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8) 교갱협 제13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사무엘상 2장 12~17절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초심을 잃어버린 한국교회

교갱협은 교단의 뜻있는 목사님들이 결성하여 지금까지 좋은 활동을 많이 해오고 있는 단체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 시간에 제가 어떤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릴까 하다가 ‘한국교회가 개혁할 일’이란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고자 생각했습니다. 교회갱신협의회는 부조리를 항상 갱신하고 개혁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세교회의 일탈을 성경이 가르친 교훈대로 바로잡고자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당 문에 게시함으로 종교 개혁의 불길이 점화된 게 우리 개신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한국교회가 개혁할 일에 대하여 우리 함께 생각하고 기도해 보고자 합니다.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로서 세습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저지른 죄악들이 근년에 한국 교회 모습과 유사한 듯하여 이런 일들을 통회하고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인 동시에 제사장 신분을 가진 사람들인데도 성경에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고 말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요, 자신들이 제사장인데 불량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를 보아 우리 성직자들이 타락하면 인간 쓰레기 불량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되고, 교회를 오도하고 오염케 하는 주범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잘못할 때 그 가장 큰 책임은 성직자인 우리 목사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까닭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치가 제일 중요한 만큼 교회가 잘못된 데에 대한 책임도 제일 많이 져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과연 잘 하고 있는지를 돌아볼 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외형만 놓고 보면 종교개혁 시대의 카톨릭 교회처럼 그 사회 주류 세력이 되어 있습니다. 교세, 물질, 권력 등 한국교회가 보유하고 있는 그 외형은 엄청납니다. 그러나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기득권에 안주하게 되었습니다. 신앙과 성경 외적인 인본적이고 물량적이고 세속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짐으로 그 일탈이 위험수위를 넘나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도가 넘어가고 있구나. 한국교회가 제동이 걸리지 않고 이 상태가 그대로 나가다가는 어디까지 가겠는가' 하는 위기감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경각심을 가지고 뜻있는 성직자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이 개혁해 나가지 않으면 비탈길로 내리달아 갈릴리 바다에 빠져 몰사한 2천 마리의 돼지 떼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절히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과연 한국교회가 개혁할 일들이 무엇인지 홉니와 비느하스의 경우를 들어 세 가지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예배의 속화를 개혁하라

첫째, 예배의 속화를 직시하여 개혁을 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에 홉니와 비느하스에 대하여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지은 죄가 너무 큰 것이 무엇이냐, 여호와의 제사를. 예배를 멸시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세습 제사장으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냥 물려받았고, 자기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제사장의 아들들이 현재 제사장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이것이 그때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신도들 가운데 제사를 드리러 와서 그 제물을 드릴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쇠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냄비와 솥과 가마에 찔러 넣고서 고기를 끄집어 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제사장이 이것을 먼저 가져다가 먹었습니다. 심지어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제사장에게 구워드릴 고기를 내라고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서 가져 왔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제사장이라면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신전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월권인 동시에 제사법에도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인본적이며 탐욕적인 것이었습니다.

원래 화목제물인 경우에 제사장의 분깃은 그 제물의 가슴과 뒷다리입니다. 그 과정은 기름을 여호와께 불살라 바치고, 그 다음 가슴을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뒷다리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 후에 이것들을 제사장의 몫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제물을 드린 신도, 제주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기름도 태우기 전에 날 것으로 구워먹겠다고 그냥 가져가고, 가마솥에 있는 것을 쇠살 갈고리로 찍어 꺼내어 가져가서 먹었습니다.

더러 제주가 바른 격식의 제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께서 가져 가십시오. 격식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강압하고 빼앗다시피 해서 기어코 자기들이 먼저 가져 갔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능멸하는 행위를 제사를 받든다는 제사장들이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하고 있으니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법한 일이 아닙니까?

성경에서 여호와를 만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에는 제사장들이나 신도들이 자신을 성결케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불경스러운 일이 생기면 여호와께서 충돌하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세기 후반에 태동한 청교도 운동이 처음 시작할 때 주요 의제가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성경 중심의 예배의 순결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는 예배에서 많이 일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들의 축제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문화란 이름을 덧씌워 사람들을 흥겹게 하는 공연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문화를 통한 선교,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것은 하나님께 더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지, 사람들 기분 맞추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일 뒤로 밀려나 있거나 다른 프로그램이 받쳐주지 않으면 추락해 버릴 만큼 점점 더 위상이 떨어지고 밀려나고 있습니다.

영감과 활력과 감동은 예배에 필수적입니다. 영감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활력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감동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위적인 게 지나쳐서 공연이 되고, 오락이 되면 예배의 신비감이 없어집니다. 예배의 거룩성이 없어집니다. 예배의 신령성이 없어집니다. 예배의 속화와 타락으로 추락합니다. 그래서 얼마만큼 그 예배를 더 돋보이게 하느냐, 그 정도를 잘 측정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기분과 감정에 맞추는 오락이 되고 맙니다. 공연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개신교가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고 가톨릭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요인이 그렇습니다. 개신교가 너무 세상을 따라 가다가 종교의 본질적인 면을 많이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진지한 사람들이 세상과 너무 비슷하게 나가는 개신교에 매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주교로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단기적인 이득을 위해서 장기적인 개신교 이미지가 추락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저는 대형 교회에 대하여 무조건 좋다고도, 무조건 나쁘다고도 하지 않는 입장입니다. 대형 교회가 기여하는 요소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하면 폐단도 조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단에도 훌륭한 대형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단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표성을 가진 교회들이 이미지까지 좋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거 같으면 그 이상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정적인 폐단이 생길까 봐 항상 절제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구석에 있는 교회가 잘못되면 그것은 크게 영향이 없지만, 대표성 있는 교회가 잘못되면 한국 개신교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대형 교회는 그 잠재력이나 지명도나, 자연발생적 성장 요건 때문에 아무 제약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이미지가 잘못되면 전체 교회가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어느 선까지가 한국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는 것인가? 그것을 잘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형 교회들이 각종 프로그램을 양산하고 또한 엄청난 물질을 투자해서 외견상 대단히 화려하고 일류 예술단 못지않은 공연도 할 수 있고 또 보여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교회들은 그것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잘 선별해야 합니다. 일반 교회는 자기 교회 재정 전체를 투자해도 어설픈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오늘날 영상매체를 통해서 세계적인 공연을 다 보고있는 사람들의 안목이나 수준이 높아져 있기 때문에 충족을 못 시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게 오락적으로 하자, 좀 더 특별한 것을 하자는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별별 짓들이 다 나오는 겁니다.

오늘날 교단 헌법이 정한 예배 교범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제가 총회장 되기 얼마 전에 총회에 한 번도 안 나온 사회 지도층에 있는 어떤 장로님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제가 고등부 때 지도했던 학생이었습니다. "목사님, 한국교회 예배를 좀 바르게 잡아줄 수 없겠습니까?" 그래서 "말은 좋지만, 전체가 그렇게 나가는데 그 대세를 나 혼자 바로잡기에는 참 어렵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에 따라 적정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적정한 변화의 범위를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게 하나님의 예배인지 사람들의 놀음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예배를 여호와를 능멸하는 그런 자리로 만들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성경을 보면 헤롯왕이 두로와 시돈 백성 앞에 연설할 때에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 사람의 소리가 아니로소이다" 하니까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못하고 자기가 마치 하나님인양 받아 챙기려다가 괘씸하게 여긴 하나님이 치시니 충이 먹어 죽었노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고넬료가 자신의 집에 초청하고 그 앞에 하나님을 뵙는 것처럼 엎드려 맞이할 때에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다" 라며 신격화 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내려주신 말씀을 듣고자 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루스드라 전도에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치니, 그 성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이라 하여 제사장은 소와 화관을 벌여놓고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바울은 '허메신', 바나바는 '쓰스신'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무슨 망발이냐!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인간이다" 라며 신격화 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가로막고 서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윤리의 부재를 개혁하라

둘째, 윤리의 부재를 직시하여 개혁을 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 22절에 홉니와 비느하스에 대하여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자기 아들들이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회막문에서 일하는 여자들과 동침한 사실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저지른 온갖 비행 중에는 사욕과 더불어 성적인 문란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원하여 회막에서 제구를 씻는 등의 일로 봉사하는 여인과 동침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고 받드는 제사장들이 얼마나 성결해야 하는데, 그들의 월력으로 7월 12일 대속죄일에는 지성소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이런 제사장들이 회막문에 시중드는 여자들과 동침하는 것을 예사롭게 하니 이것이 될 일입니까?

무릇 고등 종교는 반드시 윤리의식과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등 종교는 영험만 있으면 됩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는 영험만 나타나면 됩니다. 그들이 음란 행위를 해도 무슨 잡짓을 해도 탓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등 종교는 반드시 윤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식도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교훈은 신앙과 윤리를 병행하여 조화를 이룹니다.

그런데도 홉니와 비느하스, 이 불량한 제사장들은 신앙이 없으니 윤리의식도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의식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시선, 소문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가 가진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의식만 가지고 맘껏 행사하고 누리고 즐길 뿐이었습니다. 도덕과 윤리, 신앙과 양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못하는 자가 바보, 무능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역자들 가운데서도 내가 가진 특권을 맘껏 향유하는 자가 똑똑한 사람이고 희생하고 고난받는 사람은 지지리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 양상이 홉니와 비느하스를 닮아 갑니다. 우리가 곤궁하고 약자였던 시절, 핍박받던 시절에 가졌던 경건성과 도덕성을 상실하였습니다. 8.15 해방을 맞을 때 남북한 동포가 3천만 명인데, 한국 개신교인이 50만 명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교인들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공신력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5천만 명 남한 동포 가운데 천 만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만, 신뢰와 존경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본받기 보다는 내가 상류사회에 편입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보다는 지도자, 경영자로서 목이 뻣뻣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교회의 겉모습은 화려하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속적인 힘을 가졌으되 신령한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신뢰와 존경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성자형 목회자가 제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자형 목회자가 존경받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의 제일 중요한 수행하는 일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성직자들이 얼마나 수행에 힘쓰는가? 성도들 앞에 성직자다운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수행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인품, 그 생활 자체가 설교가 되고, 그들을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되는 그런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등한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능률을 올리느냐, 어떻게 하면 효율을 극대화시키느냐 이것만을 최선으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공교회가 사유화되어 목회 세습이 예사롭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회 세습이 무조건 잘못이라고 보는 입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농촌이나 어촌이나 낙도 같은 가난하고 열악한 교회의 세습일 때는 미덕일수 있으나, 도시의 온갖 것을 다 갖춘 교회가 능력도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대물림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을 요소가 있습니다. 교회 재정이 사금고처럼 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내가 개척했으니 내 교회고 내가 전통을 세웠으니 내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공교회의 성격이 많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건전한 상식선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목회해야 합니다.

더불어 성적인 문제도 오늘의 교회가 극복해야 할 개혁 과제입니다. 성직자나 지도층에서 성적인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면, 특히 그들이 유명 인사일수록 한국교회의 위상은 곤두박질하게 됩니다. 숨은 인물일 때에는 그 지역에서 끝날 일이지만 한국교회의 저명한 인사일 때는 한국교회 전체가 먹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신뢰받을 수 있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윤리적으로 절도 있게 나가지 아니하면 세상과 부화뇌동하는 온갖 무리들이 동성애까지 합법화 하자고 당당하게 주장하게끔 됩니다. 공공연히 교회와 경쟁하겠다고 도전장을 내게끔 됩니다. 선교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파괴하게 되는 이 모든 것의 중심에 교회에 대한 멸시가 깔려 있습니다. 자기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도덕적으로 우리보다 더 나은 게 뭐가 있냐" 하며 전에는 음지에 움츠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정면으로 해보자고 대드는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멸시를 받으면 이 지경까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두 우리가 자처한 겁니다. 교회가 사회의 신뢰와 존경을 받으면 온 사회가 그런 자들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교회가 구별되지 못하고 낭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려 말에 신돈이란 묘승이 나라를 뒤흔들었습니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 라스푸틴이란 승려가 나라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들의 권력은 왕이나 황제에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영향력을 가졌지만 그것이 그가 속한 종교를 몰락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영향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영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한번 잘못하면 그 종교까지 넘어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의 실종을 개혁하라

셋째, 말씀의 실종을 직시하여 개혁을 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4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법궤를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우려고 나가서 에벤에셀에게 진을 치고 블레셋은 아벡에서 진을 쳤는데 첫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하여 4000명이 죽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긴급히 모여 의논한 결과 궁여지책으로 실로에 있는 법궤를 전쟁 마당으로 옮겨 왔습니다. 그리고 그 법궤 양편에는 제사장과 홉니와 비느하스가 함께 있었습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에 이스라엘 진중에는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블레셋의 진중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블레셋의 사람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다 필사적으로 치고 나오니까, 이스라엘 보병 3만 명이 엎드려졌습니다.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았겼습니다. 보위하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소식이 실로의 엘리 제사장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때 엘리 제사장은 98세의 몸으로 의자에 앉았다가 아들들이 죽었다는 소식과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에 너무 놀라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는 아들 둘이 죽었다는 말 보다 법궤를 빼았겼다는 말에 가장 놀랐습니다. 그리고 임신 중이었던 비느하스의 아내는 시아버지가 죽고 남편과 시숙이 죽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 갑자기 산기가 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허리를 굽히며 아이를 낳았는데 사내 아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의미의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짓고 거둬 주었습니다. 이것은 엘리 집안이 망한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법궤를 전쟁터에 가져간 것은 지성소에 있어야 할 법궤를 사람들의 편리와 구미에 따라 함부로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주술적인 기적을 기대하고 성경을 오용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성경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상실한 것과 같습니다. 법궤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법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비가 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항아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을 말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개혁신앙은 말씀에 맞게 항상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표준과 자신을 거기에 비추어서 일탈하였으면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맞춰 고쳐나가고 변경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중시하되, 예배의 순결, 교리의 순결, 생활의 순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여기에서 예배를 개혁한다고 하는 것은 예배의 순결, 윤리의 부재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은 생활의 순결입니다. 말씀의 실종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은 교리의 순결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연 말씀대로 나가고 있습니까? 말씀 중심의 강단이 되어 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말씀보다 사람의 소리가, 설교 외적인 것들이 설교란 이름으로 강당을 어지럽히고 강단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온갖 이상한 것들이 다 설교와 동등한 위치로 강단에 오르고 있습니다. 또한 오르려고 합니다.

여러분, 예배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예배의 제일 중심되는 부분은 설교입니다. 개신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고 성례가 합법적인 성직자에 의하여 거행되고, 한 가지 덧붙여 교회의 순결과 질서를 위한 권징이 시행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그들에게 전파됩니다. 믿는 자에게는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켜 주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신앙이 발생하도록 합니다. 성례는 믿는 신자들의 미덕을 강화시켜 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일반 신도들이 강단에서 온갖 사람들이 다 등장하다 보니까 설교와 간증도 구별하지 못하고, 설교와 유명인사의 강연도 구별하지 못하고 같은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설교의 격이 떨어뜨려졌습니다. 설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권위와 생명력을 우리 스스로 깎아내려 버렸습니다. 강단 정화와 개혁은 순수한 말씀이 전파되고 각론되면서 비롯됨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보수하는 일과, 성경을 전파하는 일 양면적인 사명을 가집니다. 온갖 반기독교인과 이단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훼손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보수하고 지키는 역할을 교회가 해야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땅 끝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라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저지른 죄악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양상임을 깨달아 이것을 개혁해야 합니다. 회복함이 없을 때 거기엔 암울함과 멸망이 오게 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예배의 속화를 개혁해야 합니다.

도덕적 무질서를 방임하는 윤리의 부재를 개혁하도록 합시다. 성도들 가운데 정말 평생을 훌륭하게 신앙 생활을 한 신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목사가 안 되었다면 과연 새벽기도를 하는 교인이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요즘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직분 안주는 것도  아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새벽기도 나오는 성도들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또한 일평생 어떤 직장에 있든지 정말 존경할 만한 인품을 가진 성도들이 많습니다. 과연 우리가 그들 앞에서 내가 떳떳하게 자신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63회 총회부터 총대로 나갔습니다. 부산에서는 제가 가장 많이 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마음 가운데 한 가지 드는 생각이 ‘누가 하든지 교회 정치라고 하는 것에는 관여를 해야 한다. 어떠하든지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관여해서 그 교단과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목사로서 거기에서 더 나아가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을 때 그만두었습니다.

항상 저는 설교하는 설교자가 강단에 서기에 양심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저는 목사의 권위가 진정한 권위라고 봅니다. 당회장권은 행정권이고, 정치권이지만 강단권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권을 의미하는 말씀의 실정을 개혁토록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지켜야 됩니다. 바로 지켜야 됩니다. 그리고 올바르게 전파해야 됩니다. 바른 예배, 바른 생활, 바른 신학을 회복함이 없이 세상 앞에 영합하여 그냥 줄달음질 칠 때 그 내리막길은 멸망의 길이 될 수 있음을 가슴에 새겨서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갱신과 개혁을 통해 회복과 소생에 진력하도록 합시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활로와 희망이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처음 목사되겠다고 출발할 때에 그래도 본심을 가졌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눈물로 서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교회의 흐름에 따라서, 교계의 흐름에 따라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초심을 가져야 됩니다.

저는 19살에 목사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20살에 개척교회 전도사로 나가서 8개월 사역하고, 21살에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12월에 졸업했기 때문에 25살에 총신본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27살에 대학원에 들어가 28살에 총각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전도사부터 지금까지 50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처음 목사의 소명을 받았을 때에 ‘허위신의 제단’이란 제목으로 글을 하나 썼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 글을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눈물을 바치오리다. 마음을 드리오리다. 마음속 깊이 잠든 마지막 방울 눈물까지 보이오리다. 고적한 동산에 주님 눈물, 간절한 도고와 조용한 슬픔, 이 마음속 촉촉이 젖어들새, 난 더 누를 수 없어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눈물을 바치오리다. 화인 맞은 양심 되살려 주 십자가 아래 두 손 모으고, 그윽한 마음의 이슬 흘리려 합니다. 땀을 바치오리다. 육신의 장막, 한 덩이 흙을 주님 전에 드리오리다. 이 헌 몸 깊이 배인 마지막 방울땀까지 드리오리다. 그날 밤 겟세마네에 거룩한 피땀, 아 방울방울 괴로우신 모습 그 눈, 그 입, 이마, 그 얼굴, 조용히 눈앞에 다가섭니다. 헝클어진 모습, 고난의 성상과 마주서 이 몸 괴로운 숨결조차 죽어갑니다. 땀을 바치오리다. 불타버린 양심 되살립니다. 주 십자가 높이 높이 지어다 보며 이 온몸의 땀을 모아 바치오리다. 피를 바치오리다. 생명을 드리오리다. 이 가슴속 깊이 스민 마지막 방울 피까지 흘리오리다. 음침한 해골동산, 소망의 갈고리. 끔직한 십자가 영광의 표상이라. 주님의 벗은 몸과 그 상처, 붉은 피, 타오르는 태양아래 지는 가슴, 죄인, 보혈, 구원, 이 몸 곤두박질하며 종잇장 같이 하이얗게 죽으옵니다. 피를 바치오리다. 죽어진 양심 되살려 주 십자가 힘껏 쓸어안고서 온 몸 들쪼으며 이 생명의 피 드리렵니다."

19살 때에 이것을 지어서 목사가 되겠다고 헌신을 서원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변질되었는가 잘못 되었는가 싶을 때에 다시 한 번 이때로 돌아갑니다. 이때로 돌아갑니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목사가 되었는가?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장중에 사용되었는가? 이것을 바로 세움으로써 정말 한국교회에 올바르게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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