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7) 교갱협 제14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에스라 7장 6~10절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아닥사스다 왕 제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년 다섯째 달이라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저는 학사 에스라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저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평생을 학사 에스라와 같은 목회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며 살아왔습니다. 학사 에스라에게 대하여 본문은 우리에게 다섯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로, 학사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7장 6절에 보면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관한 한 처음부터 끝까지 훤했습니다. 어느 한 곳도 낯선 곳이 없고, 생소한 것이 없고, 모세의 율법이라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훤하게 익숙한 학사였습니다. 12절에 보면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에게 대하여 한술 더 떠서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완전하다고 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모든 왕의 왕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옛날에는 한 나라라고 해봤자 전부 도시국가입니다. 아덴시가 하나의 나라입니다. 고린도가 하나의 나라입니다. 그런 때에 아닥사스다 왕은 조그마한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여러 왕들을 다스리는 그 왕들 중에 대왕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그런 대왕 아닥사스다는 에스라로 하여금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자, 익숙 정도가 아니라 아예 완전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역대하 26장 5절에 보면 남쪽 유다의 제10대 왕 우시아의 종교 고문관으로 있던 스가랴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스가랴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우시아 왕의 종교 고문관으로 있던 스가랴는 하나님의 묵시에 대해서 밝히 알았지 어설픈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에 보면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아볼로라는 사람은 일반학문이 많을 뿐만 아니라 특히 성경에 대해서는 아주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에 바울은 믿음에 아들 디모데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일꾼이 되되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되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됩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면 그건 부끄러운 일꾼인 것입니다.

“요즘 시대가 시대니만큼 구형차 타고 다니는 목사들이 어디 있습니까? 다 신형차 타고 다니는데 난 7년 묵은 구형차 타고 다니려니, 도대체 어디 갈 때 부끄러워서 차를 타고 갈 수가 없어.” 이렇게 말하는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구형차 타는 게 부끄럽습니까? 구형차 백 번 타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부끄러운 것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치 못하는 이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바울 자신은 어떠했습니까? 디모데전서 2장 7절에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나 바울 보고 천문학을 강의하라고? 나 바울 보고 광산학을 강의하라고? 나 천문학 몰라. 광산학도 몰라. 그러나 믿음과 진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믿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이며, 기도교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나는 이방인의 스승이 자격이 있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목사가 천문학 모른다고 누가 비난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광산학 모른다고 누가 탓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믿는 것이 참 진리며,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가, 이것을 바로 모르면 부끄러운 일이지요.

옛날에 중국에 맹자라는 책이 있지요? 어느 제자가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맹자라는 책에 한 번 환하게 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네 생각이 고맙구나. 그래. 너 삼천 번만 읽어라, 맹자대란 책을 삼천 번만 읽으면 탁 하고 통하는 소리가 들릴거다.” 그 제자는 그날부터 맹자를 삼천 번 읽었습니다.그런데  삼천 번을 읽었는데도 탁 하고 통하는 소리가 안납니다. ‘이상하다, 우리 선생님이 거짓말할 리가 없는데.’ 그래서 孟子三千讀(맹자삼천독)에 不聞卓之聲(불문탁지성)이라. 이 글을 지어가지고 선생님께 갖다 바쳤습니다. “삼천 번 읽어도 탁 소리가 안 나네요?” 선생님께서 “네게 하나 묻겠는데 너 이번에 뜻을 생각하면서 정독하면서 읽었니? 안 그러면 그저 삼천 번 횟수만 채우려고 설치면서 읽었니?” “선생님, 아픈 데를 찌르시는군요. 실은 제가 그저 빨리 삼천 번 채우려고 설치면서 읽었습니다.” “그러니 안 되지. 너 이번에 다시 삼천 번 읽어라. 이번에는 뜻을 생각하면서 정독을 해라.” 그 스승에 그 제자라 그날부터 이 제자는 그야말로 양심의 가책이 안 될 정도로 뜻을 생각하면서 정독해서 삼천 번을 읽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탁 하고 소리가 어김없이 날 줄 알았는데 소리가 또 안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글이 孟子三千讀(맹자삼천독)에 之(지)자가 두개입니다. 孟子三千讀(맹자삼천독)에 不聞卓之之聲(불문탁지지성)입니다. “또 안 들리네요.” 스승 왈 “됐다. 이게 통한 거다.” “선생님, 탁 하고 소리가 안 들렸는데요.” “이 사람아. 孟子三千讀(맹자삼천독)에 不聞卓之聲(불문탁지성) 이것은 한시상 운이 안 맞아. 그건 무식한 글이야. 孟子三千讀(맹자삼천독)에 不聞卓之之聲(불문탁지지성) 이렇게 해야 한 시상에 운이 맞는 거야. 이게 바로 통한 거야.”

그 제자가 갈 之(지)자 하나 더 넣을 때에 문법적으로 연구해서 넣었겠습니까? 구문법을 연구했습니까? 아니죠. 맹자란 책을 육천 번 읽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화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맹자라는 책도 육천 번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화해 버리고 말았는데, 우리가 이 책에 대해서 띄엄띄엄 생소한 데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한국 교회에서 재건파의 일종인 세칭 백파라는 데가 있었죠? 백영희 목사님이 사역하던 부산서부교회에 백파신학교가 있습니다. 그 백파신학교에서는 졸업하는 조건이 학점이야 다 따건 말건, 신학교 3년 동안에 구약 100번, 신약 100번 읽지 않으면 졸업장을 주지 않습니다. 난 그 말 들을 때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구약 100번, 신약100번 읽으면 무언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총신대학교에 오기 전에 성경을 구약 100번, 신약 100번 읽기 위해서 먼저 백파 교회에 가서 신약 100번, 구약 100번 읽고 난 후에 우리 학교로 온 학생이 20년 전에 있었습니다.

제가 옛날에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이 말을 했습니다. “내 성경 본문 지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스스로 알아볼 수 있는 온도계가 있는데 내가 여러분에게 그 온도계를 소개해 드릴 터이니까 그 온도계를 가지고 평생토록 내 성경 지식이 어느 정도인가 재어 보십시오. 7,8세 때 들은 말인데, 곰이란 놈이 겨울에 동면 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그 미련한 것이 그래도 동면 생활에 들어가도 되나 한 번 테스트를 해본다고 합니다. 매일 도토리를 따먹고 난 다음에 일부러 높은 언덕에 가서 툭 떨어져 본 다음에 엉덩이가 아프면 지방이 덜 쪘기 때문에 ‘아하! 아직도 정도 미달이구나’ 깨닫고 그 다음에 도토리를 더욱 열심히 따먹고 떨어져 본 다음에 안 아프면 지방이 두껍게 찐 것이라 확인하고 안심하고 동면에 들어간답니다.

온도계가 섭씨와 화씨가 있듯이, 내 성경 본문 지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보는 온도계도 섭씨와 화씨 두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 옆에서 누군가 신구약 성경 가운데서 한 절을 읽을 때에 그 말씀이 어느 성경 몇 장에 있는지 알아맞힐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절수까지는 알아맞힐 수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장수면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사 그거야 알겠지요. 그와 같이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 누가 한 절을 읽어도 저 말씀은 이사야 59장의 말씀, 예레미야 45장의 말씀 이렇게 알아맞힐 수 있는가? 이게 안 되거든 도토리 더 따먹어야 합니다. 정도 미달입니다.

또 화씨는 이사야 38장. 이것은 이러이러한 말이지. 그 자리에서 이사야 38장을 아웃라인 할 수 있느냐? 예레미야 19장. 가만 예레미야 19장? 거기는 대략 이러이러한 내용이라고 아웃라인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되겠지. 마태복음 1장 되겠지. 그와 같이 시편 48편, 시편 59편, 호세아 3장, 어느 한 장을 찍을 때에 선 자리에서 그 장의 내용을 아웃라인 할 수 있느냐? 이걸로 재 봐라. 안 되거든 도토리 더 따먹어야지.” 난 지금도 도토리 더 따먹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온도계로 평생토록 여러분의 성경본문 지식이 어느 정도인가 섭씨와, 화씨 이것으로 온도계를 재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에스라는 계속해서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에스라 7장 10절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가 결심한 것이 3가지 있습니다. 그 결심한 3가지 가운데 첫째가 무엇입니까? 에스라가 여호와에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익숙하고 모든 왕의 왕인 아닥사스다 왕까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자는 이러한 평을 들을 때에 에스라가 어떠한 자세를 취했습니까? ‘그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누가 나만큼 성경 아는 사람 있나? 그 아닥사스다 왕이 과연 대왕이야. 사람 볼 줄 아는데? 나를 보고 율법에 완전한 자라고 평하니 그것 참 대왕다운데? 이제는 좀 쉬자.’ 그랬습니까? 에스라는 내가 이미 율법이 익숙한 자요, 모든 왕에 왕인 대왕 아닥사스다 왕까지라도 에스라를 율법에 완전한 자로 평할 지라도, 계속해서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하는 이것이 에스라의 두 번째 자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이상하게 누구보다도 지식을 먼저 요구하고 배워야 될 미련한 자는 배우는 데 흥미가 없습니다. 이상합니다. 잠언 18장 2절에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누구보다도 명철을 기뻐해야 될 미련한 자가 명철을 기뻐하지 않아요.

반면에 이미 지혜 있는 자들은 더 지혜를 얻으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전도서 1장 16절에 솔로몬은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큰 지혜를 양적으로 말했지요? 작은 지혜가 아니라 큰 지혜입니다. 그 다음에 많이 얻었다는 건 지혜를 수적으로 말했죠? 솔로몬은 양적으로 작은 지혜가 아니라 큰 지혜를 수적으로는 많이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했으니 시간적으로 볼 때 과거에 어떠한 자보다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솔로몬은 양적으로 볼 때 큰 지혜를 수적으로 볼 때 많이 얻었고, 시간적으로 볼 때 과거의 누구보다도 더 지혜로웠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허리를 펴고 교만했습니까? 17절에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솔로몬은 이미 양적으로는 큰 지혜요, 수적으로는 많은 지혜요, 시간적으로는 과거에 누구보다도 지혜로웠지만 다시 지혜를 얻으려고 마음을 썼다고 했습니다.

전도서 8장 16절에 솔로몬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잠언 15장 14절에 보면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잠언 18장 15절에 보면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이미 지혜로운 자는 더 지식을 구하여 지혜를 더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는 더 지혜로워지려고 몸부림치고, 도리어 미련한 자가 알려고 애를 안 쓴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 3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이미 바울에게 계시로 비밀을 알게 해 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허리를 펴고, 교만해졌습니까? 에베소서 6장 19절에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날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미 계시로 비밀을 알고 있는 바울이었지만 바울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의 말씀을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 저의 망신스러운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한 지 60여 년이 지났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이 책이 결코 간단하게 점령되는 책이 아니구나!’ 이걸 제가 깨달았습니다. ‘이 책이 결코 간단하게 증명되는 책이 아니구나!’ 다른 사람은 모르겠어요. 나는 그걸 강하게 느꼈어요.

저는 이날까지 목회하면서 귀한 은사 목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최원초 목사님이란 분인데 그분에 대한 소개는 제 사무엘상 강의 서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귀한 분인지 모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요한계시록을 일만 번 읽은 사람입니다. 그 정도면 더할 나위 없지요. 요한계시록을 일만 번 읽은 그분이 1947년 5월말 어느 날 그때 제가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목사를 할 뜻을 품고 있었고, 그 목사님도 그걸 알았습니다. 1947년 5월말 어느 날 저를 보고 “자네, 앞으로 자네가 목회할 맘이 있다면 다른 거 그만두고 우선 본문부터 많이 읽어라”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947년이면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입니다. 그 먼 옛날에 본문이 뭔지 제가 알기나 했습니까? 그 목사님께서 절 보고 “너 본문부터 많이 읽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목사님들은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다른 목사님들이 다 성경 많이 보라고 하시겠지만 최원초 목사님께서 저 보고 본문 많이 읽어야 된다고 주신 도전은 한국 교회 어느 목사님도 줄 수 없는 강한 도전이었습니다.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1947년 5월부터 이날까지 62년 동안 성경에 대해서는 남달리 시간을 투자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저에 대해서 “저 사람 하루에 성경 본문 4시간 본다.” 그런 말을 들으셨겠지요. 사실입니다. 그런데 60년 다 그렇게 본 것은 아니고, 공부할 때 어떻게 그렇게 봅니까? 유학을 마치고 온 다음에 68년부터 92년까지 23년 동안은 문자 그대로 하루 4시간씩 투자했습니다. 고려신학 할 때는 방학 동안 4시간 읽었습니다. 아마 방학까지 합치면 24년은 되겠지요. 24년은 문자 그대로 4시간씩 읽었고, 91년 이후에는 제 육체의 문제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어서 지금은 그렇게는 못합니다. 하지만 사상적으로는 그만큼 강하게 시간을 투자했지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62년 투자했으면 뭣 좀 되었겠지요?
그런데 신구약 전체를 하나의 큰 태산에 비한다면 문자 그대로 23년 동안 하루 4시간씩 투자했고, 시간적으로 62년을 투자했으니까, 태산의 4/5나 3/4 정도는 점령했겠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제가 성경을 깨달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신구약 성경 하나를 큰 태산에 비한다면 태산의 한 모퉁이를 그저 손가락으로 긁다만 정도 밖에는 깨달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고백입니다. 제가 이 말을 1978년에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에 말했습니다. 1978년은 1947년부터 성경을 읽은 지 31년째일 때입니다. 그때에 내가 31년 집중했지만 이 정도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상하게 오늘은 제2의 31년이 지났습니다. 62년.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줄어든 거 같아요. 성경은 바로 이러한 책이더군요.

구약을 순서대로 같이 읽다 보면 평생 가도 못 읽겠어요. 그런데 성경을 가만 보니까 구약 가운데 시편과 잠언은 다른 책에 비해서 농도가 짙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아이디어를 주셨는데 1950년 1월 1일부터 구약을 순서대로 읽는 것 말고 하루에 시편 다섯 편, 잠언 1장 읽으면 한 달에 한 번씩 읽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 7월말까지 시편과 잠언만 643번 읽었습니다. 643번 읽었어요. 덕분에 시편은 환합니다. 어디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자다 깨서 말하래도 다 말합니다. 몇 편에 무슨 말이 있는지. 무슨 말이 있는지 아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어요. 이게 사람 죽을 일이에요. 시편은 문맥이 있는데, 잠언은 문맥이 없으니까 잠언은 지금도 새까맣습니다. 이것이 이런 책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얼마 전에 제가 시편 119편 96절을 보고 다소 위안을 받았습니다. 시편 119편 96절에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내가 이것을 보고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시편을 그렇게 봐도 그런 거구나. 그래서 그렇구나’하고 다소 위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끄럽지만 나는 1947년부터 이날까지 62년 동안 여기에 대해서는 남 달리 좀 투자해 왔다 하는데 오늘 바로 깨달은 것은 쥐꼬리만큼입니다. 고사성어에 讀書百遍(독서백편)에 義自見(의자현)이란 말이 있습니다. 또는 見(견)자 대신에 見(현)이라고 발음하는데, 讀書百遍(독서백편)에 義自見(의자현)이라. 아무리 어려운 책도 백 번 읽으면 뜻이 저절로 통한다. 이런 말을 했어요. 헌데 이 책에는 저 말이 안 통합디다. 다른 책에는 통하겠지요. 성경에는 이 말이 안 통해요. 643번 읽어도 모르겠어요. 에스라가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익숙한 자요 완전한 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연구하기를 힘썼던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종종 말했습니다. “여러분, 목사가 평생 구루병 면할 생각은 두지 말아라.” 구루병이 뭡니까? 책상에 앉아 허리 구부리고 연구하는 게 구루병입니다. 목사가 허리 폈다가는 뒤로 벌렁 나가 넘어집니다. 평생 구루병 면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을 종종 해왔습니다.

 

셋째로,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며 준행하고, 율법의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에스라 7장 10절에 에스라가 두 번째 결심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준행하며 가르친다는 것을 같이 보겠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연구한 말씀대로 행하며 가르치는 학사였습니다. 행하며 가르치는 학사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했지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저 가르침이 아니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컫음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에 누가는 예수님의 일대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예수님은 행하시면서 가르쳤지, 행함이 없이 그저 가르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9절에 엠마오로 가던 제자가 뭐라고 말합니까?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예수님은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마가복음 6장 30절에 보면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행하면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뭐라고 합니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바리새인들은 말만하고 행치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2장 17~21절에 바울은 유대인들을 뭐라고 말합니까?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유대인들이 말만 하고 행치 않는 허물을 바울이 꼬집었던 겁니다. 에스라는 내가 연구한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학사였습니다.

 

넷째로, 에스라는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 앞에 엎으려 눈물과 금식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무릎의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는 학사로서 그저 율법을 연구하고 지식을 알고 있는 그러한 학사였습니까? 아닙니다. 에스라 8장 21~22절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에 그 길은 네 가지 어려움이 있는 길입니다.

31절에 보니까 우선은 7장 9절에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정월 1월 1일에 떠나서 5월 1일에 예루살렘에 왔으니 만 4개월을 걸어야 될 머나먼 길입니다. 만 4개월을 걸어요. 둘째로, 나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에스라 8장 20절에 보면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 우선 내 윗사람만 해도 220명이 되고, 21절에 보니까 우리의 어린 아이까지 있습니다. 나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200~300명이 같이 걸어야 될 책임이 무거운 길입니다. 셋째로 31절에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그 길에는 대적들이 매복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죽이고 돈을 빼앗는 어느 산모퉁이에서 언제 복병이 나올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길입니다. 넷째로,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막을만한 호위무사가 있나요? 빈손입니다. 당할 대로 당해요.

이 네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이렇게 무기 하나 없이 어려운 길을 올 때에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바라고 떠나기 전에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호위병을 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올 때 호위병 구해 가지고 왔습니다. 에스라는 일부러 구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앞에 금식을 했습니다. 에스라 9장 3절에 보니까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와보니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방혼이란 사람들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어요. 이 보고를 들을 때 에스라가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5절에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10장 1절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는 학사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울며 금식하고 기도하는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7장 12절에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에스라를 학사라 안하고 학사 겸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이 뭡니까? 우리 신학에서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대신한다고 나서는 사람이 제사장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대신 나서서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대신 무릎을 꿇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에스라는 학사만이 아니라 제사장이었습니다. 영어에 Dry Scholar 라는 말이 있습니다. Dry Scholar. 이건 사전에 없어요. 우리 속담으로 메마른 학자라. 신학교 교수님들이 지식은 많아요. 그런데 부흥사 같은 뜨거움이 있습니까? 그건 요구할 수 없지요. 지식은 많지만은 뜨거움이 없다고 해서 Dry Scholar라고 합니다. 그건 나쁜 말도 아니에요. 신학대 교수는 부흥사가 아닙니다. 에스라는 학문만 아는 Dry Scholar가 아니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과 금식으로 기도하는 눈물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로, 에스라의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아까 8장 21절과 22절에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23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에스라의 기도에 하나님에 응답하심이 있었습니다. 8장 31절에 아까 말한 대로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네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소설같이 무사하게 온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하나님의 선한 손에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에스라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학사 에스라는 다섯 가지 특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하고, 완전한 자. 둘째, 그러면서도 연구하기를 결심한 사람. 셋째,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나부터 먼저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 넷째, 지식만 들어있는 Dry Scholar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 하나님 앞서 엎드려 금식과 눈물로 기도하는 눈물의 사람. 무릎의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기도에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기적적인 응답이 있었습니다.

먼 훗날 이 사람이 평생을 목회하면서 내 목회에 늘 소망으로 품은 것은 나도 학사 에스라와 같은 목회자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왔던 것처럼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 동료 목회자님들께서 21세기에 학사 에스라와 같은 목회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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