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1998년, 한국의 목회자들이 교파와 신학을 초월하여 ‘한국 교회의 일치와 갱신, 그리고 사회를 향한 섬김’이라는 기치 아래 함께 모여 시작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은 어느덧 12년차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창립 12년째를 맞이하는 이때에, 그동안 주제로 삼아 함께 실천해 왔던 ‘일치’, ‘갱신’, ‘섬김’에 대한 현황을 점검하고, 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깊이 논의해야 한다. 
먼저 지난 시기 동안에 한목협이 추진했던 일들 중에서 가장 괄목한 만한 것은 한국교회의 ‘일치Unity’를 위한 노력이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만연한 극단적인 교파주의 분열과 교권다툼의 상황 속에서의 외침이었으며, 동시에 한국교회가 신학과 교단의 정체성의 차이 속에서 들려진 외침이었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더불어 활발하게 움직여 온 분야는 대사회적인 ‘섬김Diakonia’이었다. 한국교회가 하나된 마음으로 진행한 이 ‘섬김’은 교회의 일치와 갱신의 디딤돌이었으며, 대사회적인 봉사를 통한 한국교회의 이미지 개선에 큰 기여를 했다.
이와는 반대로 한목협이 기치를 걸고 추진했던 세 분야 중 가장 취약했던 것은 ‘갱신Renewal’의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갱신’을 말하기도 어렵고 더구나 실천하여 어떤 가시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기도 힘들었던 것은 이 갱신의 문제가 바로 목회자 자신의 존재성과 정체성의 문제요, 동시에 목회 자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목협이 추구했던 3가지 과제 중에서 ‘갱신’이라는 주제가 가장 취약한 이유가 바로 주제 자체가 지닌 이러한 문제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지난 기간 동안에 ‘열린대화마당’에서 다루어온 주제의 횟수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현상은 잘 드러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갱신’을 말하고 나섰다가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대로 적용된다. 자기 살을 도려내는데 아프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결연한 마음으로 어렵사리 ‘갱신’을 외쳐보지만 말없이 돌아오는 반응은 대체로 “너나 잘 하세요” 하는 식의 반응이며, 갱신을 외친 사람은 위선자로 전락되기 쉽다는 것이다.  또 나이 든 이들이 갱신을 말하면 ‘왜 젊어서부터는 갱신을 외치지 못했느냐?’고 나오기 쉽고, 젊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이 말하면 ‘불평’으로 받아들여 갱신을 외친 사람이 마치 심지도 않은 채 거두려고만 하는 사람 - 자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당하기 쉽다는 것이다. 또 소위 목회에서 유명세를 타거나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갱신을 말하면 “자신이 배부르고 등 따스하니 하는 소리”라 단정짓기도 한다. 그래서 ‘갱신’이라는 주제는 말하기도 부담스럽고 실천하기에는 더구나 힘들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 특히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오늘 가장 절실한 문제는 ‘갱신’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스스로 말하기도 조심스럽고, 실천하기에는 나 홀로 앞장서서 희생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에 ‘갱신’이라는 주제는 우리의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이 ‘갱신’을 피해 가려거나, 땜질식의 처방, 그리고 일부의 문제라고만 제쳐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개적인 회개에 뒤따르는 구체적 갱신의 실천이 없었던 지금까지의 자세를 가지고는 우리 자신의 목회의 갱신을 이룰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사회를 향한 새로운 비젼과 책임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II. 무엇을 ‘갱신’하자는 것인가?

교회가 ‘갱신’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목회자 자신의 정체성의 ‘갱신’이 먼저이다. 그리고 목회의 철학과 자세의 ‘갱신’이 우선되어야 한다. ‘갱신’을 말할 때에 그 갱신은 목회의 방법이나 교회운영이나 ‘성공의 척도’에 대한 갱신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구체적인 목회방법과 목적에 대한 새로운 방향설정과 변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갱신’은 어디까지나 우리 목회자들의 인격과 도덕에 관한 ‘갱신’이 되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목회자들의 정체성과 존재성이 잘못 나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목회자 자신의 가장 ‘비인격적인 성품의 문제’까지도 목회자 ‘개인의 영성의 문제’라고 묻어버려 왔으며, ‘목회자의 권위’라는 말로 ‘비도덕적인 타락’을 은밀하게 감추어 왔다. 대개는 목회자의 문제가 불거지면 대체로 이렇게 해 왔다. 이것이 목회자들에게는 면죄부처럼 악용되어졌기에 우리자신의 ‘갱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목회자의 ‘갱신’이 없이 교회의 ‘갱신’이 없고, 교회의 ‘갱신’ 없이 사회 ‘갱신’도 없다. 이렇게 본다면 ‘갱신’이 목회자와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첫째, 목회자의 ‘갱신’은 무엇보다도 목회자의 인격과 성품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목회자에게 건강한 인격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목회자의 인품과 소양이 사회인들에게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우리 모두는 피부로 느끼고 있다. 성직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도에 대한 조사에서 목회자들이 가장 낮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목회자들의 인격과 성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목회 지망생들에게 소명에 대한 검증으로 끝나지 말고, 한 걸음 나아가 목회지망생들의 성품과 인격적 건강성에 대한 철저한 심층심리검사도 뒤따라야 한다.
목회자 자신이 건강한 인격에 문제가 있는데 신뢰와 존경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강요하여 나오는 것을 진정한 신뢰와 존경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는 자기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다. ‘갱신’은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의 정신건강을 점검하고 그 인격과 성품을 새롭게 하는데서 시작하여야 한다.

둘째, 목회자의 ‘갱신’은 도덕적 개인생활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목회자의 생활은 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드러나지 않는 사적인 부분이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드러나지 않는 자신의 사생활이 더욱 중요하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렇지 않겠지만 소수의 사람들의 사생활이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추락을 가져왔다.
목회자들의 성도덕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명하거나 무명하거나 목회자의 도덕성은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도덕적 문제 때문에 목회자 전체가 매도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적인 문제가 개인의 문제이고, 또 일부의 일을 부풀리는 사회의 문제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름이 난 목회자의 도덕적 타락은 그 여파가 더욱 크다.
따라서 오늘 한국목회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공동체적인 대처가 없이는 ‘갱신’을 통한 사회적인 책임은 물론, 전도에도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갱신’은 그 도덕성의 ‘갱신’에서 출발하여 한다.

셋째, 목회자의 ‘갱신’은 교회재정운영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목회자들도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의식주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직면한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생활에도 극단적인 양극화가 엄연히 존재한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돈이 넘쳐서 문제가 되는 목회자가 있고, 돈이 너무 없어서 문제가 되는 목회자도 있다. 일부이지만 지나치게 화려한 소비생활은 모두에게 신뢰와 존경을 잃게 만든다.
당사자들은 “훔치지 않고 내 것 가지고 내 삶을 살아가는데 무엇이 문제냐?” 말할 지 모른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생활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면 경제적인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목회자들에게나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 바람직한 성직자의 삶의 모습으로 비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목회자들이 똑같이 살 수는 없다하더라도 지나친 양극화와 지나친 사치 만큼은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에 한국교회가 목회자들의 최저생활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의 문제라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개체교회와 교단이 함께 목회자들의 생활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Welfare Pastor’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가 사는데는 ‘먼저 온 사람들이 맨 나중에 온 사람’에 대한 배려는 필요 없을까?(마 20:1~16) 경쟁사회에 속에서 경쟁에 살아남는 자가 승자독식을 즐기는 원리가 교회와 목회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만 할까? 영국의 문호요 사상가인 John Ruskin의 경제철학은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에게 해당하지 않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이나 국가에 중요한 문제는 결코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가 아니라 ‘그 돈을 어떤 목적에 쓰느냐?’인 것이다(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김석희 역. p.184). 목회하는 교회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먼저 온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과 꼭 같은 액수를 손에 쥐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인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항의는 일리 있다.
그러나 러스킨은 경제에 있어서도 ‘애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생명을 제외하고는 어떤 부富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위의 책. 196). 나아가 그는 “가장 부유한 나라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고,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여 그 인격과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고 한다.(197)
그는 결론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신의 왕국이 오고, 그리스도의 빵의 선물과 평화의 유산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상의 서로 반목하는 악한 자와 지친 자들에게도 좁은 가정의 화목보다 더 거룩한 화목이 오고, 평온한 경제가 이루어져, 그곳에서는 악한 자들도 - 핍박은 여전히 받겠지만-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고, 삶에 지친 자들도 휴식을 얻게 될 것이다.”(214)
일부에서는 넘쳐나는 헌금과 재정운명 때문에 갈등과 싸움이 있다. 교회의 재정은 헌금이고 헌금은 헌금답게 쓰여져야 한다. 이러한 돈에 대한 회개 없이는 진정한 회개도 없고(J. Wesley), 진정한 ‘갱신’도 없다. 교회에 들어오는 재정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다. 그것은 내가 일한 댓가가 아니다. 헌금은 헌금답게 쓰여야 한다. 일부 목회자의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일부의 목회자의 도에 넘치는 생활과 재정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싸움들이 동역자들에게는 물론 이 사회에 크나큰 반기독교적인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갱신’에는 연합기관의 운영과 자리다툼에서 오는 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대사회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연합기관과 교단의 자리다툼에서 오는 피해가 많이 있다. 한국교회는 수많은 기관을 양산하고 있다. 그 타당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리다툼에서 오는 것도 많이 있다. 한국사회를 위해서,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해서 연합기관들로 힘을 모아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래야 개교회나 교단보다는 보다 효율적이고 규모 있는 일을 감당하는 등 여러 가지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자리다툼 때문에 오는 선거양상의 타락과 서로를 헐뜯는 비방과 뒷거래, 중복되고 유사한 기관의 양산 등은 긍정적인 효과를 무색하게 만들고,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준다. 교파분열도 심한데 연합기관의 행태도 같은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대사회적인 힘을 모으는데 이바지하기보다는 그 반대 경우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자리다툼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 이러한 분야에서도 시급한 ‘갱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III. 나가는 말

한국교회와 목회의 ‘갱신’에 대해서 더 구체적이고 더 많은 부분의 ‘갱신’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까지 문제가 되는 교회의 사유화와 이에 따른 목회자의 세습도 ‘갱신’해야 할 과제이다. 누구나 자신이 이루어 놓은 공적을 인정받고 싶고 그에 따른 보상도 받고 싶다. 그러나 교회는 어디까지 하나님의 공교회이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의 세계에서 목회성공이 목회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목회성공을 무엇으로 가름할 것이냐에 따라 목회성공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는 만큼 한국교회에 팽배한 목회성공의 척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목회성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는 경영학적인 방식으로의 성공은 될지 몰라도 교회의 목회의 성공의 척도는 될 수 없다.
또한 한국교회와 목회자는 이제 이 사회의 지도층이요 지배적인 종교라는 잘못된 의식이 있다. 그래서 종교 권력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의 앞날에 큰 걸림돌이 되기 쉽다. 어느 시대에나 교회와 목회자들이 이러한 권력의 정신에 빠지면 그 시대의 교회는 사명은 물론 정체성과 존재성 자체를 잃어버리기 쉽다. 그 외에도 한국교회와 목회에 ‘갱신’이 필요한 부분들이 많이 있다.
또한 무자격 신학교의 난립과 목회자들의 자질 저하의 문제도 갱신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신학적인 토대 위에서 훈련받은 소명감이 투철한 목회자들이 양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무자격 신학교가 난립하고 무자격 목회자들이 난립하여 많은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무자격 신학교의 난립의 문제와 목회자의 자질에 대한 분명한 갱신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거창한 담론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갱신’이 필요한 때이다. 이렇게 목회자의 ‘갱신’이 이루어지면 필요한 다른 ‘갱신’도 함께 이루어 질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구석구석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디딤돌’ 사명을 다하고 있다. 징검다리에 놓인 ‘디딤돌’들은 그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만약 ‘디딤돌’이 드러나 보이려고 한다면 바로 ‘거침돌’이 되고 만다. 징검다리에 이런 ‘거침돌’이 하나만 있어도 그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넘어지고 자빠진다. 그렇게 되면 그 징검다리 자체가 문제거리가 되기 쉽다. 
세계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일등 아니면 탈락되고, 무엇이든지 최고에, 최대에, 최신이 되지 않으면 그 존재성마저 인정받지 못한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교회와 목회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징검다리의 ‘디딤돌’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징검다리에 아무리 많은 ‘디딤돌’이 있어도 ‘거침돌’ 하나가 있으면 그 위를 지나는 사람은 걸려 넘어진다.
한국교회와 목회의 ‘갱신’은 바로 이러한 ‘거침돌’을 제 자리에 다시 놓아 ‘디딤돌’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한목협의 지나간 활동을 돌아보며 그 현황과 전망을 하는 이 자리에서 이런 ‘갱신’은 빨리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한목협이 추진해 왔던 일치와 섬김 또한 더욱 효과적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와 목회에서 ‘갱신’이 필요한 부분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목회자 자신의 내적, 외적 차원의 ‘갱신’이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여기서부터 다른 ‘갱신’도 시작하고 힘을 얻으면 더 좋은 결과를 이룰 것이다. 한목협의 앞으로의 활동에는 어렵더라도 이러한 ‘갱신’의 차원이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고 작은 것에서부터 변화되는 실천과 목회자들의 달라진 실체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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