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16) 교갱협 제1차 장로섬김수련회 주제특강

여러분들과 함께 이렇게 좋은 시간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장로님을 대상으로 강의나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갱협이 주최하는 어떤 면에서는 역사적인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단에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미루고 계신 일들을 시작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들과 함께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장로의 역사적 의미

‘장로’라고 하면 구약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어른으로 인정합니다. "자켄"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말의 어원은 ‘턱수염’입니다. 즉 수염을 기르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점잖은 어른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 "자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장로는 어느 마을에서나 어른으로, 또 이스라엘 나라 전체에서 어른으로 특별히 자리매김하고 존경과 신뢰를 받고 나라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위해서 엄청난 역할을 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장로’라는 이름은 참 거룩한 이름이요, 소중하고 존귀한 이름입니다. 다른 이름도 중요하지만 교회에서 ‘장로’라는 이름을 걸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존귀한 이름이기에 그에 걸맞은 인격, 신앙생활, 헌신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들과 맞먹는 위치에서 ‘장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교회의 야고보라는 장로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죠. 성경을 보면 야고보는 다른 사도들과 권위나 영향력에서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도 사도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장로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장로’와 ‘사도’가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초기에는 그만큼 장로직이라는 것이 엄청난 영적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의 선교를 통해서 지역교회가 계속 개척되고 그 안에서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니까 각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디도서 1장 5절에 보면 바울이 디도에게 명령합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그래서 그 교회를 책임지는 지도자로서 장로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교회가 발전하고 부흥하면서 장로제도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나중에는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구분이 되고, 두 기능을 가진 장로가 역할을 분담하는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기능상 구별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교회가 부흥하고 제도화 되고 심지어 국교가 되다시피 하는 와중에 가르치는 장로의 전문성을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가르치는 장로는 전문적 소양을 가져야겠고 어떤 면에서는 남다른 자격 요건을 갖춰야 한다는 인식에서 가르치는 장로를 특별히 차별화시키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성직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세상 직업을 갖지 않고 교회 안에서 전문적으로 사역하게 하고 적절한 신학 교육을 받도록 하고, 그다음에 지역교회를 책임지게 하면서 이제 가르치는 장로가 다스리는 장로와는 성격이 구별되는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가르치는 장로에게 목사, 혹은 교사라는 말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성직화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아는 사실입니다.

장로라도 가르치는 장로는 성직에 해당하고 다스리는 장로는 세상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평신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류합니다. 이 사실을 칼빈이 더 확고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제네바에 있는 칼빈이 세운 교회 안에는 목회자에 해당하는 가르치는 장로와 일곱 장로라고 할 수 있는 다스리는 장로의 제도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는데, 어떤 면에는 이것이 오늘의 장로교를 가능하게 만든 기초를 닦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장로직에 대한 역사적 흔적들을 더듬어 보면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장로직은 주님께서 자기 교회를 위해 허락하신 거룩한 직급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의 생명, 건강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막중한 책임을 진 직급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에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직분인 동시에 책임이 대단히 무거운 자리이므로 장로직을 잘 수행하는 사람은 그 상급도 남다르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르치는 장로라고 할 수 있는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라고 할 수 있는 장로, 이 두 직책을 가진 분들은 교회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합니다. 잘되어도 책임지고, 잘못되어도 전부 책임져야 합니다. 100%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만큼 무거운 자리입니다.

저는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달려오면서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한 것이 좋은 장로님들을 만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건 뜻대로 안되는 일이잖아요. 어떤 장로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목사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고,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퇴하고 나서 제가 걸어온 길을 회상하고 돌이켜 보고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저도 모르게 감사가 나오는 것은 너무 좋은 장로님들을 만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이 인격적인 면에서 결함도 많고 어떤 면에서는 부족한 부분도 많은데 그런 것들을 다 채워 주고 보완해 준 분들이 장로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사랑의교회도 존재하지 아니할 것이고 옥 목사도 존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만큼 장로직이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목회를 통해서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이런 장로님들이 많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주님 앞에 진실하게 쓰임 받고 있는 그 분들 때문에 오늘까지도 영적인 세워짐이 있고, 많은 성도들이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목사나 장로나 성경적으로 보면 뿌리가 다 ‘장로’입니다. 교회의 크기를 가지고 훌륭한 목사, 장로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적으로 전혀 맞지 않습니다. 교회 크기나 유명세를 가지고 장로직을, 목사직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영적으로 죄악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들은 장로든 목사든 간에 얼마나 큰 교회를 섬기고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크기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세요. 한국교회 장로들이 자존감을 갖고 좀 더 제 역할을 감당하려고 한다면 교회 크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는 이 풍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정말 더럽혀 놓은 것은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한국교회 이미지를 더럽힌 장본인은 대형교회 목사요, 유명한, 성공했다는 목사입니다. 덩달아 유명하다는 교회 장로요, 성공한 교회 장로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정말로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사람들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 유명한 사람은 사람에게는 유명하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아요. 저는 목사님 중에서도 그런 분들을 많이 봅니다. 정말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은 숨어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릅니다. 알아주지도 않아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세상적 가치관을 가지고 목사, 장로를 평가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초연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장로직을 제대로 놓고 우리가 존귀한 직분으로 평가할 수가 있고, 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미국에 빌 헐(Bill Hull)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쓴 책에서 미국교회가 한 30만 개 되는데 그 중에서 상위 5%에 해당하는 목사 때문에 미국교회가 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봤습니다. 상위 5%에 해당한다면 실제로는 불과 천 교회 정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속한 목사들은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탁월한 경영능력이 있어서 대형교회를 만들고 인기를 끄는데 반해 나머지 95%의 목사들이 제대로 사역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주눅이 들어서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조그마한 교회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이 열정을 잃어버리고 열등감에 빠져서 목회를 제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교회를 망치게 한 사람들은 상위권에 있는 5%에 해당하는 목사라고 악평을 해놨습니다. 저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도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크기는 잘 모르지만 10명이 모여도, 50명이 모여도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이 그 안에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곱 교회를 주님께 칭찬하시고 나무라실 때 교회 크기를 가지고 말씀하신 부분은 한 부분도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너 지금까지 목회를 몇 년 했는데 교인이 그것밖에 안 모이느냐?” 주님께서 그렇게 책망하는 곳이 있습니까? 일곱 교회 중에 그런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크기는 주님과는 거리가 멀어요. 장로직의 존귀함을 회복하려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교회의 성직을 함부로 평가하는 사고방식부터 뜯어고쳐야 합니다.

 

장로의 성경적 의미

다스리는 장로라고 할 때 ‘다스린다’는 말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검토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조금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좋은 장로님들이 계셔서 행복한 교회도 많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 교단을 봐도 장로님들로 인해 고통하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교인들도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에서 장로님 때문에 크게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은혜를 받아서 정말 구원의 기쁨에 살던 한 6~7년이 있었는데 그와 같은 행복한 시기에 깊은 상처를 준 분이 있다면 바로 장로님이었습니다. 초등학생이 뭘 압니까? 그러나 저는 어른 예배를 꼬박꼬박 참석할 만큼 어른들의 세계를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로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교역자를 2년도 안돼서 쫓아내는 일을 전문적으로 했습니다. 교회가 완전히 자기 손에서 놀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장로님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가이오와 같은 훌륭한 장로가 있는가 하면 디오드레베와 같이 장로가 되지 말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장로가 되어서 주의 몸 된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일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하면 ‘다스린다’는 말을 곡해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장로되기 전에 말씀을 통해서 바로 가르쳐서 확실하게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하는데 오늘날 장로교회가 그런 제도와 검증 과정이 없습니다. 장로를 시켜주겠다는데 장로 가운 준비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장로 시켜주겠다고 성경 읽으라는데 안 읽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거래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직분이라는 것은 장로 되기 전에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 교회 안에서의 질서가 무엇이고,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을 사람 중에 하나님이 세우신다고 하는 확신이 서는 자를 장로로 세워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 교단만 해도 그와 같은 검증을 할 제도적 장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격이 안되는 분들이 장로가 되어서 평생 불행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끝을 맺는 것입니다.

1996년에 귀한 후배 목사님들과 교회갱신협의회를 시작하고 나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습니다만, 특히 우리 교단의 장로직에 대한 인식이 거듭나는, 다시 갱신되는 은혜가 없이 이대로 가다가는 장로교회가 한계에 부딪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목사도 책임이 있습니다. 목사가 바로 서지 않으면 우리 교단은 물론 한국교회가 앞으로 굉장히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목사도 마찬가지고,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빈은 ‘다스리는 장로’라는 말을 썼을 때 진짜 다스리는 장로였습니다. 제네바에서 ‘장로’는 세상적인 의미로서의 다스리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을 장로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장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네바에서는 ‘장로’ 하면 모두 특정한 교육을 받은 정부 관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법을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일을 함부로 폄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처벌을 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만큼 장로들의 권리가 막강했습니다. 이게 다스리는 권리 아닙니까?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법을 집행하는 권리니까요. 제네바에서는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구약적입니다. 성경을 엄밀하게 보면 칼빈의 이러한 ‘다스린다’는 개념도 잘못된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다스리는 것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3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2절에 다스린다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다스림은 반드시 한 가지를 전제할 때에 가능합니다. 그 전제는 “너희 가운데서 수고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수고한다, 다스린다, 권한다’라는 세 단어가 나란히 나오는데, 이것은 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원문에 보면 ‘그’라고 하는 정관사가 세 동사 제일 앞에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라는 말 뒤에 수고하고, 다스리고, 권하는 것이 따라 나옵니다. 이것은 1인 3역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먼저 남을 섬기고 교회를 위해서 몸을 마치는 헌신의 수고를 할 때에 그 수고에서 다스리는 권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가치관이요, 다스림의 개념입니다. 남에게 힘을 가해서 남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는 것이 세상이 이야기하는 다스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쳐주신 다스림은 밑에서 받들어 섬기는 데서 나오는 권위입니다. 수고한다는 말은 온 힘을 다해서 땀방울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애쓴다는 말인데, 그만큼 자기를 던져서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형제들을 섬길 때에 비로소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을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김 자체가 다스림의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스리는 장로는 자기를 던져서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낮은 자리에서 남을 높이고, 섬기는 데에서 남의 권위를 세우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수고하는 것이 먼저 와야 하고 수고할 줄 아는 자가 다스릴 수 있는 것이고, 다스림의 권위를 가진 자가 남을 권면하면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치유할 수 있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서로 파워게임을 하고 있을 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누가복음 22장 26절에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성경이 이야기하는 다스림은 섬김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잘못 생각해 버리면 그 직분이 자신에게 큰 화가 되고 교회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에게도 해당됩니다.

성경적인 다스림은 섬기는 것임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보면 교회에서의 다스림의 권세는 섬김의 권위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교회의 기본 개념이 있는데 ‘교회’라는 말 대신에 쓸 수 있는 용어입니다. 하나는 ‘택자의 모임’이라고 ‘교회’라는 말을 대신해서 쓸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도 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성령의 전’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 세 가지 개념 중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은 에베소서 1장 23절,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도 나옵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의 몸을 형성하는 주체들이 됩니다. 이것을 가만히 보면 교회 안에서의 다스림은 ‘섬김’이라고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수백 가지 지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지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체는 모두가 몸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손가락이, 심장이, 허파가, 백혈구가 왜 존재합니까? 몸을 섬겨서 몸이 제 구실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를 던져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교회를 자기 몸이라고 했습니다. 목사, 장로는 지체 중에 어디에 해당합니까? 심장 아무리 펄펄 뛰어도 콩팥이 고장 나면 끝입니다. 모든 지체가 다른 지체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다스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체가 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다스림은 섬기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다스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고 목사, 장로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이런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안수받는다고 장로, 목사가 되니까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3년 동안은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복음 전하고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사역하실 때 앓아누우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독감에 걸리셨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건강해야 온 사방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죠. 그러니까 몸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셨을 때에는 지상에 있는 교회를 몸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지상의 교회를 몸으로 받아서 자기 몸으로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지상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이 건강해야 주님이 마음대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병, 저런 병을 갖고 20년 이상 씨름하는 사람이기에 건강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상, 좋은 비전과 꿈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몸이 약해서 움직이지 못한다면 다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이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높임받기를 원하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이 일은 누구를 통해서 합니까? 자기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완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하면 몸은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지체된 사람들이 주님의 몸을 적극적으로 섬겨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좋지 못한 목사나 장로가 교회 안에서 힘을 갖게 되면 몸이 병들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원칙대로 섬기지 않고 누르고 명령하고 파워게임 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니까 몸에 힘이 빠져서 병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아무리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병들게 하는 목사, 장로라고 생각합니다. 목사, 장로가 되어서 교회를 병들게 해서 주님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주님의 일을 못하게 만드는 일에 쓰임을 받는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지요.

베드로전서 5장 2절은 장로를 놓고 권면하는 말씀인데,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거기에 이상한 말이 나옵니다.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더러운’이라는 말을 원문으로 보면 “부끄러운 이득을 위해서”와 같습니다. 왜 이런 충고를 합니까? 목사든 장로든, 교회 지도자가 된 사람은 조금만 잘못하면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 영적 권위를 사용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뭐가 더러운 것입니까?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없는 것이 더러운 것이겠죠. 자기 명예를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는 것은 더러운 이득입니다. 세상에서 채우지 못한 열등감을 교회 안에서 채우려고 교인들 앞에서 힘을 쓴다는 것도 더러운 이득입니다. 목사가 무슨 직책입니까? 작은 예수가 되어서 성도를 섬기는 종의 위치에 있는 것이 목사입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소명, 비전을 외치지만 은근히 자기 야망, 야욕을 채우려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더러운 이득입니다. 목사가 마음 놓고 목회할 수 없도록 자꾸 딴죽을 걸면서 교인들 앞에서는 “어느 장로님이 파워가 있어”라는 말을 들으면서 은근히 쾌감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 장로직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을 주님 앞에서 철저히 처리하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애초에 장로 안에는 사도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목사도 있습니다. 장로직은 참으로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이러한 직분을 내가 맡은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라고 맡은 것이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섬김으로써 주님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장로로 세웠다고 한다면, 내가 장로로 있을 때 교회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교회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로 인해 교인들이 정말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뛸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듭니까?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 교회밖에 더 있습니까? 가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교회밖에 더 있어요? 교회 와서 은혜 받으면 고통을 얼마든지 이기고 나갈 수 있는데, 세상에서 받는 고통을 교회 안에서 더 무겁게 느끼는 것이야말로 정말 비참한 일이 아닙니까? 교회를 그렇게 만들면 안 되죠. 어떤 사람이 들어와도 교회 안에서는 행복을 느껴야 하고, 보람을 느껴야 하고, 주님께 헌신함으로써 세상이 모르는 기쁨과 감격을 채워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좋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목사, 장로입니다. 저는 이들의 역할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그만큼 장로가 중요합니다.

 

다섯 가지 실천

끝으로 다섯 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섬김을 통해서 다스리는 장로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자랑스러운 장로님이 되시기 위해서 다섯 가지를 실천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1) 담임 목사와 은혜를 같이 나누고 목회철학을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장로님이 되고 나서 한 3년만 지나면 은혜가 말라 버립니다. 제가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죠. 당회에 들어가서 의견이 부딪히면 감정이 상하고, 교회 일을 머리 맞대고 깊이 이야기하다가 목사님에 대해서 실망할 때도 있잖아요. 그러다 보면 마음이 점점 닫혀버리게 됩니다. 목사가 천사가 아닌 이상은 완전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가끔 자신의 결점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실족시킬 때도 있거든요. 그것을 다 품을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러지 못하고 상처입고 실족함을 당하면 그 다음부터 설교를 들어도 그렇고 자꾸 은혜가 메말라 갑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담임 목사와 함께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평신도 시기에 적어도 2년 이상 목사와 함께 은혜 받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장로가 된 사람들은 자주 목사와 시간을 갖고 말씀을 나누는 기회를 만듭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함께 울고, 웃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목사의 짐 속에 있는 모든 내면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고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그런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같이 앉아서 말씀을 나누다 보면 목사는 장로 때문에 살아나고 장로는 목사 때문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서 권면, 책망, 교훈 등의 교육을 받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자리까지 자꾸 변화되는 노력을 하면 그 노력을 통해 좋은 목사가 되고, 좋은 장로가 되고 교회는 점점 은혜 안에서 서는 것입니다.

2) 목사와 함께 계속 배우는 수고를 하세요.

장로는 지도자입니다. 내 학력이 대학을 못 나왔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배우고 노력하고 성장하겠다고 몸부림치겠다는 것에 따라서 사람은 달라집니다. 데이비드 웰스(David F. Wells)라는 유명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분의 글을 보면 오늘날 사회에서 신기술이 기존의 기술을 점차 빠른 속도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10년 가던 제품이 지금은 2년을 못 넘기고 폐기처분 되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이렇게 급속하게 모든 것이 바뀌다 보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함의 자취도 대부분 사라지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영원함, 오래가는 것. 변하지 않는 가치. 이런 것에 대한 의식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에만 관심을 갖고 쫓아가다 보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식들이 희미해지고 만고불변의 진리를 꼭 붙들고 산다는 소명감도 약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지식, 변화에 대해 대처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열심히 읽고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제대로 건강하게 세워지려면 장로님들이 함께 배우면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책 한 권을 선택해서 목사님과 함께 이야기도 하고 의견도 나누고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사이에 내 자신이 갑자기 큰 것 같은 발전을 하게 됩니다. 장로님들은 세상일이 너무 바쁘니까 언제 책 볼 시간이 있습니까? 그래서 목사만 자꾸 성장하고 장로님들은 지적으로 성장을 안 하면 이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서 수요예배 마치고 모여서 한두 시간 정도 공부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창 ‘새들백교회 이야기’가 화제가 될 때였습니다. 그 책을 일주일에 한 장씩 읽고 와서 자유스럽게 토론하는 것입니다. 1년 동안 그 책을 펼쳐놓고 그 교회의 철학, 방법 등에 대해 토론하니까 그동안 장로님들이 갖고 있던 생각도 알게 되고, 몰랐던 것들을 배우고, 교회에서 앞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서로 존경하게 됩니다.

3) 열린 리더십을 살려야 합니다.

닫힌 리더십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목사들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지만 장로님들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꽉 닫아놓고 자기보다 조금 똑똑한 사람들이 보이면 밀어내고, 심지어 어떤 교회는 공부도 좀 하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들어오니까 계획적으로 발을 못 붙이게 만드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이게 닫힌 리더십입니다. 이것은 망조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갑자기 독감에 걸리도록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열어 놓아야 합니다. 유능한 사람이 있으면 발탁하고 또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도 주고 그 사람과 함께 손잡고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이게 열린 리더십입니다.

사랑의교회가 열린 리더십을 실천해 옮기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적이 있습니다. 당회에서 안건을 이야기를 하다가 2년 동안 제자훈련 받고 평신도 지도자로서 구역을 인도하는 남자 순장만 해도 천오백 명이 넘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회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장로가 될 길이 열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시무장로를 7년만 하고 사역장로로 넘어가서 그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결정하고 전국장로회연합회에서 혼 좀 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결의했다가 취소했습니다. 왜냐하면 헌법이 70세까지인데, 법이요 하고 나오면 아무리 번복을 해도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장로님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 식대로 7년 되면 사표 쓰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표 쓰고 다 나갑니다. 열린 리더십입니다.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교회는 장로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죠. 그러나 작은 교회라도 열린 리더십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4) 견문을 넓히십시오.

이 말은 다른 교회를 자주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은 이 교회에서 35년 동안 한 주일도 빼놓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면서 큰 자랑인 듯이 얘기하더라고요. 자기 교회밖에 모르고 살면 그게 충성인줄 아는 모양입니다. 담임 목사에게 요청해서 1년에 한 번 정도는 배울만한 교회를 선정해서 거기 가서 예배 드리고, 그 교회 장로님을 만나 브리핑을 듣고, 배우고 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십시오. 돌아와서 같이 검토하고 우리 교회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배우면 교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있다고 해서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하고 싶다면 나가서 잘하는 교회, 앞서가는 교회, 소문난 교회, 심지어 사고가 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교회도 찾아가고 듣고 오면 그만큼 우리 교회는 커집니다.

전라남도에 소록도 맞은편에 있는 녹동이라는 조그마한 어촌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의 목사님이 그만두고 새로운 목사님을 뽑는데 ‘제자훈련 잘하는 목사’라는 조건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목사님이 오셨는데 참 지혜가 있으신 분이에요. 제자훈련을 바로 시작하지 않고 뜸을 들이다가 장로님들에게 “장로님들, 우리가 녹동에만 살았잖아요? 전국교회를 다니면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교회들이 몇 군데 있는데 그 교회 가서 학습을 좀 하자고요” 제의를 했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 주로 제자훈련을 통해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을 탐방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장로님들이 서로 의견들을 내놓으며 제일 좋은 방법으로 제자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방법인지 모릅니다. 장로님들도 눈이 열리고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들도 앞으로 그렇게 하시면 교회를 섬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5) 비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라도 비전이 필요합니다. “모로코에 있는 선교사가 이슬람권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10년째 씨름하였지만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했다는데, 물질적으로 지원할 수는 없지만 매일 그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하자.” 이게 비전입니다. 얼마든지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일할 수 있습니다. 꿈이 없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다스리는 장로로서 정말 주 안에서 교회를 섬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고 여러분의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을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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