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20) 교갱협 제12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사도행전 2장 40~42절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돌팔매질 당하는 한국교회

목회자로서, 그리고 한국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지금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을 직시해 볼 때 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심정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말로 다 할 수 없는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어떤 잡지에 실린 중요한 아티클의 제목이 “한국 기독교, 왜 증오의 대상이 되었나?”였습니다. 한 3페이지 정도의 글인데 인터넷판에서는 댓글이 500페이지나 달렸습니다. 말이 안 나올 정도였습니다. 괴멸 상태고 파산 상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척박한 바벨론 땅에서 하늘 문을 여시고 하나님 음성을 들려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 이 힘든 시기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주님과 진정한 교제가 일어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사역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저는 제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 목회직이 참으로 소중하지만 냉정하게 얘기하면 저의 담임 목사직이 저의 사역의 목표가 아닙니다. 아마 제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 목사직이 저의 목표였다면 저는 제 풀에 지쳤을 것입니다. 아마 나가 떨어졌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담임 목회자로서, 또 부교육자로서, 목회자의 사모로서 우리는 직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직분 자체가 우리의 사역의 목표가 아닌 줄로 믿습니다. 우리 사역의 목표는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숨을 쉬고, 이것 때문에 힘을 얻고, 이것 때문에 사역을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과의 은밀한 영적 교제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려면 주님과 나만이 아는 은밀한 독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나만의 은혜의 감탄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작년에 교우들을 위하여 말씀 준비와 기도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제 방에서 토요일 새벽기도 마치고 나와서 찬송을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찬송이 있었습니다. 찬송가 12장 찬송인데 저에겐 좀 익숙하지 않은 찬송이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저의 마음을 만지시는 가운데 주님과 나만이 아는 은밀한 영적 교제의 깊이로 들어가니까 “고난 받는 주를 보라 영광스런 왕의 왕 승리하고 오실 때에 만민 경배하리라 왕관드려 왕관드려 승리하신 주님께 왕의 왕이 되신 주께 면류관을 드리세” “고난받는 주를보라 왕관드려 왕관드려” 할 때 갑자기 제 속에서 막 터져 나오는 겁니다.

그 이후에 교회가 특별새벽기도를 하면서 ‘순교의 피, 보혈의 능력’을 주제로 집회를 하는데 먼저 저부터 더 나아가 온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해졌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지난 얼마 동안의 시간 속에 제 마음속에 주님과 독대하고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찬양 중에 하나가 “나의 소망은 주 경외함 나의 맘을 주께 내 영을 주님께 나 주 위해 살리 살아있는 동안 어느 순간에도 나 주만 따르리”입니다. 이번 수련회 기간 동안에 여러분과 주님만이 아는 은밀하게 하나님게서 주시는 은혜의 공간을 확보하셔서 주님과 더 친해지고 깊은 교제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깊은 교제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주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자꾸 물어봐야 합니다. 사실 오늘 저녁 이 메시지를 가능하면 면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하게 되었는데 이런 과정 속에 지난 8월초에 한 일주일 정도 사막에 가 있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막의 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저 좀 메시지 면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제 마음속에 “네가 형편이 어렵고 안 어렵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뭘 원하는 지를 네가 아냐?”라는 음성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 형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갖는 교회 형편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지금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너희 교회 형편이 중요하냐, 안 중요하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무슨 마음인지 너 아냐?”이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속에 도전하시기를 한국에 세계 대형교회의 반 이상을 허락하신 이유는 한국 교회가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무장하여 세계 선교를 마무리 하라고 주신 것이라는 정신이 번쩍나는 강력한 도전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크든 적든 상관이 없습니다. 왜 서울 밤하늘에 세계 어느 도시에도 유래가 없는 십자가 네온사인을 그렇게 많이 주셨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임하도록,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온 땅에 속히 미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 분명합니다. 지난 번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광주에 있는 겨자씨교회에서 할 때에 말씀을 전하고 나와서 옥상에 올라와서 보니까 그 교회 반경 일 킬로미터 이내에 십자가 네온사인이 최소한 스무 개 이상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왜 이렇게 하셨을까? 오늘 주님께서 이번 교갱협 수련회를 통해서 주시는 질문에 대해 우리 자신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답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상적 가치를 뒤집는 교회

지금 이 시간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한국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 무엇일까요? 최근에 세례를 받았던 이어령 전문화부 장관께 사람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좀 더 건강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질문을 받고 이어령 박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회는 일상적 가치를 뒤집는 가치를 가질 때에만 비로소 주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상적 가치를 뒤집는 가치. 역설이죠. 뒤집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세상의 가치대로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사고방식이 교회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기독교의 원리는 버리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도 그 부분이라는 겁니다. 가족을 버리고, 고향을 버리고, 또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을 버리신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그래서 십자가는 버리는 것의 최정점입니다. 그 정점을 통해서 부활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날의 기독교는 갖고 있는 게 너무 많습니다. 많은 것들을 가졌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많이 가진 것을 복이라고 하지만 기독교는 애통하는 것, 가난한 것들을 오히려 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일상적 가치를 뒤집는 가치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 주님께서 답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교회사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사를 통해서 교회의 진정한 모범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참고할 바는 많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 영광스런 교회가 성령 강림을 통하여 제이의 성육신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에 아주 아름다운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형성되고, 안디옥 교회가 형성되고, 에베소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나 서머나 교회 같은 귀한 교회들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1세기도 가기 전에 영지주의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아리우스파들이 등장했습니다. 2세기도 가기 전에 3세기에 벌써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교회 성직과 평신도를 구분하는 계급주의적인 상황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사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요소가 분명히 많이 있지만 교회사를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인 교회 모범을 볼 수 없는 한계를 여기서 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서 성경에서 객관적으로 주시는 음성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압니다.

 

기도와 교제하는데 전념하라

일상적 가치를 뒤집는 교회 본보기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토록 사랑하고 잘되기를 원하는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제가 이제 여러분들에게 언어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사실 언어라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인도하는 지도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흔히 성도들이 ‘교회를 간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교회를 간다’는 말이 당연한 언어 형식으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에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의 장소, 또는 무슨 모임보다도 훨씬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 본문 2장 42절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랬습니다. 여기 보니까 기도와 교제하는데 전념했습니다. 교제하는데 힘쓰고 기도하는데 힘썼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제하는데 힘쓰는 곳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교제를 하는데 자신들을 헌신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는 “교제를 갖는다” 정도가 아니라 “교회는 교제 그 자체였다” 이 말입니다. 교회는 “진정한 교제, 그 자체다”라는 말입니다. 교제란 것은 상호 깊은 보살핌 속에 서로 엮어진 공동체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엮어진 공동체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는 44절에 나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 진정한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주님 안에서 일상생활도 같이 경험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교제 자체가 되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슬프게도 오늘 우리가 섬기는 많은 현대 교회들이 이런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는 영적 교제의 능력과 현상을 경험하고, 실천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결속력과 일상적 물질적 삶의 나눔과 공동체성을 지금 거의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일마다 예배로 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나의 것입니다. 지갑도 내 것입니다. 또한 일반적으로는 조금밖에 나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Ek’와 ‘Kalleo’ 즉 ‘함께’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함께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조금 더 깊이 표현하자면 초대교회는 교회를 가는 성도들이 아니라 초대교회 자체가 교회가 된 것입니다.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공동체 그 자체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간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가 되라’는 말로 지금 바꿔야 오늘 이 파산 상태 같은 어려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로 ‘Being Church’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서로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또 날마다 희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랬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니까 고통은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물질적인 상호이전이 필요하다고 그랬습니다. 섬기는 것과 희생하는 것과 고통을 참는 것과 물질적인 상호이전 같은 이런 지속적인 응집력이 있을 때 교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란 예수님의 임재가 확장된 장소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예수님의 임재가 확장된 장소 Extended Local입니다. 이 장소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장소입니다. 믿는 자들끼리 서로 상호봉사하고 함께하는 성전이며 권속입니다. 권속, 즉 house-hold의 성경적 이미지는 오늘날의 가족 이미지와는 좀 다릅니다. 지속적인 상호 의존과 충성과 성실의 이미지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성실한 헌신적인 교제의 행위가 사도행전에만 하더라도 사십 번 이상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5장 등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교제 공동체로서 교제 그 자체가 되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란 서로를 위한 굉장한 헌신이며 거짓 없는 애정을 나타내는 형제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몸을 파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오늘 이런 말씀을 가지고 조명해 볼 때에 한국 교회는 거의 골육상잔의 수준입니다. 지금 한국의 메이저 신문들이 한국 교회를 비난합니까. 한국 교회 내부가 내부에다가 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정신차리게 하기도 해야겠지만 교회를 좀 강력하게 비판하는 어떤 안티적인 경향을 가진 웹사이트 같은 경우에는 교회가 교회를 너무나 상처내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좀 독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신학교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합니다. 또 들리는 소문은 서울에서 택시 운전하는 분들 가운데 수천 명이 목회지 없는 목사님이라고 들었습니다.

너무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공동체가 아닙니다. 상호의존적이고 헌신적인 영적인 아군 의식이 없습니다. 서로 분리되어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의 몸을 파괴하고 마침내 깊은 구덩이에 빠지는 것입니다. 소박하고도 진실된 영적인 공동체 의식이 없습니다. 경쟁 의식이 충만합니다. 서로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이 하나요, 몸이 하나인데 교회가 하나라는 의식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영광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시온성과 같은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가는 곳마다 마을마다 우뚝 우뚝 선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영광스럽습니까?

어릴 때 저는 개척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나 절 동네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형편없는 교회 건물에서 살았습니다. 그 때 제가 지나가면 뒤에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저 예수쟁이 아들 지나간다”고 돌멩이도 던지고 그랬지만 그 초라한 교회는 그래도 교회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 영광이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우뚝우뚝 서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하는 이 수치와 모멸을 무엇으로 감당한다는 것입니까?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었습니다. 옛날 시골교회를 기억하십니까? 지역마다 헌신예배를 드릴 때마다 어느 지역 가서 헌신예배 드리고, 다른 교회에서 헌신예배 드리면 모두가 그 교회 잘되기를 원하고 그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또 특별히 우리 교단 교회가 ‘교회를 가는 것’보다 ‘교회가 되는’ 그런 축복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섬김의 삶

저는 대학부 사역을 할 때 4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참된 영적 교제의 껍데기라도 좀 경험하고 싶어서 사람을 바꾸는 것과 변화시키는 것이 이론으로 되지 않고 삶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4년간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분들 가운데도 저와 공동체 생활을 한 분들이 좀 있습니다. 제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예수님 안에서 함께 있는 다른 형제들을 섬기기 위하여 저 개인의 삶을 희생하는데 저가 얼마나 인색하고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것을 깨닫는 매우 고통스러운 사실이었습니다.

지금도 목회자가 되었습니다만 우리는 여전히 이기심과 소유욕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주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아니 주님이 살아 계심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분이 교회를 통하여 제2의 성육신을 감행하시고 교회가 교회 되기를 기대하셨다면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 시대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이기심이, 우리의 독선이 파괴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제대로 된 공동체 교회는 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 중에 하나가 약자에 대한 관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본래 가난한 자, 낮은 자를 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되고 약자된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먼저 나타나서 통고를 해 주었습니다. 배고픈 자를 배불리고 부자를 빈손으로 내보내는 대역전의 드라마를 실현시켰습니다. 이사야 말씀을 통해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소외되고 눈 멀고 고통 당하는 아픈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역전의 드라마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라

그렇다면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진 교회가 되기 위해서, 또 우리의 예배가 예배당 내에서 메아리치는 단순한 소리를 넘어서 흐르는 시간 가운데 불변하는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임을 세상 앞에 선포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범적인 교회상을 보여주십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역동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도행전 2장 본문에 보면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처음 믿는 성도들은 이 성령의 은혜에 대해 같은 공동체 속에서 아주 민감해했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범적인 교회상은 성령의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한 교회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요,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공동체였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공동체인 교회가 할 일을 직접 지시합니다. 성령께서 직접 목회하시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교해 보자면 한국 교회는 너무 우리 자신들의 주장이 많습니다. 우리 생각이 꽉 차 있습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실 여지와 공간이 없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교제 자체인 교회가 된 것에는 그 공동체가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절에 보면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께서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선교사를 보내는 일에 직접 관계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5장 28절에 보니까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도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민감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7절을 잘 아실 것입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일이라고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회에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섬기는 교회에 1월부터 12월까지 수많은 사역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다 귀한 일이지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그 일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성령의 인도에 민감해야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얘기합니다만, 주일에 여섯 번 이상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저는 매주일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다고 표현합니다. 타오르는 불이 되다가 타다 남은 재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새벽 연합예배를 같이 드리면서 주일예배를 섬기는 분들과 같이 기도를 하는데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하며 말씀들을 합니다. “주일에 진액을 그렇게 다 빼는데 토요일 새벽부터 그렇게 진을 다 하면 주일에 어떻게 사역하냐? 에너지가 어디 있냐?” 저는 저의 약점이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주일 예배와 주일 말씀을 앞에 놓고, 물론 평일에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지만 토요일 새벽에 “내일 주일 예배에 들어서기만 해도 기름부음이 있게 하시고 성도들이 본당에 들어서기만 해도 눈물이 나게 하시고, 들어서기만 해도 하나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십시오”라고 함께 기도합니다.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진 분들과 함께 강단에 올라가서 “주여! 내일 예배를 살려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내일 예배를 살려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성령님의 인도가 없으면 안되는 것을 너무나 절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도가 저를 살립니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 되는 것이고, 교제 그 자체인 생명의 공동체가 되려면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에 힘입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본문에 오순절 성령강림이 임했습니다. 임했다 할 때 그것은 위로부터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장 9절부터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그게 위로부터 부어지는 역사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섬기는 교회가 진정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Empowering Moment입니다. 능력을 받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능력을 받는 순간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온 동네의 북이 된 한국 교회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내가 능력을 받는 순간을 경험했는지 경험 안 했는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목회자지만 얼마나 메마른 사역자인지 남들이 말해 주지 않아도 우리 자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자매가 저한테 와서 “목사님, 제가 성령 충만한 지, 안 한지 목사님이 좀 판별해 주십시오” 하고 묻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어려운 거 없다. 내가 성령 충만한 지 안 한지 잘 모르면 그건 충만 안 한거다” 임신을 하면 내가 애기를 임신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는 엄마는 없습니다. 귀신이 들어도 사람이 바뀌는데 귀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령님이 우리를 붙잡으시는데 우리가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사역을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진실된 주의 영이 임할 때에 사람은 변화되는 줄로 압니다.

과거에 한국 교회는 토요일 저녁 같을 때 청계산, 불광동, 삼각산 기도원 근처에 기도할 장소가 없었습니다. 삼각산에 가면 토요일 밤 같은 경우 기도하기 좋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많은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청계산이나 삼각산에 가보십시오. 기도할 자리에 잡초가 무성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능력을 받는 순간을 회복해야 합니다. 특별히 공동체 속에서 능력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 능력을 받으신 그것이 우리에게 모범이 됩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비둘기는 온유한 평안의 영입니다. 비둘기는 싸우지 않습니다. 운동팀들이 각자 나름대로 트레이드 마크가 있습니다. 타이거, 라이온, 이글 같은 것을 택합니다. 그런데 비둘기를 트레이드 마크로 하는 팀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다못해 ‘마린덕스’라고 해서 오리 정도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오셔서 비둘기 같이 임하실 겁니다. 비둘기 같은 온유한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생명의 공동체로서 진정한 영적 결집력을 가지고 능력을 감당할 수 있되 온유한 인격들로 서로 다듬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둘기 같은 성령의 능력을 받는 순간을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부분 특징이 있습니다. 잘 생기건 못 생기건 상관없이 그 인격과 얼굴에 온유함이 드러납니다. 어릴 때인데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2학년 때 SFC수양회에 가서 은혜를 받는데 강사가 한부선 선교사님이었습니다. 부르스 헌트라고 기억나십니까. 한부선 선교사님이라고 옛날에 아주 한국말 잘하는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얼굴이 너무너무 인자하셨습니다. 그때 저가 쇼크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인자하냐!” 그 이후에 강원도 예수원에서 대천덕 신부님을 보고 정말 인자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미국 가서 신학교에 처음 들어갔을때 신학교 학장님이 계셨는데 그 분도 그렇게 인자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온유한 인격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눈이 번들번들 한 것이 아니라 눈이 온유해집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야 공동체가 됩니다. 번쩍번쩍 해서는 안됩니다. 눈이 그냥 번쩍번쩍 해서 어떻게 일이 되겠습니까? 공동체를 위하여 그런 온유한 인격상을 닮아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나이가 들어도 그의 얼굴이 퓨어pure하고, 심플simple하고, 험블humble하고, 청결하고, 겸손하고, 소박해집니다. 명목만의 그리스도인으로만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 모습이 뒤틀리고, 긍정적인 삶의 영향력이 공동체로 가기 힘듭니다. 온유한 얼굴이 아니라 느끼한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꾼들이 그렇습니다. 정치에서도 바른 정치는 필요하지만 정치꾼이 되면 느끼한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한 온유한 인격이 아니라 정치꾼이 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공동체가 가지는 4가지 기능

이제 좀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 성령이 역사하는 공동체에 나타나는 4가지 기본적인 기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네 가지 기본적인 기능은 참된 공동체의 형성과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본 토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면서 사도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진정한 영적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거룩한 성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살아있는 기도에 전력투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공동체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라

먼저 말씀 드릴 것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지속적으로 사도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기독교가 너무 얄팍하다.” 여러분 우리가 얄팍합니까? 정말 사도의 교리가 얄팍합니까? 저는 그동안 대학교에서 캠퍼스 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면서 교리보다도 고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교리만 주장하다가 고백적인 신앙이 없으니까 껍데기만 되더라는 것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고백 신앙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기독교의 깊음을 우리가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내려오는 사도의 가르침을 계속 이어가면서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7월 초에 어쩌다가 순천의 송광사에 잠깐 들릴 일이 있었습니다. 순천 송광사에는 삼보(三寶) 불법승들이 있습니다. 마침 저녁 예불 시간에 갔는데 제가 닫힌 문 뒤에서 듣는데 한 사백 명의 승려가 반야심경인지 염불을 외우는데 천둥처럼 외웠습니다. 믿음이 강하게 해요. 그러니까 그 외우는 것과 그 합력하는 것과 그 하나 되는 파워가 웬만한 반대는 다 무릅쓰고 다 이겨내겠더라고요. 제가 목사 아닙니까? 목사가 그 앞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일반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사도의 가르침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에 깊이 있는 신앙과 교리와 고백과 신조들을 다시 한 번 우리가 집중하고 천착해야 합니다. 생명을 불어 넣어 우리 기독교가 가진 진수들을 다시 한 번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너무 가볍다는 말을 이제는 더 이상 듣고 않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 교제를 나누라

두 번째,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진정한 영적 교제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또 거룩한 성찬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기도에 전력투구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부산물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은 하나님이 베풀만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가 형성되어 갈 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 네 가지 기능들이 자연스럽게 행해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우시고 교회를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 47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진정한 공동체의 역할과 교회의 기능이 이루어지니까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셨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숫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숫자를 늘리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사람이 무슨 꾀를 쓸 수도 있고, 거짓말도 할 수 있고, 그래서 몇몇을 유혹할 수도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고 궁극적으로 대한민국 4천만 명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대하게 보면 우리는 민족 공동체입니다. 민족 공동체 가운데 한 국회의원이 지역구 십만 명의 마음을 나름대로 움직일 지 모르겠지만 4천만 명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욥기 12장 16절에 있는 것처럼 속이는 자와 속는 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양떼를 먹이고, 양떼를 치며, 양떼를 사랑하고, 진정한 교제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양떼들을 목숨 걸고 잘 돌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숫자가 작을수록 더욱 간절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럴 때 마태복음 25장 21절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그 다음에 보십시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저는 철저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적은 수에 충성하지 못할 때에 많은 수를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이 몇 명 되었으면 좋겠다, 몇 명이 목표다, 이런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영적 공동체가 되는 데에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대학부 사역 때 몇 명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개척교회도 해 보았습니다. 저도 많은 약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하나님이 이 정신을 계속 유지하도록 때리시고 고치시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아직도 부족합니다만 영혼에 대한 소명과 영혼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조금이라도 훼손될 것 같으면 하나님이 때려 주셨습니다. 12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백 명 모일 때까지 정말 죽을 쑤어서 아픈 사람에게 가서 심방하고, 돌잔치 와서 예배드려 달라고 하면 정말 돌잔치도 부흥회처럼 했습니다. 돌잔치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갑자기 막 눈물이 나옵니다.  왜 눈물이 나오냐. 얘가 평생 죽을 고생할 걸 생각하니까 그랬던 겁니다. 돌잔치도 부흥회처럼. 결혼식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진액을 쏟으려고 했습니다.

담임 목사와 부교육자의 차이가 뭔 줄 아십니까? 담임 목사는 영혼에 대한 무한 책임이 있습니다. 무한 책임에 대한 강도 차이입니다. 그런데 부교역자 가운데서 영혼에 대해서 무한 책임을 느끼면 하나님은 그가 담임 목회자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여기에 부교역자 여러분도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평생 동안 부교역자 시절에 한 영혼을 사랑하는 영혼 사랑 성적표가 평생 가는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아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면 그 공동체가 뿜어내는 영적 역동력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키울 것입니다. 천 명, 이천 명, 삼천 명 대신에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여덟 명, 열 명의 교우들을 잘 양육해야겠다고 결심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양육하고 목양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영혼의 에너지와 진액을 같이 쏟으십시다. 그리하면 자연스럽게 날마다 구원받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더해 주실 것입니다. 교회의 사이즈가 우리의 관심사가 되면 안 됩니다. 참된 영적 공동체를 만드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오정현 목사는 큰 교회를 섬기니까 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 어릴 때 지지리도 가난한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부산에 ‘어린이 성경고사 대회’ 하느라고 부전교회나 초량교회 이런 데 가보면 “세상에 우리 아버지 교회는 비가 새는 조그만 교회인데 이 교회는 왜 이렇게 크노? 누구는 무 먹고 누구는 인삼 먹나?” 청소년 시기까지 저는 비 새는 집에서 살았고 비 새는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데 그때 교회에 몇 십 명이 모이는데 왜 교회를 비가 새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갑니다. 공사를 조금만 하면 될 텐데 참 가난하고 초라한 교회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교회는 영적인 끈끈함이 대단했습니다. 초라했지만 내 눈에는 초라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 대부분의 세미나와 프로그램을 보면 주된 목적이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인가?’입니다. 그래서 관심을 기울이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 성장하는 것 그렇게 어려운 것 아닙니다. 어떻게 쉽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열 명, 스무 명 섬기는 그 교회. 그 공동체가 진짜 교회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진짜 영적 교제가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십시오. 진짜 영혼의 찰떡 같은 교제가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십시오. 한 30년 전쯤의 이야기입니다. 3,40명 대학생들이 수양회에 참석해서 모두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마지막 시간 악수를 하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형님, 저 부족한 거 용서해 주세요.” “형제, 내가 상처준 거 있으면 용서해라.” 악수를 하는 시간에 벌써 그런 고백을 서로 나눕니다. 그러면서 나온 이야기가 “형님. 형님의 인격이 어떻든 내가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입니다.

이것이 영적 교제와 신앙 안에서 할 수 있는 고백 아닙니까? 이런 진정한 공동체성을 느껴 보십시오. 교회가 좀 크면 제자훈련을 통하여 열 명, 열두 명의 소그룹이 이루어져 그 소그룹이 진정한 영적 공동체가 되면 거기에 영혼의 치유가 일어나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고, 네 것 내 것이 없고, 서로 함께 쉐어(share)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면 교회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때마다 하나님이 영적 공동체의 능력을 가지고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개척을 하면서 교회를 두 번 건축했습니다. 교회 공간이 없으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건축을 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건축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제자훈련을 하는 가운데 너무 영적으로 하나가 되고 은혜가 있고, 서로 교제의 능력이 있고, 서로 섬기고, 함께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가 되니까 어떤 미용사를 하는 자매가 시집가려고 만 불을 꼬깃꼬깃한 현금으로 모아 놓았는데 “내 개인 보다도 주님의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습니다” 하면서 주일에 그 만 불을 그냥 캐쉬(cash)로 탁 헌금대에 넣어버려서 헌금대가 출렁했습니다.

또 2차로 건축할 때 나중에 너무 힘이 들어서 현금으로 몇 억이 좀 모자랐습니다. 그럴 때 안수집사님들과 그 앞에 있는 분들이 같이 모여서 “우리 신용카드 다 긁자” 누가 그런 제안을 하고 어떤 분이 무슨 기계를 가져 왔는데 신용카드회사 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공동체가 어렵다는데 왜 못하겠냐?” 하면서 다 긁었어요. 그래도 돈이 모자라서 한 19만 8천불 정도이니까 한화로 2억 정도가 모자랐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듣던 어떤 사업하는 형제가 그 다음 날 백만 불, 십 억을 현금으로 들고 왔습니다. 사업자금을 갖고 왔더라고요. 그래서 두 번째 위기 가운데 해결을 보았습니다. 제가 무슨 ‘교회 건축을 잘했다’ 그 말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공동체가 되면 공동체의 능력을 통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사람 숫자 늘리려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섬기는 그 모임과 적은 숫자라도 영적 교제의 능력이 확보된 그런 교회가 되면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람들의 머릿수를 헤아리고 있다는 것은 무서운 함정에 빠지는 것이고 진실된 교회 공동체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한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고 믿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흔히 가질 수 밖에 없는 약함이 있습니다. 토요일 새벽에 우리 교회의 중직자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사정상 못 나오는 분이 있거든요. 그러면 나온 분하고 더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데 못 나온 분 때문에 약간 신경 쓰일 때가 있습니다. 못 나온 분을 생각하지 말고 나온 분들을 안고 진정한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목자의 심정으로 섬겨주고 체력을 쏟으면 나중에 그 영감이 못 나온 분들에게도 전수되어 안 나오면 안 될 운명에 봉착하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참 공동체는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사랑하게 하고, 어떻게 하든지 함께 전력투구해서 기도하게 하고, 어떻게 하든지 자기 이익을 깨뜨려서 영적 교제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찬이 이루어지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기념하여 성찬의 떡을 떼면,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게 여기면 주님께서 구원받는 자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셔서 교회의 교회됨을 형성시켜 주실 것입니다. 진실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면 공동체의 성장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벤쿠버에 있던 안수집사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민교회는 어려움이 많으니까 이해는 갑니다만 6년 동안 한 번도 목사님이 교회 공동체의 능력과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교회 옆에 있던 성당에 갔는데 그 곳에서 성찬식을 했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영적 교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못 듣다가 6년 만에 성당을 지나다 들렀는데 성찬식을 하는 거기서 “이 성찬을 통하여 성도들끼리의 영적 교제에 능력이 있길 바랍니다”는 말을 듣고 은혜를 받았답니다. 그 말을 듣고 참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이 영적 교제의 능력에 대해서 몇 년 동안 듣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들이 되겠습니까?

부지런히 주께서 보내주신 적은 수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목양하며 신실한 청지기로서 자신을 증명할 때 주님께서 그 결과 더 많은 영혼들을 맡기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지도를 받도록 보내주신 그 사람들에게 충성을 다하십시오. 부족하지만 내가 진정한 영적 교제의 능력을 받는 순간을 통하여 확보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은총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교회에 대한 민감함을 가지고 진정한 영적 공동체를 만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유기적 교회를 이루라

성경적으로 사람은 악하지만 영적 교제의 능력 속에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소위 목회적 성선설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나를 통하여 저 사람 좀 변화시켜 달라고. 아니 내가 더 변화되기를 갈망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되면 조직적 교회가 아니라 유기적 교회가 됩니다. 직분과 어떤 위치로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사명과 소명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조직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조직적 단체의 대표는 고아원입니다. 유기적 단체의 대표는 가정입니다. 똑같이 먹고 자고 입고 똑같은 생활을 합니다. 과거에는 가난한 집들보다도 외국의 원조를 많이 받는 고아원이 훨씬 더 생활 형편이 좋았습니다. 더 잘 먹고 더 좋은 환경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아원과 가정은 다릅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 얼굴에 사랑 받은 흔적이 빠져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는 조직적 교회가 너무 많아 교인들이 사랑 받은 흔적이 얼굴에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너무 사납습니다. 주님의 법은 사랑과 평안입니다. 사랑과 평안과 위로와 은혜를 통하여 그 얼굴에 사랑 받은 흔적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이 없으니까 너무 사나워졌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단지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상처받은 분들이 비판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지금 ‘정직과 감사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나, 감사하는 우리, 정감 넘치는 사회. 정직은 세상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박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정직운동과 함께 감사도 같이 해야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 공동체요 생명 공동체요 교제 공동체며 은혜 공동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정직운동을 하고 NGO도 정직운동을 하고 모두 정직을 향한 몸짓은 합니다만 아무리 세상의 조직이 그렇게 해도 한 가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절망을 모르는 유일한 은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공동체가 되고 영적 교제의 능력이 나타나니까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한국 사회 속에 온갖 돌팔매질 당하는 한국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고민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빌게이츠가 하버드대학교에서 ‘창조적 자본주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대한민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으므로 자본주의 사회를 떠날 순 없지만 교회가 진정한 영적 교제의 능력을 가지면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을까를 고민했는데 ‘공동체적 자본주의’라는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복음주의권에 있으면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서 어떤 식으로 교회가 비난받는 이런 난국을 타개해 나갈 것인가를 생각할 때 이미지가 개선이 안 되면 한국 교회가 방향이 잡히지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공동체적 자본주의’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공동체적 자본주의’는 그동안 국내외에서 엄청난 규모의 자본fund으로 새로운 구조 조정을 감행함으로써 나타난 대규모의 실업이나 불황, 그리고 빈부격차와 양극화를 초래한 것으로 공격받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의 모범을 진정한 영적 교제가 있는 교회를 통해 회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적 자본주의’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자본주의의 장점을 100% 살리되 그 목적이 자신의 이해와 내 자신의 유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건전한 발전에 무게 중심을 두기 때문에 좌파와 우파를 아우를 수 잇는 대안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좌와 우를 아울러 자본주의적 장점을 살리고 다 같이 귀하게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성경적 자본주의 체제를 어느 정도 펼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공동체라는 성경적 의미의 Community란 말은 Common과 Unity의 합성어입니다. 쉽게 말하면 합력하여 하나가 되어 선을 이루는 공동체 자본주의는 바로 성경적 의미의 자본주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진정한 영적 교제의 능력을 배가할 때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의 위기를 돌파시켜 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교회의 영적 지경이 점점 넓혀지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정리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영적 공동체가 되고, 말씀과 기도와 교제와 성찬이 있는 공동체가 되면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자기 개인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주님께 영광을 올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무대의 중심에 서야 항상 어느 정도 자기의 허전한 부분이 채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세상과 다른 가치체계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뒤집음의 은혜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이라도 진정으로 그들의 목자된 심정으로 영적 공동체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 되게 할 때 우리의 마음에 이 영혼의 만족이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남이 우리를 안 알아줘도 그냥 웃을 수 있는 진정한 여유의 사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숨어 지내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열 명의 성도를 향한 헌신과 사랑으로 충만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괜히 교회가 작다고 허전해 하면서 정치한다고 쫓아다니면 영적 낭비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머리가 예수님이 되시면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상관없고,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 영적으로 하나가 되면 하나님이 영광을 거두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부흥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공입니다. 성공은 위험한 것입니다. 요즘 생각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9장 27절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뒤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의 열매를 주시고 남들이 볼 때 사역을 성공적으로 한다는 평가를 할 때가 개척교회 처음 시작하고 열 명, 스무 명 안고 겨우겨우 연명하면서 애쓰고 수고하고 땀 흘릴 때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도시 교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목사님들이 시골에서 십여 명의 성도들과 함께 겨우 연명하면서 애쓰고 수고하는 목사님들보다도 훨씬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개척교회 목사의 심정으로 뛰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위험한 순간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사역을 향하여 박수칠 때 하나님 영광이 사라집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종료되는 순간입니다. 그럴 때 영적 쓰나미가 오면 감당을 못 합니다.

<미국복음주의연맹> 회장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분이 계십니다. 콜로라도에서 아주 잘나가는 교회, 가장 모범적인 교회를 섬기는 분입니다. 콜로라도에서 마녀들과 잡신들과 이단들이 발호하는 그 가운데서 <세계기도센터>를 만들고 피터 와그너와 손잡고 기도도 아주 잘하는 굉장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그래서 다 몰락했습니다. 꼭대기에서 추락을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 마음의 텅 빈 공간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분은 나름대로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사모님과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다 좋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쓰는 것이 있었습니다. 책을 쓰다보면 에너지가 많이 방출됩니다. 그런데 꼭 시험 들지 않으려고 사모님과 같이 다니고 그렇게 했는데 책 쓴다고 콜로라도의 어느 한 호텔에 갔습니다. 너무 허전하고 에너지가 다 방출되고 뭔가 채워지지 않으니까 어릴 때 자기가 동성애 성폭행을 당한 그런 과거의 아픔 때문에 동성애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설교를 하다가 동성애를 막 욕하는 설교를 하니까 자기와 동성애를 하던 그 사람이 “어, 저 사람 나랑 동성애 했던 사람인데.” 그래서 고발을 해서 하루아침에 추락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역을 하더라도 허전하니까 영적인 쓰나미가 올 때 감당을 못한 것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상관이 없습니다. 열 명이면 열 명, 스무 명이면 스무 명, 그 공동체에 영적 교제의 능력을 회복하는 그 자리를 여러분들이 마련해서 함께 숨 쉬는 공간이 없으면 그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크든 작든, 어느 지역에 있든 저와 여러분이 섬기는 그 교회가 교제 그 자체가 되게 하시고,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공동체가 될 때에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희들만이라도 영적 교제의 능력을 회복하여 ‘공동체적 자본주의’를 형성해서 자본주의의 약점을 극복하면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이 시대를 향하여 어둠을 밝히는 횃불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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