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있을 수 없는 질문
한국교회는 지금 선교 130년 역사에 가장 어려운 시점을 통과하고 있다. 전국의 대표적 일간신문들이 일제히 한기총 대표회장의 직무정지 기사를 내 보내면서 “돈 선거 휘말린 길자연 목사 직무정지 … 흔들리는 한기총”(중앙일보, 3/30), 이라는 제목까지 내 걸고 있다. 인터넷 토론방에서는 “이명박, 김윤옥 무릎 꿇게 만든 길자연 한기총 회장 직무정지”라는 제목에다 “X 목사님들 좀 조용히 좀 삽시다, 어째 한 달에 한 번씩 언론 타는 거 같네요” 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한기총의 금권선거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 역사적 증언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주최한 행사에서 나왔다. 한기총은 3월 25일 오후 2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대강당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설교자로 참석한 이만신 한기총 명예회장은 “나는 한기총 선거에서 금년에도 금권 선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금권 선거에 연루된 사람들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했다고 뉴스앤조이가 보도하고 있다. 이날 한기총 명예회장 4명이 연속으로 설교한 자리에서 이만신 목사는 첫 번째 설교자로 나섰다. 이 목사는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에서 돈을 쓰는 것은 관행이다. 나는 재작년, 작년 그리고 금년에도 선거에서 돈을 썼다는 분명히 사실을 알고 있다. 금권 선거 관행이 우리 한기총에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금권 선거를 한) 엄신형·이광선·길자연 목사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가 교회가 보는 눈에 대하여 아파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가 교회를 어떻게 보는가는 별 문제가 아니다. 사회란 교회를 좋게 보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적어도 “한국교회, 자정능력이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님이 다스리는 교회여야 한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몸은 머리를 통제를 받아야 한다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어떡하라고 교회더러 자정 능력이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솔직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교회의 자정능력 여부를 논하는 것을 용납하기가 어렵다. 교회는 그 어느 공동체보다 맑고 투명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교회야 말로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어야 한다. 교회는 최고의 자정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미국을 흔히 인종적 용광로(melting spot)라 부르지만 교회야말로 모든 사람이 용해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한국교회더러 자정 능력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교회는 존재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마태복음 13장에서 읽는 좋은 씨와 가라지 비유에서 조금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게 교회의 또다른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가라지들이 섞여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고 하신다. 밭의 가라지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지만 교회에서 자라는 가라지는 그냥 두라고 하신다. 좋은 씨에서 난 곡식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추수 때가 되면 자연히 정리할 수밖에 없으니 그 때까지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약간은 피할 길을 열어 둔 것 같다. 그러나 가라지가 좋은 곡식을 대신할 만큼 되어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가라지는 드문드문 있는 법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보수교회 대표회장’이 시커멓게 먹칠을 하고 있는 꼴이다.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교회의 근본을 부정하는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질문, ‘교회가 과연 자정 능력이 있는지’에 대하여 성실하게 대답해야 한다.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 오늘의 교회는 마치 하나님이 내버리신 것 같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몽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과연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정화시킬 수 있는가? 일반신자들은 이미 한기총에 대해 손을 들었다. 해체하라는 것이다. “한기총 해체를 위한 기독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해체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안 계신 한기총에는 누가 있는가?”라는 극단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
감당하기 어려운, 교회의 교회됨을 부정하는 질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냉정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1) 한국교회가 갈수록 소프트해지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는, 80년대까지 주일성수, 십일조, 성경읽기, 새벽기도, 전도 등 눈에 보이는 개인의 신앙 양식을 단순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회의 주보 전면에는 늘 이런 원색적인 구호들이 등장했다. 한마디로 개인의 삶의 방식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교회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주일성수와 십일조의 강조는 다른 말로 하면 시간과 물질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내 것이 없다는 사상이 그 속에 있었다. 매우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구호는 교회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전도와 복음화에 대한 강조는 있지만 개인의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강조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제자훈련, 두 날개, 가정교회 등 요즘 강조되는 교회안의 조직과 훈련은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해 갈 것인지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신앙의 평가를 주일 성수나 십일조 등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도대체 개인의 신앙생활을 달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데 있다. 거저 예배 참석하고 헌금 조금 하면 적당히 살아도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느낌이다. 성경공부, 설교, 훈련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정말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달게 받도록, 내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인식하며 살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도대체 한국교회는 지금 성도들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고 있는가? 일신의 영달, 행복하고 안락한 삶만 가르치는, 지나치게 소프트한 내용으로 신앙이 아니라 문화의 한 양식으로 변질된, 이 세상에서의 누림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그런 하나의 종교적 생활양식을 가르치는 것은 아닌가?
성도가 희생과 고난을 마다하는 순간, 세속적 가치의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금권선거가 횡행하는 것은 결국 고난과 상관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오늘 우리는 복음을 지나치게 달콤하게만 설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목사들이 지나치게 달콤한 설교만 하려 하는 것 아닌가?
(2) 교회가 다분히 권력 지향적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말이 ‘고소영’이라는 말이다. 소망교회 장로가 대통령이 되면서 교회와 정치가 뒤죽박죽이 된 측면이 있다. 교회가 권력의 산실이나 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빈민의 대부로 알려진 김진홍 목사의 이름이 대통령 만들기 공신이라는 말과 뒤섞여졌다. 개 교회를 담임목사가 아니라 유명인사들, 권력자들과 연상하는 (‘ㅇㅇ이 출석하는 교회’) 경우가 많아졌다. 대형교회 목사의 세습이 강행되어왔다. 세습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힘과 권력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교회가 장(長)을 생산하는 도구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한기협, 한기총, 한장총, 전기총, 한국교회지도자협의회, 지역기총, 전국 장로연합회, 지역 장로 연합회, 노회장로연합회 등등 헤아일 수 없이 많은 연합체를 만들어 장(長)을 무한대로 생산해내었다. 연합체가 오히려 연합을 해치는 결과를 빚고 있다. 무엇 때문에 온갖 종류의 연합체가 만들어지며 교단이 생겨나는가? 교회 분열은 다른 말로 설명이 어렵다. 성경적, 신학적 차이를 말하는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이유다. 그냥 부끄러울 뿐이다. 오직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교회가 어느 새 권력의 자리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오늘 한기총의 부패를 어떻게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3) 한국교회의 선교조차 다분히 금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나 선교사가 어떻게 살고, 어떤 모습으로 선교하고 있는 지 정확하고 정직하게 알고 있는가? 선교조차 공적주의, 금력에 의지하지 않는가? 한국교회 선교는 돈으로 하는 선교라는 비판이 제기된 지 오래다. 선교 현지에서 금력을 휘두르며 사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에 관한 관심은 매우 피상적이고 그저 돈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선교 기도회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교회를 보기 어렵다. 선교본부들이 구체적인 기도 프로그램이 진행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그저 돈을 보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선교현장이 온갖 종류의 다툼으로 얼룩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선교지 대도시, 혹은 환경이 좋은 곳에만 선교사들이 수백명씩 모여 있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교단이 다르다보니 통제와 조정이 불가하다. 선교사의 편리가 우선되는 선교에서 무슨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가?
(4) 교회가 외형에 집착하고 있다.
대형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모든 대형교회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모든 목사가 대형교회를 모델로 삼는다는 점이다. 커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논리에 빠져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바른 말씀의 선포와 성찬과 권징의 시행고 같은 개혁교회의 표지가 ‘무엇을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간다고 하면서 교회의 내용보다는 교회의 외형에 더 집착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이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아닌가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보니 결국 권력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다.
작은 것은 힘이 없고, 초라하고, 그래서 마치 주님도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실제로 작은 교회 목사들은 제대로 설교를 하지 않는 느낌이다. 적은 수를 가진 교회는 자연스럽게 무시당하는 현실이다. 작은 것은 권력을 쟁취할 수 없다.
(5) 목사의 도덕성과 인격성이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구제품 옷을 입을 때 목사는 그래도 신뢰감이 있었다. 돈이 없는 것이 흠이었지만 적어도 도덕성에는 의심 받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다. 적지 않은 목사들이 돈 문제, 성추문, 가짜학위, 거짓말 등으로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도덕적 파탄상태를 보여왔다. 소수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교단마다 곳곳에서 목사의 도덕성과 인격성의 문제로 파열음이 나타나고 있다.
목사들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주범이다. 목사 없으면 분열도 거의 없을 것이다. 소속교회들도 별로 없는 교단들이 난립한 것은 전부 목사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6) 죄에 대한 인식능력이 약해졌다.
갈수록 목사와 교인들이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고신의 기독교보는 사설을 통해 한기총 돈 선거에 대하여 양심 고백한 사실을 두고 늦게 고백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비난할 정도이다. 죄를 죄로 보지 않는다. 일반 고위 공직자들은 돈을 유용하거나 뇌물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법처리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사표를 낸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교회안에서 금권선거가 벌어졌다고 하는데도, 돈을 받았다고 시인하는 데도 사표를 내는 사람도 없고, 어느 교단에서도 재제를 하려 들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완전 양심 마비상태다.
교회나 연합기구 안에서 돈이 유용되고 남용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회계사고도 빈번하다. 감리교는 하나의 교단인데도 왜 저렇게 오랫동안 감독회장도 뽑지 못하는 절름발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가? 감독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크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교회가 권력화되니 분쟁조정 능력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3.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이 있는가?
이 심각한 질문 앞에서 한국교회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현재의 상황은 매우 비관적이다.
(1) 한국의 공교회는 자정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 안에서 동일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같은 사건이 늘어나는 것은 자정능력이 없음을 반증한다. 이미 감리교가 선거문제로 법원의 관리에 맡겨졌다. 감돋교회가 장로교인 변호사의 손에 들어가 있다.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한기총이 같은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금권선거에다 관리권조차 목사나 장로가 아니라 변호사의 손에 넘어가 있으니 자정능력이 전혀 없다고 해야 마땅하다.
사람이 모인 교회 안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런 문제는 매우 드문 일이어야 하고, 문제가 발생하여도 즉각 해결되고 잘못은 시정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사정없이 단죄될 수 있어야 한다. 죄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도록 조치하고, 범죄에 대한 대응이 갈수록 더 엄격해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자정 능력이 없다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교회의 자정능력이 없다는 것은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사회법정의 재판에 맡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좀처럼 교회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폰서 검사, 전관예우 판사 등 사법부의 부조리가 연일 보도되고 있지만 교회의 문제를 그런 사법부로 끌고 간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보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기총 감리교본부 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법정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치리가 이루어지 않는 것은 한국 모든 교회의 보편성 현상이다. 목사에게 문제가 생기면 노회의 목사들은 철저히 목사편을 든다는 것이 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실제로 그래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 교단의 재판은 자주 정치재판으로 변질된다. 교회는 자정능력을 잃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2) 공교회는 자정능력을 잃고 있으나 곳곳에 샘물은 존재한다.
수년 전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옥한흠 목사와 강원용 목사가 한목협의 대화마당에 나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그 때 주어졌던 ‘한국교회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국교회에 비관적이던 강원용 목사는 놀랍게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국교회 안에 샘물이 있다. 어디선가 새로운 샘이 솟아나고 있다. 결코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충 그런 요지로 이야기해 주었다.
한국의 공교회는 대부분 자정능력을 상실했다. 공교회에 대한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서로 죽지 않으려 겨우 엉겨있는 느낌이다. 교단이 실망스럽지만 달리 대안이 없어 그냥 붙어있는 형국이다. 그렇게 느끼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
어딘가에 샘물이 존해하고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많은 성도들은 교회의 소위 ‘상층구조’에는 전혀 상관없이 아침마다 한국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가르치는 대로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곳곳에서 기윤실, 좋은 교사, 뉴스앤조이, 바른교회 아카데미 등 각양의 형태로 자신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샘물노릇을 하려고 애를 쓰는 개인과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대로 가면 망하므로 이대로 가지도 않을 것이다.
(3) 공교회의 조직적 구조변화가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현재 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미국 전체교회의 대표회장을 전혀 알지 못한다. 들어본 적도 없다. ‘한국개신교회는 추기경과 같은 독보적인 존재가 없어 힘이 없다’는 소리를 한다. 한국교회가 힘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힘이 너무 많아 탈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신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문자 그대로 주님이 머리로 존재하시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머리가 되려는 무례한 행위를 그쳐야 한다.
총회장, 노회장, 이사장 같은 명예욕을 채우는 자리를 없애야 한다.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 Moderator, Chairperson과 같은 용어를 우리도 만들어 내야 한다. 호칭부터 바꾸어야 한다. 모든 목사들이 주께서 세워주신 ‘목사’되었음에 감격하고 흥분해야 한다. 목사들이 조정, 중재자의 자리, 의자에 앉아서 정리하는 사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필자는 그래서 오래전부터 총회장을 ‘총회종’으로 바꾸면 어떤가고 다소 엉뚱한 제안을 해보기도 하였다. 총회 대표 ‘섬김이’는 어떤가? 어떻게 하든 철저하게 명예욕, 권력욕을 깨뜨리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다.
존재방식에 한계를 보인 한기총은 조직을 접어야 한다. 마구잡이 교단영입, 각종 형태의 연합기구영입으로 세만 불린 현재의 형태는 금권선거를 부르게 되어 있다. 한목협이 설정했던 교단장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과 같은 표준을 만들어 공교회 연합회를 구성하고, 총무중심의 체제가 아니라면, 유엔이 사무총장을 강대국이 맡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대형교단은 아예 회장을 맡지 못하도록 만드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이번 한기총 사태도 합동과 통합이라는 대형교단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목사들이 되었는가? 성경은 이미 구약에서 우상숭배를 제1계명으로 금지해 놓았고, 신약에서 탐심을 우상숭배로 규정했다(골3:5). 목사들의 의식 전환이 없이는 변화가 불가능한 일이다. 탐심을 우상숭배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이 극도로 경계하는 우상숭배에 빠져드는 원인이 탐심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죄를 죄로 아는 가장 근본적이 의식개혁이 시급하게 일어나야 한다. 죄인이라야 다시 주님을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