고, 선교사나 목회자로 일생을 헌신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한국 교회의 흐름은 70년대의 헌신과 부흥 덕이었다고들 본다. 여기에 근거해서 이런 논리가 일반적이다.

(1) 70년대의 헌신과 신앙적 열정은 좋았다.
(2) 현재 한국 교회의 여러 문제점들은 그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지가 맞는가를 물어야 한다. 문제제기는 이런 것이다.

(1) 70년대에 신앙을 가졌고, 그때 헌신했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한국 교회의 리더가 되었고 그들이 지금 50대부터 80대까지 아직도 한국 교회에 있다. 이른바 70년대의 헌신자들이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천년대로 넘어와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대형교회를 비롯한 중심적인 목회 현장과 선교와 사회적 활동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2) 그런데 현재의 한국 교회는 윤리 도적적인 약점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신앙 자체의 명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 그 앞에서 리더십을 갖고 끌어가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언감생심으로 보인다.
(3) 그렇다면, 현재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은 결국 70년대에 헌신한 리더들의 문제 아닌가? 그리고 더 깊이 들여다보면 70년대에 한국 교회에 강렬하게 확장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형태에 어떤 약점이 있는 게 아닌가?

이 가설을 한 번 이런 식으로 표현해 보자.

어느 공직자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공직자들이 일주일 정도 공무로 출장 갈 때, 사실상의 업무 내용은 2-3일이면 끝나는 정도고 나머지 2-3일은 출장지에서 놀거나 아니면 집에 돌아와 며칠을 쉬다가 출근한다. 물론 출장 수당은 일주일 치를 다 받는다. 이런 것이 공직 사회에서 오래된 관행이고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대하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공직 사회에서 오래된 이 관행은 하나님 앞에서 본다면 정직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보실까? 신앙인으로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출장 문제와 연관해서는 어떤 것일까 ….'

이 사람이 그 뒤로는 2-3에 공무를 마치고 다시 직장에 출근하면서 일했다. 어떤 파장이 있었을까? 동료들에게 질타를 받고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는다'고 말이다. 만일 이 사람이 국장급 정도의 직위에 있다면 적어도 자신이 권한을 갖고 있는 부서 내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현실적인 변화가 있기도 할 것이다.

70년대 한국 교회가 받은 신앙은 어떤 점에서 ‘이분법적인 신앙과 신학 형태’가 있는 것 아닌가? 교회 안에서 받은 직분은 하나님의 일이지만 사회적인 활동이나 직장에서 하는 일은 세상의 일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한창 양적으로 부흥할 때 한국 교회의 리더들은 사회적인 공정함과 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아닌가? 물론, 한국 교회의 진보적인 그룹에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헌신한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것은 한국 교회 전체를 놓고 하는 말이다.

더구나 국민의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이슈가 뒤로 밀리면서 한국 교회는 전체적으로 법치적 민주주의, 상생의 시장경제, 인도적 인륜도덕에서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근거한 바른 방향을 이끌어갈 전망이 부족했던 것 아닌가?

오늘 발제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갈등'에 대한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나 이분법적 신앙은 갈등의 원인을 구조적으로 그 안에 품고 있게 마련이다. 특히 신앙과 신학에서 이분법적인 입장은 그 집단 자체를 확장시키고 방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사회 전체를 이끌고 가는 통합적 리더십은 발휘하지 못한다. 신앙의 위기 상황에서 순교적 신앙은 가능하지만, 일반 사회 전체에 하나님의 큰 섭리를 전하는 데는 약점을 가진다.

7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 역사와 연관된 이 가설의 구조는 신학적으로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신앙적 정체성과 사회적 연관성 사이의 문제다. 신앙과 행위 또는 믿음과 윤리의 문제다. 기독교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어온 문제다.

이 발제 초두에서 말한 본질적인 의미의 신학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 교회 안에 있는 갈등의 원인은 어쩌면 상당부분 신학적 입장과 태도에서 발생한다고도 보인다. 본질적인 의미의 신학과 진실하고 헌신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란 주제가 논의된 까닭이 이런 것이다.

다시 한 번 바라기는 본 발제의 세 번째 덩어리의 한 가설이 한국 교회 현장과 신학계에서 본격적으로 토의되었으면 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