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도 아이티는 가난한 나라였다. 아이티를 방문하기 전, 아이티에 관해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은 프랑스 화가 고갱(1848~1903) 작‘타히티의 여인들’과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아이들이 진흙 쿠키를 먹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아이티가 어디에 있는 지도 몰랐으나 이제는 아이티 역사와 경제적 빈곤, 정치적 불안과 국제 무역에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이티는 남미와 북미를 잇는 카리브해의 섬나라로 쿠바와 도미니카공화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492년 10월 스페인 국왕의 후원으로 인도의 황금과 후추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때 이 섬을 발견하고 인도로 착각한 콜럼버스의 스페인군은 이곳을 독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원주민들을 모두 전멸시켜 버렸다. 그 후 노예무역이 성행하면서 이들은 인간사냥을 통해 아프리카 흑인들을 신천지의 농장주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넘겼다. 그때 아이티는 노예로 팔리기 전 수용소 역할을 했고 팔고 남은 일부는 이곳에서 노예로 사용됐다.

이 섬은 후에 프랑스가 점령하여 50만 명의 흑인으로 사탕수수와 커피 농장을 경영했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은 한때 프랑스 정부 예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수도였던 북부 해안도시에는 언제나 100척이 넘는 상선들이 드나들었고 이에 비해 당시의 뉴욕은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아이티에 있던 흑인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반란을 통하여 1804년 데살린을 황제로 하는 ‘아이티’라는 제국을 세움으로 세계 최초의 흑인 왕국을 건설하였다. 아이티는 프랑스 점령으로 인해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나라지만 주민 대다수가 아프리카 토속어인 크레올어(Creole)를 사용하고 있다. 아이티의 인구는 830만 명으로 흑인 90%, 물레토(흑인과 백인의 혼혈)가 약 10%를 차지하고 있다.

지구상 최빈국 중 하나인 아이티는 유혈과 독재의 험난한 역사를 거쳐 왔으며 지난 200년 동안 30번 이상의 유혈 쿠테타가 있었고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이 남아공으로 망명한 후 미군 주도하의 유엔평화유지군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 불안과 치안의 미비로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이 나라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연재해는 이곳 사람들의 삶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고 있다. 2004년 3천 명의 인명을 빼앗은 허리케인 Jeanne은 4년만에 아이티 GDP의 7%를 쓸어가 버렸다(The Economist, 2009년 2월). 2008년에 Gonaives 지역에 있었던 폭풍과 허리케인을 경험한 유엔 관계자는 이를 인류의 재앙이라고 표현했다(The Week, 2008년 9월). 게다가 World Bank의 발표에 의하면, 아이티 인구의 78%가 하루 $2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The Economist, 2007년 4월)로 국민의 약 80%가 연간소득 100달러 미만, 문맹률은 80%에 육박하고 있다.

지진 참사와 한국교회

2010년 1월 발생한 재앙적인 지진은 그나마 있던 아이티의 국가 가능을 마비시켰고, 그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지진 발생 후 전세계가 도움의 손길을 뻗고 있는 가운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직접 현지를 찾았고, 현지에 급파된 전세계의 각종 NGO 단체, 구급대, 심지어 군대까지 최대한의 원조를 하고 있다. 가장 발빠르게 대처한 한국교회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긴급 구호와 조사를 위해 지진 후 열흘의 시간이 지난 1월 22일 한국 교계 언론들로 구성된 공동취재단(국민일보, CBS, CTS), 사랑의교회 커뮤니케이션실 팀장, 그리고 나는 한국교회희망봉사단의 일원으로 현지를 방문했다.

지진으로 인해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로 바로 갈 수 없어 이웃나라 도미나카를 경유하게 되었다. 도미니카과 국경 도시 히마니를 통하여 수도 포르토프랭스까지 육로를 통해 가는 동안 국경 근처의 마을들은 지진의 피해를 크게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을 태운 차가 수도에 점점 가까워지자 언론을 통해서 봤던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녹듯이 흘러내린 지붕들, 무너진 잔해 속에 파묻혀 있는 자동차, 무엇이든 천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얼기설기 엮어 임시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난민촌 사람들... 완전 파괴였다. 무엇 하나 어떻게 손 써볼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나마 형태라도 남아 있는 건물들은 계속되는 여진으로 언제 무너질지 몰라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모습들도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며칠 머물면서 역설적이게도 이 파괴는 회복을 위한 파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탄 속에서 긍휼과 자비가 무궁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며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었다는 예레미야의 고백이 떠올랐다. 그분의 진노가 영원한 적이 있었던가. 그분의 향한 부르짖음을 언제 거절하신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곳을 보는 주님의 안목을 달라고 속으로 계속 외쳤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나라는 원래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무엇인가 다시 시작하려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새로 건물을 지으려고 해도, 도로나 기타 공공 시설들을 확장하려 해도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파괴된 이 시점에서는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기에 이제는 회복만 남았다.

더불어 그 파괴는 집이나 건물만의 파괴가 아니었다, 영적인 파괴도 있었다. 아이티는 종교 분포상 로마가톨릭이 인구의 80%를 자지하고 개신교는 16%, 부두교 등 기타 종교가 4%이다. 그러나 물 밑에서는 부두교가 득세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동시에 부두에 의지하는 인구가 절반 이상이고, 기독교는 가톨릭과 아프리카 토착 종교인 부두교의 영향으로 혼합적인 요소가 많고, 훈련된 교회 목회자가 적다고 현지 선교사는 설명한다. 그렇기에 그 땅은 여전히 복음의 불모지인 것이다.

그곳의 기독교 목회자들은 교회 사역만으로는 생활비가 부족하여 공항이나 항구에서 짐을 나르는 일을 많이 한다고 한다. 나도 공항에서 포터로 일하는 현지 목회자를 만났는데 자신에게 뭔가 도움을 좀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가난을 알긴 해도 도움의 길이 막연하여 안타깝기만 하던 그곳, 어둔 영에 찌들려 있어도 실제적 도움을 주지 못해 안쓰럽던 그곳에 지금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고, 많은 기도와 물질이 집중되고 있다. 영적 회복과 부흥을 일으키실 하나님을 바라보니 예레미야처럼 나도 중심에 소망이 솟아올랐다. 세계 모든 교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아이티를 위해 하시려는 일을 숨기시지 않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마치 여호와께서 소돔으로 향하여 가시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시려는 일들을 미리 알려주셨듯이 말이다.

이러한 중에 한국교회는 연합하여 겸손히 그 땅 백성들을 위로하여 충성된 종에게 더 큰일을 맡기시는 인정을 받았으면 한다. 한국교회 선교 30여 년, 짧지 않은 우리의 선교 노하우를 동원하여 성급함이나 가시적 효과, 단기적 안목 등을 지양(止揚)하고 겸손히 그들과 장기적 파트너십을 구축해 가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각자의 목소리가 아닌 연합된 큰 힘으로 도움의 효과를 극대화 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갈래로 나눠진 한국교회 교파들이 연합되어 가는 복이 우리 위에 임하기를 소원한다. 또 이 아픔을 딛고 일어나 정결케 하시며 회복시키시고, 부흥케 하시는 하나님의 복이 아이티 국민 전체에게 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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