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8) 교갱협 제14차 영성수련회 폐회예배

마가복음 16장 14~20절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저는 어머님과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만큼 제게 가장 익숙한 문화가 교회 문화입니다. 서른 살에 목사가 되고 지금까지 교회를 가장 가깝게 여기는 삶의 터전으로 알고 살면서 제 손에서 꾸준하게 놓지 않았던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책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읽지 않는 책 중에서 그래도 읽는 게 성경입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무거운 부담이자 목마른 갈증이 하나 있다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20절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이것은 전도에 대한 부담입니다. 교인들에게 나가서 전도하라고 말하면서도 제 목회 현장이 주로 보내 주시는 사람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보니까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여전히 무겁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은 전파하라”(막16:15) 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마28:19)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이 말씀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은 늘 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떠나시면서 마지막 유언처럼 하신 말씀이면서, 마가복음 끝 부분에 이 단락이 괄호로 묶여 있길래 굉장히 중요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부담스러웠습니다.

또 하나 갈증이 있다면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는 구절입니다. 목사의 주된 사역이 말씀 증거인데 해 보면 해 볼수록 이건 분명합니다. 아무리 멋진 말로 포장하려 해도 주님이 함께 역사하지 않으면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기술은 그저 사람의 것일 뿐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함께 역사하사” 이 갈증이 저에게는 여전히 지금도 있습니다. 갈수록 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증거하실 때도 그 따르는 표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확실히 증거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 들었습니까? 확실히 증거되는 말씀 때문에 그들의 인생에 잔치가 일어나는 새로운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증언할 때에 제자들에게는 주께서 함께 역사하는 표적이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말씀에 확실히 증언되었습니다. 그 표적이 오늘 본문에 있지 않았습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런 표적 말입니다.

저는 기적 중에 기적이 제가 목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솔직한 고백입니다. 어떤 때는 교인들이 저를 목사라고 불러주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그래서 설교하다가 절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네가 목사냐?” 하며 다 나가버리면 제가 어디서 설교하겠습니까? 제 참모습을 알면 인간적으로 저를 존경하겠습니까? 드러내지 않으신 게 너무 감사합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교인들도 다 그런 것 같습니다. 교인들도 다 드러나면 장로하겠습니까? 집사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숨겨주신 은혜가 참 감사하고, 우리를 이 귀한 교회의 한 직분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불러주신 이것이 기적 중에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불러주시고 세워주신 분이 적어도 내 사역에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나타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갈수록 더 봐야만 믿는 세대, 경험해야만 아는 세대인데 내 눈 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 전하는 재미도 있고, 계속 전할 이유도 생기는 거 아닙니까? 은사가 다르니까 생각하면서도 갈증은 여전합니다. 예를 들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표적이 따른다고 했는데, 귀신이 쫓겨나가기는커녕 약을 올립니다. 그럴 때에 도대체 내가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는, 주께서 함께 하시는 그런 역사 속에 있는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손을 얹은즉 환자가 나을 것이라고 했는데 손을 얹어도 낫지를 않습니다. 어떤 때는 일반병실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오면 그날 저녁에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개척한 친구 목사의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몇 년을 해도 교인이 늘어나지 않고 있는데 소원이 하나 있다면 말기암 환자 한 명만 낫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고생 끝입니다. 그 정도로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라도 사도행전의 사건이 나의 현실이 되고, 성경의 기록이 내 삶에, 사역에 열매가 되는 그런 간증들, 그런 보고서가 왜 내 인생에는 이렇게 힘든가 하는 갈증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표적은 잔치, 파티를 불러 일으킵니다. 표적의 의미가 잔치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 잔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 장로들이 함께 그야말로 파안대소 하면서 웃는 소리가 저 담장 밖까지 들렸습니다. 오죽하면 먹기를 탐하는 자, 어떻게 저런 자들과 친구가 될 수 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당시 경건의 표준을 뒤로하고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이 받을 수 없었던 것들을 나눠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현장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이 정말 그대로 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랜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오랜 질병에서 치유되었습니다. 오랜 관계에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이런 것들이 잔치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이 땅 잔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전부 다 회복되는 것이고 새로운 출발입니다. 오랫동안 내 인생 가운데서 되지 않았던 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그분의 표적으로 혜택을 주시니까 거기에서 잔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나안 혼인잔치에도 예수님이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워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니 포도주였습니다. 여러분, 누가 제일 놀랐겠습니까? 물이 제일 놀랐습니다. 내가 조금 전에 물이었는데 갑자기 내 몸에서 냄새가 나더니 포도주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변화되는 당사자가 제일 놀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먼저 변화의 파티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잔치는 계속 이어집니다. 누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으며, 누가 그 잔치를 계속 이어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오셔서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는 그 자리에 모두들 기뻐하는 잔치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목회 사역이, 말씀 증언의 사역이 바로 이런 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토니 캠폴로(Tony Campolo)의『 더 킹덤 오브 갓 이즈 어 파티 』(The Kingdom of God is a Party: God’s Radical Plan for His Family)라는 책입니다. 그 속에 하와이 출장중에 겪은 내용이 있습니다. 저자는 새벽에 배가 고파 ‘기름에 찌든 숟가락’이라는 상점을 발견하고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새벽 3시 반쯤 일단의 거리의 여자들이 들어와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내일이 내 생일이라고 말했더니 모두들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조소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우리 처지에 무슨 생일은...” 이런 자조섞인 말들이 오가면서 썰렁한 분위기의 식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캠폴로는 주인에게 내일 저들을 위해서 생일파티를 열어주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 여자 이름이 뭐냐?” “아그네스입니다.” “내일 이 시간에 오느냐?” “매일 옵니다.” 그래서 주인 아줌마와 함께 세 명이 역할 분담을 합니다. 다음날 주인 아저씨는 음식을 만들고, 아줌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캠폴로는 장식을 해서 3시 반 전에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그 여자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세레머니가 벌어졌습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해피 버스데이 아그네스.” 아그네스의 그렇게 놀란 눈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케익 커팅을 하라니까 아그네스가 “이거 집에 좀 갖다 두면 안되겠느냐”고 합니다. 그렇게 그녀가 떠난 빈자리에 모두들 조용히 있을 때에 토니 캠플러는 “내가 아그네스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그에게 주인이 “혹시 목사님 아니냐? 어느 교파에 속한 목사냐?”고 물어봤습니다. 캠폴로는 “나는 거리의 여자들에게 새벽에 생일파티를 열어주는 교파의 목사”라고 대답했지만 주인은 “그런 교파가 어디 있느냐? 그런 게 있다면 나도 당장 오늘부터 교회에 나가겠다”고 했답니다.

여러분, 파티가 필요합니다. 삶에, 관계에, 내가 뛰어넘지 못한,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목사라도 줄 수 없는 것을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내가 주장하고 선포하고 말하고 싶어하는 그 말씀을 확실히 증언해 주시는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합니다. 토니 캠폴로는 이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마다 파티가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잔치를 일으켰고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천국의 생명잔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미리 경험시켜 주시는 현장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목회라는 이름의 현장을 만들어낼 때에 잔치의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그 현장을 만들어 내라고 주님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제게 세 가지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1) 우선순위를 조정하라

첫째, 목회 사역에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목회란 그야말로 목양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목양의 동굴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보내주시는 사람을 잘 키우겠다는 안주하는 마음이 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회개할 것 없는 아흔 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 돌아온 양에 대한, 한 사람에 대한 기쁨이 더하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마음에 대해서 너무 소홀했다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캠퍼스에, 또 젊은이 문화에, 학생선교단체에 역동성이 상실된 데에 대한 자성이 10여 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학생선교단체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해 보면 그 원인 중 하나가 간사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현장에서 스스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복음의 감격 가운데 실수하면서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현장 감각이 상실된, 현장을 떠난 지 오래 된 간사들과 함께 따로 테이블 위에 둘러앉아 양육한다는 것입니다.

목양 필요합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쉬운 것, 익숙한 것에 안주하는 법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끼리, 선택받은 우리끼리 둘러앉아 나누고 기도하는 게 좋으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면해서 불편함을 감수하는 그 현장을 어느 때부터인가 멀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구원하시는구나. 지금도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구나’ 그런 일들이 계속 우리의 귀에 들리고 보여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돌아온 사람의 간증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 예배 중에, 모임 중에 끊임없이 계속 일어나야 하는데 회심간증이 없습니다. 돌아오게 한 사람의 피눈물 나는 간증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을 받았다. 주님께서 내 길을 열어 주셨다’ 이런 형통, 번영의 간증은 있는데, 피 터지는 싸움을 통해서 한 생명과 씨름했던 그런 간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뛰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는데, 나는 못하겠나 하는 마음으로 육교만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습니다만 다리가 불편하신 분들이 어떻게 육교 위를 올라가셨는지, 거기서 늘 구걸하는 분들에게 가서 저도 똑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안 일어납니다. ‘문장이 잘못되었나 보다. 나사렛이 빠졌구나.’ 다시 해도 안 일어납니다. ‘잡아 일으켰다고 그랬는데...’ 일으켜 보기도 하고 별 짓을 다해 봤습니다. 안 일어납니다. ‘하나님.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됩니까? 오늘부터 밥 안 먹겠습니다.’ 화가 나고 그래서 그날 저녁부터 라면만 먹었습니다. 그런다고 됩니까?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는데 비슷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제 앞에 서는 것입니다. 저는 눈을 감고 회피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뜨거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입을 열었습니다. “예수 믿느냐?” “믿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서 믿게 하시는, 함께 역사하시는 그 따르는 표적으로 예수 믿어야 산다는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면 당사자는 혜택을 입음으로 파티가 일어날 것이고, 주변 모두가 눈으로 봄으로써 말씀이 더욱 확실히 증대될 것 아닌가’ 하는 불 같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도망가듯 포기한 저에게 다른 아무 생각없이 그 사람 불쌍히 여기고 그 사람 예수 믿어야 한다는 것에만 집중하니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보는 데서 쭉쭉 다리가 늘어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아, 나도 되는구나!’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일으킬 수 있는 것도 아니구나! 내 기술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영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이건 철저히 주님이 하시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때는 되고 어떤 때는 안 되는 것은 한 생명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주님의 마음을 가진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두 번째 선교대국이라 하고 자랑하지만 여전히 80%가, 아니 85%가 넘는 불신자들이 존재하는 선교지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선교지이고 우리의 목회 현장은 선교지 캠프입니다. 끊임없이 내 주변에 죽어가는 불신자들을 향해서 우리를 이 땅에 선교지로, 선교사로 있게 하신 것입니다. 가끔씩 크루즈 유람선 같이 목회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좋은 시설에서 함께 교제하고 예배하고 풍성히 누리며 천국의 항구까지 거친 바다 위를 염려하지 않고 안전하게 같이 누리면서 올라가고자 하는 크루즈 목회를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바다를 빼앗기고 주변에 있는 섬들을 다 빼앗긴 상태에서 어떻게 그 배가 항구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항공모함 목회를 해야 합니다. 나가서 임무수행하고 주변을 초토화시켜서 하나님의 땅으로 만들어 놓는 전투기들을 많이 태울 수 있는 어머니 배, 항공모함 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정말 큰 교회입니까? 항공모함에 승선한 승무원들의 숫자는 그 배의 규모를 얘기할 때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얼마나 그 목적과 임무에 충실할 수 있는가? 작은 육지로서의 모함이 되어서 필요할 때에 출격시키고, 승전 기록을 가지고 돌아오는 전투기들이 많이 있는가 하는 것이 항공모함의 자랑일 것입니다. 그런 비행기를 많이 보유한 항공모함이 대단한 것입니다. 교인들의 삶의 현장에서, 가정과 직장과 말씀을 증언하는 그 자리에서 함께 역사하셔서 많은 싸움에서 분명하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열매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되어야 하고 내가 만들어야 하는 교인들의 영적 체질을 위해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인가? 이 부분에 다시 한 번 검토가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전도를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요함 중에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정말로 나는 그런가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여쭙기를 바랍니다.

 

2) 본질을 분명히 하라

두 번째 깨달음을 주신 것은 목회 사역에 본질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배웠던 것 중에 하나가 신앙생활이란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는 측면입니다. 학습되는 요소가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고 그리스만 살고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런 신앙고백들로 시작했는데, 목사가 되고, 혹은 제자훈련을 좀 받고, 또 집사 한 15호봉쯤 되고, 이런 식의 경력이 쌓여 가는 만큼 이게 자존심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만 사는 이것이 어느 날 예수님은 죽고 나만 살겠다는 그런 자존심으로 많이 살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게 제 속에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가끔씩 아는 목사가 방송이나 신문기사 혹은 잡지에 기사가 되어 나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몇 살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50살 전후라고 할 때는 ‘같은 나이인데, 이 사람은 이렇게 유명해졌는데, 이렇게 목회를 잘하는데 나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사실 가끔이 아니고 자주 스쳐갈 때가 있습니다.

포항 선린병원 설립자로 재작년에 돌아가신 고 김종원 장로님의 이야기를 아실 지 모르겠습니다. 평양의과대학에서 소아과 의사를 하다가 1.4 후퇴 때 내려와서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폭탄 터진 웅덩이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고 북녘 땅에 두고 온 세 아들이 생각나 평생 전쟁고아들을 위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미 해병대와 선명회의 도움으로 포항에 병원을 짓고, 62년도에 개인 재산으로 못하도록 법인등록을 하고, 병원에서 월급 주면서 선교사도 많이 보내고, 1년에 20여 차례 이상 단기선교를 가는 등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분이 계십니다. 고지식한 면도 있어서 엄마가 아이들 치료하기 위해서 들어왔을 때 손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으면 “그것 칠할 시간 있거든 애나 똑똑히 보라”고 그럴 정도로 눈물 쏙 빠지도록 얘기하는 그런 할아버지인데 이 분의 기록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워낙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분위기가 되다 보니까 아예 돌아가시기 전에 수십 년 동안 매일 썼던 수십 권의 일기장을 다 불태워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 뿐인데 하나님만 영광 받으셔야 되는데, 사람들이 나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흔적을 다 없애 버렸다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이런 사람이더라 하는 짜집기 기사가 났는데 주변 사람들이 어디 정확하겠습니까? 내 얘기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겠죠. 그래서 자서전을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정확하게 남기기 위해서. 그러나, 조심스런 말씀을 드립니다만 내 얘기를 내가 정확하게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내 얘기를 들어서 정확하게 쓰지도 못할 사람이 쓰다 보면 모든 약점들 다 빼고, 그래도 체면 유지할 최소한의 기록으로 쌓아놓을 그 이야기를 듣고 그것 때문에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겠습니까? 표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놀랄 만한 내 인생의 모든 흔적들을 주변에서 보면서 ‘아, 저것이다. 저 사람에게 일어난 저 일이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역사하신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게 표적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걱정하는 학교 문제든 교계 문제든 결국은 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문제 아니겠습니까? 남이 하겠다고 하면 하라고 좀 주면 어떻습니까? 목회 사역의 본질이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는데 교인들도 목사들도 자기 교회 자랑을 은근히 많이 합니다. 한 번은 가게에 들러서 얘기하다가 제가 어느 교회 목사라는 것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인이 전혀 믿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서대문교회 담임목사라고요. 몇 년 전에 이 교회에 왔어요” 그러니까 교인 중에 한 사람이 우리 교회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이 영화배우 같고 외국어를 다섯 개 구사하고 샤프하게 생겼다고 그랬답니다. 저는 좀 투박하게 하거든요. 그랬더니 못 믿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인 이름을 대라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거짓말 해서 됩니까? 교회 자랑, 목사 자랑, 그게 사실 예수님 자랑하고 싶어하는 코스에 있는 것이겠지만, 그런데 그런 자랑을 목사인 우리가 스스로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미지를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3) 집중력을 강화하라

세 번째 깨달음은 목회 사역에 집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연말이 되면 연락처 리스트를 새로 정리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음식점 전화번호가 왜 그렇게 많은지 서울 서북부에 웬만한 음식점 전화번호가 저한테 다 있었습니다. 회의, 모임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가 보면 다 그 얼굴이 그 얼굴입니다. 저쪽 모임에서 만났는데 여기 오니까 그 얼굴이 또 있어요. 좁은 땅덩어리에서 무슨 단체가 그렇게 많고, 무슨 조찬이 그렇게 많은지요.

한 번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지하에 있는 기도실에서 몇 개월을 엎드려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손에 전류가 통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안수기도 해도 낫지 않고 그랬는데, 갖다 대면 방언이 터지고 넘어가고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보는 사람마다 다 만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이게 뭔가 하다가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안타까워하시는가를 알았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내어 교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무릎 꿇고 주님 앞에 조금만 더 집중하고 있으면 능력을 나타내 주시고, 그에 따르는 표적을 보이는 현장을 만들어 주십니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을 주님께서는 얼마나 우리의 목회 사역 현장에서 보고 싶어 하는가를 알았습니다. 갈 데가 너무 많고, 누릴 게 너무 많고, 볼 것이 너무 많고 만날 사람이 너무 많아 일주일이 다 가도록 내 교인 이름 붙들고 눈물 한번 흘리지 않는 우리를 보시면서, 그 이름 한 번 부르고 가슴에 안고 한 번 울었더니 하나님께서는 평생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약값에 모든 돈을 다 들이고 고통의 밤을 떠나지 못했던 사랑하는 교인들의 그 수십 년 된 고질병을, 병원에서 손 놓고 모든 가정이 다 그 병에 함몰되어서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어두움의 자리를 그 따르는 표적으로 잔치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이 집중해야 합니까? 나중에 뭐 하다가 왔냐고 물으실 때에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합니까? 저희 교회 노래가 있습니다. 그 중에 “말씀, 은사, 기적으로 역사하신 교회”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 은사, 기적’을 화면에 잘못 띄우면 ‘말씀은 사기적’으로 이렇게 나옵니다. 요새 아이들이 얼마나 영악스럽습니까? 학생들이 킥킥 대고 웃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기래.” ‘남 얘기하는 게 아니구나. 내 얘기구나. 말씀 가지고 사기치고 있구나.’ 그래서 가사를 바꿨습니다.

우리가 다시 이 귀한 시간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이 구절이 우리 목회의 보고서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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