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9) 교갱협 제14차 영성수련회 새벽기도회

사무엘하 8장 9~18절
"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무찔렀다 함을 듣고 도이가 그의 아들 요람을 보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와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무찌름이라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그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성을 떨치니라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사령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들이 되니라"

반갑습니다. 저는 광주동명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상복 목사입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이상하게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만 저는 복 福자, 서로 相자를 씁니다. 제 이름처럼 어디서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함께 복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주시고 여러분에게도 은혜주시기를 원합니다.

14절 말씀에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결국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양을 치던 목자로 심지어 부모조차도 무시했던, 그래서 사무엘이 와서 기름 부으려 할 때 데리고 오지도 않았던 그 다윗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세우시고, 이스라엘 왕으로 존귀케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이루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무슨 일인가를 했다는 것은 결국 돌아보면 하나님이 하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저는 안수받고 26년,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목회 사역이지만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아홉시면 주무십니다. 그리고 세시 전에 일어나서 매일 서너시간을 기도하십니다. 정말 그렇게 하는데 교회는 너무너무 약합니다. 또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그 바쁜 유학 시절에 시간의 십일조를 채워야 된다고 하며 새벽에 두시간 사십분 동안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학교에 늦어서 사역과 학업이 평탄치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또다른 분은 설교 한편을 준비할 때 일주일에 스무시간을 투자합니다. 정말 충실하게 하루에 거의 세시간씩 스무시간을 투자해서 한편의 설교를 준비합니다. 원어를 따져가면서 정말 철저하게 준비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은혜가 안되고 변화가 안됩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아니죠. 기도해야 합니다. 준비도 잘 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름부으셔야, 하나님이 하셔야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기도도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사역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모두가 존경하고 닮기를 원하는 다윗을 보면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도대체 하나님이 왜 그렇게 사랑하셨고, 쓰셨고, 존귀하게 하셨을까요? 뭔가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기도하고, 심방하고 목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역 이전에, 설교 준비 이전에, 기도 이전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18편 1절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은 전심으로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삶과 믿음과 사역이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저는 14절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기게 하셨더라”는 말씀처럼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을 보면서 다윗의 생애를 네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용사로서의 다윗

먼저 용사로서의 다윗을 살펴보려 합니다. 다윗은 일생 동안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을 치릅니다. 그는 목동 시절부터 그의 고백대로 종일 곰과 사자와 싸웠고 어린 시절 거대한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군대장관으로 발탁된 이후에도 끝없이 전쟁과 전투를 치루었고, 그리고 왕이 된 후에도 에돔과 암몬과 계속되는 싸움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기게 하셨더라”

저는 우리의 사역이 단순한 승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기를 원하고, 그 승리가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 진정한 승리를 통해서 우리가 가는 곳에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이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단순하게 이기는 것이 승리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통해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결국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애굽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너희 발로 밟는 곳을 다 네게 주리라고 하셨는데, 다윗에게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다윗이 시편 67편에 고백했던 것처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치른 수많은 전투 가운데 용사로서의 위대한 모습을 사울과의 관계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은 사울을 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일생 동안 다윗을 미워하고 대적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잘 아는대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수없이 추격했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기회를 두 번이나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까지도 마음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오히려 사울을 존중했던 것을 봅니다. 사무엘상 26장 20절처럼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이런 태도를 취했던 다윗이 특별히 사울을 이기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승리가 뭔가를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승리는 칼로 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진정한 승리는 창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긴다는 것입니다. 선으로 이긴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알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세운 자이고, 왕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위해 다윗을 끝없이 추격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사울을 적으로 간주한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다윗에게 사울은 그의 왕이요, 그리고 그의 장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한 15년을 외국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느끼는 것들입니다. 누가 진정 우리의 적인가?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사울과 같이 진정한 충신, 진정 하나님의 사람을 내 경쟁자라고 해서 적으로 간주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교회는 외부의 핍박으로 무너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교회가 무너질 때는 언제나 내부의 문제에 기인한다.” 아마 그 말이 맞을 지도 모릅니다.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플래툰’이란 영화를 아마 보셨을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젊은 주인공을 맡은 찰리 쉰이 전투를 마치고 부상을 입고 후송되면서 헬리콥터에서 하는 말이 “우리가 이 전쟁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문제이다”였습니다. 그 소대 안에 라이벌 관계인 2명의 상사가 있는데 정글에서 전투를 하는 중에 그 둘이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래도 동료라고 미소를 보내는데, 다른 한 동료가 그에게 총을 쏩니다. 그리고 구출하려고 하는 찰리 쉰을 막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다고. 그러나 헬리콥터가 이륙하는 순간에 정글에서 살려고 헬리콥터를 향해 달려오는 그 상사를 보지 않습니까? 결국은 수많은 총을 맞으면서 두팔을 벌리고 쓰러지는 그 모습을 여러분도 기억할 것입니다. 누가 적입니까?

감히 이런 말씀을 드려 봅니다. 이슬람의 침공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거대하고, 조직적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미 영국은 절반이 기울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웹사이트를 열면 거기에 이슬람 마크가 뜹니다. 이슬람은 지금 공산권, 그리고 힌두교, 불교권까지도 전부 통합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거대한 세력이 한국을 아시아의 전략기지로 삼으려고 몰려오고 있고, 그것을 지금 우리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거대한 세력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선교전략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교와 가톨릭과 기독교가 공동전선을 펴지 않는 한 이길 수 없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물며 기독교 안에, 교단 안에, 노회 안에, 하물며 교회 안에 동료를, 친구를, 하나님의 백성을 우리가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다윗의 그 마음을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사울왕을 가장 아름답게 처리해 주옵소서.” 저는 다윗이 그렇게 기도했다고 믿습니다.

다윗을 추격하고 괴롭히던 사울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블레셋에 참패하고 비참하게 죽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옷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슬픈 노래를 불렀던 것이 사무엘하 첫 장이지 않습니까? 사무엘하 첫 장을 펴면 아직 목숨이 남아있는 사울을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찌를 가져온 사람을 오히려 다윗이 죽입니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서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금식하고 옷을 찢으면서 19절에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3절에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요나단만이 아니라 사울을 위해서도 다윗이 그렇게 안타까워하면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해결해 주시기를 원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성경에 나와있지 않으니까 모릅니다만,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다윗의 그 마음. 저는 이것이 다윗의 진정한 승리라고 믿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선의 승리입니다. 칼로 이기는 것은 또 다른 보복이 올 것이고,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닐 것입니다. 20여 년 전에 섬긴 한 교회에 의사였던 장로 한 분이 계셨는데 얼마나 따지던지 저도 작심하고 토론을 했습니다. 그리고 토론과 변론을 넘어서 논쟁을 벌인 끝에 제가 완전히 이겼습니다. 저는 그리고 나서 그 분을 잃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선의 승리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을 혹 힘들게 하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들, 혹 우리의 경쟁자라도 우리가 적과 아군을 구별할 줄 알고 존중할 줄 알기를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가 다툼을 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에게 하는 소리가 “기름부음받은 장로를 이렇게 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그분이 하는 얘기가 “그럼 당신은 기름부은 목사에게 그렇게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다윗이 사울에게 했던 것처럼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쉬운 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의 그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승리하는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으로서의 다윗

두번째로 우리는 다윗의 왕으로서의 승리를 봅니다.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사울왕가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길보아산에서 패한 이스라엘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지파들은 뿔뿔히 흩어져 있었으며, 신앙은 곤두박질쳤고 모든 것이 철저히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다윗은 이제 왕이 되어서 흩어진, 그리고 찢겨진 열두지파를 모아야 되고 흩어진 그들의 마음을 모아야 되고, 무너진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큰 사명을 맡은 다윗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집안을 다 이기고 왕이 되고 나서 첫 번째 한 일은 9장 1절애 나옵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요나단의 집에 남은 자가 있냐고 묻지 않고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던, 아니 사울이 죽은 후에도 근 7년간을 그렇게 괴롭히던 사울의 집안을 위해서 그 집안에 남은 이가 있는지를 묻습니다. 결국은 요나단의 아들에게 은혜를 베풉니다만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결국 사울의 집안까지도 다윗이 포용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군사령관 아브넬이 비참하게 암살되었을 때 아브넬을 위해서도 통곡하며 웁니다. 단순한 쇼가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이 진실로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열두지파를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다윗은 가장 큰 원수였던 사울의 집안을 품었습니다. 가장 큰 원수의 집안을 품음으로써 열두지파 이스라엘 모두가 다윗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 또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서 노회가, 그리고 총회가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흩어진 마음들이 다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무너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본문 8장 15절에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온 이스라엘이 다윗의 인격 앞에, 신앙 앞에, 통치 앞에 기꺼이 순복하는 모습을 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견고히 세우면서 펼쳐 나갑니다. 우리의 사역이 그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소망합니다. 다윗의 마음 때문에, 다윗의 포용, 다윗의 진정한 승리 때문에 원수였던 사울의 집안이 다윗의 집안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지 않습니까? 이후에 르호보암 때 북왕국 열지파가 떨어져 나가지만 어떻게 보면 베냐민 지파가 제일 먼저 배반해야 할 것 같은데 끝까지 유다 지파로 남아있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다윗이 사울을 끝까지 왕으로 존중하니까 이후의 왕들이 수많은 실수를 했지만 하나님이 그 왕권을 지켜주시고 다윗의 등불을 지켜주시고, 아무도 반역하지 못하게 하나님이 지키지 않습니까? 이런 은혜가 우리의 사역 현장에도 있기를 원합니다.

 

가장으로서의 다윗

세번째, 다윗의 가장으로서의 승리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행복했던 사람은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부모에게 무시받으며 자랐고, 형들의 심부름을 갔지만 큰 형에게 책망을 들었고, 청년 시절 사울의 군장으로 지냈지만 사울의 미움을 받으면서 끝없는 방황과 피난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가 아내를 가졌지만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왕이 된 이후에도 예루살렘에 정착할 때까지도 그의 가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밧세바를 범했고 우리아를 죽였고 그 일로 인해서 그의 큰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을 범했을때도 화만 냈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인해 압살롬이 마음의 분노가 쌓여 결국 반역을 하고, 다윗의 가정에 계속 칼이 떠나지 않고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을 때 백성에게 축복한 다음, 가족에게 축복하러 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하 6장 20절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다윗은 자기의 가정이 그렇게 쉬운 가정은 아니었습니다만, 하나님의 나라 못지않게, 나라를 다스리는 일 못지않게 자기 가정을 꼭 축복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고백합니다. 목회 사역으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분주하다가 자녀들에게 무관심하고 아내에게 무관심해서 가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듣지 않습니까? 다윗은 나름대로 가정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윗의 가정은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물려주고, 왕권과 함께 사명을 물려주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을 물려주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 29절에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물론 메시아에 대한 약속입니다만,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대해서 축복하지 않습니까?

많은 분들이 이 구절 뒷부분만 좋아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아브라함처럼 천대에 복을 물려주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윗처럼 영원히 종의 집에 복을 물려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29절 앞부분을 더 좋아합니다. “이제 청하건데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님 앞에 영원히 저와 저의 자녀들이 머물러 있게 하옵소서. 주의 얼굴을 보게 하옵소서. 주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옵소서. 사역도 물론 잘해야 되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우리의 가정이 먼저 하나님 앞에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성도로서의 다윗

마지막으로 승리자 다윗의 성도로서의 모습을 봅니다. 열왕기상 1장에 하나님이 다루시는 왕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맨 앞의 커튼을 열면 나이많아 늙어 침상에 누워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서막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용사가 아닙니다. 전쟁터를 말 타고 누비고 활을 당기던 용사도 아니고, 우렁차게 열두지파를 호령하던 왕도 아닙니다. 나이 많아 늙어 초라하게 침상에 누워있는 한 노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이 정말 이 모습을 늙고 초라한 한 노인의 모습으로 그립니까? 누구의 표현대로 젊음도, 능력도, 지혜도 다 사라지고,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2절을 보면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그의 신하들이, 그의 종들이, 그의 옆에 있는 자들이 늙고 초라해서 연약해 누워있는 노인을 보면서 그분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고, 조금이라도 더 살아계시도록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경이 가르쳐주는 다윗의 마지막 모습은 늙고 초라한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백성이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조금이라도 더 살아계시길 바라면서, 그분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시기를 바라면서, 그의 가족이 그의 종들이 최선을 다해서 받들던,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의 영광스런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이런 모습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우리 사역의 마지막 부분이 성도들이 조금이라도 더 모시고 말씀을 듣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하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배려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여기도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3~4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왜 성경은 왕들 얘기 맨 앞부분에 이런 모습을 기록했을까요? 이스라엘 전체를 다 뒤져 몸이 따뜻하고 가장 아리따운 정결한 처녀를 구해 왕의 품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합니다.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옛날 번역은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저는 그 부분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승리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물론 작은 죄들도 많았고 실수도 많았지만 가장 큰 죄인 밧세바를 범했던 죄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침상을 적시며 울면서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기를 수없이 다짐했던 다윗입니다. 다윗의 생에 말년에 그의 몸이 차가워지고 그의 품에 신하들이 젊고 아리따운 여인을 품에 안겨 주었지만 다윗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다윗이 연약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못하였더라’가 아니라 ‘아니하였더라’였습니다.

다윗은 그가 생애 마지막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그가 한번 범했던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책망을 들었고, 눈물로 철저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오랜 기간 동안 두번 다시 죄를 저지르지 않기로 다짐하고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실수를 한번도 안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 하나님 앞에 회개한 그 죄, 한번 하나님 앞에 약속한 그 결심, 내 눈에 흙이 들어오는 그때까지, 주님 앞에 서는 그때까지 내가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최선을 다했던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다윗을 향해서 너는 진정 승리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용사로서의 승리자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 내 사역에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윗이 사울을 진정한 사랑으로 이겼던 것처럼, 요셉과 형제들이 진정으로 무릎을 꿇었던 것처럼, 주님의 사랑으로 이기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왕으로서의 다윗, 원수와 그의 집안까지 열두지파를 다 품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세웠던 다윗처럼 이 시대를 우리가 감당하게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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