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이 왔다. 4월의 총선과 12월의 대선이 임박한 것이다. 이 양대 선거는 우리나라의 국운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의 큰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특히 우리 한국 교회가 정치 무대로 파송한 대표 선수랄 수 있는 세 번째의 장로출신 대통령이 집권한 지난 4년간의 모습에 대한 국민적 평가가 매우 부끄럽고 실망스러운 면을 많이 담고 있기에, 이번 선거를 맞이하는 우리 한국 교회의 처신이 매우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세상은 지금의 정권을 ‘기독교 정권’(일명, 고소영정권)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갖고 있고, 그 바람에 교회 자체를 향한 태도도 매우 공격적이며 냉소적이다(김선욱). 소위 안티 기독교 세력이 지금처럼 창궐한 적이 없다. 그 바람에 최근 우리 한국의 기독교가 크게 위축된 것은 사실이고, 교인 감소 추세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기독교인 감소 추세가 집권층의 과실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교계 내부의 각종 부끄러운 모습들과 뒤엉켜서 퇴화 현상이 가속화된 것은 사실이다. 결국, 교계 안팎으로 북 치고 장구 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부끄럽게 한 죄인들이 된 우리 모두가 문제이다. 한국 기독교의 부끄러운 정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아 마음에 큰 아픔을 느낀다. 발제자인 김선욱 교수는 아래와 같이 한국 정치의 문제점들을 9가지 정도 적시했다.

정치인의 부정부패 문제, 당리당략으로 인한 시민 소외의 문제, 지도자의 독단적 집행에 따른 합의 정신의 실종문제, 부의 재분배 실패로 인한 양극화 문제, 경제적 가치와 효율성 중시로 인한 사회적 가치의 획일화 문제, 복지-교육-환경 등의 국민적 과제들을 정파적 입장으로 대하므로 답을 찾지 못하게 된 정치 과잉 문제, 국가적 차원의 접근으로 풀지 못하고 정파적 차원으로 접근하므로 서 문제해결이 더욱 어렵게 된 남북의 평화통일에 대한 문제등을 열거했다.

그 밖에도, 다수의 폭압 문제와 정치적 적대 관계에 대한 미숙한 처리 문제들도 짚었다. 그 중 정치보복성의 검찰조사나 세무 사찰들을 통하여 과거 정권의 실세들을 죽음에 몰아가는 행위나 재기 불능 상태로 몰아가는 정치 보복적 행위를 통한 죽임의 정치를 펼친 일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정치 과제로 예시하였다. 정치를 인간의 본연적 행위로 보았을 때, 거기에는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현 정권 하에서의 언론 통제의 어두운 문제에 대하여서도 짚어 주었다. 현 정치 문화 변혁의 중심으로 떠오른 나꼼수의 등장도 결국은 언론 자유와 유통 구조가 잘못된 데에서 파생한 것임도 언급했다.

발제자의 지적이 이 정도라면, 우리가 우리 교회의 대표처럼 알고 압도적 지지로 한국 정치 현장에 파송한 현 집권자는 심각한 결격 사유를 지닌 이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의 훈련이 잘못된 사람이고, 성서적 신앙의 밑받침이 크게 부족한 사람이며, 지도자의 덕목인 정직성과 포용성이 결여된 독재 지향적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평가는 매우 가혹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분명한 평가가 나와야, 다음의 우리의 실수를 방지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어찌 그 개인의 책임만이겠는가? 그를 그렇게 양육하고 길러낸 한국 교회의 책임이 더 큰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미숙한 한국 교회에서 어찌 유능한 인물을 생산하여 파견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행착오(試行錯誤)치고는 그 동안 우리가 잃고 빼앗긴 것이 너무 많아 매우 뼈아프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미숙하고 정치에 미숙한 우리 한국 기독교의 자화상은 어떤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는 세상에 미숙하고 정치에 미숙하다는 말을 긍정적인 말로 인식할지 모르겠다. 그 모습이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며 사는 신앙인의 당연한 모습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정답일 수 없다. 매우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려는 무책임한 표현이다. 정치가 과연 속된 것이라서 회피하여야 할 것인가? 기독교는 세속의 정치에 대하여 더러운 것이라 하여 마냥 부정적으로 대하여도 되는 것인가? 정치의 안방은 사탄에게 내어주고, 거룩한 우리는 모이는 예배당만 고수하면 되는 것인가? 예수께서 과연 우리를 그렇게 가르치신 것인가?

참 부끄러운 일이다. 왜 부끄러운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목숨을 내어 놓으시며 싸워서 쟁취하고 평정하신 세상이란 그 무대를 지금의 한국 교회는 확실히 계승(繼承)하여 우리의 무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도리어 마귀와 어둠의 난장판이 되게 한 무능한 집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교회에서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통하여서도 주(主)가 되고 싶어 하신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해드리고 말았다.

김 교수는 그 점에 대한 기독교인의 보편적 오해들에 대하여 말한다. ‘민주주의는 성서적이지 않다’, ‘아무리 독재자라도 하나님은 권력자를 축복하신다’, ‘신앙인은 기존의 질서를 무조건 옹호해야 한다’. 실로 정말 엉뚱한 생각들이 분명하다. 동시에 이런 현상은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는 아직도 문자적 교리에 묶여 있어서 사고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음을 알게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마 5:13~14)라는 말씀에서, ‘세상’이 바로 정치 공동체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지적하였는데, 매우 적절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했다고 본다. 그 말씀을 새겨보면, 예수에게서의 제자들은 세상이란(정치란) 현장에서의 제자이어야만 했다. 삶의 현장을 떠나거나 외면한 제자들은 정말 상상하지 못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제자의 설 자리는 불의하고 더럽고 죽이고 파괴적인 세상 현장 한복판이다. 그곳에서 생명을 살리고 섬기면서 변화와 새 맛을 안겨 줄 제자들이어야 했다. 결코 피안의 세상에서 평안과 안위를 즐기는 무리들이 아니었다. 강도 만난 자들의 이웃이기를 원하셨지, 신학이나 논하고 교리나 따지는 무리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셨다. 주께서 왜 당신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스승이 되려고 하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겠는가? 삶과 정치의 현장에서 문제의 답을 주는 교회되라는 분부가 아니었겠는가? 십자가는 가르치려는 곳에 있지 않다. 섬기고 받들려는 데에 있다.

사실 한국 교회는 세상을 가르치려고 해왔다. 세상과 정치도 알지 못하면서 정죄하며 자신의 의(義)만을 드러내려 해왔다.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할 능력도 없이 세상 위에 자신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 바람에 교회는 집단 이기주의의 온상처럼 보였고,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되면서 세상이란 무대를 잃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말았다. 지금 그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 있다. 세상과의 관계에서 자신감을 잃은 체 매우 혼란스러움에 빠져 들었다.

김 교수는 자신이 믿는 가치를 절대화하면서 이웃들이 가진 다양한 가치와 태도들을 배척하며 악으로 규정하는 점도 그리스도인이 조심할 대목으로 지적했다. 거기에서 독선이 나오고 선악의 관점으로 보는 흑백논리가 나와서 대화를 막아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들은 기독교적 가치인 개방적이고 공존하는 삶에 역행하는 짓이다. 정치란 칼 슈미트의 지적대로,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을 시작’되는데, 자칫하여 적과 반대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하나로 보게 되면서 정치 과잉에 빠지면 매사를 그르치게 된다. 교회는 매사를 정치적 입장이 아닌 그 내용 중심의 접근을 하므로서 패거리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회의 문제도 짚고 있다. 정교분리의 참된 의미는 국가가 특정 종교를 국교로 지정하여 종교 활동에 정치적 영향을 미치거나 다른 종교의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인데, 한국 교회는 이 원리를 오용하거나 남용해 왔다고 본다. 특히 보수주의 권에서는 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예언자적 발언은 회피하면서도 권력들은 비호하고 자신들의 기득권과 영역을 보수하려는 데에는 집단적 압력 단체로 활동하는 등의 이중적 모습을 보여 왔다. 그 중에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사회적 통념에 어긋난 비상식적인 발언들을 빈번히 쏟아내는 일은 기독교를 무지한 집단으로 생각하게 할 정도였다. 
 
김 교수는 교회의 소통 방식도 교회의 정치 참여를 어렵게 한다고 본다. 설교나 가르침이 본질상 쌍방적이지 아니하고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교회지도자들 역시 세상 정치에 절대 필요한 쌍방통행식 소통을 잘하지 못한다. 대중과 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번역을 잘 못한다. 그 바람에 그런 소통의 일방성에 익숙해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정치 문제에도 목회자의 정치적 주장을 펴는 설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 바람에 요즈음 보수주의 영역에서 ‘정치적 메시아’의 환상을 갖고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 정치판에 뛰어 들려는 교회 사람들이 있는 듯싶다.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해도, ‘아멘’ 하니까, 그것에 도취되어 그런 열광적인 교인들이 세상 정치판에서까지도 자신을 지지해 주리라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참 정치도 모르고, 세상에도 무지한 이들이 우리를 어처구니없게 한다. 교인들의 맹신을 기반으로 기독교 정당을 발족하고 ‘정치적 메시아’의 꿈을 도모하려는 것이 과연 몽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바람에 한국의 평신도들은 건강한 정치 훈련을 받지 못한 체, 세상 무대로 떠밀려 나온다. 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나온 사람들은 결코  그 현장에서의 소금과 빛이 될 리가 없다. 여전히 이기적인 사람들이고, 패거리 정치인들이서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성서적 가치를 세상 현장에 반영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나 소명(召命) 의식도 없다.



또 있다. 한국 보수주의 기독교를 세상이 수구꼴통으로 간주하는 큰 이유는 반공(反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가치로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도 일언지하에 외면하게 만들고, 모든 이웃들을 좌파냐 우파냐로 갈라서 본다. 교회와 자신들의 신앙을 반공주의 프레임에 꽉 틀어 갇아 두고 말았다. 교회의 극우적, 권력 지향적,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을 모든 국가 정책 분야에서 획일적으로 드러내면서, 우리 한국 기독교를 어느 덧 ‘갇힌 보수집단’으로 만들었고, 가진 자들의 기득권이나 옹호하는 집단으로 인식되게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 지지와 신앙적 지지의 혼돈을 드러낸 일이다. 우리가 얼마나 비성서적인 집단인가를 스스로 세상에 드러낸 모습이다. 그 바람에 지난 70-80년대에 불의한 정권에 저항하면서 나라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 남북평화 통일을 위한 화해 운동, 그리고 노동자-농민 등의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며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노력하면서, 일으켜왔던 교회 부흥의 열매들을(백종국) 지금은 다시 세상과 이웃 종교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언제까지 편협한 복음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그의 복음의 온전함을 선포하는 건강한 강단이 될 것인가?

그러기에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본다. 긴 호흡을 하면서, 우리는 한국 교회와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길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겠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하고, 빛으로 살게 하는 것인지를 숙고하면서, 주일 강단을 세워가는 입장이 구축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새로운 출발을 어디에서 할 것인가?

먼저 바람직한 기독교적 정치 참여를 위하여 개교회 안에서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봄이 필요하다.

1)

강단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목회의 무대를 개 교회 차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미쳐야 할 세상 전체라고 생각하는 강단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대에 메시지를 던지고 제기된 세상의 현안에 대한 기독교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성서적으로 조명해 줌으로써 교우들로 하여금 세속의 정치적 현안들을 성서적인 시각으로 숙고하고 대응하게 하는 강단이 되어야 한다.
설교의 정치화는 이루어져야 한다. 목회는 인간 삶의 전부를 껴안고 하는 일이며, 설교 강단은 하늘과 땅 전체를 상대하면서 하는 영역이기에, 설교가 정치적인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증언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도, 의도적으로 저 세상만 말한다면 비겁한 일 아닌가? 하지만 깊은 주의가 있어야 한다. 목회자 자신이 정치와의 먼 거리를 확인하면서 해야 한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오병이어 표적 이후, 사람들이 당신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을 때, 주님은 아예 산으로 피신했던 그 태도와 마음을 잘 유지해야 한다. 동시에 교우들의 성서적 차원의 정치 참여에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좋다는 생각이다. 새삼 생각해 보자. 우리 교회에서 예수의 마음과 영성을 가진 큰 정치인이 탄생한다면, 이 얼마나 반갑고 기뻐할 일이겠는가? 그런 인물을 배출한 목사는 하늘의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온전한 정치적 설교는 특정한 정당이나 집단의 어느 입장을 대변으로 나타나서는 결코 안 되고, 적어도 그날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본문)과 그 정당한 해석을 근거해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 자신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런 정치적 설교가 선포되고 있음을 교우들로 하여금 공감하게 하여야 한다. 처음엔 당연히 내부의 오해도 많겠지만, 설교자의 말씀에 대한 열정과 진정성이 밑받침이 되면, 큰 장벽을 넘어서리라고 본다.

2)

강단이 이런 정치적 설교와 예언자적 설교에 부담을 느끼면, 어떤 설교를 하게 되는가? 피안적, 심미적, 도피적인 삶을 조장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에 힘쓰게 된다. 인간의 삶과 유리된 설교와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유리된 설교를 남발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 동떨어진 신자들을 만든다. 세상 무대에 나서면 계속 어리석고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적응이 되지 못한 주의 백성들이 나오게 한다. 예수처럼 세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에 연전연패(連戰連敗)하는 나약한 제자들이 양산하고야 만다. 나사렛 예수께서는 당시 기존의 낡은 종교와 사회의 기득권적 세력들과의 치열한 토론(씨름)에서 결코 밀린 적이 없었다. 진리와 사랑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이익중심과 자기중심의 세상을 이길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한국 강단은 몰려든 교우들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을 치열하게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맛볼 수 있는 현장에 바로 세상과의 싸움에 있음을 알게 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영생도 이 세상에서의 승리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게 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하나님을 제도권의 예배당 안에서만 영광 받으실 분으로 간주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온 세상,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인간의 전 역사와 영역에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 주(主)이시기를 원하시며, 사회 각 분야에 흩어진 그의 백성들을 통하여 그들의 생활 현장에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싶어 하신다는 강단의 증언이 계속 선포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문이 열리리라고 믿는다.

강단의 증언이 하나님의 정치를 대변하지 못하면, 그 부작용은 엄청 난다. 세상에 대하여 ‘예’와 ‘아니요’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서 결국 정의와 공의를 말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기복주의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세상에서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종교 집단이 되면서, 다수의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들이 교회와 복음에 절망하여 교회를 떠나게 되어, 종국에는 중산층 위주의 기형적 종교로 전락하게 된다. 특히 경제적 양극화 상황이 급속한 지금의 시점에서, 교회마저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그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의 품을 잃게 되면 한국 교회는 현재의 수준 유지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3)

교회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갖는 긍정적 요소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다수의 악인들이 다수결이라는 숫자 놀음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악용할 수 있음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깨어 있는 소수, 창조적 소수, 의로운 소수를 통하여 더욱 강력히 일하시는 분이시다. 예수의 입장은 결코 다수 지향적이지는 아니 하셨다. 분명히 공동선을 추구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몸까지 던지셨지만, 그러나 다수결로 문제 해결을 도모하시지는 아니 하셨다. 사랑과 진리에 따라 행동하셨다. 이것이 교회의 정치를 참여할 범위라고 본다. 다수라도 거기에 거스르면 ‘아니요’ 해야 하고, 소수라도 바르게 가면 ‘예’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예수께서는 당신의 연약한 제자들에게는 서로 사랑과 일치와 화목과 연대를 요구하셨다. 제자들이 당신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충분히 이해하신 것이다. 약한 자들의 힘은 개인에게서가 아니라 일치하고 사랑하고 연대하고 협력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임을 잘 일깨워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 부분도 교회가 세상의 건강한 사회 형성과 민주주의를 실현해가기 위해 역할을 할 수 있는 접촉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 교회는 바로 이 차원에서의 성숙하게 응답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이 시급하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더욱 시급한 해결 과제이기도 하다. ‘싸우고 갈라지지 말고, 너네들이나 잘하라’는 세상의 조롱을 어서 속히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특히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세상의 비신자 그룹들과도 충분히 연대(連帶)할 수 있는 넓은 품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크신 세계와 역사는 제도권의 교회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음을 우리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당신의 뜻을 긍정하는 모든 세상의 세력들을 통하여서도 당신의 일을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뜻을 같이할 세력들과의 연대할 능력이 우리 한국 교회에 커지면 커질수록 좋을 것이다. 그만큼 영향력도 커질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기독교는 자기만 아는 집단인가’ 라는 불평하는 이들의 의혹을 해소시켜 줄 의무가 있다. 크신 주님을 제대로 증거하기 위해서라도 함께 그 방법을 찾아내자. 이웃 종교들에게도 적대적인 태도는 정말 지혜롭지 못한 모습이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라고 지적한 예수의 말씀을 폭넓게 활용하여야 한다.

4)

발제자 김 교수는 기독교적 가치를 세상에 구현하기 위하여, 교파들 사이에 이견을 사전에 조정하는 장치를 마련하여 사회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하나 되어 제시하는 기독교이기를 제안했다. 사회적 정치적 발언을 개 교회나 개 교단 차원보다는 한국 교회라는 큰 차원에서 드러나게 될 때, 그 힘과 영향력은 당연히 큰 효과를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매우 지당한 제의라고 생각된다. 그의 제안대로 우리 기독교가 그런 하나 된 소리를 외칠 시스템을 갖추어 작동할 수만 있다면, 우리 한국 기독교는 지금보다는 한층 성숙하고 힘 있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어떻게 그런 체계를 갖추어 갈 것인가?

이렇게 제의해 본다. 우리 개신교 안에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사회의 제반 현안에 대하여 우리 한국 기독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개신교의 싱크 탱크(Think Tank)를 상설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래서 사회적 이슈가 떠올랐을 때, 그 싱크 탱크에서 기동성 있게  모여 현안을 논의하고 조율하여, 우리 한국 기독교적 가치 차원에서 세상에 대안을 제시하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모임이 시급하다. 이런 대처할 모임이 없기 때문에, 우리 현안에 대한 대처 의지를 가진 교단이나 교회들은 언제나 뒷북을 치곤 한다. 요즈음엔 정치 현실이 너무 급변하기 때문에 그 현안을 따라 잡기도 숨 가쁘다. 또 마음먹고 담당자들이 모여서 입장을 정리한 후 발표를 한다고 해도, 기독교 전체가 아닌 일부의 것이어서 그 발언의 무게감이 매우 약하다. 불교나 천주교에 비하여 많이 빈곤해 있다. 마침 우리 한목협이 그래도 종종 정리된 증언을 한다고 해도, 우리 역시 폭이 좁기는 마찬가지이다. 본인이 속한 기장 교단은 세상적 현안들에 대하여 비교적 발 빠른 입장 표명을 한다. 그럼에도 우리 역시 한 가지라는 한계를 면치 못한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갈 것인가? 정말 하나와 일치로의 변화가 긴요하다.

그래서 제의해 본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도모하기 위하여 한목협이 주도하여 만들어낸 교단장 협의회처럼, 이번에는 평신도와 함께 사회 정치적 현안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대변할 교회와 사회 차원의 정책 기구로서의 씽크 탱크를 만들어 보자. 한목협에 가입한 교단들이 파송한 평신도 전문 인력들의 모임체인 씽크 탱크를 상설기구로 만들어 작동시켜 보자! 우리 기독교 안에는 이미 탁월한 인력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흩어진 그들을 한 데 모아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드러내는 데에 동참시켜 보자. 그러면서 그곳에 참여한 인재들을 계속 세상의 모든 현안들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사고를 하는 훈련을 시켜보자. 그러면 그 속에서 정말 우리 한국 기독교를 성숙하게 대변할 위인으로 한국 역사와 정치사에 큰일들을 할 인물들이 계속 배출되기도 하지 않겠는가? 세상과 정치 현장에서 복음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생산해 보자. 사람이 진정 필요하다. 그래서 기존의 교단장협의회는 교계 지도자들을 통한 기독교의 내부의 힘을 결속시키게 하고, 이 평신도 중심의 씽크 탱크는 세상을 향한 한국 기독교의 결속된 입장을 증언하게 해보자.

여기에는 정치인, 전문분야의 학자, 신학자, 목회자, 청년과 여성 지도자 등 다양한 행동가들을 결집시켜 한국 교회의 하나 된 성숙한 의견을 세상에 전하게 만들어 보자. 그래서 개 교회나 개 교단 중심의 프레임을 넘어가 보자. 말도 안 되는 일부 정치 목사들의 교인 쇄뇌(殺腦) 행위에서 우리 교우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티비 등의 언론 매체들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꾸준히 공개마당을 꾸려가면서 노력하면, 세상과 정치에 대한 수준 높은 대응도 충분히 가능해지리라고 믿는다.

이번 양대 선거에 대한 우리의 급속한 대응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 동안의 세상에 대한 우리 교회들의 행태에 대한 깊은 회개와 반성을 선행하면서 우리가 할 일들을 찾아간다면, 늦었지만 그러나 머잖아, 우리는 이 역사의 구원을 견인하며 헌신하게 될 한국 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발제자 김고광 목사님의 내용에서 선거에 임하는 교회의 기존의 태도에 대한 비판과 앞으로의 요구는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과연 한국 교회가 언제 그리고 누구를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한 적이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기독교 정당의 출현에 대한 우려와 비판적 시각에 대한 입장 표명이 생각 밖에 그 분량이 많았는데, 그 점에 대하여서는 본 논찬자는 크게 고려할 대상이 못 된다는 입장이고, 또 그에 대한 나의 숙고도 부족하여 이 자리에서 논찬하는 것을 유보했음을 알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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