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회연구소는 지난 2011년 11월에 ‘한국의 사회문화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를 발표한 바 있다.1)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 종교계에 대한 신뢰도가 어떠한지를 보여 주었는데, 이익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대기업에 대한 신뢰도보다 더 낮게 나왔다는 충격적인 점이다. 5점 만점 기준으로 종교계 신뢰도는 3.00으로, 의료계(3.22), 시민사회(3.22), 학계(3.16), 대기업(3.12) 아래에 서있다. 자기 종교 지도자에 대한 신뢰도에서는 신부(4.91), 스님(4.83), 목사(4.64) 순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에서 종교별 인식까지도 드러났다. 우선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53.2%)이지만 동시에 종교 간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는 종교(57.0%)로도 꼽히기도 했다. 종교 간 갈등이 일어나는 주요 영역으로도 ‘개신교와 불교 사이’를 꼽은 사람이 41.6%였다. 개신교가 종교간 갈등을 야기하는 종교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보다 심각한 것은 개신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사회에 여러 비리 의혹을 재생산해냄으로써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며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사실은 개신교가 종교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국사회에서 현재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 개신교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사회통합과 치유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작금에 교회가 내외적으로 그렇지 못 하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병든 교회가 되어 오히려 교회가 사회의 걱정거리로 추락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교회가 병들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목회자와 교회에게서 생길 수 있는 문제, 즉 윤리적 문제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회자와 교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윤리문제 중에서 교권(종교권력 내지 교회권력)의 문제가 자못 크지 않을 수 없다. 여러 형태의 교권 문제 발생으로 인해 오늘날 개신교가 ‘힘 숭배’ 종교가 아닐까 할 정도로 우려를 낳고, 사회로부터 혹독한 비난과 비판을 받고 있다. 참으로 교권문제는 목회윤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야 할 과제로 부각된다. 오늘의 논의에서 과연 그것의 사례들이 무엇인지, 교권에서 문제시되는 권력과 그것이 주는 윤리적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목회자와 교회가 타개해 나갈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우리가 시급히 다루어야 할 목회윤리의 중요 과제이자 목적이다.





1. 표출하고 있는 개신교 교권문제

지난 몇 년 사이에 한국사회의 종교계 핫뉴스로 달군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잦아졌다. 특별히 개신교 목사의 교권과 관련한 비리 의혹이 마구 불거져 나와 사회로부터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증폭되었고, 교계 내에서는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내홍을 앓고 있다. 한국사회가 빈부 양극화, 지역과 계층 갈등, 이념 갈등, 세대 갈등, 남북 갈등 등으로 중층으로 고통 겪고 있는 와중에 종교내외 갈등까지 겹치고 있고, 개신교 교권문제는 한국사회를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 우리는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한다.

그 동안 언론매체에 드러난 공식적인 개신교 교권 관련 사건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하다. 규모 면에서 큰 사건만 추려보면, 교회 세습 문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금권선거 논란, 여의도순복음교회 사태, 교회의 정치 세력화와 연장선상에 선 개신교계 NGO인 ‘기독교사회책임’이나 뉴라이트 정치운동과 기독 정당 창당 등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먼저 교회세습에 관련한 문제가 개신교 내 교권이 가진 문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개신교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이 본격화된 결정적 계기는 2000년 모교단의 광림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세습 결정이 확정된 이후였다. 그로부터 교회세습은 한국사회에서 공론의 주요 쟁점이 되었고, 거의 모든 언론 매체들은 그에 대해 한 결 같이 강경하게 비판적인 논조로 일관했고, 심지어 교계 신문까지도 완곡하지만 온건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 다음 한기총의 금권선거 파문 역시 교권과 깊이 관련해 있다. <경향신문>에서는 “돈 선거·종교평화선언 유보… 세상이 종교를 걱정했다”는 제하로 그 사건 내력을 다음과 같이 기사화한 바 있다.

"지난해 12월 치러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회장 선거 때 후보자가 대의원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개신교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금권선거 논란으로 당선자인 길자연 목사가 신임 회장으로 추인 받지 못하게 됐고, 교회 내 ‘돈 선거’에 대한 양심선언과 증언이 이어졌다. 급기야 한기총 회장 선거는 소송으로 이어져 길자연 당선자가 직무정지 판결을 받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기독교윤리실천 등은 한기총 해체 운동을 전개했고, 구호단체 월드비전과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등은 한기총을 탈퇴했다.
금권선거 논란의 당사자인 길 목사는 직무정지 5개월 만에 회장직에 복귀했지만 집행부의 ‘개혁정관’ 폐기, 기금 유용 등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면서 사건이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차기 회장 선거도 기약 없이 늦춰지고 있다. 개신교 최대 연합기구인 한기총이 최대 위기를 맞은 상황이다."

<경향신문>은 동일한 제하에 일 년 내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싣고 있다. 

"신도 80만 명을 헤아리는 세계 최대의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용기 원로목사의 가족이 교회 관련 기관의 요직을 독식하면서 종교계 안팎의 비난을 샀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난 4월 조 목사가 교회 내 핵심 기구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굿피플 인터내셔널 이사장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아울러 조 목사 가족들의 교회 내 역할을 제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조 목사와 조 목사의 부인 김성혜 한세대 총장이 각각 ‘조용기 자선재단’(구 사랑과행복나눔 재단)의 총재와 공동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조 목사 가족과 교회 간 갈등이 첨예화됐다. 순복음교회 측은 조 목사 가족이 여의도순복금교회의 출연 법인인 ‘조용기 자선재단’을 사유화하려 한다며 반발했다. 지난 9월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일부 장로가 조 목사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등 사태가 법정으로 비화됐다. 또 국민일보 노조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신자들이 조 목사의 아들인 조민제 국민일보 사장과 부인 김성혜 한세대 총장을 배임 혐의로 고소하는 등 순복음교회 관련 기관들에서도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4)
교회의 정치 세력화와 관련한 사건들 역시 교권의 문제와 상관이 없을 수 없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에 개화된 시민사회운동과 맞물려 개신교의 NGO 운동도 출현하기 시작했다. 2004년 11월엔 개신교 정치단체로서 ‘기독교사회책임’이 결성되고 중도 이념을 표방하며 정치참여를 본격화했지만, 보수 개신교의 세력화에 불과하다. 그 다음 2005년 11월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창설됐다. 이 단체는 미국의 ‘신기독교우파’를 연상시키는 개신교 보수주의 입장으로서 반공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기총과 연대하는 보수우익세력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기득권층 이익을 대변하는 기독교계 정치참여 형태이다. 뉴라이트는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키는 산파역을 하며 큰 공을 세우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기독교 사회운동을 넘어서서 대형교회의 보수 우익 성향 일부 목사들이 중심이 돼서 1997년 ‘한국기독당’을 창설하기도 했으며, 2008년엔 총선을 앞두고 ‘기독사랑실천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2012년 총선과 대선을 대비해 또 다시 2011년 9월 개신교 정당을 창당해 교계 안팎으로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 권력의 구조, 권력의 윤리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흔히 세속적 영역과 구별되는 성스러움의 영역이지만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표면상 세속적 의미의 (공적) 권력과는 무관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종교는 사회상황에 따라 강력한 권력집단으로 부상할 수 있으며, 그래서 사회적 영향력을 전혀 무시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현재 개신교는 한국사회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거대한 주류 종교집단으로 자리 잡고 있고, 최근에는 소위 권력화 하는 종교권력 집단으로서 개신교가 발생한 여러 비리 문제로 인해 사회적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다.
개신교는 권력(power, Macht)으로부터 결단코 비껴나갈 수 없다. 사회 모든 영역, 정치·사회·경제 등에서 힘이 작동하고 있듯이 개신교 역시 강력한 힘의 기제가 작동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개신교에서 생겨나는 권력을 마냥 부정적이거나 세속적 의미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우선 긍정적이고, 본질적인 측면에서 다루어 볼 필요가 있다.

종교적 권력은 그것이 갖는 존재론적 측면을 갖고 있다. 권력은 “중앙집권적”5), 혹은 “자기중심적”6) 요소가 있다. 권력은 그 자체로 자기성을 내재한다. 한병철은 자기중심적 권력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장소는 모두 자기를 향하고 자기를 주장한다. 자기를 향한 의지는 권력 개념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추구 없이는 어떤 권력 구조도 생겨나지 않는다.”7) 그는 더 나아가 “권력 그 자체는 타자성에 대한 개방이 없다. 권력은 자기를 반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8)고 설명한다. 권력은 타자성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성을 극복해야 하는 “권력의 윤리화”가 요청된다. 한병철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권력의 윤리화는 장소가 자신의 자기중심적 추구를 넘어서 나아가기를, 장소가 일자뿐 아닌 다수와 그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도 체류 공간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자기를 벗어난 타자를 향한 윤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데리다는 그런 권력의 윤리를 자기성을 약화시키는 “자기 면역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자기 면역성이란 “주권적 권력의 자기성과 계산 가능한 지식에 의해 재전유될 수 없는 모든 타자성을 개방”10)함을 뜻한다. 데리다 역시 권력의 윤리란 다름 아닌 ‘타자성의 개방’이란 의미로 해석한다.   

레비나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권력을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성 속에서 타자성의 윤리학으로 정초하고자 했고, 에로스(사랑)의 개념에서 자기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했다. 레비나스는 자기중심적 자아의 자연적, 이기적 삶을 낯선 타자를 향한 이타주의적 삶의 차원으로 초월하려고 했다. 그에게 있어 본질적 인간 존재의 의미는 “외재성으로서의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타자를 위해 헌신하는 이타적 존재”로 나타난다. 

틸리히 역시 신학의 영역에서 권력의 의미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권력 자체에 “강제적인 요소(compulsory element)”12)가 있음을 주시한다. 권력은 강제력 혹은 강제성의 성격을 표출한다. 그러나 만약 권력이 강제성으로만 한정된다면, 그 자신과 그것에 근거를 둔 대상을 결국 파괴하고 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 자아를 실현하는 한에서 강제력을 유효하게 만드는 속성을 가진다. 그러나 권력이 그것만으로 쓰일 경우, 단연코 파괴적이 되고 만다. 그런 측면에서 권력은 다른 한편 본질적으로 윤리적 요청(사랑과 정의)을 지향하고 있다. 권력이 사랑의 규제를 받지 않으면, 권력은 강제성이 행사되는 대상을 파괴하는 폭력으로 돌변하고 만다. 정의가 없는 힘 역시 무자비한 폭력으로 둔갑하고 만다. 틸리히는 사랑과 정의 같은 내재적인 도덕성을 바탕으로 이기성의 권력이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런 틸리히의 존재론적 분석을 넘어서 권력에 대한 현상론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정치·경제 분야 등 구체적인 현실세계 영역에서 작동되고 있는 권력이 가지는 성질과 그 기능에 관심을 집중한다. 예컨대 권력이 가지는 사회윤리적 의미와 기능을 천착한다.

니버는 틸리히와 같이 권력에서의 강제성 개념을 주목한다. 그러나 그가 주목하는 강제성의 의미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오는 틸리히의 것과는 다르다. 니버가 말하는 강제성(coercion)은 “정치적 힘, 즉 정치적 정책이나 제도 또는 사회적 구조의 힘이 행사하는 강제성”13)을 뜻하고 있다. 니버는 권력이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의도하는 목적대로 행동하게 강요하는 강제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그런 측면에서 강제력은 사회윤리적 기능이 있음을 간파한다.

집단 이기주의화된 사회집단이나 사회 전체의 구성원 절대다수의 이해관계가 심각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이기적 죄악성은 도덕적 호소나 설득만으로 제약될 수 없기 때문에 제재나 위협을 가하는 강제력 같은 다른 힘이 요청되게 된다. 이것은 내재적인 도덕적 강제성이 아닌 외재적인 법적 또는 정치적 강제성을 의미하는 ‘사회적 정책과 제도’14)를 말한다. 니버는 현대사회에서 그런 사회적 장치나 기구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랑 및 정의의 사회적 실현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권력의 자기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종교집단, 특히 제도로서 교회는 권력이 가지는 자기중심성의 성격을 배제하기 어렵다. 제도적으로 집단화된 교회의 자기중심성은 불가피하다. 제도교회가 수량적, 경제적, 정치적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집단적 자기중심성은 증폭되고, 영적 힘보다는 그러한 물리적 힘에 의존하려는 양상을 점차 띠게 된다. 만약 교회들이 교인 수가 몇 천에서 몇 만 명을 헤아리게 되고, 수십 억 내지 수백억의 재산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공동체를 조직하고 지배하는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되면, 권력의 자기중심성은 강화된다. 그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는 교회 자체를 자신의 사적 소유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렇게 교회는 교회 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다. 한국의 일부 (초)대형교회가 그런 집단적 자기중심성 내지 이기심을 부정적으로 표출하게 되므로 사회적으로 비판 받는 여러 비리나 문제를 낳기까지 한다.

권력이 가지는 강제성 측면에서 볼 때, 집단으로서 교회는 자체가 갖는 강제력 때문에 파괴적 힘을 발현할 수 있다. 이럴 때, 교회 자정 노력이나 순수한 사랑이라는 도덕적 호소 내지 합리적 설득으로는 비정상적으로 확장되는 이기적이고 강제적인 힘을 제어하거나 견제하기란 매우 힘들다. 그러므로 권력의 비정상적 강제성에 대응할 수 있는 사회윤리적 방안 마련이 요청되게 된다. 다른 견제 집단의 감시와 비판이 필요할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제도 개선이나 정책 마련이라는 다른 강제력에 의한 방법을 취하므로 권력 제어나 견제의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


3. 교권문제 해결을 위한 목회윤리적 과제 도출
 
3.1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 확립

목회자는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자인가? 목회자가 흐릿한 자기 정체성에서 출발하게 되면, 어떤 형태의 목회를 하든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 생겨나는 제반 윤리적 문제는 목회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사역에 임하기 때문에 자주 발생하곤 한다. 그래서 목회윤리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선결 과제는 목회자의 존재와 그 자격에 대한 자기이해이다.15) 목회자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분명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사역에 임했다.16) 사람들이 그의 사도직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어도 바울은 사도됨의 자각이 확고했고, 흔들리지 않았다. 그 만큼 자기 정체성이 분명했고, 그런 자기이해로 목회에 임했다.

현대 목회자에게 자기 정체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회자는 전문직 종사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목회자에게 부여되는 모든 힘이나 권위는 아무리 사회적 역사적 상황이 변했다 하더라도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고 확고할 때 그릇 사용되거나 남용되질 않는다.17) 목회자에게 주어진 권한은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한 명예라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권을 계승받은 자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따라”(딤전 1:1) 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목회자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사도적 권위를 부여받았다.

2) 목회자는 하나님 영광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을 받은 자이다(딤후 1:9). 목회자는 복음 전하는 자로 임명되었다. 그것은 거룩한 소명이다. 목회자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동하여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딤전 1:5)으로 목회에 임하여야 한다.

3) 목회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딤전 4:6)이다. 좋은 일꾼은 종된 자로서 섬김과 관련한 직책을 맡은 자이다. 선한 일꾼은 선한 일을 사모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다(딤전 3:1, 3, 8).

4) 목회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인 교회를 다스리는 자로서 그것을 경건의 비밀로 알고 명예로 생각하는 자이다. 건물과 사람을 모두 포함하는 교회는 목회자의 자기 소유물이 아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 드려야 한다.

5) 목회자는 경건을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또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자이다(딤전 6:3-10).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흠과 책망이 없이 잘했다 칭찬 받을 수 있도록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보여주는 자이다(딤전 6:12).

6) 목회자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딤후 2:15)이다. 예수님께서 삶의 본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본을 받으며 타자에게 본을 보이는 자가 목회자이다.

7) 목회자는 불명예스러운 일꾼이 되지 않는 자이다(딤전 1:19). 목회자가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리면 사탄의 수하에 들게 되어 파선한 자가 되고 만다. 결국 가장 불명예스러운 자로 남게 된다.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은 이처럼 목회자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그를 따라 사는 존재라는 분명한 자각에서 온다. 목회자는 한 마디로 자기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닌 주를 위한 존재이다. 본회퍼가 올바로 설명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Dasein-fuer-andere)”이다.1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가지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타자, 즉 죄인과 약자를 위해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대속의 삶을 살았다. 철저히 타자를 위한 참 인간이었던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보여준 고난의 사랑과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 정의를 실천했다.

목회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타자를 위한 존재’이다.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교회를 수단으로 자기를 위해, 자기 왕국을 쌓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타자를 위해 선용하여 아낌없이 사는 자가 목회자이다.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며 타자로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고난 받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존재가 바로 목회자이다.

3.2 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

모든 종교 집단은 제도화되면서 조직화, 직제화되기 마련이다. 신앙 공동체는 제도화 되면서 소종파(sect) 유형에서 교회(church) 유형으로 바뀐다. 교회 유형은 공동체의 보편성을 추구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조직체가 되면서 권력체가 된다. 교회의 성직제도가 강화되고, 사회질서와 관계를 맺으며 권력과의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정치, 경제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개신교의 교회도 그런 조직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사회 속에서 종교 세력으로 남게 된다. 문제는 교회가 힘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사회변동을 긍정적으로 촉진하는 집단이 되질 못하고, 사회발전에 부정적이고 역기능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교회는 전적으로 자기중심성을 고수하는 이기적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아무리 제도화되어 권력체가 될지라도 ‘타자를 위한 생명공동체’이어야 한다. 힘을 섬김으로, 나눔으로 바꾸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자아가 아닌 타자를 지향하는 공동체로 나아갈 때만이, 비로소 교회의 본질을 세워갈 수 있고,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을 바로 지켜나갈 수 있다.

3.3 하향화하는 개신교 계층

종교는 본질적으로 세력이 커지면서 보수적인 양상을 띤다. 종교가 점차 집단화, 조직화 되면서 사회변동을 긍정적으로 촉진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본래 가지고 있는 보수적 성향 때문에 사회변동을 장애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종교는 그 자체 이익을 지키기 위해 기존 사회질서를 옹호하면서 생산적인 사회적 변동을 억제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종교사회학자 마두로(Maduro)는 종교가 사회변동에 방해되는 경우를 라틴 아메리카의 가톨릭교회 사례에서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지배계급이 종교의 주도권을 잡아 종교가 사회변동을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하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밝혀냈다.21) 첫째, 헤게모니 전략으로써 지배계급을 위협하는 성직자, 교회의 자격을 무차별 박탈하고, 불법화한다. 둘째, 경제 전략으로써 지배계급이 성직자들에게 특권과 부를 제공하여 사회·경제 조직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셋째, 가족 전략으로 지배계급은 성직자 계급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넷째, 법적-정치적 전략으로써 지배계급은 헤게모니 전략에 우호적인 법적 메커니즘을 창출한다. 다섯째, 교육문화 전략으로써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우호적인 문화과정이나 교육제도를 창출하고 성직자들을 이에 편입시킨다. 여섯째, 억압전략으로써 지배계급은 기존 질서에 대립하는 종교활동을 억압한다.
      
마두로의 분석처럼, 종교는 자칫 지배계급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기존질서를 옹호하는 식으로 이용되어 사회변동을 억제하는 권력계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의 개신교도 그처럼 지배계급이 추구하는 사회변동 억제 전략에 말려들 수 있다. 개신교가, 특히 성직자 계층이 현존하는 사회, 경제, 사법, 교육, 문화 질서를 수호하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움직이는 질서라는 종교적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다.

한국교회가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지배계급의 질서에 수긍하기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이익과 소외계층의 편에 서서 나갈 때, 앞으로 교회의 미래가 보장된다. 개신교 계층은 지배계급 질서에 안전하게 편입하려고 하기보다 타자, 즉 사회적 약자인 소외계층 편에 낮은 곳을 향해 나가고, 섬기고 나누는 계층으로 서야 한다.


4. 나가는 말

현대사회에서 종교권력은 여타 세속권력(정치, 경제)처럼 권력의 자기 속성 상 자기 자신을 무한 증식해 간다.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성을 가진 권력은 권력의 윤리화 없이는 필연적으로 왜곡되거나 파괴적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해당 종교에 소속된 지배적 구성원이나 집단, 계층은 비정상적 권력으로 인해 파괴적 힘을 발현할 수 있다.

개신교 역시 교회권력에서 피해갈 수는 없다. 오늘날 끊임없이 표출되고 있는 많은 개신교 교권문제는 권력의 비윤리화로 인한 역기능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 윤리적 내지 목회윤리적인 성찰과 반성, 그 극복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요한다.

필자는 교권에 관한 논의를 마치며, 교권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1) 목사는 타자를 위한 존재이다. 목사는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를 위해 살다, 그를 위해 죽는 존재고,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다.

2) 개신교는 ‘타자를 위한 종교’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역시 ‘타자를 위한 생명공동체’로 존재하는 방식을 취한다. 교회가 자아가 아닌 타자를 지향하는 공동체가 될 때, 비로소 교회의 본질을 세워갈 수 있다. 교회는 어떤 경우이든 목사를 위한 소유물, 권력의 도구가 결코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것이고, 주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개신교 관련 각종 단체나 기관 역시 ‘타자를 위한 공동체’로 세워져야 한다. 끊임없이 자기 이기성을 확대하는 이익단체나 기관으로 전락할 경우에, 개신교는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오명과 수치를 얻게 된다. 

3) 교회 혹은 교회관련 기관이나 단체의 비윤리적 권력화 문제를 제어하거나 감시하기 위해서는 자체의 제도 개혁뿐만 아니라 동시에 시민사회나 개신교 개혁 단체의 견제가 필요하다. 교회개혁실천연대나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같은 개신교 개혁 단체들의 감시 노력이 보다 지속적으로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4) 개신교는 힘이 커지면서 점차 기득권층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개신교는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권력화를 지향하거나 권력계층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개신교는 더 큰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힘의 논리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가지고 있는 힘을 나눔과 섬김의 논리를 가지고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

5) 개신교는 또한 팽창하는 사회적 힘을 가지고 종교 권력 경쟁에 가세하지 않아야 한다. 과도한 권력경쟁을 통해 다른 종교계를 자극하지 말고, 종교와 정치를 뒤섞는 사회혼란을 초래하지 않고, 종교간 갈등을 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통합과 화해의 종교 본연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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