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부족한 사람의 기조 발제 “한국교회, 새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때로는 과분한 칭찬으로 격려해 주시고, 때로는 예리한 비판으로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주신 세 분께 감사드립니다. 사실상 오랜 세월 종교사회학적으로 한국교회를 연구해 온 학자로서 오늘날의 한국교회에 대하여 평가하고, 미래적인 희망을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직도 한국교회에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불씨가 남아 있고, 최근에는 변화되려는 의지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발제가 해답이나 대안이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 글은 문제의 현실을 진단하고 평가하는 종교사회학적 연구이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안 제시는 제 몫이 아니라 신학자와 목회자의 몫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자 합니다.


1. 임성빈 교수의 논찬에 대하여

1) 제 발제의 내용을 너무 분명하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요약, 정리해 주셨습니다. 특히 기독교윤리학자답게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하여 윤리적인 시각에서 다시 조명해주어서 장황한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2) 6-1에서 제기한 전문성 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만 ‘전문성’이라는 용어보다는 그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는 “청지기 사명의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상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간파했듯이 개신교윤리의 핵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성실과 절제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는 “청지기적 소명의식”이며, 이것이 간과되면 소위 “천민적 자본주의”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3) 6-2에서 제기한 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지만 또한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패러다임 변화에 있어 사람이 먼저 변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도가 먼저 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진지하게 다시 한 번 숙고할 문제라고 봅니다. 물론 목회자와 평신도를 포함한 기독교인 개인의 변화와, 조직이나 구조 혹은 제도의 변화가 함께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앞으로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2. 조성돈 교수의 논찬에 대하여

1) 제 발제의 함축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핵심을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목회사회학을 가르치시는 전문적 식견이 제 발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셨습니다. 학자이면서도 목회 현장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염려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2) 교회와 지역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신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적지 않은 교회가 지역사회 봉사에, 그리고 지역사회와의 관계 정립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봅니다. 다만 이제는 단순히 물질적 구제와 봉사의 차원을 넘어(이것은 국가나 사회복지 기관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소위 “영적 복지”(spiritual wellbeing) 향상을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3) 그동안 한국교회에 대한 담론의 중심적 주제는 대형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조성돈 교수가 중형교회 혹은 중대형교회 리더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목회자들과 소통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개척교회, 미자립교회, 소형교회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신학자나 종교사회학자와 같은 전문적인 학자들뿐만 아니라 중형 이상의 교회 목회자들도 이 문제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아픔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 정병길 목사의 논찬에 대하여

정병길 목사의 비판적 성찰이 날카로운 지적일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논찬 내용에 대하여 다소 곤혹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제 글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논찬자가 제 글의 의도와 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음의 몇 가지 사항에 대한 제 소견을 다시 한 번 밝히려고 합니다.

1) “‘한국교회 희망의 불씨’에 대한 다른 관점”에 대하여
제가 한국교회의 “희망의 불씨”로서 제시한 ‘신앙의 역동성,’ ‘감성문화,’ ‘개 교회에    대한 충성심’이 미래 한국교회의 ‘짐’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첫째로, ‘불씨’는 집을 태울 수도 있지만, 음식을 요리하고 방을 따뜻하게 하고 불을 밝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집을 태울 우려가 있다고 ‘불씨’ 자체를 꺼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씨 자체는 소중한 것입니다. 신앙의 역동성, 감성문화, 교회에의 충성심과 같은 한국교회의 불씨가 과거에 역기능을 수행한 적이 있다고 해서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이를 목욕시키고 그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 것과 다름이 아니라고 봅니다. 불씨는 잘만 사용하면 매우 유용한 것입니다. 제 의도는 그 불씨를 잘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쪽에 지적했듯이 그 불씨를 개 교회를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고 세상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한국교회의 패러다임이 ‘성장 중심’에서 ‘성숙 중심’으로, ‘신앙 중심’에서 ‘실천 중심’으로, ‘교회 중심’에서 ‘지역사회 중심’으로, ‘조직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제 입장에 대하여 신앙적 역동성, 감성, 충성심과 같은 불씨는 옛 패러다임의 답습이라고 지적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불씨들이 과거에 한국교회의 성장, 신앙, 교회, 조직 중심의 교회 패러다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의 패러다임이 성숙, 실천, 지역사회, 사람 중심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불씨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앙적 역동성, 감성, 충성심은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이요 유산입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장점이요 밑천이기도 합니다. 제 논지는 그 유산을 보다 건설적으로, 창조적으로 승화시켜 그것으로 한국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강한 동력으로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셋째로, 유교, 불교, 개신교의 종교성을 비교하면서 전통종교는 민족의 가슴을 절제시키는 사회적 기능을 감당했지만, 개신교는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고, 그러나 이제 그 불이 꺼져 과거 회귀적 불붙임에 집착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역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종교문화사에 대한 견해차이겠지만, 각 종교들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너무 단순화시키거나 지나치게 일반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근대화, 도시화 바람으로 개신교가 성장했다고 했으나, 그 변화과정에서 개신교 이외의 모든 종교가 성장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요즈음 교회 성장의 동력은 1970, 80년대 유행했던 성령운동, 신유운동, 카리스마 운동이 아닙니다. 이 운동들은 가난하고 억압받은 경제적, 정치적 현실에 어울리는 것으로 과거 한국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기는 했으나, 오늘날에는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에서 사라져버린 신앙 양태입니다. 따라서 과거회귀적인 불붙임이 이제는 한국교회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2) “교회성장과 희망의 상관성 문제”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한국교회의 희망을 교회성장에 초점을 맞춰 논의하고 있다는 지적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 논찬자는 제 글의 논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저는 교회성장론이 말하는 성장예찬론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을 목회의 성공 척도로 보는 견해를 혐오합니다. 성장이 반드시 성공의 기준은 아니며, 교회성장이 교회의 최종적인 목표나 바람직한 모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성장한 것에 대하여 과대평가하는 ‘자만’이 문제라면, 그것을 과소평가하는 ‘자학’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성장한 교회가 있다고 해서 ‘성장’ 담론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바르게 성장하지 못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건강하게 성장한 교회도 있습니다. 잘못해서 교회가 자라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성장’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성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것은 종교사회학자가 아니라 신학자나 목회자가 평가할 일입니다.
둘째로, 제 발제의 일관된 논지는 사실상 교회의 ‘성장’ 문제가 아니라 ‘성숙’의 문제입니다. 요즈음 한국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도 결국은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하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이것 역시 신학적, 목회적 기준이 아니라 사람들의 평가 기준에 따라 논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 공신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글에서도 밝혔듯이 제가 강조하는 바는 양적 성장이 아니라 영적 성장(혹은 성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의 희망을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전체적인 논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한국교회의 희망을 ‘성장의 관점’에서 논하는 접근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성장이나 쇠퇴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떠나 객관적인 평가에 있어서 교회가 쇠퇴하고 침체되는 것이 왜 문제가 아닙니까? 가능하다면 경제든 종교든 성장하는 것이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봅니다. 제 친구들은 대부분 중형 혹은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입니다. 그들의 공통된 최고의 관심사, 최대의 고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인 수가 늘지 않는 것, 혹은 교인 수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미자립교회, 개척교회, 소형교회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인 수가 10명만 되었으면, 20명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의 ‘성장주의’ 올무? 작은 교회의 ‘성장 콤플렉스’? 많은 목회자에겐 ‘성장의 부작용’이라는 말조차 사치일 수 있습니다. 과연 성장 없이 희망을 말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리고 그것이 정당합니까? 물론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장 제일주의에 빠진 일부 대형교회와 목회자 때문에 성장담론 자체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건설적인 대안이 아니며, 단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 담론일 뿐입니다. 성장 문제는 특히 목회자에게는 절박한 문제입니다. 교회가 성장할 수만 있다면 “영혼까지도 팔고 싶다”고 절규하던 한 제자의 말이 지금도 제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권위주의’가 문제라고 ‘권위’까지 포기할 수는 없듯이 ‘성장 제일주의’가 문제라고 ‘성장’ 가치마저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넷째로, 희망을 말하면서 ‘교회 중심적 희망’을 말하는 것은 ‘통계성장학’ 이상의 담론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선 교회성장론에서 말하는 성장통계학과, 교회의 성장과 쇠퇴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교회적 요인에 대한 통계적 분석(제 시도는 후자에 속한 것입니다)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논찬자는, 희망은 누구의 희망인가고 물으면서 교회 중심적 희망이 교세와 교권에 기초한 것이라고 했는데, 왜 ‘교회의 희망’을 교세나 교권과 결부시켜야 합니까? 그리고 먼저 교회에 희망이 있어야 민족과 역사 앞에서 희망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교회는 죽어가면서 세상을 향해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을까요? 교회가 바로 서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 바름과 나눔과 하나 됨이 이루어지지도 못하면서 세상을 향해 정의, 평등, 사랑을 외치는 것은 모순되고 공허한 일이 아닐까요? 세상은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할 겁니다. “너나 잘 하세요!”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자신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고 이것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물론 교회가 온전해진 다음에야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희망과 세상의 희망은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로부터 겸손하게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 3, 4, 5, 6에서 제기한 문제
여기서 제기한 문제는 제 발제 내용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들에 대한 논의 또한 제 글의 5장 3절 이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지면과 시간의 제약 상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논찬자는 제 글이 구체적인 대안과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원론적 거대 담론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한 것 같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맡은 발제의 주제는 성격상 원론적인 거대 담론의 수준을 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담론(예를 들면 논찬 자료 3, 4, 5, 6에서 논하고 있는 것)은 이미 목회상담학, 민중신학, 통일신학, 토착화신학, 종교신학,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생태신학, 생명신학, 정신분석학, 기독교 저널리즘 분야 전문가들의 분석과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어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귀한 모임에서 발제할 기회를 허락해주신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회장이신 손인웅 목사님과 임원 여러분, 그리고 세 분 논찬자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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