欲知未來 先察已然(욕지미래 선찰이연)
- 앞 날을 알고 싶으면 지나간 일을 살펴보라 -


1. 머리말

오늘날 한국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2천 년대에 와서 한국교회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양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끝없이 그 위상이 추락하여 사회적 공신력을 상실했다는 질적인 측면에서 생겨나는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교 가운데 유일하게 개신교만 교인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교회가 사회적으로 존경과 신뢰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섬김과 나눔의 실천을 통해 사회적으로 모범을 보인 교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비쳐진 한국교회의 자화상은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돈과 권력과 명예를 놓고 끊임없이 다투고 헐뜯고 갈라졌고, 이권과 파벌과 금권으로 얼룩진 교단 정치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단 간의 이합집산과 갈등, 되풀이되는 이단 시비와 사이비 교회 집단의 출현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일부 대형교회의 목회 세습과 재정 비리, 상업화 혹은 기업화된 운영, 초호화판 건물 건축도 매스컴이 한국교회를 비판할 때 어김없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물량주의와 성장제일주의, 그리고 개 교회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도 세속화의 전형으로 지적되고 있다. 타 종교와 전통 문화에 대한 지나친 배타성도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개탄의 목소리도 들린다.
한때 높은 도덕성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예언자적 통찰력과 운동으로 사회변형에 선구자 역할을 했던 한국 개신교가 오늘에는 가장 비판받는 종교,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한국교회의 미래는 장밋빛일까 아니면 잿빛일까? 한국교회의 미래에는 희망이 있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다시 한 번 냉철하게 돌아보고, 겸허하게 반성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2. 빨간 불이 켜진 한국교회

1) 양적 성장의 문제

한국 개신교는 기독교 선교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성장한 사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 최근까지 종교, 특히 기독교를 연구해 온 세계적인 종교학자, 신학자, 사회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교회의 성장을 예찬(?)하고 있다. 한때 종교의 세속화 현상을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추세라고 강력히 주장했던 세속화 이론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도 나중에는 지구의 여러 지역에서 종교가 성행하는 탈세속화(desecularization)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한국을 꼽았다.1) 종교 세속화론의 또 다른 대가인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 역시 성령운동에 힘입어 한국 개신교회는 아시아에서 대표적으로 성장했다고 소개하고 있다.2) 세계 기독교의 현실과 전망을 광범위하게 분석한 종교학자 필립스 젠킨스(Phillip Jenkins)도 아시아에서 위대한 기독교 성공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한국이며, 이제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다수인의 종교가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3) 기독교의 미래를 연구한 역사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한국이 기독교가 성장한 주목할 만한 사례라고 길게 설명하고 있다.4) 특히 종교학자 존스톤(Patrick Johnstone)과 맨드릭(Jason Mandryk)은 선교 비전에 있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라고, 그래서 아시아에서 개신교인 비율이 가장 높은 유일한 나라라고 치켜 올리고 있다.5) 이들은 한 목소리로 오늘날 기독교가 그 본 고장이었던 유럽에서 쇠퇴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세속화되고 있는데 반하여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는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한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개신교회 숫자는 1960년 5천 개에 불과했으나 2010년에는 6만 개로 50년 사이 12배로 늘어났고, 교인 수도 같은 기간 동안 60만 명에서 900만 명으로 15배로 늘어났다. 이것은 마틴의 표현대로 ‘기독교 열병’(Christianity fever)과 같은 것이었다.6) 교회성장 과정에서 메가 처치도 많이 생겨났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가장 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두 번째로 큰 침례교회가 한국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메가 처치 10개 가운데 5개가 한국에 있다고 한다.7)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대학교와 신학대학교도 한국에 있다. 오늘날 한국 장로교인은 미국 장로교인의 두 배에 달하고, 한국 감리교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교세를 가지고 있다.8) 그리고 2008년 말 현재 한국 개신교는 세계 173개국에 1만 6,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해서 미국에 이어 선교사 파송국 세계 2위의 나라가 되었다. 한 마디로 그동안 한국교회의 성장은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주로 1960년대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그 성장의 요인으로는 상황적인 것과 교회적인 것이 있다. 우선 지난 몇 십년간 한국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의 변화가 교회 성장에 중요하게 작용했다.9) 1960, 70년대 군부독재 체제 아래서 정치적인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을 때 마음의 평안을 제공하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경제적으로 절대적 빈곤 혹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축복을 약속함으로 종교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소속감과 공동체성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심리적, 혹은 사회심리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물론 다른 종교들도 그러한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에, 개신교가 성장했던 기간에는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 심지어는 사이비 종교들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사회학자들은 어려운 정치, 경제, 사회 현실에서 종교가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종교가 부와 건강(wealth and health)을 약속하기 때문이라고 보면서 그것을 소위 ‘번영의 복음’(Gospel of prosperity)이라고 부르고 있다.10)
지난 몇 십년간의 한국교회 성장에 크게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요인은 교회적인 것이다. 1960년대 이래로 한국교회에서 나타난 특징의 하나는 활기찬 신앙적 열정의 표출이었다. 그것은 부흥운동, 성령운동, 신유운동, 카리스마운동 등으로 뜨겁게 분출되었다. 그 운동은 나아가서 배가운동, 전도운동, 성경공부와 기도회, 셀 조직과 선교회 조직 활동의 활성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운동이 교회성장의 활력이 되었다. 특히 성령운동은 한국교회 성장의 가장 강력한 동력을 제공했다.11) 물론 이러한 성령운동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복음이 한국의 무교적인, 기복적인 문화와 혼합되면서 사람들의 “필요를 찾고 필요를 충족시키는”(find needs and meet needs) 작용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12) 어쨌든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상황적, 교회적 요인에 의해 교회가 급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교인 수가 줄기 시작했다. 1960-70년 사이 교인 수는 412%나 증가했고, 1970-85년 사이에도 103%나 증가했지만, 1985-95년 사이에는 증가율이 35%로 떨어졌다. 그러다가 1995-2005년 사이에는 드디어 14만 4천 명이 줄어들어 -1.6%의 성장률을 보이게 되었다.13) 같은 기간 동안 가톨릭 신도는 무려 220만 명이나 늘어나서 74.4%의 증가율을 보였다. 불교의 경우에는 40만 명이 늘어나서 3.9%의 증가율을 보였지만 같은 기간 동안 전체 인구는 5.6% 증가했기 때문에 비율에 있어서는 오히려 약간 감소했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여 최근 한국 종교의 동향을 보면 가톨릭은 급성장했고 불교는 정체되고 있으며 개신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2) 사회적 공신력의 문제

한국교회의 양적 쇠퇴 못지않게 문제적인 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매우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의 2009년 조사 결과14) 한국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에 있어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19.1%인데 비하여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 비율은 33.5%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100점 척도로 환산하면 46.36점에 불과하다.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간다”는 데 대해서 “그렇다”는 응답이 19.6%,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40.8%로 두 배에 달하고 있다. “목사님의 설교와 행동에 믿음이 간다”는 데 있어서도 “그렇다”는 응답이 22.9%,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33.5%로 부정적 평가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개신교회의 활동은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데 대하여 “그렇다”는 응답은 35.4%,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24.3%였다. 신뢰도를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면 기독교인 신뢰도 점수는 45.0점, 목사 신뢰도 점수는 48.6점, 교회 신뢰도 점수는 52.5점으로 낮게 나타나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는 총체적으로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요즈음 반기독교(주로 반개신교)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중심으로 ‘안티 기독교’ 운동이 네티즌 사이에서 빠르게, 그리고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인터넷에 올라온 교회 관련 기사에 대하여 악성 댓글을 달면서 기독교를 비방하고 악담을 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생겨났고, 마침내 반기독교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양상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2003년 안티 기독교 운동의 기치를 들고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이 출범하면서 내건 창립 선언문에는 “이 사회에서 기독교가 패악질을 일삼지 못하도록 기독교를 박멸하겠다”는, 저주에 가까운 선전포고의 내용이 들어 있다.
급기야 2007년 11월 23일에는 한국교회언론회가 안티 기독교 관련 토론회를 열었다. 여기서 이찬경 반기련 회장은 “물질적 축복과 기복을 파는 종교업자들이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 협박하고, 공룡화된 교회는 거대한 기업처럼 돌아간다”면서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의 외적 성장과 신도의 양적 팽창이 목사의 성공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신도들은 결국 현금 지급기 노릇만 죽어라고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15) 최근에는 심지어 반기련에서 ‘기독교 비판’을 위해 시내버스에 반기독교 광고까지 부착하기에 이르렀다.16)
우리는 이러한 안티 기독교 운동의 확산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물론 그러한 운동을 전개하는 이들의 주장이 무례하고 몰상식한 것이라고 간단히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몰지각한 일부 세력이라고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대부분의 교회들은 건강하다고 강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요즈음과 같은 본격적인 반기독교 운동이 생겨난 적이 과거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뒤에 보게 되겠지만 한국교회에 대한 비기독교인, 특히 비종교인의 일반적인 시각이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라는 사실이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왜 한국교회는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일까? 한국교회의 보다 근원적인 위기는 교인 수 감소보다는 오히려 사회로부터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되는 지경에 이른 현실이 아닌가 한다.


3.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두운 몇 가지 이유

교인 수가 감소하고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예견될 수 있을까? 한국교회를 양적인 성장과 사회적 공신력이라는 두 가지 점에서 전망할 때 일단 그 미래는 매우 어둡다. 한 마디로 절망적이다.

1) 인구학적 변화

사회학적으로 볼 때 종교의 성쇠를 결정짓는 데는 몇 가지 변수가 있다. 첫째는 인구학적 변수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출산율(여성 1명이 가임 기간 동안 낳는 평균 자녀 수) 및 인구증가율(출산율에서 사망률을 뺀 순수한 인구증가율)이다. 물론 출산율이 높을수록 인구증가율도 높다. 전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2.0 미만이면서 종교가 성장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현재의 인구가 유지되려면 출산율은 2.1 이상이어야 한다). 오늘날 종교인구 증가는 개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높은 출산율에 의한 것이다. 즉, 출산율 혹은 인구증가율이 높아야 종교도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17) 1900-2005년 사이 세계 인구 대비 종교인 비율이 이슬람교는 12.3%에서 21.0%로 급증한 반면에, 기독교인 비율은 34.5%에서 33.0%로 감소했다. 그런데 기독교 국가의 평균 인구증가율은 1.14인데 비하여 이슬람 국가의 평균 인구증가율은 2.15이다. 지난 100년 사이 가톨릭 인구의 비율은 전체 기독교인의 47.8%에서 52.9%로 늘어난 반면에, 개신교인 비율은 24.1%에서 21.1%로 감소했다. 가톨릭 국가의 평균 출산율은 2.18인데 비하여 개신교 국가의 평균 출산율은 1.86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기독교인은 1900-2000년 사이 대륙 인구의 9.2%에서 45.9%로 급증한 반면에, 유럽 대륙의 기독교인은 같은 기간 동안 대륙 인구의 94.5%에서 76.8%로 감소했다. 아프리카의 출산율은 3.59인데 비하여 유럽의 출산율은 1.01이다.
미국의 경우 주류 교파(mainline denomination) 교인들은 감소하고 있으나 보수 성향의 교회는 성장하고 있다. 교회성장학자들은 보수교회가 성장하는 이유는 그 교회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본다.18) 이때 강하다는 것은 교회가 교인들에게 강한 헌신을 요구하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며, 강한 선교 열정을 가르치고, 절대적인 믿음을 갖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의 사회학적 연구는 보수적인 교회가 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보수적인 교회 교인의 출산율이 높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19) 물론 그들의 출산율이 높은 것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고, 가족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 자녀를 많이 낳는 것과 관련이 있다.
종교가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종교인의 출산율,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출산율이 높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현재 세계에서 최하위다. 그리하여 출산율이 1970년의 4.53에서 1980년의 2.83, 1990년의 1.59, 2000년의 1.47에서 2008년에는 1.19로 계속, 그리고 급격히 낮아졌다. 출산율 1.19는 세계 평균 2.54의 절반도 안 되고, 선진국 평균 1.64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2018년부터는 나라 전체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2050년에는 3천 만 명으로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20) 따라서 현재와 같은 교인 비율을 유지한다고 할 때 40년 후 개신교인의 수는 모두 550만 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급격한 고령화 현상 때문에 그 교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60세 이상의 노인일 것이다.
출산율 감소와 관계가 있지만 전통적인 가족 가치의 붕괴에 따른 인구학적 변화도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전통적인 가족 가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확대가족, 많은 자녀, 늦지 않은 결혼, 이혼의 억제 등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가족 가치는 신앙을 유지하고 교회가 성장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21) 그런데 한국에서는 전통적인 가족 가치가 빠르게 무너지면서 가족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만혼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독신자가 증가하고 출산을 기피하며 결혼 건수는 줄어드는 반면에, 이혼 건수는 늘고 있다. 예를 들어 초혼 건수는 1990년에는 365,964건이었으나 2007년에는 282,581건으로 줄어든 반면에, 이혼 건수는 1990년에는 45,694건이었으나 2008년에는 124,590건으로 늘어났다. 독신자 가구 수도 1985년에는 전체 가구의 7%였으나 2005년에는 20%로 늘었다. 결혼 연령도 지난 30년 사이 남녀 똑같이 3년씩이나 늦어졌다. 한 마디로 집합주의적인 가족 가치가 개인주의적인 가족 가치로 변화되고 있는데, 이것은 교회 쇠퇴의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22)

2) 사회경제적 수준 향상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두 번째 요인은 사회경제적 요인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민주화 수준),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며(소득 수준), 사회적으로 보장되어 있고(복지 수준), 여성의 지위가 높은(성 평등 수준) 나라들에서는 대개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23) 반면에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빈곤하며, 사회복지 수준이 낮고, 여성 차별적인 나라들에서는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개발국(54개국) 가운데서 교회가 성장하는 나라는 3.7%이고 쇠퇴하는 나라는 74.1%나 되는 반면에, 저개발국(48개국) 가운데서는 85.4%의 나라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나 쇠퇴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이것이 유럽 선진국에서는 교회가 쇠퇴하는 반면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교회가 성장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교회가 성장하는 나라를 보면 1인당 국민소득이 1,000 달러 미만인 나라 가운데서는 76.8%가 성장했으나, 그것이 1만 달러 이상인 나라 가운데서는 26.9%만이 교회가 성장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이상인 나라 가운데 교회가 성장한 것은 싱가포르 한 나라뿐이다.
사회학적으로 박탈-보상 이론(deprivation-compensation theory)이라고 불리는 설명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박탈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리고 박탈의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는 그것에 대한 보상을 종교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종교성이 강하고 교회도 성장하기 쉽다고 본다.24) 요약하면 사람들은 삶이 가난하고 힘들고 혼란스러울수록 종교에 의지하려고 하지만, 배부르고 편하고 생활이 안정될수록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이후 정치적으로 상당히 민주화되었고, 경제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이제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으며, 경제 규모는 세계 13위에 올랐다. 복지 제도가 점차 정착되어가고 있으며,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향상된 정치, 경제, 복지, 성 평등 수준이 오히려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동기와 요구를 약화시키게 되었다. 따라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전후로 가장 잘 살고 있으며, 가장 민주화되어 있고 복지제도가 가장 발달해 있으며, 성 평등 수준이 월등하게 높은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서 교회가 가장 쇠퇴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본다면, 앞으로 한국의 경제 수준이 더 높아질수록, 민주화가 더 이루어지고 복지제도가 더 발달하며 성 평등이 더 이루어질수록 교회성장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사람들의 가치관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된다. 특히 경제적인 여유는 사회적인, 심리적인 여유를 만들어내면서 종교 이외의 것, 예를 들면 ‘인생을 즐기는 것’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게 된다. 실제로 생활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종교를 갖는 것”이라는 한국인 비율은 1984년에는 10.8%였으나 2004년에는 4.5%로 줄었고, “신념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라는 응답 비율도 26.7%에서 10.4%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돈이 많은 것”이라는 응답 비율은 10.9%에서 30.6%로, “여가/휴식 시간이 많은 것”은 2.0%에서 8.5%로 늘어났다.25) 특히 경제적 수준이 향상되면서 눈부시게 발달한 여가산업은 사람들의 시간과 돈과 관심을 종교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하나의 강력한 대체종교(alternative religion)가 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는 전국 도처에 널려있는 휴양시설, 위락시설, 관광시설을 이용해 건강과 휴식, 오락과 유흥을 즐기고 있다. 이에 따라 관광산업은 더 없는 호황을 누리면서 교인들을, 그리고 예비 신도들을 유혹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여가산업을 통해 전에는 종교로부터 해결할 수 있었던 긴장해소나 정신적 치유와 위안을 얻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도를 확보하기 위해 여가산업과 힘겨운 경쟁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것은 더욱 어려운 게임이 될 것이다.

3) 종교이동(switching)의 한계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세 번째 요인은 이제 전도와 개종 가능성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종교간 이동이나 무종교인의 개종이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타종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숫자는 117만 명(가톨릭으로부터 29만, 불교로부터 88만), 타종교로부터 가톨릭으로 개종한 숫자는 136만 명(개신교로부터 86만, 불교로부터 50만), 타종교로부터 불교로 개종한 숫자는 138만 명(개신교로부터 112만, 가톨릭으로부터 26만)으로 390만 명의 종교 이동이 있었다.26) 그러나 기윤실의 조사에 따르면 2009년에는 종교인의 98.5%가 앞으로 종교를 바꿀 의향이 없다고 응답했다.27) 종교를 바꿀 의향이 있는 사람은 1.3%, 종교를 포기할 의향이 있는 사람이 0.2%로 나타나고 있다. 즉, 과거에는 포교나 전도에 따른 종교간 이동이 적지 않았으나 이제는 거의 모든 종교인이 현재의 종교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종교를 바꿀 사람은 이미 대부분 바꾸었고, 현재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좋든 싫든 그 종교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타종교인을 개신교로 개종시킬 여지는 거의 없는 셈이다.
한편 기윤실의 조사 결과 2009년 현재 종교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앞으로 종교를 가질 의향이 없는 사람은 79.4%로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종교를 가질 의향이 있는 사람 가운데, 그 종교가 개신교라는 응답자는 6.7%, 가톨릭은 8.3%, 불교가 5.2%였다. 이 비율을 숫자로 환산하면 무종교인 가운데 개신교로 개종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115만 명 정도이다(가톨릭은 142만, 불교는 89만). 그렇다면 이제 백만 명 상대로 200개 교단, 6만 개 교회가 신도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기존의 9백만 신도와 예비적 신도 백만 명을 놓고 한국교회들은 제로-섬(zero-sum) 게임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미 벌어지고 있지만 앞으로는 더욱 치열한 경쟁이 교회들 사이에서 벌어지게 될 것이다.
교회간의 수평이동(switching)도 보다 더 활발해질 것이다. 이 시합에서는 당연히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춘 대형교회들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미 대형교회로의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28) 대형교회일수록 다양하고 알찬 교회 프로그램, 크고도 편리한 교회시설, 동원될 수 있는 충분한 인적, 물적 자원,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갖춘 목회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교인들 입장에서는 명성 있는 교회에의 소속감, 익명성의 보장, 부담 없는 교회출석이라는 이점을 누리기도 한다. 더욱이 대형교회들의 개 교회주의와 성장 제일주의, 목회자의 명예심과 과욕은 더욱 대형화를 추구할 것이고, 이에 따라 수많은 미자립 교회들이 문을 닫고 수많은 목회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교회성장이란 주로 다른 교회, 특히 작은 교회 교인들을 얼마나 많이 끌어올 수 있는가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도 시장주의, 자본주의의 냉혹한 논리와 현실이 적용되는 슬픈 결과가 초래될 것으로 보인다.

4) 한국교회의 낮은 신뢰도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네 번째 요인은 나락으로 떨어진 한국교회의 위상이다. 이것은 매우 낮은 사회적 신뢰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에 대한 비개신교인, 특히 무종교인의 평가는 비참할 정도로 부정적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미래에 타 종교인이 개신교로 개종할 가능성은 별로 없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무종교인의 개종 가능성에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개신교에 대한 무종교인의 신뢰도가 너무 낮다. 예를 들어 기윤실의 조사 결과 무종교인 가운데 개신교 교인을 신뢰하는 비율은 6.6%, 목사에 대한 신뢰도 비율은 11.9%, 교회활동에 대한 신뢰도 비율은 24.1%에 불과하다.29) 무종교인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기관을 보면 가톨릭이 38.9%로 가장 높고, 다음은 불교의 23.1%, 그리고 개신교는 10.8%에 머물고 있다. 호감이 가는 종교에 대한 응답 비율도 가톨릭이 35.0%로 가장 높고, 다음은 불교의 28.6%, 그리고 개신교는 14.2%로 역시 가장 낮다. 이 결과는 지난 20여 년간 가톨릭이 급성장한 것에 비하여 개신교는 쇠퇴하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가 특히 20, 30대 연령층에서 가장 낮다는 사실이다. 20, 30대는 우리 사회에서 차세대 주역일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들에게 종교적 신앙을 물려줄 세대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특히 반 개신교 성향이 강하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미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개신교인 자신에게서도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윤실의 조사 결과 개신교인이 전체적으로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 비율은 56.4%에 머물고 있고, 구체적으로 교인에 대한 신뢰도 비율은 54.3%, 목사에 대한 신뢰도 비율이 68.6%, 교회활동에 대한 신뢰도 비율이 71.1%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높은 비율이 아니다. 즉, 개신교인 스스로도 한국교회에 대하여 크게 신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개신교인 가운데 가장 신뢰하는 종교가 가톨릭이라는 응답자가 13.1%(가톨릭교인 가운데 개신교를 가장 신뢰한다는 비율은 1.9%), 개신교인 가운데 가장 호감이 가는 종교가 가톨릭이라는 응답자가 11.1%(가톨릭교인 가운데 개신교가 가장 호감 가는 종교라고 응답한 비율은 2.2%)로 나타나고 있어 자신의 종교에 대한 신뢰도가 개신교인의 경우 가장 낮다.
물론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1년 전보다 다소 높아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는 했다.30) 예를 들어 2008년과 2009년 조사 결과를 비교해 보면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뢰한다”는 응답 비율은 18.4%에서 19.1%로 약간 증가한 반면에, “신뢰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48.3%에서 33.5%로 낮아졌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지난 2-3년 전과 비교해 볼 때 개신교회를 “더 많이 신뢰하게 되었다”는 응답 비율은 4.0%에 불과한 반면에, “더 적게 신뢰하게 되었다”는 응답은 26.6%나 되었다. 이렇게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개신교에 대한 사람들의 낮은 신뢰도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4. 한국교회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을 수 있는 몇 가지 이유

앞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몇 가지 불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이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자.

1) 신앙적 역동성

한국교회는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신앙적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 한국교인은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인 교회요 교인이다. 물론 단순히 뜨겁고 열광적인 종교성만을 놓고 말하면 성령운동(pentecostalism), 신유운동, 카리스마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일부 지역의 신앙적 열정이 더 뜨거울 수 있다.31) 그러나 그 지역은 대부분 우리나라의 1960, 70년대처럼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힘들고, 정치적으로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지역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종교는 단순히 현실의 물질적, 정신적 고통을 견디게 해 주는 ‘번영의 복음’일 수 있다.32) 한국은 이제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정치적 안정을 누리면서 더 이상 과거 한국교회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성령운동 류의 종교성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종교적 열정은 또 다른 방식으로 뜨겁다.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주일 낮 예배뿐만 아니라 주일 저녁(혹은 오후) 예배, 수요 예배를 드리고,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개 교회 부흥집회를 열며,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유일한 교회다. 주일 성수, 기도, 성경읽기, 전도, 해외 선교에 있어 세계 어느 교회의 추종도 불허할 정도로 한국 교인은 열성적이다. 통계로 비교해 보자.
기독교의 본 고장이라고 하는 유럽의 교회 출석률은 매우 저조하다. 유럽과 비교하는 이유는 이제 한국의 경제 및 정치 수준이 성령운동이 유행하고 있는 저개발국들 보다는 유럽 수준에 가깝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국가별로 60% 이상이지만, 등록 교인 가운데 매 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비율은 덴마크(3.3%), 스웨덴(4.9%), 노르웨이(5.6%)의 경우 매우 낮고, 프랑스(16.1%), 독일(21.3%), 영국(22.4%)도 낮으며, 서구에서 종교성이 가장 강하다는 미국의 경우도 교인의 교회 출석률은 42.5%이다.33) 스페인, 이탈리아, 아일랜드와 같은 가톨릭 핵심 국가에서도 교회 출석률은 20%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 출석률(‘주 1회 이상’)은 71.0%나 된다. 교회에 등록되어 있는 교인들 가운데서 “종교가 생활에서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프랑스 22.6%, 독일 15.7%, 영국 32.8%로 낮다. 그 비율이 미국의 경우 70.1%로 높지만, 한국 개신교의 경우 그 비율은 88.9%나 되고 있다.
“매일 기도한다”는 응답자 비율도 기독교권에서 종교성이 가장 강한 미국의 경우 교인의 49.6%이지만, 한국 개신교는 그 비율이 59.3%로 더 높다. 그리고 한국 교인의 49.2%가 일주일 한 번 이상 성경을 읽고 있으며, 46.2%가 십일조 헌금을 내고 있다. 1984년과 비교해 볼 때 2004년에는 “매주 1회 이상” 교회에 출석하는 비율이 61.8%에서 71.0%로, “일주일 한 번 이상” 성경을 읽는 비율도 44.8%에서 49.2%로, 십일조 헌금을 내는 교인 비율도 42.0%에서 46.2%로 증가했다.34) 이것은 같은 기간 동안 가톨릭의 경우 주일 미사 출석률이 66.2%에서 42.9%로, 매일 기도하는 비율이 57.1%에서 27.8%로, 일주일 한 번 이상 성경 읽는 비율이 39.7%에서 16.3%로 크게 낮아진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비록 최근에 가톨릭이 그 교세에 있어서는 눈부신 성장을 했지만 종교성은 크게 낮아지고 있는 반면에, 개신교는 비록 교인 수는 조금 줄었지만 종교성은 가장 강할 뿐만 아니라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he Economist 지는 얼마 전 세계의 종교적 부흥과 문제에 관한 특집을 내면서 한국은 종교적으로 매우 뜨겁고(heat), 경쟁적이며(competition), 선택의 여지가 많기(choice) 때문에 교회가 급성장했고 활발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35) 한국교회는 매우 뜨겁고 열성적이다. 다종교, 다교파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 경쟁을 하면서 자극이 되고 있다. 신앙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신앙적 역동성은 한국교회의 미래적 가능성에 있어 희망적인 하나의 요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 감성문화 성향

사회과학자들은 인류의 문화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학자는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로, 그는 문화 유형을 크게 아폴로(Apollo)형 문화와 디오니소스(Dionysos)형 문화로 구분한다.36) 전자가 이성과 질서, 자제와 균형을 중시하는 문화라면, 후자는 감성과 박력, 정열과 감정이 강조되는 문화다. 아폴로형 문화가 냉철한 ‘머리의 문화’라면, 디오니소스형 문화는 뜨거운 ‘가슴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아폴로형 문화가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역은 유럽이며, 디오니소스형 문화가 발달한 곳은 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지역이다.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디오니소스형 문화권에 속한다.37)
이러한 문화적 성향은 종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폴로형 종교문화에서는 이성, 지성, 합리성이 강조되고, 디오니소스형 종교문화에서는 감정, 열정, 감성이 중요시된다.38) 그런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종교성보다는 감정적이고 열정적인 종교성이 교회 성장에 효과가 있다. 지적인 성향이 강한 유럽의 기독교가 쇠퇴하는 반면에, 아프리카의 기독교가 급성장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성향의 차이에 크게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종교문화는 매우 감성적인 디오니소스 문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한국 종교 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39) 물론 이러한 문화는 한국교회의 신앙적 역동성의 근거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사회경제적 수준이 높은 나라들에서는 기독교가 대체로 쇠퇴하고 있다는 점을 보았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에는 높은 사회경제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쇠퇴하지 않고 있다(그렇다고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미국에는 상반된 두 개의 교회 흐름이 있다. 하나는 감독교회, 회중교회, 감리교, 장로교 등으로 개표되는 자유주의(liberalism) 전통의 주류 교파이며, 다른 하나는 남침례교, 성령강림파, 독립교회로 대표되는 복음주의(evangelism) 전통이다. 그런데 전자는 다분히 아폴로적인 종교문화 성향을 가지고 있고, 후자는 디오니소스적인 종교문화 성향을 띠고 있다. 그리고 전자는 교세가 기울어지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특히 독립교회(independent church)가 급성장하고 있는데, 이 교회들은 ‘감성을 추구하는’(Seeker-sensitive) 교회들이다.40) 경제적인 풍요와 과학의 발전, 이성적 사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회의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영적, 정신적, 도덕적 빈곤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스러움과 신비의 경험이 중시되는 감성적인 종교성이 그들의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종교문화가 감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미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경제 수준이 향상되고 정치가 안정되며 복지제도가 정착된다 하더라도 근원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목마름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한국의 감성적인 ‘가슴의 문화’ 성향은 미래에도 한국 교인들이 종교성을 유지하는데, 한국인이 종교를 찾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3) 개 교회에 대한 충성심

한국교회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이유는 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충성심과 연대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한국교회 일반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에 대해서는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볼 때 가장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가 자신의 정신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가 하는 데 대하여 “만족한다”는 응답 비율은 개신교의 경우 59.2%(‘불만’ 11.7%)로 종교들 가운데 가장 높다(성당에 대한 가톨릭 교인의 만족도 44.8%, 절에 대한 불교인의 만족도 38.1).41) 그리고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가 여러 신자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가 하는 데 있어서 “만족한다”는 응답 비율 역시 개신교의 경우 60.6%(‘불만’ 12.2%)로 가장 높다(가톨릭 38.9%, 불교 31.3%).
다른 조사 결과도 한국교회 교인들은 자신의 교회에 대하여 대체로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42) 현재 다니는 교회에 대해 전체적으로 만족하는 교인의 비율은 71.4%(‘불만’ 3.7%)이며, 담임 목회자에 대해서도 “만족한다”는 응답 비율이 80.7%(‘불만’ 2.2%)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다니는 교회나 그 교회 목회자에 대하여 불만이 많으면 교회를 옮기거나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다수의 교인들이 적어도 자신의 교회에 대해서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 교회에 대한 신뢰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에 대한 충성심과 헌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특히 개신교는 가장 잘 모이고 열심히 모이는 신앙 집단이다. 그리고 교회학교, 선교회, 소그룹 모임을 가장 활성화하고 있는 집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은 결속하고 연대할 수 있는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신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돕고 격려함으로 영적, 정서적, 물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집단이기도 하다. 그들은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친숙할 뿐만 아니라 사회규범을 실천하고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커다란 이점을 가지고 있다.43) 다만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러한 커다란 자원과 내적 동력이 주로 개 교회 안에서만 활용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이제 ‘그들만의 잔치’를 벌일 것이 아니라 그 판을 세상을 향해 넓일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실상 자발적인 인적, 물적, 시간 자원이 충분히 동원될 수 있는 기관은 교회뿐이다.

4) 적극적 사회봉사

한국교회에서 희망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는 세 번째 이유는 한국교회가 사회봉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해 왔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희생과 봉사를 가장 헌신적으로 하는 집단이다. 국가의 번영과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굶주린 북한 주민, 그리고 빈곤과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세계의 빈민과 이재민을 위해 매 주 혹은 매일 뜨겁게 기도하는 집단이 교회 이외에 어디 있는가? 그러나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와 교인은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44)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시설을 보면 장애인복지 시설의 52.4%, 아동복지 시설의 78.4%, 노인복지 시설의 43.6%, 정신요양 시설의 52.7%를 개신교 혹은 개신교인이 운영하고 있다. 구휼활동에 있어 수재의연금(1996-2002년)의 68.8%, 대북 인도적 지원(2001-2003년)의 51.1%, 해외 인도적 지원(1996-2002년)의 64.9%를 한국 개신교가 담당했다. 2002-2004년 사이 헌혈자의 91.6%, 골수 기증자의 41.2%, 장기 기증자의 44.3%가 개신교인이었다. 재소자 자매결연의 52.3%, 불우 수용자 및 가족 돕기의 59.6%가 개신교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호스피스 기관의 85.6%가 개신교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태안 앞바다 오염제거 자원 봉사자의 80%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 교도소, 병원 등을 찾아가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 교회와 교인은 또 얼마나 많은가? 도시 빈민,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가정 등을 가장 열심히 돌보는 것도 교회와 교인들이다. 가난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나라들을 찾아가 의료, 교육, 복지 등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교인 이외에 얼마나 되겠는가?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미얀마의 사이클론,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 가장 활발한 구호활동을 편 것도 교회였다. 그리고 지난 1월 대지진을 겪은 아이티를 가장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것도 바로 개신교다. 국가 차원의 지원 액수와 같은 1천만 달러를 목표로 모금을 하고 있는 데, 이것은 불교 지원 액수의 수십 배에 달하는 것이고 가톨릭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다. 그밖에도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드러나지 않게 돌보고 섬기고 나누는 교인들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이러한 봉사와 사랑의 실천이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 회복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교회를 신뢰하는 경우 그 이유를 묻는 물음에서는 “봉사활동을 많이 해서”라는 응답이 21.7%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선행의 올바른 가르침”(14.4%)이라는 응답이었다.45) 한국교회의 미래에 희망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변화만이 희망이다

우리는 앞에서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기 위해서는 교회의 부단한 자기 갱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에 무엇이 문제였으며, 현재는 무엇이 문제인지 밝혀내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뼈저린 반성과 함께 변형 의지를 가지고 이를 실천하는 일이 요구되고 있다. 따라서 먼저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문제, 특히 사회적으로 공신력을 잃어버린 근본적인 요인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한국교회의 문제

한국 개신교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성장했다고 소개했던 존스톤과 맨드릭은 같은 책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46) 그들은 네 가지 점을 지적한다. 첫째는 영적 자만심이다. 성공과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통계적인 성장, 인상적인 조직과 건물에 대한 자만심이 있다고 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성공, 부, 학위를 추구하는 유혹에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분열이다. 모든 교단이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장로교는 일제 강점기 말 하나였으나 지금은 100개나 된다고 질타하고 있다. 교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셋째는 교회의 지도력 형태에 대한 것이다. 지도력이 너무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목회자의 높은 지위가 성서적인 섬기는 지도력을 방해하고 분열, 형식주의, 율법주의를 촉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넷째는 윤리적 가르침이 소홀히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서적 진리가 사회 주제에 적용되지 못하고 낮은 윤리적 기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더 큰 신뢰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매우 정확한 진단과 평가가 아닌가 한다.
한국인들은 한국교회의 어떤 점이 문제라고 보는 것일까? 이 문제는 한국교회에 대한 낮은 신뢰도의 요인이 되고 있기에 매우 중요하다. 한미준과 한국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47) 한국교회는 양적 팽창/외형에 너무 치우친다는 것이다. 물량주의에 너무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세속화되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봉사와 이웃사랑의 실천에 인색하다는 것이다. 교파가 너무 많고 단합이 안 된다는 것이다.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준다는 것이다. 타종교인과 무종교인에게 너무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는 것이다.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사리사욕/이기심 등 그 자질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자기교회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목회자나 교인들이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 밖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문제적인 현실 때문에 한국교회에 대하여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이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들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조사에 따르면 위에서 지적된 한국교회의 문제에 대하여는 상당히 많은 교인들도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변해야 한다.

2) 교회 패러다임의 변화

한국교회는 먼저 교회의 패러다임(paradigm)이 변해야 한다.48) 교회 패러다임은 목회 전략 및 지향성과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패러다임은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이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지상적인 목표는 양적 성장이었다. 개 교회든 교단이든 우선적인 과제는 교회 성장이었고, 이를 위해 교회의 모든 자원이 동원되고 동력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팽창주의와 성장 제일주의는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특히 성장이 수단이나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됨으로 교회가 질적으로 성숙해질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신앙 중심’의 패러다임이었다. 교인들에 대한 훈련 및 평가 기준은 주로 신앙에 대한 것에 편중되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 잘 믿고 교회 잘 나오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전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내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교인의 실천적 삶의 문제는 소홀히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잘 믿기는 하지만 생활은 다를 것이 없는 신자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세 번째는 ‘교회 중심’의 패러다임이었다. 소위 ‘모이는 교회’에 관심을 집중하여 ‘우리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들만의 강한 연대감과 충성심을 강화함으로 개 교회주의에 물들게 되었다. 교회 간에는 빈부격차가 심해졌고, 일부 대형교회는 개교회 왕국이 되어버렸다.
네 번째는 ‘조직 중심’의 패러다임이었다. 교인 하나 하나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여러 조직을 활성화함으로 교회의 역량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교단적으로는 파벌 싸움의 빌미를 제공했고, 개 교회에서는 비민주적인 권위구조를 만들어냈다.
이제 한국교회의 패러다임은 변해야 한다. 그것이 시대적 요청이고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선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이 ‘성숙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인 수 늘리는데 총력을 기울이기보다는 내실을 다져 교인들을 성숙한 신자로 양육해야 한다. 여기서 ‘성숙함’이란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교인이 영적, 도덕적으로 능력 있는 신도로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신앙 중심’의 패러다임은 ‘삶 중심,’ ‘실천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교회에서 주로 하나님 잘 믿고 교회 열심히 나오고 신앙생활 잘 하라고는 했지만,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교인들의 구체적인 삶이 비신자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교인들이 사회생활에서 보다 착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셋째로 ‘교회 중심’의 패러다임은 ‘지역사회’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지역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인상은 너무 시끄럽고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사회를 위해 과감히 교회의 인적, 물적, 시설 자원을 활용해서 적극적으로 봉사함으로 교회가 지역사회로부터 먼저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조직 중심’의 패러다임이 ‘인간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인간다움이란 민주적인 구조에서 개개인의 인격이 존중되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먼저 권위주의와 차별의 구조를 벗어나야 한다. 교회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인정되어야 하고 젊은이들과 평신도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인 하나 하나의 문제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필요하다.

3) 교회 본질의 변화

한국교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한국교회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래서 미래 한국교회에서 희망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목회자와 평신도가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교회가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무엇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 교회, 구체적으로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영성, 도덕성, 공동체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➀ 영성의 회복
한국교회는 첫째로 영성(spirituality)을 회복해야 한다. 영성이란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물질주의, 성공주의, 출세주의와 같은 이 세상적 가치보다 영적인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말로는 영성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이 세상적인 물질, 명예, 권력, 성공 등에 집착하는 과오를 범했다. 교회와 목회자의 성공 척도를 교인 수, 건물 크기, 예산의 규모에 두었고, 교인에 대한 평가도 사회경제적 지위, 헌금 액수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영적 능력을 잃어버렸다.
영성은 종교만이 가지고 있고, 종교에서만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의 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개신교의 영적 수준은 매우 낮다. 한 조사 결과 “한국교회가 영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는 응답자는 15.0%에 머물고 있으며, “교회 지도자의 (영적) 자질이 우수하다”는 응답 비율도 18.7%에 머물고 있다.49) 반면에 한국교회는 “진리 추구보다 교세확장에 더 관심이 있다”는 데 대하여는 66.7%가 동조하고 있다. 한편 비종교인 가운데 “종교 지도자의 자질이 우수하다”는 응답이 신부는 31.8%, 승려는 21.2%이지만, 목사의 경우에는 16.5%로 가장 낮게 나타나고 있다.50)
영성 상실이 한국교회 위기의 한 근원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지 1년 만에 서울대교구 가톨릭 신자는 30-40%나 증가했다고 한다.51) 종교지도자의 영적 지도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 종교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목사로 불리기보다는 박사나 교단 직책 혹은 온갖 모임의 장, 대표, 고문 등으로 불리길 좋아하는 목회자, 교단 정치에 몰두하는 목회자, 성공과 출세, 명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목회자,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 목회자로서는 한국교회의 영적 수준을 끌어올릴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지도자는 부와 명예와 권세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종의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참된 영적 지도자가 그 어느 때보다 한국교회에 아쉽다. 따라서 양적인 성장보다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내야만 한국교회는 그 본질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➁ 도덕성의 회복
한국교회의 두 번째 과제는 도덕성(morality)을 회복하는 일이다. 도덕성이란 바르고 의롭게 사는 것이다. 정직하고 신실하게 사는 것이다. 목회자와 교인의 삶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칭송받을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 목회자와 교인을 평가하는 잣대는 신앙의 수준이 아니라 삶의 도덕적 수준이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지역사회에서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솔선수범하고 법과 질서를 지키며 바른 길을 가야 한다. 특히 성직자가 품위를 잃어 사회의 지탄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도덕성 수준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부정적이다. 도덕성의 수준을 나타내는 중요한 척도는 말과 행동이 얼마나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윤실의 조사 결과 향후 개신교회가 신뢰받기 위해 개선되어야 할 점으로 지적된 것은 압도적인 비율을 보인 “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일치”(50.1%)였다(다음은 “타종교에 대한 관용”으로 20.5%).52) 이 조사에서는 또한 향후 개신교회가 신뢰받기 위해 바뀌어야 할 점으로 교회 지도자들(30.9%), 교인들의 삶(23.7), 교회의 운영(21.1%) 순으로 지적되었다. 교인들의 도덕성 수준의 또 다른 평가 기준은 사회적으로 일탈행위를 얼마나 적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03-2005년 사이 범죄를 저지른 비율을 종교별로 볼 때 전체적으로는 22명당 1명꼴인데, 무종교인은 23명당 1명, 불교인은 31명당 1명으로 조사되었고, 개신교인은 39명당 1명으로 범법률이 다소 낮으나, 가톨릭 교인의 경우에는 105명당 1명꼴로 나타나서 매우 높은 도덕성 수준을 보이고 있다.53)
도덕성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 지도자의 위상이 특히 중요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목회자의 도덕성에 대한 평판은 별로 좋지 않다. 직업인들의 정직/윤리 수준을 평가한 조사 결과에 있어서도 신부가 1위를 차지했고, 승려는 3위, 그리고 목사는 5위에 머물고 있다.54) 또한 최근 한국교회 장로들을 대상으로 한, 교회갱신을위한목회자협의회의 설문조사 결과 한국교회 목회자의 도덕성(윤리의식)에 대하여 “좋다”고 평가한 비율은 32.9%에 불과한 것(‘보통’ 52.6%, ‘나쁨’ 14.5%)으로 드러나기도 했다.55)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금전적인, 혹은 성적인 비리가 드러난다든가, 일부 대형교회에서 목회자가 교회를 사유화하고 담임 자리를 세습한다든가 하는 것도 교회 지도자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자체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교단 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지도자들의 권력 다툼과 갈등도 교회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교회의 지도자와 교인이 실추된 도덕성을 얼마나 회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미래에 매우 중요하게 영향을 미칠 또 하나의 변수가 될 것이다.

➂ 공동체성의 회복
한국교회의 세 번째 과제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공동체성이란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을 의미한다. 한국교회는 서로 돌보고 나누는 일, 사회와 교회에 일치와 화합을 이루어내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공동체성 회복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민족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우선 북한 주민에 대한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필요하다. 북한 주민을 단순히 미래 선교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피를 나눈 동족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의 굶주림 문제 해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민족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서는 타 종교에 대한 관용도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사회다. 다종교, 다문화 상황이 주어진 현실이다. 그런데 개신교는 타종교, 그리고 전통문화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매우 배타적이다.56) 그래서 종교 간의 갈등과 분쟁의 근원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종교적 배타성은 타종교인, 무종교인들로부터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57) 반기련의 이찬경도 “개신교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로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에 대한 멸시와 폄하를 일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면서 불상과 단군상을 부수고 장승을 훼손하며, 수만의 신도가 모여 사찰이 무너지라고 통성기도를 했던 사례 등 타 종교에 대한 개신교의 배타성을 지적하고 “존중받기를 원하면 먼저 존중하라”고 경고한 바 있다.58) 개신교인은 우리나라 인구의 1/5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타종교인, 그리고 무종교인이다. 그들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공격하는 일은 민족 화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종교와 신앙을 가진 사람을 나름대로 존중할 수 있는 것이 민주사회의 정신이며, 그들에 대한 관용과 이해는 민족 화합과 상생에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공동체성을 이루어낼 수 있는 하나의 길이다.
공동체성 회복의 또 다른 주제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이다. 한국교회는 짧은 선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갈라지고 나뉘어졌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신앙 집단 사이에 심각한 긴장과 갈등이 있어왔다.59) 개신교는 이미 200개가 넘는 교파로 분열되었고, 오랜 기간 동안 소위 보수적인 교회와 진보적인 교회는 서로 적대감을 보여 왔다. 단순히 교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슈에 있어 사사건건 대립하고 마찰을 일으켜왔다. 그래서 교파분열과 갈등은 개신교인, 타종교인, 무종교인 모두로부터 항상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 지적되어왔다.60) 다행히 2007년 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대회에서 “교회를 새롭게 민족에 희망을”이라는 주제로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화해와 협력의 길을 가기로 다짐한 것은 뜻 깊은 일이다. 더욱이 최근에 보수교회를 대표하는 한기총과 진보교회를 대표하는 KNCC가 봉사와 섬김을 통해 하나 되는 화해의 대사회적 메시지를 발표하고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한 것은 대단히 환영할만한 일이다.61) 사실상 그동안 한국교회의 보수 진영은 교회성장에 크게 기여했고, 진보 진영은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사회복음운동에 공헌했으니 둘은 상호보완적으로 한국교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62) 이제 하나 되어 하나님 나라 운동에 뜻과 힘을 모으면 우리 사회와 교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성 회복의 마지막 과제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물론 앞에서도 보았듯이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사회봉사와 구제에 가장 앞서왔고, 그래서 많은 일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서는 아직도 충분히 나누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는 엄청난 물적, 인적, 시설 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을 더욱 내어놓아야 한다. 더욱 돌보고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에는,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아프고 외롭고 슬프고 힘든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섬김을 통한 사랑의 실천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신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마 5:16). 실제로 “향후 개신교회가 신뢰받기 위한 중요 사회적 활동”으로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60.3%)가 “봉사 및 구제활동”이라고 지적하고 있다(다음은 윤리와 도덕 실천운동으로 19.9%).63)
섬기는 일에는 보수와 진보가 다를 수 없다. 그래서 “교리는 갈라지게 하나 봉사는 하나 되게 한다”(Doctrines divide, services unite.)는 말이 있다. 한국교회는 섬기는 일에 하나 되어야 하고, 가지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내어놓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에 ‘아이티 구호를 위한 한국교회 라운드 테이블’이 열려 KNCC와 한기총 등 교계 25개 단체가 모여 함께 아이티를 돕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으며,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봉사와 섬김의 사역을 실천해온 한국교회봉사단과 한국교회희망연대가 하나의 결집된 힘으로 ‘섬김과 봉사’에 헌신하기로 하여 한국교회희망봉사단으로 새롭게 출범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에 희망을 주고 있다.64)

4) 남은 과제: 대형교회의 책임과 이미지 쇄신

이와 같이 한국교회가 영성, 도덕성,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분명히 미래에 희망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대형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의 규모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고, 교회의 성공 척도를 교회 규모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 전체에, 그리고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특히 대형교회라는 사실이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나 여론의 따가운 시선은 주로 대형교회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대형교회의 행보에 좌우될 가능성이 많다. 대형교회는 그만큼 사회적으로 많이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많고도 좋은 자원을 가지고 있어 그 교회들이 미치는 파급효과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신분에는 그만큼 도덕적인 의무가 따른다는 말이다. 한국의 대형교회를 향해서는 어떤 도덕적 요구가 있는 것일까? 우선 그 풍부한 자원을 베풀고 나누는 일에 더욱 사용해야 한다. 지금까지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개 교회를 위한 일보다는 세상을 섬기는 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교회들이 대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작은 교회들을 배려해야 한다. 성장에 대하여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한다. 대형교회들은 이미 클 만큼 컸고, 가질 만큼 가지고 있다. 그 교회가 커질수록 주변의 개척교회, 작은 교회들은 문을 닫게 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미 1년에 1천개 가까운 영세 교회들이 사라지고 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주변의 수많은 미자립 교회들을 생각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을 나누어줄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상생의 길이요 공동체성 회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형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이제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내려놓아야 한다. 한국교회를 이끌고 가는 책임적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개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사회로부터도 존경받을 수 있는 영적, 도덕적 지도력을 보여야 한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들의 책임도 막중하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매우 낮다. 우리나라 주요 기업 임원의 42%, 국회의원의 1/3이 개신교인이다. 그러나 기윤실 조사에서 “정치계, 관계, 재계 등에서 개신교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라는 물음에 있어 그것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응답은 6.5%에 불과한 반면에, “부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응답은 46.9%에 이르고 있다.65) 대형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는 높은 지위에 있다. 많은 것이 주어진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교회 지도자들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며, 이것이 한국교회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에 희망을 만들어가기 위해 교회가 해야 할 두 번째 조건은 대사회적 이미지(image)의 쇄신이다. 불교는 매우 조용한 종교다. 어떤 일을 하든지 별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문제적인 상황이 상대적으로 덜 노출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지탄을 받을 가능성이 적다. 이것은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가톨릭의 이미지는 조용한 영성을 추구하며, 신부는 욕심이 없고 섬기는 일을 잘 한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는 여러 가지 형태로 사회에 노출되어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숫자도 많을 뿐만 아니라, 매우 시끄럽고 요란하게 교회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인근 교회에 대하여 “시끄럽다”든가 “지나치게 전도활동을 한다”면서 부정적 인상을 말하고 있다.66) 특히 주로 개신교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 혹세무민하는 이단 신앙은 그대로 언론을 통해 폭로되고, 그것은 교회 전체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 때때로 쉽게 노출되는 일부 대형교회들의 비리나 부도덕성도 대중매체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대사회적 이미지를 바꾸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 대대적으로 아이티 구호사업 활동을 전개하고, 여러 교회단체들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한국교회 이미지 쇄신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본다. 사회봉사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보았듯이 개신교는 사회구제와 봉사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하고 있으며, 그 수준은 가톨릭의 세 배 이상이다.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개신교의 사회봉사 활동의 수준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종교에 대한 의견을 물은 조사 결과 개신교(42.0%)와 가톨릭(41.2%)가 비슷한 응답률을 보이고 있다.68) 그리고 가톨릭 신자의 10.7%만이 개신교가 사회봉사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고 본 반면에, 개신교인의 25.3%가 가톨릭이 사회봉사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고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선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기는 하지만,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봉사활동이 생각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아마도 봉사와 구제 활동이 주로 개 교회나 신도 개인의 차원에서, 혹은 기껏해야 개 교단 단위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봉사의 역량도 함께 모으고, 착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적절하게 사회에 알리는 작업도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 개신교는 하나 되어 가장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라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사회에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6. 맺는말

복음이 전해진 19세기 말부터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그리고 위기의 때에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한국교회, 지치고 힘들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워 희망을 주고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었던 한국교회, 그리고 뜨거운 신앙적 열정으로 기적과 같은 성장을 이루어냈던 한국교회가 2천 년 대에 접어들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더 이상 교회가 자라나지 못하고 있으며,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강한 질책을 받으면서 신뢰도는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출산율 감소와 전통적인 가족구조의 붕괴로 나타나고 있는 인구학적 변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안정, 경제적 풍요, 사회적 복지 등으로 나타나는 사회경제적 변화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교회는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버림으로 그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갖는 것은 한국교회의 신앙적 역동성이 식지 않고 있으며, 교회에 대한 교인들의 충성심과 신뢰의 수준이 여전히 높고, 사회봉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 위기인 것이 분명하지만 희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희망은 미래형이다. 앞으로 성장을 이어갈 수 있고, 사회적으로 존경과 신뢰를 회복하려면 달라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만이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희망은 한국교회(목회자와 교인)의 노력 여부에 달려 있다.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희망을 만들기 위해 한국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영성, 도덕성,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물질, 성공, 명예, 권력, 공명심과 같은 세상적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신앙의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 지도력이 되살아나야 한다.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도덕적인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바르고 올곧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민족 공동체, 문화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고 더욱 더 베풀고 나누어 줌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는가? 한국교회, 미래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전적으로 한국교회가 앞으로 하기에 달렸다. 신앙적 열정에 더하여 영성, 도덕성,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교회, 세상에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제 영적으로 충만하고 도덕적으로 온전하며 나누고 돌보고 섬기는 삶을 통해 이 세상을 밝히 비추고 맛을 내어 ‘멋진 신세계’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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