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직면한 당신, 어떤 믿음을 준비하고 있는가?

▲ 김은국 저, 을유문화사, 2004-12-30, 345쪽, 8000원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욥 24:12).
"목사님, 목사님의 신은 저들의 고통을 진정 알고 있을까요?" ('순교자' 중에서)

신의 존재와 삶의 부조리 사이에서 뱉어낸 이 질문이야말로 인류의 역사와 발걸음을 같이 하는 해묵은 질문들이 아닐까? 인생이 당할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체험한 욥도, 삶 속에서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여전히 공허했던 솔로몬도 다른 보통의 인간들처럼 이 질문을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에 부딪혔을 때, 욥기나 전도서를 펼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끔찍하고 절박한 고난 속에서 의인 욥이 얻은 깨달음과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왕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씨름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위로와 희망을 얻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저자 김은국은 이 질문을 한국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으로 끌고 왔다. 한국 전쟁 중, 평양에서 열네 명의 개신교 목사가 공산군에게 납치됐다. 이중 열두 명은 처참하게 처형되고 두 명만이 살아 돌아 왔다. 육군 파견대 정치 정보국 소속의 이 대위는 이 사건을 조사하라는 특별 임부를 받게 된다. 자유민주주의와 종교적 신념을 위해 숭고하게 희생한 이들을 기념함으로써 정치적 선전을 꾀하려는 군 당국의 지시였다.

희생된 열두 명의 목사와 함께 끌려가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신 목사는 어쩐 일인지 그 사건에 대해 입을 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 목사가 생존할 수 있었던 까닭은 목숨을 구걸하고 신앙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평양 기독교인들은 일제히 신앙과 조국을 저버린 두 명의 목사를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한다. 화난 군중은 신 목사에게‘가룟 유다’라는 별명을 붙이고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던 이 대위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위대한 순교자'라고 칭송받던 12명 중 대부분이 목숨을 위해 신앙을 저버렸으며, 정작 끝까지 신앙을 당당하게 지켰던 사람은 생존자 두 명이라는 것이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신 목사의 태도다. 자신에게 거침없이 쏟아지는 평양 시민들의 비난과 폭행 위험에 직면해서도 끝까지 사실대로 밝히지 않으려 한다. 하루빨리 진실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하라는 이 대위의 종용에 신 목사는 되묻는다.

"젊은 친구, 그들이 진실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소?"

평생 신을 찾아 헤맨 신 목사가 발견한 것은 인생의 괴로움과 냉혹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 그 고통을 깊이 느낀 신 목사에게는 더 이상 진리도, 신의 존재도 큰 의미가 없었다. 신 목사는 그들에게 눈을 돌린다. 절망 속에서 그들이 단 하나 붙잡고 있었던 것이 있다면 영생의 소망, 신앙의 확신이었다. 그리고 열두 명 순교자들의 영웅담이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굳게 붙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믿음과 희망을 지켜 내기 위해 신 목사는 기꺼이 가룟 유다가 되어 평양 기독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 그리고 열두 명의 신앙을 기리기 위한 추도예배를 앞장서서 주도해 나갔다.

"난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가를,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스럽게 되는가를 보았소. 그렇소, 영원한 희망이라는 그 환상 말이오. 인간은 희망 없이는,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그 괴로움을 이겨 내지 못합니다. 만약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하긴, 그게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다른 데서-그렇소. 하늘나라 하나님의 왕국에서라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1964년 김은국은 이 작품을 발표하자마자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세계 10여 개 언어로 번역되면서 "하나의 사건을 소재로 신에 대한 인간다운 믿음의 보편성을 표현하고 신을 믿으려고 갈망하는 데서 비롯되는 의혹과 고뇌"를 훌륭하게 다뤄 냈다는 평가를 얻었다. 그리고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1969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게 된다. 작년에는 '세종문화회관 개관 30주년', '한국 신연극 100주년'이라는 짱짱한 타이틀을 걸고 이 작품이 연극으로 재탄생했다. 신과 고통, 인간 본질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풀지 못한 탐구 영역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이 책 속에는 인간이 직면한 고통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대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신의 존재와 인생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는 의혹을 품고 있었지만, 고통당하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명예와 신념을 아낌없이 희생한 신 목사, 목전에 닥친 위험을 피해 교인들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다시 돌아와 그들과 운명을 함께한 고 군목, 일찌감치 기독교의 울타리에서 도망쳤지만 임종 직전, 목사인 아버지가 보인 인간적인 의혹과 번뇌에 기꺼이 자신의 신앙을 되찾은 박 대위.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지켜본 후 비로소 위대한 인류애에 눈을 떠 가는 이 대위.

이제 이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유도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당신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믿음을 준비했는가? 당신의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어떤 믿음과 희망을 보여 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믿음은 어떻게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지극히 '성경적인' 결말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신을 향한 '인간다운 믿음'을 보여 주는 이 책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인물들이 빚어낸 신에 대한 치열한 믿음과 의혹, 고난당하는 인간을 향한 지독한 사랑을 다양하게 엿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임은 분명하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