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18) 한목협 제14회 전국수련회 개회예배

본문: 마태복음 17장 1~20절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일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초기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병도 고치고, 특별한 기적도 행하시고, 또 귀신을 쫓아내시기도 하시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주제를 당당하게 선포하시는 주님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런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자랑거리요 대단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관심을 끌게 되자 정작 주님의 태도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제자들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그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기 충분했습니다. 제자들은 황당하기도 했을 것이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많은 갈등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 이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주님과 동행한 제자들은 그 곳에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아주 신비한 황홀경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체험한 것은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거룩한 광경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해와 같이 빛나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대표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조상들과 주님이 서로 대면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제자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이 보통의 산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나타나 메시야인 주님과 이야기를 하는 곳이니, 그 얼마나 신성한 곳이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그 장소를 다른 장소와 구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장소를 특별하게 구별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세 제자들을 대표해 주님께 흥분된 목소리로 간청을 하게 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절). 베드로에게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하는 그 곳은 바로 성지(聖地)와도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한 그 장소를 신성하게 생각했고, 따라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 성전을 지어 주님께 경배하고 싶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으니, 유대인의 한 사람인 베드로의 흥분이 어떠했을지는 능히 상상하고도 남습니다. 진정으로 그는 그곳이 성스럽다고 생각했고, 그 성스러운 곳을 떠나지 않고 진정으로 그 곳에서 믿음의 조상들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마음은 자연스런 종교적인 감정입니다. 우리 기독교를 포함하여 세계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초자연적인 경험이 이루어진 물건이나 장소는 단순한 물건이나 장소가 아닙니다. 그러한 물건이나 장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신성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신성한 물건이며, 베들레헴은 주님께서 탄생하신 곳이라 신성한 장소이며, 얍복강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곳이라 신성한 강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신성한 물건을 지니고, 그런 신성한 장소를 방문하여 그 때 일어난 거룩한 경험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베드로에게도 변화산은 그냥 산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산에서 거룩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주님과 만난 장소이고, 또 주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난 장소이니, 그 얼마나 거룩하고 신령한 장소이겠습니까? 당연히 베드로는 그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고 그 장소에 비록 초막이지만 성전을 지어 그곳을 숭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장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베드로의 이 같은 태도는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의 태도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고 주님께 말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뿐 아니라 유대인들 또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장소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주님의 대답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라는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영과 진리’라는 내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주님은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이 이 사실, 즉, 신앙은 외적인 물건이나 장소, 또는 형식이나 제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이 중요하며, 도리어 그러한 외적인 것들에서부터 자유로울 때만이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신앙을 외적인 형식에 얽매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외적인 형식이나 조건에 얽매여 신앙의 본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먼저,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로서 우리는 신앙의 내적인 자유를 선포하기보다 교인들을 외적인 제도로서의 교회에 얽매이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니고 바로 우리 교회에서만 예배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이다” 또는 “다른 교회에 십일조 하는 것은 진정한 십일조가 아니고 바로 우리 교회에 십일조를 하는 것만이 진정한 십일조이다” 등 끊임없이 다른 교회와 자신의 교회를 분리하고, 자신의 교회야말로 진정한 교회라고 신성화하였습니다.

‘내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가르쳐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참된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라는 사도들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오직 유형적인 교회로서 자신의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만을 목표로 두는 개교회주의는 지금 도리어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내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라는 개교회주의는 잘못된 교파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교단만이 복음에 합당한 교단이며 타 교단은 이단적이라고 주장한 결과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외국과는 달리 한국교회는 교파의 벽이 너무 높아 그 누구도 그것을 허물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런 개교회주의는 자신의 교회만을 성장시키려는 세속적 사고에 집착할 때 더욱더 심합니다. 또한 교인의 숫자만 많고, 건물을 크게 짓고, 헌금이 풍성한 그런 교회관을 목표로 할 때 발생합니다. 이런 교회관으로 성장한 교회는 총회나 어떤 단체의 의견도 듣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의 큰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교회는 기존의 교회의 법을 어기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으로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게 합니다. 주님은 내적인 자유를 가르쳐 주셨지만, 사마리아 여인처럼 신자들은 “이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저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가?” 따지며 외적인 제도로서의 교회에 얽매이고만 있으니, 그들을 양육하는 한 목회자로서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이런 개교회주의는 첫째,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킵니다. 주변의 교회들을 같은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보아 교회의 통일성과 협력을 파괴시킵니다. 둘째, 지나친 개교회주의는 독선과 아집으로 빠져 극단적으로 흐를 때 이단으로 되기 쉽습니다. 개교회주의에 근거하여 성장, 발전한 교회는 노회와 총회 그리고 교계의 올바른 조언을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셋째, 성도들을 교회에만 묶어 놓아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그리고 봉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못하게 합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의 영역이 교회 영역에 한정되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공헌하지 못하고 기복주의에 빠집니다. 개교회주의적 사고는 신앙을 사적으로(private)으로 만들어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교육 등등에서 나타나는 복음의 공적인(public) 측면을 간과하게 됩니다. 복음의 공적인 측면을 간과하는 신앙은 일제시대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었던 역사참여적인 전통을 깡그리 없애는 것입니다.

개교회주의와 더불어 물량주의는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신도수, 교회 건물의 크기, 연간 예산, 헌금의 규모, 목회자 사례비와 승용차 모델에 이르기까지 물량적 지표들이 목회의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고, 수치로써 환산할 수 없는 질적인 것보다는 수치로써 환산할 수 있는 양적인 것을 선호하는 태도가 한국교회에 짙게 깔려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장주의적 물량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적인 경제구조로 인한 사회적 약자의 고통,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외국인 노동자와 새터민의 급증으로 인한 문제 등의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을 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신앙을 사적인 일로 만들어 교회의 부흥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때 우리 한국 사회는 각종 문제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과 연결시켜 보면, 베드로가 ‘산 위의’ 성스러운 장소에서 주님을 모시면서 내적으로 평안한 삶을 살려고 결심한 그 때, ‘산 아래’에서는 한 사람의 아들이 귀신이 들려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산 위의 거룩한 장소에 머물러, 그 거룩에 취해 산 아래의 고통을 잊어버린 것처럼, 한국교회 또한 교회 내적인 일에만 머물러 교회 외적인 고통의 문제를 철저히 잊어 버렸습니다. 또한, 교회 외적인 일에 관심을 갖더라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사회봉사 차원에서만 관심을 가져 복음을 더욱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사사(私事)화’는 ‘영성’을 이해하는 데에서도 보입니다. 보통 영성이라고 하면 기도생활, 개인경건생활 등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교회는 개인적 영성을 강조하여 사회와는 유리되어 외딴 섬에서 생활하는 것을 온전한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예언자적인 정신을 상실한 것이며,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온전한 영성은 개인적 영성 뿐 아니라 사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소금과 빛이 되는 사회참여적인 영성을 포함해야 합니다. 국가적, 민족적, 세계적인 문제까지 하나님의 사람의 입장으로 예언하는 사회참여적인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기독교 신앙이 게토화되어 사회와 유리된 생활로 되든지 사회의 변화의 촉진제로서 교회가 서지 못할 것입니다. 목회자는 사회 발전에 책임이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하늘의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산 아래의 사람들의 고난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고난을 심리적으로 위로하는 차원을 넘어 복음으로 구조적인 악까지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산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의 고난을 돌아보셨듯, 우리도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역사의 현장에 똑바로 서서 역사의 고난을 우리의 고난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영국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역사참여적인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노예제도가 영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가장 큰 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무려 56년만인 1833년, 드디어 영국 의회는 노예 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는 노예폐지운동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복권 제도를 20년에 걸친 의회에서의 공방 끝에 폐지시켰고, 가난한 사람들이 병이 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설립하게 하였습니다. 또 과다한 노동 시간을 제한시키고, ‘어린이노동보호법’을 통과시키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더 나아가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타개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구제보다는 직업 교육을 시키고, 취업을 알선하는 제도를 정부가 구체적으로 실행하게 했고, 영국의 야만적인 형벌 제도를 대폭 개정했습니다.

이런 역사참여적인 신앙은 비단 윌버포스뿐이 아닙니다. 본 회퍼와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역사참여적인 신앙이 무엇이라는 것을 보여준 신앙의 위인들입니다. 본 회퍼는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는 명제를 통해 인간은 값싼 은혜에 중독되고 말았다”고 말하며 행동이 없는 신앙을 비판합니다. 그가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신앙인은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입니다. 흑인 차별을 없애기 위해 온몸으로 저항한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이러한 행동하는 신앙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킹 목사는 어릴 때 백인 친구와 같이 놀지 못하게 친구의 엄마가 막는 것을 경험하고 인종 차별의 비참함을 알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목숨을 걸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투쟁했습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존재하는 가장 큰 목적은 바로 한국교회의 갱신과 일치와 섬김입니다. 교회 갱신을 위해 우리가 먼저 바라보아야 할 곳은 바로 산 아래에 있는 세상입니다. 산 아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민초들의 역경입니다. 그들의 고난을 복음으로 위로하고 복음으로 개혁할 때 진정으로 교회가 갱신될 것입니다. 교회 내적인 문제만을 개혁한다고 해서 교회가 갱신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외적인 문제에도 올곧은 목소리를 낼 때, 그 때 진정으로 교회가 갱신될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의 조화에 있으니,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올곧게 교회를 갱신하는 일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소속 목사님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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