콥틱 교회는 세계 교회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콥틱 교회는 콥트 언어를 쓰던 교회로서, 콥트어는 과거의 이집트 언어, 즉 애굽인들이 사용하던 고대 언어를 말한다. 옛날부터 이집트는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제국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서 콥틱 교회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콥트어는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 언어의 수난은 주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공용어를 헬라어로 사용하도록 명령함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콥트어는 이집트 내에서도 천대를 받기 시작해 예수님의 복음서가 타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주후 200년 경에는 콥트어의 표준적인 표기법조차 없었다. 일상 용어로서의 콥트어는 토착화된 헬라어와 많이 혼용되었다가, 주후  641년 이집트가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하자 완전히 말살되었고 대신 모든 사람들이 아랍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콥틱 교회는 교회사가 유세비우스(A.D. 260~340경)에 따르면 전도자 마가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세운 교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마가가 말년에 이집트로 건너와서 전한 기독교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되면서 이집트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완전히 결합해 하나의 성(性)을 이루고 있다는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은 이집트 교회가 세계 교회와 분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주후 451년 소집된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디오스코루스(Dioscorus)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적 대변자였던 에우티케스(Eutyches)를 단성론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규정해 면직했는데, 그 이면에는 기독교의 정치적 중심지가 이집트 쪽으로 기울이지는 것을 우려한 비잔틴 제국의 동방교회와 로마 카톨릭의 견제가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총대주교 면직 이후 비잔틴 교회가 새로 임명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는 이집트 출신의 친 비잔틴파인 프로테리우스(Proterius)였다. 그러나 이 결정에 반발한 이집트 교회의 주교들은 그에 맞서 엘루루스(Elurus)를 총대주교로 선출하고 별도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축성식 이후 두 그룹으로 갈라져 일어난 폭동으로 인해 프로테리우스(Proterius)는 457년 성 금요일에 살해되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이집트 교회는 국민적 교회로서 독립하며 세계 교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집트 교회를 또다른 말로 콥틱 교회(Coptic Church)라고 부르는데, 이단 정죄와 이슬람의 철저한 기독교 말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손목에 새겨진 십자가 문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콥틱 교회는 마가 요한을 초대 교황로 여기고 있으며 이렇게 오랫동안 믿음의 뿌리를 지켜온 그들의 생활 방식이나 종교관은 대부분 초대 교회 당시부터 전혀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와서 살아있는 초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는 아랍어 권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 인구를 가진 나라이다. 그 수는 약 340만에서 1,350만 명에 이르며 인구의 10~12%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학자 필립 파르지스의 현장조사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5%에 해당하는 350만 명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기독교인의 90% 이상은 콥틱 기독교인이며, 10%의 로마 카톡릭과 소수의 개신교가 있다. ‘세계기도정보’에 의하면 비 콥틱 그리스도인은 50만 명에 이른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최근 몇 년간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박해의 분위기를 조성해 가고 있으며, 콥틱 교회는 여전히 소수 집단으로서 무슬림들과의 긴장 가운데 있다. 가난한 그들은 무슬림으로 개종하면 주어지는 보상금에 현혹되거나 무슬림 이성과 결혼을 통해 개종해야 할 상황에서 쉽게 신앙을 저버려 지금도 하루에 30~40명의 교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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