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한국 개신교의 성장추세가 하강곡선으로 돌아섰다. 여러 가지 외적 요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요인은 교회 안에 있다. 한국 교회가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교회 밖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사회적 존재로서 교회는 어느 정도의 세속적 힘을 갖게 되면, 그 때부터 제도화되고, 권력집단화 되면서 정신이 혼탁해지기 시작한다.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주 종교를 교체해 본 경험이 있는 민족이다. 세계사적으로 이와 비슷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민족사적 사실을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이루어야 할 역사적 채찍으로 삼아야 한다. 교회가 스스로의 갱신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기독교의 사회적 존재 가치는 급속도로 약화될 것이다. 서구 사회와 달리 한국 사회는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전통 종교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아직 자기 갱신 능력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대안적 종교의 등장에 길을 내주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교회의 역사는 개혁 정신이 이미 초기 교회에서부터 드러나는 ‘교회의 본래성’에 속한 것임을 보여주지만, 이 글의 범위는 16세기에 태동한 개혁교회에 한정된다. 개혁교회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유형의 신앙전통을 발전시켜왔다. 그러한 신앙전통은 주로 ‘칼빈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칼빈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간격을 넘어 칼빈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개혁신앙 전통의 본래적 성격을 규명하고, 오늘의 고백신앙을 재점검하고자 한다.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칼빈의 신앙유산을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재조명해봄으로써, 한국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단초를 마련해보려는 것이다.1)



<칼빈 이해>

1. 칼빈에 대한 다양한 평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상이한 평가는 어디서나 가능하지만, 역사적으로 칼빈처럼 상반되 평가를 받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팎에서 칼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확산되어 왔다. “지옥에서 베자와 함께 있는 것이 천국에서 칼빈과 함께 있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했던 제네바의 적대자들부터, ‘손톱만큼의 관용도 모르는 냉혈한’이요, ‘개신교도의 교황’이요, ‘절대 권력을 행사한 제네바의 독재자’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다른 한편, 칼빈에 대한 추앙과 찬사도 그에 버금가게 많다. ‘개혁교회의 아버지,’ ‘개신교의 성자,’ ‘가장 완벽한 신학체계를 세운 위대한 신학자,’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꾼 선지적 역할을 할 인물’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칼빈에 대한 평가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특정한 관점과 단편적인 자료에 의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칼빈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우선 일차적인 자료에서부터 난관에 부닥치게 된다. 칼빈은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전기적인 서술을 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단편적인 언급조차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칼빈을 이해하려면 ‘역사적 칼빈’의 모습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하며, 다양한 조각들을 모아 모자이크를 제작하는 것과 같은 인내의 자세가 필요하다.

2. 교리적 해석의 문제

1)
역사적으로 칼빈의 사상은 주로 칼빈주의의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에밀 두메르그(Emile Doumergue)는 칼빈주의를 ‘칼빈의 칼빈주의’와 ‘칼빈 이후의 칼빈주의’로 구분하면서, 이 둘이 서로 일치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밝힌다. 앙드레 비엘레(André Biéler)는 “칼빈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본다면 칼빈주의는 구시대적이다. 그 이유로 칼빈이 교리적 체계를 세울 때 그것이 모든 시대에 다 적용된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고 지적한다. 비엘레가 언급하는 칼빈주의는 두메르그에 의하면 ‘칼빈 이후의 칼빈주의’라고 하겠다. 하여튼, 교리적 접근은 칼빈을 위대한 ‘교리의 조직자’로 보고, 칼빈의 신학에서 교리적 체계를 찾아내는 것으로 신학의 본분을 삼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교리적 해석의 문제는 ‘해부는 잘 했는데, 끝마치고 보니 생명이 끊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경우와 흡사해진다는 데에 있다. 교리적 해석은 자칫하면 박제품을 제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칼빈이 진실을 밝혀야만 했던 상황의 절박감, 말씀 속에 담겨진 그의 뜨거운 열정 같은 것들은 느껴볼 수 없는 것이다.
개신교 교리의 교과서라 불리는 『기독교강요』만 해도 그렇다. 칼빈이 이 책을 처음 구상한 것은 24세 때(1533), 박해를 피해 도피한 앙굴렘이라고 알려져 있다. 칼빈이 도피하고 있는 기간에 프랑수아 1세는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여 화형에 처했다. 희생자들 중에는 칼빈의 친지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칼빈은 침묵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거짓으로 법을, 재판을 진행하던 자들이, 무죄한 피 흘림의 부당성을 중상과 허위날조로 감추어 버리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힘없는 신도들을 죽이는 극악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게끔 하는 방도를 만들어 놓으려고 획책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만일 내가 거기에 강하게 대항하지 않으면, 그때 나로서는 변명할 여지없이 불성실하다고 하면서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칼빈은 박해자에 맞서야만 했다. 그는 통치세력이 유포했던 허위사실에 맞서서 진실을 밝히고, 복음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억울함을 벗겨주고자 했다. 그래서 『기독교강요』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그토록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미혹하는 자라고 부당하게 비난받고 죽임을 당해야했던 복음 전파자들의 참된 교리를 드러내려고 했다.’

2)
사람들은 칼빈을 교리적 신학자라고 생각한다. 칼빈의 신학에서 교리적 체계를 발견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칼빈이 교리중심주의적으로 사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믿음은 패러독스’라고 갈파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에서 단순하게 어느 한 면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됨을 발견했던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비극을 넘어서』에서 인간의 삶 속에 상반된 이율배반이 공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삶은 실존적 한계를 지닌 비극적인 삶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심각하지만, 동시에 그 죄를 극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이 분명하시기에, 인간의 삶은 ‘비극을 넘어서 있는 희망’으로 나아간다. 20세기의 키에르케고르나 니버의 신학적 사고에서 칼빈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칼빈은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일면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메테우스의 침대’ 이야기가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사람을 침대에 눕혀 놓고, 침대 밖으로 발이 나오면 발을 자르고, 머리가 나오면 머리를 잘라서, 침대 크기에 맞추었다. 칼빈은 프로메테우스 식으로 교리를 정해 놓고, 그 틀에 맞추어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다. 두메르그의 지적처럼, 칼빈의 사고 구조는 대립되는 것들 사이의 ‘이율배반과 상반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사고 구조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의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현실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단순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대하게 되면 자기에게 맞는 측면만을 선택하거나, 어떤 전제를 가지고 단면적으로 해석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그러한 교리 환원적 관점은 칼빈의 교리를 이해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

3. 자료의 문제

칼빈은 ‘한 권의 사람’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가 쓴 『기독교강요』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칼빈의 저작 선집을 출간한 딜렌버거(John Dillenberger)는 조심스럽게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중요한 책이기는 하지만, 칼빈의 신학과 『기독교강요』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기독교강요』를 중심으로 한 칼빈 해석이 이해만큼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이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저작을 남겼다. 우선 시기적으로 1540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출간된 ‘로마서 주석’으로부터 그의 사후에 출간된 ‘여호수아 주석’에 이르기까지, 칼빈이 집필을 계속했던 「주석서」가 있다. 닉슨(Leroy Nixon)은 칼빈이 여러 위대한 종교개혁가들 중에서 가장 적합하고, 분명하게 성서를 해석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그런데 칼빈의 주석가로서의 면모가 신학자로서의 명성에 가려져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기독교강요』는 「주석서」와 상응하여 볼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예배의식서와 요리문답서」, 「소책자와 논문들」, 수 천통에 달하는 「편지들」, 그리고 아직도 그 전부가 드러나지 않은 방대한 양의 「설교문」등 많은 자료가 있다. 그러므로 칼빈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써 다양한 일차 자료들에 대한 성실한 검토가 필요하다.

4. 관점의 문제

1) 상황적 해석
칼빈은 평화로운 시기에 마음의 평정을 갖추고 논리적 체계를 세워가며 글을 쓰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소리 없는 전쟁터 한복판에 서서,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을 직시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글을 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을 이해하려면 교리적 해석의 관점을 넘어, 그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필요하다.

2) 목회적 관점에서의 해석
칼빈의 신학은 목회 현장에서 비롯되었다. 제네바 교회에서 칼빈은 ‘목사’요 동시에 ‘교사’(doctor)의 직분을 감당했다. 올리비에 파티오(Olivier Fatio)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독재적 권력으로 막강한 정치적 힘을 행사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칼빈이 단지 ‘목사로써 목회적 성취를 통해서’ 제네바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제네바와 주변 지역의 목회자들과 함께 ‘목회자회’를 형성해서 개혁추진의 중추를 삼았다. 닉슨은 목회자로서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지적 능력, 열성적인 성격, 확고한 의지가 조화를 이룬 인물이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목회 현장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사건관련 경험을 통해서 ‘사상가요 연구가이며, 동시에 실천적인 감각과 경험을 갖춘 목회자’요,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에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씀의 전달자’가 되었다고 한다.
베자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칼빈의 설교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게가 있다.”고 고백했다. 베자처럼 칼빈의 말씀에서 듣는 이들에게 충격을 주어 변화시키는 ‘믿음의 무게,’ 반대자들이 일으키는 폭풍으로부터 개혁교회를 지켜낸 ‘확신의 무게’를 느껴볼 수 있으려면,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목회자의 관점에서 칼빈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는 아직 미미하지만, 그러나 칼빈 이해의 새 지평을 열어 주리라 기대한다.

<개혁교회의 신앙 전통>

1.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신앙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개혁신앙은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이룬 유형의 신앙이다. 종교개혁의 주도 세력을 세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개혁에 참여했지만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게 된 세력이 있다. 이들은 결국 기존 질서를 고수하는 집단 (Counter-Reformation group)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둘째,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면서 급진적인 행동을 취했으나 점차 소멸되어 버린 종파적 세력이 있다. 이들은 기존 질서의 해체를 주장하는 집단(Radical Reformation group)을 이루어, 기존 사회와는 구별된 의로운 자들만의 세상을 수립하려고 했다. 셋째, 대안적인 교회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개혁의 실체를 정착, 발전시킨 세력이 있다. ‘대안적인 교회’를 세우는 일을 주도한 집단이 바로 개혁교회이다.

1)
개혁신앙은 교권 중심적인 교회 체제를 거부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권위적 지배체계에 의해 질서 잡힌 제도화된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2)
개혁신앙은 교회가 의로운 자들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칼빈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교회로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적인 모습을 가진 ‘보이는 교회’를 중시하고 이 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 세상의 교회는 완성을 향한 도상의 교회일 뿐이다.

3)
개혁신앙은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신앙이다. 칼빈은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예배(말씀과 성례전)의 표지를 통하여 구별하고자 하였다.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참 신앙은 예배를 통하여 표현된다고 고백해왔다. 칼빈은 ‘잘못된 예배보다 우리의 구원에 더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예배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한다.

2. 신앙과 신학의 불가분리성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신학과 목회의 간격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부재론과 신학무용론에 이어서 이제는 신학유해론이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이미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었던 문제들이다.
칼빈의 신학적 진술은 그 방법론에서 중세 신학과 명확하게 구별된다. 칼빈은 신학자체의 논의를 위해 날을 세우던 스콜라신학의 방법론을 신앙에 오히려 유해한 것으로 여겼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체계를 밝히기 위해서 ‘또 다른 현학적 신학’(scholastic theology)을 전개하려고 하지 않았다. 칼빈은 철학적 변증을 채택하기보다 인문주의자들처럼 ‘원천으로 돌아가고자’했다. 그러나 칼빈의 관점에서 신앙의 고백을 담아내지 못하는 휴머니스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무용한 신학이라고 하겠다. 그가 돌아가려한 원천은 성경이었다. 성경으로 돌아간 그는 본문에 대한 교부 철학적이나 인문주의적 해석에 주력하지 않고, 쯔빙글리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성경 말씀 자체를 증거로 삼아 성경을 해석하고자 했다. 그리고 성경해석에 입각하여 신학적 사고를 전개하면서 신앙과 신학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입증하였다.
‘개혁신앙’의 관점에서 더욱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신학부재론이다. 신학이 부재한 교회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신앙은 신앙과 신학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신학은 ‘내가 믿는 것’을 바르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신앙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신학무용론은 한국 교회의 오랜 관행이기도 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종종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참된 설교가들에게는 신학이 무용지물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 교회 현장을 둘러보면 그저 말 잘하는 사람만을 찾는 세상 같습니다. 오늘 일반적으로 말 잘한다는 목사를 보면 자기의 인격생활을 배경으로 하거나,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신학을 기초로 한 설교라기보다는 대부분 교인들의 저급한 감정을 이용하여 흥미본위의 즉흥적 설교를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로는 교인들의 신앙을 건전하게 지도한다거나 훈련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중심점이 없고 애매하고 철저하지 못한 설교를 하면서, 교회 진흥운동을 한다고 농촌운동, 종교교육운동, 문화운동 등을 말하지만, 이런 것만 가지고 교회가 참으로 진흥되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교회 부흥 혹은 발전책이 있다면 교회의 강당문제 여하에 있습니다. 진정한 설교는 반드시 역사적 공동체적 신앙경험에 터를 다져야 합니다. 참된 설교가가 되려면 당연히 신학자로서의 설교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 설교가와 신학자는 똑같이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과 기독교의 역사적 신앙의 터에 닦고 그 위에 버티고 선 엄연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 있는 설교는 신학자에게서만 들을 수가 있고, 참된 신학은 진정한 설교가의 입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상의 인용은 1933년, 평양 산정현 교회를 목회하던 송창근 목사의 설교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송창근 목사는 당시 한국 교회 안에 이미 편만해 있던 신학무용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개혁신앙은 신학무용론을 극복하고, 신앙과 신학의 상호연관성을 재인식해야할 것이다.

3.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신학

칼빈이 1536년 8월, 파렐에 붙잡혀 제네바에 머물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신학적인 필요 때문이었다. 당시 제네바에는 여러 개혁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1531년부터 간헐적으로 복음을 증언해 왔으며, 그 결과로 인해서 제네바는 1536년 5월, 종교개혁을 받아들이는 공식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도시가 된 지 석 달 만에 제네바 교회는 혼돈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열정적인 설교가였던 파렐은 무엇이 필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제네바가 칼빈을 다시 부른 주된 이유도 신학적인 필요 때문이다. 칼빈이 떠난 제네바가 맞닥뜨린 것은 잃어버린 영역을 회복하기 위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개혁의 도전이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뛰어난 신학자중 하나였던 사돌렛(Jacopo Sadeleto)을 내세워 제네바를 다시 로마 교회의 영역에 포함시키려 했다. 사돌렛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제네바 인들은 결국 자기들이 추방했던 칼빈으로 하여금 ‘사돌렛에 대한 답변서’를 작성하도록 요청했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를 대표하여 불과 엿새 만에 답변서(Reply to Letter by Cardinal Sadolet to the Senate and People of Geneva)를 써서 사돌렛의 논지를 효과적으로 반박했다. 결국 제네바 교회는 칼빈을 다시 부름으로써 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교회를 바로 세우게 되었다.

1)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면 신앙과 신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칼빈은 참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신앙(공동체의 신앙고백), 신학(개혁신앙의 본질을 밝힘), 그리고 규례(교회의 조직과 생활의 틀)이다.

2)
개혁신앙이 올바로 고백되려면 신학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칼빈은 신학이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I.xiv.4). 그래서 ‘믿음은 신학적 이해에 의해서 정리되고 성숙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믿음은 잠깐 꽃을 피우고는 곧 시들어 버리고 말 것’이라고 한다.

3)
종교개혁 교회는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상황에 놓여있었다. 로마 가톨릭,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개혁신앙을 갖지 않은 자 등을 향해서 개혁 교회의 입장을 밝혀야 했다. 개혁세력을 고대의 이단교설, 극단적인 무정부적 재세례파, 또는 도덕적 관용주의자와 동일시하려는 비판들에 신학적으로 맞서야 할 필요도 있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공통의 기반을 확인해야 했다. 이런 다양한 전선에 직면하여 칼빈은 개혁신앙의 고백으로써 『기독교강요』를 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처럼 신학자를 대상으로 쓴 신학서가 아니다. 그의 말처럼, 개혁의 전선에 서 있는 신앙인들이 ‘개혁신앙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섬으로써’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도록 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4.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한 신학

개혁신앙의 전통에서 신학은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 필요하다. 칼빈이 평생토록 정성을 기울인 관심사 중 하나가 개혁교회의 일치이다. 그는 다양한 개혁교회 사이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신학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서로 다른 교회 사이에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각자의 믿음에 대한 신학적 진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적 사고를 집약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신앙교육서』(Catechism, 1537, French edition)의 서문에서 이러한 신학적 표현이 ‘다른 교회들에게 우리 믿음의 진실성을 밝히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라틴어 판(1538)에서는 ‘모든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를 포용하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우리의 『신앙교육서』를 통해서 우리와 다른 교회와의 연합이 더 분명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5. ‘근본적 일치’에 대한 믿음

칼빈은 서로 다른 교회 사이에 제도적인 일치보다 신학적인 일치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한 신학적인 일치는 서로 다른 신학적 차이를 통합하여 하나의 신학을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신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각자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 간격을 좁히는 작업을 시도했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에게 있는 표현의 차이를 넘어서는 본질적인 차원의 일치가 있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 ‘근본의 일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칼빈의 신학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칼빈은 평생토록 개혁교회를 지켜내기 위해서 적대자들과 끊임없는 신학적 논쟁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종교개혁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신학을 점차 보완해 나갔다. 종교개혁의 제2세대로서 칼빈은 루터, 쯔빙글리, 멜랑히톤, 그리고 부처 등, 그보다 앞선 세대의 신학적 업적을 토대로 칼빈은 ‘종교개혁 신학의 종합판’이라고 불릴 수 있는 개혁신학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다.2)
칼빈의 인간관계는 ‘근본적 일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칼빈은 상대방이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 한, 그가 앞서 관계를 단절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상대와의 신학적 차이는 근본적인 걸림돌이 될 수 없었고, 꾸준한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칼빈의 ‘신학적 폭’은 그가 어떤 자세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반영하고 있다. 칼빈은 자신이 결코 뜻하지 않았던 개혁자의 삶을 살도록 했던 파렐(Guillaume Farel)과 평생토록 신실한 관계를 유지했다. 파렐은 20년이나 젊은 칼빈을 존경하는 동료로써 대했다. 파렐과 함께 제네바의 개혁을 선도했던 비레(Pierre Viret)는 칼빈의 가장 가까운 평생 친구가 되었다. 제네바에서 쫓겨나서 스트라스부르로 도피한 칼빈은 그곳에서 부처를 만났다. 칼빈보다 거의 20년을 앞선 부처는 일찍이 ‘하이델베르그 논쟁(1518)’에서 루터의 주장에 영향을 받고 개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칼빈은 그를 목회적 조언자요 신학적 선생으로 삼고, 평생토록 돈독한 우정관계를 유지했다. ‘예정론, 교회 조직, 교회일치’ 등에 관한 칼빈의 주장은 부처의 견해를 깊이 반영하고 있다. 칼빈은 루터와 직접 만난 적이 없었지만, 루터의 신학을 높이 평가했다. 칼빈은 불링거(Heinrich Bulling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일 루터가 나를 악마라고 부른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존경할 것입니다”라는 말로써 루터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칼빈은 루터의 후예 멜랑흐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훗날 루터파와 칼빈주의자 사이에 좋지 않은 감정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칼빈과 멜랑흐톤은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로 남았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마르부르 회담(1529)에서 루터와의 사이에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성찬에 관한 견해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쯔빙글리의 후예 불링거(Henry Bullinger)와의 삼년에 걸친 대화를 통해서 성만찬에 관한 의견의 일치를 이루어 내었다. 그 결과가 ‘취리히 합의’(Consensus Tigurinus 또는 Zurich Consensus, 1549)이다. 이 토대 위에서 이른바 ‘성만찬에 대한 개혁교회적 이해’가 생겨났다.

<칼빈의 신앙유산과 한국 교회의 과제>

‘고백신앙’은 ‘개혁하는 교회’의 신앙이다. 칼빈의 신앙적 유산이란 관점에서 고백신앙의 특징을 몇 가지 찾아본다. 첫째, 본질에 대한 물음을 놓치지 않는 신앙이다. 둘째, 믿음과 믿는 대로 행함의 일치를 지향하는 신앙이다. 셋째,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아는 신앙이다. 넷째, 교회 공동체를 토대로 믿음을 실천하려는 신앙이다. 이 마지막 항목과 관련하여 교회의 본래성과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한국 교회에 영감을 주는 칼빈의 신앙유산을 밝혀보고자 한다.

1. 본질에 대한 물음

우리 사회는 가치관의 혼돈 상태를 겪고 있다. 점차 물질만능적인 가치관이 팽배해져가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오늘의 사회가 직면한 혼돈을 극복할 수 있는 비전과 올바른 가치관을 교회에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는데 있다.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버렸고, 더 나아가 그 대변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고백신앙을 회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백신앙은 본질적인 문제에 관해서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는 신앙이다. 고백신앙은 존재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삶의 본질을 ‘하나님께 영광돌림’에서, 신앙의 본질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구하고자 한다. 고백신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대상에서 무엇이 본질(몸체)이고, 무엇이 겉으로 드러난 현상(몸짓)인가를 식별하기 위하여 영적으로 깨어있을 것을 요청한다.3)

1) 신앙적 본분의 확인
칼빈이 본격적인 신학 저작을 하게 된 근본 동기는 개혁신앙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강요』 초판(1536) 서문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제네바 교회를 맡은 칼빈은 개혁교회의 신앙원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급히 ‘강요’ 초판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첫 번째 『신앙교육서』(Catechism)를 출간했다. 이 ‘교육서’의 첫 번째 항에서 칼빈은 ‘우리 인생의 주된 관심과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는 것,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2) 교회의 본분
교회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교회 현실은 치열한 경쟁의 터전이 되어있다. 목회적인 성공을 기대하게 하는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에 의존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근본에서 멀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 본질에 대한 물음을 슬며시 내려놓게 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도구로 전락한다. 교회적으로 목회 윤리의 문제가 진지하고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됨의 본분을 재확인하고, ‘두 주인’을 섬기지 않겠다는 고백신앙을 회복해야 한다.4)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코페루니쿠스처럼 칼빈은 중세적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바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밝힌 것이다. 칼빈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처럼, 인생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갈파했다. 칼빈의 이러한 주장은 중세 시대에 잊혀져온 ‘하나님의 영광’이란 원리를 신앙의 우선적인 원리로 복구한 것이다.  칼빈은 1542년의 ‘제네바 교리문답’을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우리를 창조하셨고, 세상에서 살게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주인이요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아낌없이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돌림’은 칼빈의 사상을 상징하는 용어로 이해되어왔다. 1909년, 칼빈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뒤메르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저는 이 말씀으로 기념식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바로 종교개혁자 칼빈의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인생의 가장 우선되는 목적에 집중하기 위해서 부차적인 것들은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Deo Gloria!’”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사상은 개혁자들이 직면해야 했던 16세기의 대립과 박해라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광을 받으실 대상이 교회와 교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믿음 때문에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증인들을 옹호하기 위한 증언인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자신의 전체 신학을 개괄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지만, 일반적으로 그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이란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루터 신학의 틀을 빌어 표현하자면, 칼빈은 ‘십자가의 고난’의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말 대신 몸으로 증언한 인물이라고 하겠다.

2. 믿음과 삶의 일치

고백신앙은 믿음과 행함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신앙이다. 판 엇 스빼이꺼르(Willem van’t Spijker)는 칼빈을 한 사람의 진실한 신앙인으로 이해하게 될 때 “마음과 정신의 일치뿐만 아니라, 지식과 믿음의 일치를 통해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봉사하기를 갈망하는 삶을 사는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정신에 따라서 믿음과 삶이 하나여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칼빈주의의 등장에 기여한 인물이 에임즈(William Ames, 1576-1633))이다. 호튼(Douglas Horton)은 에임즈를 “생활과 격리된 그 어떤 신학도 거부했으며, 말씀의 실천을 주장한 신학자였다.”고 평한다. 에임즈는 청교도신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교회 신학의 정수』(The Marrow of Theology)에서 ‘경건하고 올바른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봉사하며 영광 돌리는 것이 신앙인이 행할 마땅한 도리임’을 철저하게 강조했다. 에임즈는 신학을 “하나님을 향한 삶, 또는 하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정의한다.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삶’은 ‘올바른 삶’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다.

1) 신앙생활과 일상적인 삶의 목적이 같다
중세 교회는 교회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에 대하여 일종의 이중적 기준을 적용하고 있었다. 성과 속은 구별되었고, 신앙규범은 교회 내적 삶의 영역에 한해서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반면에 개혁교회는 중세 교회의 이원론적 신앙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영역을 교회를 넘어 온 세상에로 확장하였다. 개혁신앙은 교회의 영역에 속한 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하는 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고백한다.5) 세상적인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는 루터의 소명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러한 신앙 유형을 막스 베버는 “이 세상적인 금욕주의”라고 정의했다.

2) 믿음은 실천과정에서 우선순위에 대한 선택으로 드러난다.
목적의식이 없는 삶은 해야 할 일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필요가 없다. 고백신앙은 믿음을 실천함에 있어서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차선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책임적이고 분별력 있는 신앙이다.

3. 일상생활의 소중함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시작에서 소위 ‘이중지식’에 관해 언급한다. 인간의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중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 양심이다. 칼빈은 신앙이 바로 서려면 ‘이중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신앙을 잘못된 생각에서 구별해내기 위해서 반드시 신앙과 지식이 결합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은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은 ‘이중지식’을 필요로 한다.
칼빈은 단지 성경을 통해서 ‘머리로 아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없다고 보았다. ‘성경에서 얻는 지식’과 ‘일상적인 사건의 경험에서 얻는 지식’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려면 ‘경험을 통한 지식’에 도달해야 한다는 칼빈의 말은 ‘이중지식’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느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칼빈을 ‘경험 신학’의 아버지라고 평하기도 한다.
칼빈은 ‘가장 좋은 신앙의 훈련은 일상적인 우리의 경험’이라고 확신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느낌이 우리에게 경건을 가르쳐 주는 유일하고 적절한 교사이며, 거기에서 신앙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확실한 신앙의 단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경험적 용어를 사용한다. ‘실천과 경험 속에서 얻어지는 지식은 교만한 사변보다 훨씬 더 확실하다.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실하게 알고, 손으로 만진다. 거기에서 자신이 살아나고, 깨닫고, 구원받고, 강해지고, 성화되는 것을 느낀다.’고 했던 것이다.

4.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믿음

1) 성령 체험의 윤리성
한국 교회는 일반적으로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고, ‘성령체험’을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체험을 중요시하는 신앙관은 교회의 양적 성장에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상응하는 질적 성장을 이루려면 성령체험의 윤리성과 교회적 훈련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칼빈을 이성적으로 철저한 논리체계를 세운 신학자로 이해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칼빈의 신학은 성령의 활동하심에 기반을 둔 신학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비밀을 이성으로 알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신앙적으로 참된 스승은 성령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칼빈에게 하나님 중심은 곧 그리스도 중심이다. ‘강요’ 3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우리와 그가 하나가 될 때까지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어떤 것도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려면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칼빈에게는 성령의 역사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 ‘신앙’이다. 칼빈은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 맞춘다.”(III.ii.8)고 정의한다. 신비적 표현이다. 성령의 관점에서 신앙생활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거룩하고 신비한 교제’이다.

2) 성령 체험과 성경의 말씀
칼빈은 성경과 성령을 동전의 양면처럼 이해했다. 온전한 믿음은 성경 말씀의 조명과 성령의 인도를 필요로 한다. 개혁교회는 개인의 신앙 체험을 중시하지만, 그러나 개인의 체험이 말씀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며, 말씀의 능력이 개인의 체험을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칼빈은 성령의 증거는 ‘성경에 의해서 검토되어야 하고, 성경에 속해야 한다.’(I.ix.2)고 주장한다.
칼빈에 의하면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비밀을 명백하고 확실한 지식으로 가르치는 스승’이다. 이러한 성령의 ‘은밀한 활동(내적 조명)’에 의해서 우리는 지적인 깨달음을 넘어서는 더욱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고, 믿음의 교리적 가르침은 우리의 마음속에 확신으로 새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신도들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말씀에 의해서 성령의 증거를 판단함으로써 되 물림이 없는 신앙의 성숙한 단계의 이르도록 훈련해야 한다.

3) 신앙적 절제
한국 교회에서는 간증집회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 간증의 주요 내용은 마치 무용담과도 같은 개인적인 체험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있다.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개인적인 신앙 체험을 드러내는 일에 절제가 필요하며, 그럼으로써 공동체에 덕을 세우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의 본이 되도록 훈련해왔다.
칼빈이 종교개혁에 헌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회심 체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칼빈의 회심에 대해서, 그가 언제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칼빈은 자신의 회심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의 글 두 곳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539년에 쓴 「사돌렛에게 보내는 편지」와, 1558년에 쓴 「시편 주석」 서문이다. 그렇지만 그 내용조차도 절제되어 있으며 모호하기만 하다. 이러한 문제를 장 카디에는 칼빈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관계된 것은 알리지 않은 채 내버려 두도록 했다고 해석한다. 칼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떻게 회심이 일어났느냐?’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결과로 그가 ‘어떤 일을 하게 되었고,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5. 교회의 본래성

칼빈은 교회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 땅위의 교회는 ‘하나님의 제도’이자, 동시에 ‘세상 사람들의 단체’이기도 하다. 칼빈은 이 둘 사이의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온전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에 기초한 공동체적 신앙고백과 더불어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한 규범적 지침이 결합되어야 한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신앙고백과 규범적 지침에 대한 합의에 근거한 계약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어떤 특정 세력이나 집단이 주도하는 조직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민주적 참여에 의해서 체계를 갖추게 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1) 모성적 이미지의 교회론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내적인 부르심’에 있다. 칼빈은 교회가 ‘선택받은 자들’만으로 구성된 공동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누가 선택받은 자인지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뿐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기 백성을 은밀하게 부르셔서, 품에 안아 주시는 분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안아 주시는 품이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the visible church)의 본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어머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어머니이다. 그는 “어머니(교회)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고, 가슴에 안아 젖을 먹여 기르고, 육신을 벗을 때까지 안내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칼빈의 교회론에는 어거스틴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우선 기독론적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교회가 강조된다. 다른 한편, 어거스틴은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다양한 여성적 이미지로 교회를 표현한다. ‘참 어머니,’ ‘그리스도의 신부,’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여왕,’ 그리고 ‘순결한 동정녀’ 등의 그것이다. 여성적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그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전파되므로, 교회의 사명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낳고, 양육하는 것이다.’고 설명한다. 이어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를 통한 거듭남을 교회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우리의 첫 출생은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두 번째 출생은 하나님과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고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을 통해서 우리는 칼빈이 로마 교회의 교황 중심적인 교회론을 철저하게 부인하면서도, 모성적 이미지로서의 교회론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교회의 공동체성을 밝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2) 새로운 피러다임의 교회 리더십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리더십은 가부장적 리더십이다.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해내는 카리스마가 리더십의 전형으로 인정받아왔다. 목적 지향적이고 권위주의적 성격을 지닌 가부장적 리더십은 내적 갈등을 치유하기보다 증폭시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 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수많은 갈등과 분열의 상처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차가운 이미지와 다르게, 실제의 칼빈은 어린 소녀의 심성과도 같이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섬세한 심성은 인간관계에서 잘 표현되었는데, 그 사실을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이 그의 편지이다. 약 이천 통에 달하는 칼빈의 편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편지들에서 우리는 인간 칼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칼빈의 여성적 감성은 그의 목회관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루터의 교회론에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공동체”란 개념이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 교회의 성격이 ‘선포와 들음’이라는 남성적인 관계로 규정된다. 반면에 교회를 ‘품에 안아, 젖을 먹여 양육하는’ 여성적(모성적) 관계로 생각했던 칼빈은, 제네바 교회의 목회 기간 동안 수많은 갈등에 휩쓸렸지만, 자기의 힘을 내세워 상대를 해하기보다 차라리 ‘나를 죽이라’는 희생의 자세로 일관했다. (cf. 고전 3:2; 살전 2:7)
종교개혁의 교회는 칼빈의 여성적 감수성에 기초한 리더십 덕분에 큰 분열을 방지할 수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참여자들은 나름대로 대단한 개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런 인물들 사이에서 견해의 차이를 조정하여 일치를 이루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개혁자들 사이의 신학적 차이를 치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하여 갈등의 원인을 규명해 내면서, 다른 한편, 개별적인 차이를 넘어 본질적 일치를 확인함으로써 서로 화합하게 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여성적 감수성을 내포한 목회자 칼빈의 모습에서 우리는 21세기 교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리더십, 화합과 치유와 생명 살림의 리더십의 전형을 발견하게 된다.

3) 교회의 직제는 도구적 수단이다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특정 직분을 성경의 직분과 문자적으로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 전통에서 교회의 직제는 근본적으로 교회적 필요성에 의하여, 그리고 상황의 특성을 고려하여 제정된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두 해 만에 추방당했다.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칼빈과 파렐에게 불과 삼일의 말미를 주고 제네바를 떠나게 했던 것이다. 쫓겨나서, 파렐은 뉘샤텔로 갔고, 칼빈은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프랑스 망명자 교회의 목회자가 된다. 그런데 스트라스부르에서 비로소 칼빈은 목회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삼 년이 가지 못해서 제네바는 칼빈을 다시 필요로 하게 되었다. 1541년,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가서 먼저 한 일이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 조례”를 통해서 교회의 조직을 위해서 필요한 네 가지 직분을 제시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접했던 부처의 직제론이 시 의회가 주도하는 제네바 체제와 조화를 이루는 교회적 직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직분을 성경적인 직분이라고 한다. 여기서 ‘성경적’이란 성경에서 그 직분을 문자적으로 명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직분의 역할과 기능의 범위가 성경이 제시하는 바에 따른다는 의미이다.

6. 교회의 사명

1) 온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
한국 교회는 일반적으로 교회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을 구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교회는 개인적이고 영적인 구원의 문제를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서 보면, 개혁교회와 루터파 사이의 신앙적 차이가 드러난다.
루터의 개혁은 세속 통치권이 상대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상황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체계를 구축하는 문제가 시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칼빈은 루터파와는 상반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의 지배가 종식된 이후 극심한 사회적 혼돈을 겪고 있는 제네바의 상황에서 사회적 질서의 수립은 시급한 과제였다.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맡겨진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은 곧 세상 질서의 틀을 갖추는 과정이기도 했다.
칼빈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칼빈이 국가에 대한 교회의 지배를 생각한 것은 아니다. 칼빈은 교회의 통치(ecclesiocracy)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theocracy)를 믿었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를 지배하지 않는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지원적인 관계이지만, 서로 독립적이다. 통치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교회의 지도자나 세속 통치자나 모두 그들의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직접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기초해서, 칼빈은 교회가 국가에 대해서 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교회는 국가와 그 기능에 대해서 성서적 가르침을 제시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칼빈은 국가가 영적인 문제에 개입하려고 할 때, 교회는 불복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데 동의했다. 자신의 조국 프랑스의 개신교 박해 상황에 대해서 늘 안타까워하던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세속 권력의 남용의 문제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사회를 전복하는 반란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점차 폭군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한 저항이 일반 시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치자에게 저항할 권리를 갖고 있는 공적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강요』 첫 판에 표현되었고, 마지막 판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베자는 칼빈의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켜 타락한 세속 권력에 대한 신적 거부 사상을 분명하게 밝혔다. ‘바돌로메 축일의 학살’(1572)을 목도한 베자는 ‘낮은 지위를 갖고 있는 이들도 세속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주장을 펴게 되었다.

2) 온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
한국 교회 현실에서 사회복지에 관한 관심이 급속히 증대하고 있다. 개혁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인 변화라고 하겠다. 교회를 섬기는 일과 세상을 섬기는 일을 통합해 낸 개혁교회의 발전은 제네바 사회에 실질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빈곤 계층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던 것이다. 칼빈의 경제 사상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주목할 만하다.

3) 소외된 약자와 함께하는 교회
칼빈은 교회를 통해서 함께 나누는 친교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교회는 사회적으로 특권을 지닌 사람이나 소외된 사람, 그 누구도 동등하게 인정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특히 칼빈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와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을 강조했다. 칼빈의 의지를 반영하여 제네바 교회는 사회 복지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나아가 제네바 시로 하여금 복지체계를 갖추는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칼빈은 죽기 5년 전까지 제네바의 시민권을 받지 않았다. 생애의 대부분을 망명자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칼빈은 이방인으로써 겪는 인생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국 사회에도 외국인 이주민들이 급증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사회적으로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화, 인종적 차이가 사회적 갈등의 또 다른 요인이 되지 않도록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한 교회 공동체의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마무리>

가장 분명한 역사의 교훈은 “누구나 역사를 논하지만, 역사로부터 배우려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에 담겨 있다.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새로운 목회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새로운 목회적 리더십은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얻어지는 리더십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전통의 어깨를 딛고 서서, 역사적 지혜를 바탕으로 더 멀리 내어다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갖춘 리더십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칼빈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오늘 한국 교회의 미래를 전망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제네바 교회의 목회자로서 칼빈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목사로서 거의 대부분의 시기에 걸쳐 그는 목회 영역의 자율권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신과 견제에 시달렸다. 예를 들어, 칼빈 자신은 성찬을 예배의 일부로써 가능하면 자주 드리려고 했지만, 그러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가톨릭 교회의 유산이 깊게 남아있는 상황에서 성찬을 자주한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정체성에 문제가 된다고 주장하는 시 의회의 현실 논리가 우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목사로서 칼빈은 목회권의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맞섰다. 1554년에 일어난 베르틀리에(Philibert Berthelier) 사건은 그 중에 한 예일 뿐이다. 칼빈은 의회의 결정에 맞서서, ‘주님의 성찬을 부끄럽게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기를 결정한다. 백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그렇게 부끄러운 일에 관련시키지 못한다.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선언했다. 칼빈이 목회적으로 필요한 권징의 권한(교회의 고유한 권한)을 행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칼빈은 1541년부터 제네바 교회를 다시 목회를 하게 되었지만, 15년이 지난 155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분적으로나마 교인의 신앙 훈련과 권징의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와 시 의회 사이에 ‘권징’으로 인한 갈등은 그가 죽는 날(1564년)까지 계속되었다. 칼빈은 ‘가벼운 잘못과 중대한 잘못,’ 그리고 ‘위반과 범죄’를 구분했다. 그리고 권징의 목적은 잘못을 엄격하게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말씀으로 책망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교회의 다수는 더 이상 귄징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칼빈은 말씀 앞에서 진실한 목회자였다. 그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시인했다. 성경을 주석하면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모르겠다고 인정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주석’의 1장 11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문제들을 논하면서,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문제는 해석하지 않고 생략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말로 마무리한다. 그는 성서의 거의 전 부부에 대해서 강의하고 주석했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경우, 요한계시록은 손을 대지 않고 남겨두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고백했다.
칼빈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자신을 공동묘지에 묻고 묘비도 세우지 말 것을 엄격하게 당부했다. 그는 자신의 묘가 추종자들에 의해서 일종의 성지처럼 여겨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에 그랬다. 오늘날 그의 묘지 자리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제네바 공동묘지에 있는 현재의 묘지 자리는 단지 추정일 뿐이다.)
칼빈에게 목회자의 삶은 ‘자기 부정’의 삶이었다. 쫓겨난 지 3년 만에 제네바의 요청을 다시 받았을 때, 그는 정신적인 압박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끔직한 멍에를 다시 메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네바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백번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결국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다.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라고 여겼기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로 했던 것이다.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빈은 ‘나는 내 자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나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해 있습니다.’라고 자기 부정의 고백을 한다. 『기독교강요』 3권 7-8장은 신앙인의 삶을 ‘자기 부정’의 삶으로 정리한다. 제네바를 향하는 칼빈은 “내 심장(마음)을 죽여서 주님께 희생 제물로 바칩니다. 내 영을 묶어서 하나님께 복종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래서 칼빈의 인장에는 “두 마음 없이 진실하게”라는 라틴어 경구와 함께 ‘불타는 심장을 들고 있는 손’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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