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20) 교갱협 제13차 영성수련회 폐회예배

히브리서 12:1~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저는 아침이면 정구를 합니다. 한 10여 년 정도 되었습니다. 정구를 하다 보면 공이 아웃이 된다든지, 네트에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네트에 걸리는 경우가 있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칠까 잠깐 몇 초 차이로 고민하다가 공을 엉뚱한 방향으로 보내고 맙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너무 잘 하려고 힘이 들어가면 게임을 망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번 교갱협 영성수련회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고 또 도전을 받았습니다. 아마 공히 느끼는 것이겠지만 ‘아, 그렇구나!’ 하고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굉장한 도전을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강단에 서신 강사를 통해 은혜 받고, ‘아~ 저것이다. 저렇게 해야지!’ 하면서 목에 힘이 들어가고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면 그분은 틀림없이 자기 교회에 가서 일낼 분입니다. 그런데 교인들도 보통 눈치가 아닙니다. ‘이번에 우리 목사님이 세미나에 갔으니까 올 때 뭐하나 가지고 오겠구나’ 하고 딱 방어 자세를 취합니다. 죄송합니다만 하늘의 비밀스러운 프로그램을 가져가도 성도들이 마음을 닫아버리면 전혀 쓸모없다는 사실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교회 갱신은 결국 목회자의 갱신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갱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즐거운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할 때도 준비 운동을 하고 격한 운동을 하고 나면 마지막에 숨쉬기 운동을 합니다. 그와 같이 저도 이 시간에 숨쉬기 운동을 하는 것처럼 목과 눈에 들어있는 힘을 빼고 예수님만 붙잡고 다시 돌아가서 정말로 즐겁고 신나게 사역하시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마라톤과 같은 우리의 삶

베이징에서 29회 올림픽이 열려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올림픽의 꽃은 마라톤이라고 하는데 그 마라톤에는 야릇하고 묘한 경기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 아이오아대학에서 마라톤 강좌한 것을 책으로 엮은 ⌜마라톤 풀코스 16주 완주 프로그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목차를 보면 제1주 ‘마라톤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해서 제16주 ‘마라톤에 실제 참여하기’, 그리고 마지막 17주에는 ‘마라톤, 그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내용입니다. 그 책에 보면 마라톤은 하나님이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고 나옵니다. 마라톤 훈련 코스를 통해서 자기를 훈련합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마라톤에 분명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라톤은 또 짧은 100미터 달리기처럼 성질대로 금방 끝낼 것도 못됩니다. 굉장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마라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짧은 것이 아니고, 간단하게 끝낼 일이 아닙니다. 성취감도 있고, 즐거움과 보람도 있고 마지막 받을 면류관도 있지만 그렇게 만만하게 끝낼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고전 9:24에 보면 바울 사도가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사람이 많으나 상을 얻는 사람은 한 사람이기에 너희도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 했습니다. 또 빌립보서 3장 14절에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고 고백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는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의 종말이 다가온 것을 경험하면서 고백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도다.”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방해가 되는 것을 내려 놓으라

그렇다면 경주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상식적으로 경기하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마라톤 하는 사람으로서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로서 사역하기 위해 나머지는 다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목회자는 너무나도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공동체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말려들다 보면 건강도 해치고 인생도 다치게 됩니다. 거기에 말려들 일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단순화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단순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거리는 불가능합니다.

마라톤은 1등이나 기록보다도 더 훌륭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완주하는 것입니다. 인내하지 않고서는 목적지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라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중간에 탈락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 것 아닙니까? 어디까지 참을 수 있습니까?

저는 인내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제가 어렸을 때 시골 동네에 큰 정자소나무가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온 동네 어르신들이 와서 낮잠도 주무시고 했는데 제 친구가 주무시고 계시는 옆집 아저씨의 털을 하나 딱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개미가 문 줄 알고 손으로 탁 치더라고요. 거기서 그만 둬야 하는데 또 한 번 뽑았어요. 그러니까 눈을 뜨고 쳐다보더라고요. 그런데 어린아이니까 “그만해라!” 하고 계속 주무셨습니다. 거기서 그만두었어야 하는데 또 뽑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화가 나서 일어나 난리를 쳤습니다. 한 동네 아들 같은 자식이지만 참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 ‘인내, 인내’ 하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목회하면서 저 만큼 인내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지독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저도 참는 사람입니다만 참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누구나 끝까지 참을 수는 없습니다.

 

기쁨의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마라톤에는 인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을 열정이라고 해도 좋고, 기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뛰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라톤의 유래를 잘 아실 것입니다. 아테네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병사가 뛰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왕실에 승리의 소식을 전해야 되겠다는 열정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무조건 뛰었습니다. 1894년에 아테네에서 근대 올림픽이 시작될 때에 그 병사의 사명감을 기리기 위해서 마라톤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마라톤의 유래는 조국이 이겼다고 하는 기쁜 소식, 승리의 소식을 전해 주고자 하는 열정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존 맥스웰 목사님의 ⌜최고의 나⌟라는 책이 금년 1월에 나와서 읽어 보았습니다. 책 내용 중에 두 명의 교수가 1,500명을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눠서 약 20년을 조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A그룹은 83%에 해당하는 사람들인데 직업을 선택할 때 돈을 최우선 순위에 둔 사람입니다. 그리고 B그룹은 나머지 17%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우선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년 후에 이 1,500명중에 101명이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01명의 백만장자 중에서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100명이 직업을 선택할 때 자기가 좋아하는 직업을 선택한 B그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조사의 목적은 “열정이 직업과 성공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였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니까 성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좋아하니까 잘하고, 잘하니까 사람이 따르고 또 돈이 따르고, 궁극적으로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맨발의 기봉이”를 기억하실 텐데 기봉이가 제일 잘하는 것은 ‘달리기’이고 제일 좋아하는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기봉이가 잘 달리는 이유는 바로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나이는 40살인데 정신연령은 8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장애인’입니다. 기봉이는 동네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음식을 얻으면 어머니에게 가져다 줄 생각에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뛰면서도 엄마가 기뻐할 일을 생각하니까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기봉이는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네 이장님이 기봉이가 달리기를 잘하는 것을 알고 마라톤 경주에 내보냅니다. 기봉이가 마라톤 경주에 나가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마라톤에서 이겨가지고 울엄니 틀니 사줄거여!” 오직 그거 하나를 위해 달렸습니다.

자세도 중요하고 인내심이라는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뛰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공자께서 쓰신 논어 옹야雍也에 보면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아는 자가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가 즐기는 자만 못하다’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머리 좋은 녀석이 부지런한 놈보다 못하고, 부지런한 놈은 즐겁게 신나게 사는 놈만 못하다.’ 무언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인으로서 힘들고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기쁨의 사역자, 예수를 바라보라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목회자로서 이 사역을 계속하게 하는 동인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즐거운 사역자의 모델이 예수님이십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견디셨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다 참고 감당하도록 했습니까? 앞에 있는 즐거움을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구속경륜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회복시키고 인간을 바꾸시는 사역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 기쁨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감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예수를 바라보라! 그 예수를 생각하라! 우리의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하고 그 분을 생각해야 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그 분과 내가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뤄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그 일을 할 수 있고 그 일을 하다보면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암송하지 못하면 어디 가서 새한교회 교인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믿음으로. 여러분 안에 주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이 지금 성령으로 부활하사 내 안에, 내 삶의 주인으로 좌정하심을 믿습니까?

빌립보서 1장 6절에 보면 그 분이 내 안에서 착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2장 13절에는 그 분이 내 안에 기쁘신 뜻을 두고 나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바라보거나, 붙잡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셔서 내 인생을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붙잡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소명, 설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는 목포 새한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입니다. 목포 새한교회의 전신은 1896년 3월 5일에 미국의 유진 벨 선교사님께서 세우신 목포 양동교회입니다. 호남에서는 소위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나뉘어진 이후에 유진 벨 선교사님이 선교지를 나주로 정하려고 했다가 나주 양반들한테 쫓겨납니다. 그 때 그 분들의 연세가 27~28세였습니다. 그런데 목포에 와서는 바로 땅을 살 수 있었고, 그래서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양동교회는 기장 교단으로 당시의 석조건물이 그대로 있습니다.

새한교회는 금년으로 111년이 되었습니다. 110년 동안 말씀을 지켜온 교회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유주의 신학과 싸웠고 에큐메니칼과 싸우면서 자랑스러운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싸울 대상이 없으니까 교회 안에서 싸운다는 것입니다.

제가 90년도에 부임했는데 그 전에 교회가 완전히 깨져서 목사를 중심으로 교인 3분의 2가 나간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교회인지 정치 9단인 장로님이 계시고, 거기에다 신유 은사가 있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거기다 목사님은 교단 정치 9단이었습니다. 고수들이 난리를 치니까 교회가 쪼개질 수 밖에 없었지요. 목사님이 당회에 들어갈 때는 청심환을 먹고 들어갔답니다. 그런 교회였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부임해서 올해로 19년째 사역하고 있습니다. 1997년이 100주년이었는데 교회를 외곽으로 옮겼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가다 마지막 목포에 오시면 왼쪽에 저희 교회가 있습니다. 부지를 구해서 이사하고 예배당을 짓는 과정에서 제가 딱 3번 죽을 뻔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목포에서 전통적인 교회 중에 우리 교회처럼 열린 교회가 없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 보면 새한교회를 이만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새한교회에 보내심을 분명히 확인하고 갔습니다. 정말 가기 싫어서 울고 갔습니다. 목회자로서의 부름도 중요하지만 목회지도 분명한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하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목양지라 할지라도 반드시 몇 번의 고비는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설교가 먹혀 들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먹혀 들었다고 했지 잘 했다고 안 했습니다. 그렇게 까다로운 원로 장로님은 성경을 꾀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님 되시는 분은 성경을 암송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디서 저런 젊은 목사가 저렇게 보수신학을 제대로 배웠는가 모르겠다”고 칭찬을 하더랍니다. 안 그러면 저도 2년짜리였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로 잘 참았습니다. 희한한 것은 당회할 때는 장로들이 무슨 말을 하면 나는 어른처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면 성질이 나서 잠을 못자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당회석상에서 화가 났으면 뒤집는 것 아닙니까? 제 아내가 저 보고 “당신은 목회자로 타고 났소. 어떻게 그렇게 잘 참어?” 그랬습니다. 이번에 대구에 있는 어떤 교회에 가니까 원로 목사님이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무덤에서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감사해야 하는 게 그래봤자 무덤에서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때가 되면 쨍 하고 해 뜰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참는 것이 인간적인 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붙들게 했습니다.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침 운동과 경건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울고, 결단하게 했습니다. 저는 실질적으로 성경공회 건으로 인해 교회에 사표를 낸 적도 있습니다. 저는 그만 두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엄청난 환란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되었지 않느냐?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되었지 않느냐?” 그 때 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나 이 교회에서 죽을랍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하면 명분을 갖춰서 도망갈 수 있을까만 궁리했었는데, 그 때부터는 하나님께 이 교회에서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주일날 교인들에게 “저는 이 교회에서 죽겠습니다. 혹시 제가 죽으면 화장해서 예배당에 뿌려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언이 완전히 제압을 해버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죽으려고 맘먹은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이제 건드려봐야 나가지도 않겠고 어떻든지 잘 살아보자고 한 것 같아요. 지금은 교회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즐거워 합시다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인내하고 참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는 교회라고 하면 온 몸으로 기뻐합니다. 온 몸으로 떱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으면서 교회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술도 안 마시고 멀쩡한 정신으로 사람을 잡는데 이렇게 무서운 공동체가 없습니다.

교회가 너무 무서워서 교회란 무엇인가? 건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미친 사람처럼 98년도부터 막 돌아다녔습니다. 미국이고 인도네시아고 어디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교회론이 정립되면서 교회는 내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회가 행복합니다. 어렵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힘들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이상하게 목회가 신나고 재미있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두뇌기능부전증”이 있다고 합니다. 이 증상이 오면 머리가 쑤시고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결국에는 실신까지 한다고 합니다. 머리가 아파오면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답니다. 현기증을 느낄 때는 엠파이어 빌딩 꼭대기에서 손가락 끝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 보는 느낌이라고 한 걸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은 지금도 강대상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중보기도팀에게 생명처럼 기도를 부탁하고 강대상에 올라설 때마다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십니다” 하며 선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과 아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강대상에 서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분은 예수님만 생각하면 즐겁고 예수님만 생각하면 전하고 싶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강대상에서 말씀을 선포하게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지난 휴가 때 읽은 ⌜레이첼의 커피⌟ 라는 책입니다. 110년 전에 미국의 유명한 석유회사 대주주인 ‘세브란스’는 기독 실업인으로서 한국에 의과대학과 병원을 짓도록 엄청난 후원금을 보냈습니다. 그 후원금으로 에디슨 박사가 세브란스 의대와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에디슨 박사가 감사편지를 ‘세브란스’에게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세브란스’가 보내온 답장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내가 주는 기쁨이 박사님이 받는 기쁨보다 더합니다.”

그렇습니다. 주고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분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그 즐거움을 붙잡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즐거워 합시다. 그런 저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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