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본 글에서 위와 같은 이 시대 물질문제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해법으로 ‘물질주의를 극복하는 기독교의 영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 시대 교회와 목회자가 사회로부터 비판받는 이유는 전적으로 물질에 자리를 내 준 ‘존재의 신비를 잃은 결과’라고 단정을 내리고 싶다. ‘물질’이란 인격을 매개로 하는 하나의 도구 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인간이 오히려 경제 현상의 도구로 전락하여 버렸다. 무한한 소유를 꿈꾸는 현대인간의 모습은 소유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결국 소유를 절대자의 자리에 내 주고 말았다. 심지어 소유를 미래의 완성적인 사건으로 투사하여 오늘의 소유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일의 더 큰 소유를 기대하며 결국 내일의 소유를 위하여 현재의 타자성을 파괴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 것이 현대의 인간모습이다.

필자는 물질의 문제와 연관된 한국사회의 문제를 분석하면서 이에 대처해 나가야 할 목회자의 영성에 대하여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1) 자살왕국의 진실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자살률은 10만명 당 31.2명으로 2009년 31명을 이어서 OECD 국가 중 최고를 기록했다. 이 자살이라고 하는 영어 suicide의 어원은 라틴어 suus(스스로, one’s own)와, sed, 또는 se(없이하는, without)에 근거한다. ‘스스로 자기를 없이하는’ 뜻을 가진 자살은 시대와 문화, 그리고 종교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이 되어왔다. 예를 들어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유죄를 선고받은 자의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인정하였고,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반하는 죄로 보고 있으며, 힌두교는 자살을 자의적인 의사로 자기를 해방시키는 행위로 보았으며, 베트남 전쟁의 경우, 항거의 표시로 분신자살을 시도하는 승려들의 죽음을 고상하게 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살에 대한 동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자살에 대한 생물학적인 측면이다.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과 같은 정신적 질병을 수반하여 나타나는 자살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정신병은 뇌의 화학성분을 변화시켜 신경세포 사이에서 감정과 공격성 등을 조절하는 분자들인 부신수질(副腎髓質) 호르몬인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이나, 포유동물의 혈액이나 뇌 속에 있는 혈관수축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의 양을 감소시킨다. 따라서 자살을 예방하기 위하여 이러한 대뇌신경전달물질의 수치를 정상적으로 올려주기 위한 프로작(Prozac)과 같은 항우울증 약을 처방하기도 한다. 또한 자살을 사회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유전자의 생존욕구’로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예를 들어 위험에 직면에 한 그룹의 경우, 한 개체가 자신을 희생하고 그 외 개체들을 보호하였을 경우, 진화 유전적인 맥락에서 볼 때, 자살에는 그 행위자가 그 여타 집단에 이득을 주고, 자신 외의 타 개체군을 통하여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려는 동기가 숨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맥락에서 자살을 해석하는 경우, 자칫 정신현상에 대한 환원론에 빠질 수 있으며, 유전자의 선택적 자살론 또한 죽음에 대한 사회 문화적인 해석 없이는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이론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다.

둘째, 자살에 대한 심리학적인 측면이다. 즉 자살자의 심리적 차원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한 본능적인 충동이 있으며, 외적인 자극이 주어지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프로이드(Freud)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의하면, 인간은 두 종류의 충동에 의하여 지배되는데, 하나는 삶으로 향하는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파괴적인 죽음에로의 충동이다. 전자는 자기영속 본능인 에로스를 통하여 최고의 안정상태인 죽음을 막기 위하여 종족을 번식하는 삶을 추구하지만, 후자는 영원한 안정을 취하기 위하여 유기체의 종말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이란 두 충동들 사이에서 죽음의 본능이 강하게 나타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심리학적인 해석 또한 죽음에 대한 개인과 집단의 이해가 시대마다 차이가 있으며, 인류역사를 통하여 자살이 늘 나타난 점을 고려할 때, 삶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킬 외부적인 환경을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과연 자살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셋째,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인 측면이다. 뒤르켐(Emil Durkheim)은 1897년의 『자살론』에서 자살의 원인을 생물학적인 요인이나 심리적 요인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사회적 구조의 특성을 통하여 자살을 규명하려고 시도하였다.2) 그는 산업화 과정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분업이 사회적 통합을 약화시키게 되어 이러한 사회적 사실(fact)이 자살과 같은 현상을 유발시킨다고 보았으며, 도덕이나 종교를 통하여 극복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는 자살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이다. 이기적 자살은 사회의 통합이 약한 경우, 현실과의 괴리감으로 인하여 통합의식이 희박하여 질 때 개인이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타적 자살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발전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할 수 있을 만큼 통합의식이 강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편, 아노미적 자살은 공황이나 실업이 증가하여 사회의 급격한 변동이 있는 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사회의 규범이나 가치관이 붕괴할 때, 개인의 안정감에 위기를 느낄 때 나타나는 것이다.

뒤르켐의 분석 가운데 흥미로운 사실은 자살과 관련한 종교적 성향인데, 개신교 지역과 카톨릭 지역을 비교한 내용을 보면 전통적인 규범이나 가치를 보존하여 단결력이 강한 카톨릭 지역보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개신교 지역에서 자살이 높게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또한 경제적인 위기감에 따른 자살의 성향을 분석하였는데, 로마를 통합하여 통일민족국가 체제를 확립하여 큰 번영을 누린 이탈리아를 예로 들면서, 경제적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률이 크게 높아진 이유는 경제적 요소와 연관된 사회 질서의 변동이 자살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한국사회에서도 자살유명인의 자살을 모방하는 베르테르 효과도 있지만 많은 경우 생활고 자살을 의미하는 ‘경제(economy)’와 ‘자살(suicide)’의 합성어인 ‘이코노사이드’가 많다는 사실은 사회·경제·문화적 요인이 우리나라 자살률을 높이는 주범이라는 데 힘을 실어준다.

이와 같은 자살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필자는 한국사회 자살의 주된 원인이 바로 경제문제와 깊게 연관이 되어 있으며, 이에 따른 왜곡된 인간이해가 자살률을 높이고 있다고 보고 있다. 현재 한국자본주의의 문제는 과거 이민족의 지배체제로 말미암아, 내생적인 사회적 생산력을 증대하기 보다는 외국자본과 권력 간의 결탁으로 지나친 독점자본이 형성되었으며, 국내 부존자원을 고려하지 않은 외국 기술의 도입이후, 시장점유에도 불구하고 상응한 일자리들이 창출되지 못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계속된 권력자들의 실정(失政)은 한국사회를 경제적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간은 재화를 통한 대량소비사회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물질을 채우려는 소비적 욕구를 증대시킨다. 소비에는 생존에 필요한 일차적 욕구로서의 소비와, 정신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이차적인 문화적 소비가 있을 수 있다. 현대 소비사회는 과잉 물자를 생산하고 유행을 통하여 생활을 획일화시킴으로서 풍요속의 빈곤과 비윤리적 소비문화를 조작하는 모순을 양산한다. 아울러 매스미디어에 의해 조작되는 무차별적 소비문화는 물자의 낭비와 함께 인간의 낭비를 초래한다. 소비사회는 풍요한 생활을 모토로 하지만 물자와 인간의 기호마저 획일화 시키고, 이러한 획일화되는 결국 인간의 개성과 창의성을 말살하며 급기야 인간을 공허하게 만든다.

한국사회 자살증후군의 이면에는 절대빈곤의 문제보다 소유와 소비를 인간 사이의 상징적 교환으로 여김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소외의 문제가 숨어있는 것이다. 사실 경제적 행위에서 화폐나 자본은 중요하지만, 동시에 필요악이다. 화폐나 자본이 결코 인격을 가진 주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나 집단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는 화폐나 자본의 크기 여하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는 비인격적 관계로 전락하여 버리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존재함으로써가 아니라, 소유하고 소비함으로써 살아간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가 위와 같은 문제들로 야기되는 한국사회의 자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기여하려면, 보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교회와 성원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종교는 절망의 순간에 상상력을 통하여 사회 성원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문제가 있는 기층 사회의 아노미적 상황을 극복할 도덕적 정당성을 제시하여 준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종교는 그 한계를 드러내는데, 그 이유는 종교적 상상력에 의한 도덕적 용기가 생에 대한 희망은 주지만 구체적인 윤리적 원칙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는 한계상황에 있는 개인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제시함으로써 응분의 책임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반쪽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현실의 변화가 없는 희망은 자칫 허구나 망상으로 전락하여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사회 내 위기감을 극복할 희망의 메시지는 그 자살을 막을 수 있는 실천이 전제되지 않고는 공허한 구호로 끝나버릴 것이다. 자살 문제는 이 시대 교회가 분담하여야 할 사회적 책임이다. 교회의 메시지는, 저 닿지 못할 하늘을 ‘소유’함으로써, 신이 되고자 허망한 바벨탑을 쌓았던 맹신이, 이 시대 다 가지지 못할 소유를 꿈꾸며, 소비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으려는 환상과 연관이 있음을 폭로하여야 한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며, 소비가 아니라 나눔을, 그리고 독점이 아니라 관계’가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이며 실천적인 행동강령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2) 로또 제국의 환상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돈(money)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문제는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기독교계 일각에도 돈은 그 화폐가치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움직여서 많은 경우 사람을 허망하고 부패하게 만들어 개인과 공동체를 파국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반대로 드문 일이지만 개인의 생명과 공동체를 살리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돈의 이러한 힘은 돈의 가치가 유발하는 묘한 심리적인 특성 때문이다. 돈이 결코 인격을 가진 주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폭군처럼 그 위세를 떠는 주된 이유는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가 화폐가치의 크기 여하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는 비인격적 관계로 전락하여 버리기 때문이다. 예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에 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의 성품과 인격이 기준이 아니라 그가 소유하고 있는 화폐가치의 크기가 기준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즉, 인간은 존재함으로써가 아니라 소유함으로써 살아간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를 위협하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적 비판에 의하면 물신(物神)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돈은 하나의 권세를 가진 주체로서 나타난다. 그 권세는 영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묘사될 수 있는데, 영적인 의미와 방향을 가지고 인간으로 하여금 어디로 향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3) 돈은 권세를 가지고 인간관계와 인간의 행동을 규정하기에 이른다. 현대 사회를 조직하는 물질적 제도와 그 제도를 다스리는 것을 영(靈)으로 나누어 물신을 제도의 영으로 본 그의 분석에서 주체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상품과 돈과 자본이 사회적 주체가 되어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이란 엄밀하게 구별하여 자본주의적 영성과 이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해방적 영성이 있을 수 있다. 물질적 조직과 연결된 영성은 썩어가는 자본주의를 포장하는 종교적 향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신은 상품의 인격화이고 사람의 사물화 또는 상품화로서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이 물신은 각각 상품, 돈, 그리고 자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래 상품이란 인간 노동의 산물이고 교환함으로써 이익을 남기려고 생산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노동 분업에서 한 산물이 교환을 통하여 다른 산물을 얻으려 할 때 비교 교환가치가 생기며 이때부터 상품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며 상품들이 주체로 탈바꿈하기 시작할 때 사람의 속성인 생명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생산자와 상품의 관계는 바뀌고 오히려 생명을 소유한 상품이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 상품생산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생산자와 생산물 사이에 단절이 오고 상품 사이에 사회적인 관계가, 그리고 생산자 사이에 물질적 관계가 형성이 되는데, 상품이 사회적인 관계로 인격화되는 순간부터 생산자 인간은 살기 위하여 상품에 종속하는 경향을 가지며 바로 여기에 종교적인 충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마르크스는 보았다. 즉 상호 관련된 상품의 인격화는 상품이 관여하는 다른 세계를 창출하고 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상품이 상품세계에서 실현하는 사회적 관계를 종교적 환상으로 재생산하여 물신 숭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상품유통과정에서 소비되지 않고 모든 상품의 일반 등가물 또는 공통분모로 작용하는 특별한 상품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돈(화폐)이며 이 돈의 출현으로 상품의 인격화 과정이 보다 첨예하게 전개가 된다. 돈은 상품가치의 보존자로서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며 상품의 최대 상징으로서 전능한 의지를 가지고 상품 위에 군림한다. 돈은 모든 상품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반드시 통과하여야 하는 원천이 되어 질적으로는 무한한 권능을 갖게 되지만 양적인 측면에서 실제 총 화폐량은 한정이 되어있다. 여기에서 소유자는 심리적으로 탐욕에 의하여 종교적 특성에 따라서 돈의 초월성을 선택하며 돈을 소유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돈을 획득하기 위하여 제한된 규범을 의식하면서 무한한 소유를 꿈꾸게 된다. 마르크스적인 언어로 상품관계는 무한한 목표들을 창출하는 반면에 생산자는 유한한 걸음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5) 자신의 내면성에 있는 무한한 소유에 대한 욕구는 목표를 세우나 그 목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게 되며 오히려 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경건한 행위로 바뀌어져 물신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상품과 돈이 물신으로 바뀌어져 나가면서 더욱 큰 물신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본이다. 자본은 밑바닥에 있는 자들에게서 더 많은 노동력을 착취하며 결국 자본으로서의 기계는 착취당하는 이들의 생명을 필요로 하며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실업이라는 형태로 계속 공격을 받게 된다. 아울러 자본은 상품 세계의 한 가운데서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고 증대시키는 힘을 가진 가치라는 위대한 주체로서의 자본이라는 위세를 가지고 모든 것을 점령하여 나가며 이 주체는 일상적 삶의 종교로서의 신비스러운 주체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것이다.

더 많은 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가 더 의미 있게 된다고 자칫 착각에 빠지는 우리들에게 한국사회는 ‘로또의 대박’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대박만 터지면 인생은 역전’이라는 맘모니즘(돈귀신)적 환상 말이다. 물론 로또에 긍정적인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하여 보면 복권을 구입함으로써 전체 수익금의 일부가 사회 간접자본으로 재투자되기 때문에 복권을 사는 행위로 사회발전에 공헌한다는 구실을 내세울 수 있으며,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가 보장하는 투자를 통한 재산증식이라는 경제적 합리성으로 무장하여 가장 적은 액수로 수천수만 배의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데, 주저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로또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인격적 특성 때문에, 아무리 로또의 정당론을 펼친다고 하여도 당위성을 가지기 힘든 한계가 있다. 가장 심각한 로또 폐해는 소유에 대한 맘모니즘적 미신이다. 즉 로또는 인간에게 소유에 대한 무한한 욕구를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사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화폐의 총가치량은 분명하게 제한되어있다. 더군다나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화폐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로또를 통하여 무한한 소유를 갈망한다. 로또를 구입하면 그 구입액수가 얼마든지 개인은 자신이 투자한 액수는 생각하지 않고, 그 액수의 크기가 무한정할 것이라는 대박을 꿈꾸게 된다. 바로 여기에 심각한 함정이 있는 것이다. 제한된 화폐가치를 가지고 도대체 얼마만큼의 ‘무한한 가치’로 증식시키기를 원하는가? 제한된 것이 무한을 꿈꾸는 것 사이에는 극복하지 못할 분명한 선이 있다. 마치 이것은 제한된 인간이 무한한 신이 되려는 헛된 노력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소유에 대한 집착은 동시에 소유만을 바라는 자신과 이웃을 공동체에서 소외시키게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소유도 가능하지 않으며, 소유만을 바라는 이기적 특성상 타자를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문화적 욕구를 통하여 소비의 욕구를 채우려는 개인에게, 그 소비를 상징으로 하는 성원간의 기호화(記號化)는 차별을 낳고, 소비적 욕구를 따라가지 못하는 제한된 소유는 그 자신을 더욱 더 공허하게 만들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피조성의 한계를 조물주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함으로써 극복한다. 여기에서 극복하는 방식은 신이 되려는 저 닿지 못할 하늘을 향하여 허망한 바벨탑을 쌓는 맹신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드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이 땅 위’에서 신앙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로또는 인간의 소유한계를 망각하게 함으로써, 즉 제한된 인간의 소유로 무한한 돈을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땅에서 땀을 흘려 열심히 살 생각을 잊게 하고, 일주일간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공중권세를 가진 자에게 굴복하기를 원한다. 즉 자칫하면 로또는 맘몬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로또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려면, 로또를 통한 대박이라는 환상을 통하여 더 큰 것을 소유하려는 허무한 미신보다 사회성원의 적은 투자를 모아 큰 공적가치를 재생산하여 사회발전에 기여한다는 성숙한 시민정신을 먼저 갖출 때 가능할 것이다. 정당한 땀과 노력을 통하여 증식하는 재산은 건강한 경제체계를 건설하는 바람직한 국가의 초석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신앙인들이 십자가의 고통을 생략하고 영원한 부활만 꿈꾼다면 진정한 신앙인 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축복을 제자직의 성실한 삶이 없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대박’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확률이 아니며 더군다나 기우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축복을 나누어주시기 위하여 창세전부터 십자가 위의 고통을 준비하셨다. 축복은 고통과 함께 그 의미를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제 그 고통은 이 땅위에서 신앙인이 함께 나누고 분담하여야 할 신앙의 몫으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국가 경제의 위기 속에 물질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은 이때, 기독교인은 더 많은 소유를 꿈꾸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비워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의 방식을 통하여 함께 존재하는 축복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3)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현대 인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에 있다고 주장한다.7)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소유 개념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 조명하여 보았을 때 오히려 낯선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본질적인 삶의 방식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인데 이 존재의 삶의 방식이란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현대 기독교인에게 ‘젖과 꿀’을 상징하는 ‘약속의 땅’은 내세적 의미보다는 여전히 ‘현세적 축복’의 의미로 더 많이 강조되는 것 같다. 그 주된 이유는,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가 강조한 ‘경제 성장’의 전략과 그 맥을 같이하여 기독교도 ‘축복’을 지나치게 ‘외형적 풍요’라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6.25 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당시의 현실 속에서 ‘복 받으면 잘 살수 있다’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가난한 한국 민중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아울러 개신교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축복을 외형적인 면에 집착한 결과, 현대 기독교계 일각에는 과도한 외형적 성장주의와 교단, 교파, 그리고 교회 간 패권주의의 부작용이 생기게 되었으며, 축복의 크기를 소유한 물질의 크기로 비교하여, 그 격차 때문에 교회와 교회, 교인과 교인 사이의 불화와 소외의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젖과 꿀’의 메시지는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이 되어있다. 그러나 험난한 광야의 생활을 거쳐 막상 도착한 그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의미함직한 ‘풍요로움’이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양들에게서 젖이 많이 나 쓰고도 남아 버린 우유가 흐르는 땅도 아니었고, 비옥한 땅을 채운 과수나무에 달린 벌통들이 땅에 떨어져 꿀이 질퍽한 그러한 땅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존을 위하여 수많은 전쟁을 치루며 매 순간 목숨을 부지하여야 하는 척박하기 이를 데가 없는 황량한 땅이었다. 그렇다면 ‘젖과 꿀’이 이스라엘이 정착한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특성과 거리가 먼 것이라면, 그 본래적 의미는 이스라엘의 역사 경험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특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적 관계’에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젖’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젖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다. ‘젖’은 내가 소유한 젖을 내는 짐승의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젖’은 ‘어미’가 갓 태어난 ‘새끼’에게 그의 생명수를 전달할 때 나타나는 ‘몸의 표현’이다. 이것이 사람에게서는 ‘젖을 물리는 어머니’와 그 생명의 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녀’와의 불가분의 관계로 나타난다. 따라서 ‘젖’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 본능적이지만 자신을 희생하며, 모태로서 아이와 신체적 연관이 있지만 자신을 주장하거나 이기적이지 않으며, 갓난아이보다 압도적으로 덩치가 크지만, 결코 그의 힘을 무력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배려와 따스함이 있으며, 자애어린 눈동자의 쉼 없는 경계와 부드러운 키스가 끊이지 않는다.

‘꿀’은 수많은 벌들이 한 뜻을 품고 열심히 노력한, 고된 노동의 끝에 나타나는 ‘삶의 향기’이며 ‘협동정신’을 의미한다. 한 방울의 꿀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수많은 벌들은 하나가 되어 마침내 그들의 목적을 이룬다. 그러나 그 ‘꿀’은 결코 개인의 것으로 주장되지 아니하며, 오히려 공동체를 위한 양식으로 저장이 된다. 서로 무질서하게 엉켜있는 것 같으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몰려다니는 것 같지만, 서로 평등하고, 꿀과 이것의 향기에 집착할 것 같지만, 결코 독점하지 않는다. 따라서 ‘꿀’은 공동체의 정신이자 과정이고 그 결과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의 젖과 꿀의 정신은 바로 사랑과 협동의 신앙원리와 통한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생명의 하나님이셨다. 광야에서 음료와 양식을 주셨으며,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품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품어주셨다.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다시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음료와 양식이 되셨다고 요한은 고백한다. 그리고 모든 백성을 제자삼아 당신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그러므로 ‘젖과 꿀’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하는 신앙적 관계이며, 동시에 이웃과 나누는 상생의 법칙인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는 내가 소유할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경제 제일주의 원칙보다도 내가 전달하여야 할 생명을 잉태할 ‘사랑’과, 승리와 패권주의의 논리보다는 같이 나누어야 할 ‘공동체의 정신’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속하여 있는 교회와 교단, 그리고 목회의 현장이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바뀌어 지기 위하여서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줄 수 있는 마음과 그것을 누구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정신이 필요하다. 이러한 신앙의 원리가 없으면 결국 ‘젖과 꿀’은 ‘힘’과 ‘권력’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며, ‘축복의 땅’은 승리주의를 앞세운 ‘제국주의’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4) 웰-빙(Well-Being)의 허구

근래 한국사회는 ‘웰-빙’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매스 미디어에는 건강상담, 요리코너, 아름다운 몸매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를 보는 시청자들은 ‘웰-빙’에 대한 문화적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과도한 소비신경증에 예민하여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웰-빙’이란 전체국민소득수준이 선진국의 수준인 2만 불 이상인 국가에서 발전되고 있는 산업이며 의·식·주에 관계된 1차적 욕구를 넘어 정신적 평온과 안정을 추구하는 지적인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제 1만 불 안팍의 GNP를 가지고 이 ‘웰-빙’을 물질적인 풍요와 경제력을 통한 외양적인 과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들을 볼 때 우리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다.

‘웰-빙’은 ‘만족한(well)’ ‘인생(being)’을 추구하는 ‘삶의 질’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의미하여 이 두 단어 ‘웰(well)’과 ‘빙(being)’중에 어떤 단어를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에는 큰 차이가 생긴다. 만약 ‘만족’에 관한 ‘웰’을 중요하게 여기면 그 기준은 자칫 개인적이고 1차적인 욕구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흐를 것이다. 즉, 타인은 어떻게 되는 자신의 복지만 해결하려는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한국사회에 ‘웰-빙’에, 개인이 소유한 물질의 과시나 명예의 척도로 ‘럭셔리’란 단어를 붙이는 것을 보면 정신적인 것보다 여전히 개인의 물질적 풍요와 고급화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웰(well)도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빙(being)이다. 미국에서 웰-빙(well-being)은 반전운동과 민권운동 정신을 계승한 중산층 이상시민들의 삶의 방식과 깊게 연관이 되어있다. 즉, ‘웰-빙’은 근대화된 첨단 문명에 대항하여 자칫 소외되어가는 자연과, 인간 개개인의 개성과 존엄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정신사조인 것이다. 따라서 바른 의미의 ‘웰-빙’은 경제적 관점에서 발전과 개발을 모토로 한 ‘웰’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강조하는 ‘빙’으로 그 중심이 옮겨질 때 그 의미가 분명하여 질 것이다.

성서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은 그야말로 ‘웰-빙’ 자체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핵심은 ‘타자’를 위한 ‘사랑’의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웰-빙’은 사실 ‘굳-빙(good-being)’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누리는 삶의 안온한 복지 보다는 이웃을 위하여 어떤 선한 존재(good-being)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성서는 우리의 관심을 되돌린다. 그리고 그 선한 존재가 공동체를 위한 ‘공동의 복지(common-wealth)’에 전념한 결과 생긴 것이 바로 교회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도 교회와 성원만을 위한 웰(well)을 중시하는지 아니면 성원 개개인과 이웃을 위한 전체의 빙(being)에 더 관심이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웰’은 낮은 소리로, 그리고 ‘빙’은 보다 큰 소리로 내야 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5) 외모 지상주의

최근 한국사회에서 만연되는 ‘외모지상주의’의 문화는 그야말로 우리의 정신 수준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얼짱, 몸짱 등의 신조어는 한국사회의 외모 지상주의 풍조를 나타내는 기현상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신세대의 취향을 나타내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넘겨버리기도 한다.

이 ‘짱’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김용석에 의하면 이 ‘짱’의 어원에 대하여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한다. 사람을 호칭할 때 친근함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쓰이는 일본어 ‘짱(ちゃん)’이 유입되어 와전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집단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한자 ‘장(長)’이 경음화 현상을 거쳐 짱이 되었다는 설, 그밖에 80년대 대학가의 시위현장에서 화염병과 함께 민간용 불법무기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짱돌’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설도 있다고 한다. 또 특정 만화 영화의 마니아에 의해 유포된 것으로 의심되는 ‘짱가’ 유래설도 의심하고 있다.

위의 다양한 설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한국의 ‘짱’ 문화가 ‘외모에 기인한 편견 혹은 차별’이라고 정의되는 루키즘(lookism)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루키즘은 미국 《뉴욕타임즈》의 컬럼니스트인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인종, 성별, 종교, 이념 등에 외모차별주의가 인류 역사에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몇 가지 요인들 중 하나로 봄으로써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용어다. 따라서 한국사회 일각에서는 비평가들이 ‘짱’ 신드롬을 신세대의 외모지상주의에서 비롯된 한국판 루키즘이라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외모지상주의는 특히 대량소비사회 속에 병들어가는 현대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특히 매스미디어는 재화를 통한 대량소비사회에서 무차별적 공격으로 개인의 소비적 욕구를 증대시킨다. 소비에는 생존에 필요한 일차적 욕구로서의 소비와, 정신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이차적인 문화적 소비가 있을 수 있다. 현대 소비사회는 과잉 물자를 생산하고 유행을 통하여 외모를 획일화시킴으로서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는 수많은 얼굴보다는 자본을 투자하여 칼로 도려낸 ‘소수의 얼굴’만을 표준화여 마치 그것이 얼굴의 기준인양 조작하는 모순을 양산한다. 이러한 매스미디어에 의해 조작되는 ‘외형’에 대한 무차별적 소비문화는 소위 유행이라는 물자의 낭비와 함께 인간의 낭비를 초래하는 것이다. 소비사회는 언뜻 풍요한 생활을 모토로 하지만 물자와 인간의 기호마저 획일화 시키고, 이러한 획일화되는 결국 인간의 개성과 창의성을 말살하며 한국사회에 급기야 인간을 외모로 규정하는 ‘짱’의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얼굴’은 얼(영혼, 정신)의 꼴(형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할 것을 경고하였다. 그 인간의 됨됨이는 외모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내면세계에 의하여 좌우 된다는 말씀이다. 성서는 또한 ‘몸’ 또한, 신체적 외형적 형태라기보다는 그 몸이 주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의의 병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크리스챤의 ‘짱’은 ‘맘짱’ 또는 ‘영짱’을 지향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예언한 이사야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이 시대에 새롭게 할 신앙이 무엇인가 되새겨야 할 것이다.


6) 왕따

한국사회 속에서 유행병처럼 번지는 ‘왕따’ 현상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물신의 또 다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 지라르(Renè Girard)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자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그 욕망을 채우려는 극단적인 경쟁의 순환고리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존재이다. 인간의 욕망에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것에서 유래하는 모방 경향이 있다. 이 모방 경향은 종종 타인에 의해 촉발되거나 강화되기도 한다. 욕망이란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모방은 경쟁적 욕망의 장애물을 향하여 맹목적으로 돌진한다. 자신이 지향하는 존재를 발견할 때 추종자는 타인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을 욕망함으로써 그 존재에 도달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상대방의 욕망이라는 폭력을 만나게 된다.

모방 욕망은 불순한 전염병과 같은 것이어서, 만일 이것을 멈추기 위한 희생물과 이것이 다시 가동되는 것을 막는 제의적 모방이 없다면, 희생위기의 원인인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파괴할 것이다. 따라서 모방이란 인간의 욕망과 경쟁, 그리고 이들 사이의 비극적인 인간 분열의 기원이다. 또한 모든 무질서의 기원이며 그 결과 저절로 화합을 가져다주는 희생양의 매개를 통한 질서의 기원이다.

모방 위기가 약화될수록, 욕망과 그 갈등은 대상을 떠나서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되며, 모방은 더 퇴폐적으로 되어간다. 바로 이런 사실로부터 순수모방이라는 믿음은 더 부추켜지고, 갈수록 더 강박적인 것으로 변해가는 관계들을 두고 어떤 자율적인 실체라고 호도하는 추세도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모방’의 부조리와 경쟁적 ‘욕망’이 부르는 ‘폭력’에 인간사회는 무질서에 처하여질 위기에 빠지지만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하여 질서가 유지된다. 이때 등장하는 제의는 모방 위기의 모방적 되풀이이다. 그것은 종교적, 사회적인 협동정신에서 행해지는데 제의가 희생물 메커니즘을 반복하여 죽는 희생물에게 손해를 입히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하는 의도에서 제의가 행해진다는 것이다.

집단의 지배적인 문화적 가치에 이질적이거나 일탈적이면서도 자신을 폭력에 방어할 수 없는 무력한 자는 바로 ‘희생양’이 되기에 적당하다. 무한한 경쟁으로 야기되는 폭력의 가능성에 집단 전체가 정신적 공황에 빠지게 될 때 나타나는 공포심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집단과 하나가 되어 ‘희생양’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희생양’은 다시 무질서의 사회에 잠시나마 질서를 가져다주며 동시에 ‘전체빼기 하나’로서의 희생양을 계속 찾아내는 희생제의의 악순환을 문화 속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이때 폭력의 특징은 계속해서 희생물만을 향하므로 애초의 대상을 시야에서 놓쳐버린다. 희생대체에는 항상 어떤 ‘인지불능’이 내포되어있다. 희생이 행해지는 동안 희생은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희생의 메커니즘 속에 작용하는 ‘인지불능’은 폭력의 역할에 대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인지불능에 대하여 신학의 전통적인 입장은 ‘희생신학’이라는 맥락에서 성서에 나오는 희생제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욕망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즉 희생물을 요구하는 신은 제단에 쌓인 고기를 요구하며 희생 의식을 되풀이 하여야 신의 화를 진정시킨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 속의 신학은 희생 제도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신학의 포로’로 방치하여 두는 것이다.

희생에는 수수께끼 같은 신비가 있다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고전적 휴머니즘에는 이런 신비에 대한 질문이 있었지만 현대인들에게 ‘희생’은 무관심에 방치되어 희생과 폭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그는 보았다. 지라르에 의하면 폭력에 이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은 비이성적이다. 폭력은 폭발하려 할 때 충분한 이성을 찾을 수 있지만 그 이성은 처음에 겨냥한 대상이 조금이라도 자기 능력 밖에 있으면서 계속 비웃게 되면 폭력은 곧 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17) 폭력은 항상 대체용 희생물은 찾으며 욕망을 유발한 대상이 정복불가능 할 때 폭력은 그 대상을, 폭력을 초래할 아무런 명분도 없는 다른 대상으로 대체한다.

희생에는 일련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내부의 폭력’이라는 점이다. 희생의 기능은 내부의 폭력을 진정시키고 분쟁의 폭발을 막는데 있다. 희생제의가 없애려는 것은 바로 가까운 사이끼리의 분쟁, 경쟁 상태, 질투심과 언쟁이며, 다시 세우려는 것은 공동체의 조화이고, 강화시키려는 것은 사회적 일치이다. ‘희생양’은 누가 되는가? 욕망 지배적인 인간 집단의 문화적 가치에 이질적이거나 일탈적이면서도 자신을 집단의 폭력으로부터 방어할 수 없는 무력한 자가 바로 ‘희생양’이 된다. 처음 겨냥한 대상이 없을 때 대체용의 대상을 공격하는 폭력의 성향은 일종의 전염으로 묘사될 수 있다. 오랫동안 억압된 폭력은 항상 그 주위로 번져 나가는데 제의적 예방책은 한 편으로는 이런 식의 파급을 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의적 불순, 즉 폭력의 상황에 갑자기 말려든 사람을 가능한 한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인간은 자신이 채울 수 없는 욕망을 폭력으로서 ‘희생양’에 분출함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일시적으로 누그러뜨리는 대리만족을 얻게 된다. 따라서 ‘희생양’은 무질서의 사회에 잠시나마 평화로 가장된 질서를 가져다주게 된다. 이러한 ‘전체빼기 하나’로서의 ‘희생양’은 역사 속에서 마녀 사냥이나 반유대주의, 그리고 노예제도등을 만들어낸 동기가 되었다.

한국사회 속에서 왜 ‘왕따’의 문제로 끊임없는 폭력이 반복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원시야만의 행태가 언제까지 방치되어야 할 것인가? 욕망을 욕망하게 하는(we desire desire)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주심으로서 우리들을 구원하였다. 따라서 인간에게 남겨진 최후의 메시지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를 통하여서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7) 결론

역사 속에서 교회가 경제문제와 직면하여 물신과 대항하였을 때 극복한 적은 거의 없다.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는 이를 『교회분열의 사회적 배경』에서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다. 교회가 물질문제와 직면하여 위기에 처할 때 위에서 지적한 경제적 요소와 직결한 사회적 문제를 다스릴 영적 혁명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대개 ‘내적회개’로 회피하게 된다고 그는 날카롭게 꼬집었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물신에 대항하기 보다는 내적 회개의 문제로 회피하는 전형적인 교회의 메시지는 따라서 대개 내면치유나 자아회복과 같은 주제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물질주의의 절대적 욕망을 잘못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등치하게 되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값싼 은총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갱신은 물론 내적혁명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이 혁명은 진정한 회개를 말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구속사의 원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당신의 영광을 온전히 돌려드리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을 책임져 주실 분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이 땅의 헛된 것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덮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사는 우리의 ‘사회적 성화’와 연관이 되어 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지 의로운 죄인은 아니다. 죄인이 용서받음으로 죄인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만이 의로운 분으로 드러나며 이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진정한 회개는 자기 성찰과 반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사회를 정화하는 행동과 연관이 되어야 하며 이 때 한국사회를 변화시켜 나갈 진정한 영적 에너지가 갖추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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