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냥질이라도 해서 살 수 있었으니 다행했다. 양식이 없어 굶주려 죽는 절량농민의 보릿고개, 6․25 피란민과 전쟁고아, 가뭄과 흉년 그리고 어쩌다가 밑바닥 생활로 전락했던 사람들이 동냥질을 했고,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인심이 있었다.

강선봉 노인(75세)이 24세 때 소록도에 어머니와 아내를 그대로 두고 혼자서 빈손으로 뛰쳐나와 누나를 찾아갔다. 반겨주는 사람이나 도와줄 사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지 먹고 살아야 장래 일을 붙잡을 수 있었다.

한센병을 앓았던 분들 가운데 한 친구의 도움으로 동냥질에 나섰다. 새벽 4시, 동냥 포대에 항고와 숟가락을 챙겨 넣고 함양으로 갔다. 세 사람이 나누어 나섰다. 첫 동네에서 아침을 얻어먹고 동냥을 시작해서 오후 늦게 만나기로 했다.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어렵게 입을 열어 "밥 좀 주세요" 하고는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 "밥상을 차려 주거라" 하는 어른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자가 사랑채 마루에 밥과 시래기 국과 김치를 차린 밥상을 내주었다. 감동이었다. '아-! 세상에 이런 집도 있구나' 기대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인심이 메말라도 다 그렇지는 않다. 어려운 사람의 형편을 이해하고 나누며 돕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베풀면서도 낮은 자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도 있다. 다음 집 문전에서 또 다음 집에서 옮겼다. 어떤 부인은 쌀 한 줌, 어떤 여자는 보리쌀 한 줌을 주었다.

개가 죽으라고 짖는 것이 힘들었다. 개울에 내려가 얼굴과 함께 흐르는 눈물도 씻어냈다. 다음 마을로 가서는 스스로 불쌍한 생각에 뒷동산으로 올라가 멍하니 앉았다가 잠이 들었다. 점심도 건너뛰었다. 동냥포대는 바닥도 채우지 못했다. 거지입학 날 성적이 낙제점이었다. 소록도에 그대로 있었으면 먹는 것 걱정은 없었을 것인데 하는 후회도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동행했던 친구가 말했다. "너무 편하게 살아서 그래. 울기도 많이 울고, 약이 올라야 악바리가 되지. 세월이 약일끼다." 그 말이 옳다. 빈 털털이가 도둑질하지 않고 살려면 부끄러움이나 자존심 같은 것은 다 내려놓아야 했다.

다음 날은 친구가 동행해 주었다. 그가 '동냥 좀 주세요' 하면 선봉은 '둘이요' 하고 소리를 지르기로 했다. 쌍거지가 된 것이다. 약속대로 그가 "동냥 좀 주세요" 하면 선봉은 "둘이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한 사람에게 주는 량에 조금 더 주었다. 어떤 사람은 둘씩이나 몰려다닌다며 핀잔을 주었다.

동냥질 선배가 "아, 한 줌도 안 되는 동냥 좀 주면서 뭘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하쇼? 그럼 둘이 두 번씩이나 와서 귀찮게 하리까" 하며 내질렀다. 그러고는 거지가 때로는 독해야하고, 또 깡다구를 부릴 때는 부려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렇게 동냥기술을 실전으로 배웠다.

얼마 후에는 혼자 나섰다. 비가 쏟아졌다. "밥 좀 주세요" 하고 처마아래 서 있으니 밀짚모자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밥을 담은 항고에 떨어졌다. 밥을 주는 부인도 투정이었다. 항고는 밥과 김칫국 범벅이 되었다. 어느 집 퇴비막에 앉아 그 밥을 먹으려니 자신이 처량해서 한 참을 울었다.

그래도 박을 밀어넣고 일어섰다. 비 때문에 사람들이 있을 때 부지런히 해서 한 줌이라도 더 얻어야 했다. 오후 3시가 되니 동냥자루는 한 말쯤 채워졌다. 다음 날도 그렇게 얻은 양식을 팔아 현금으로 바꾸었고, 얼마 후에는 요긴하게 쓸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62년. 소록도를 나와서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강선봉 노인은 '소록도, 천국賤國으로의 여행'에 이런 글을 썼다. 그 때로부터 50년, 다시 부인과 함께 소록도에 들어와 산다. "그 때, 고생 많이 했지요" 하면서도 무상한 세월과 함께 고마웠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한다. 한 때는 얻어먹으면서도 지금껏 살았으니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은혜라는 고백한다.

얻어먹는 것이 은혜라면 베풀고 나누는 자는 복된 사람이다. 예수께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했다.

(소록도남성교회 강선봉 집사를 만나서 나눈 이야기와, 그의 자서진 <소록도, 賤國으로의 여행>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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