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는 말

한국 국민에 있어서 베트남은 현대사의 사건과 추억을 함께 공유하는 나라이다. 공산주의 국가이고 가난한 후진국으로만 생각하던 베트남. 월남전 참전의 추억 속에 언젠가 다시금 언젠가는 다시 찾고 싶었던 그 베트남이 요즈음 한국에서 관심이 날로 커가고 있다고 한다. 그 관심의 증거로 베트남에 투자한 외국인 투자 규모로 제1위 국가의 자리에 한국이 앉았다. 실제 베트남의 몰려드는 한인들의 공동체도 갑자기 커져서 호치민시에만 해도 5만 내지 7만여 명의 한인들이 살면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교계에서도 선교지 베트남과 베트남 교회에 대한 관심도 높다. 그러나 베트남 선교에 대한 관심도와 쏟아 붓는 열정의 수준만큼 베트남 교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바른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바른 선교지 접근과 이해를 위하여 객관적인 베트남 교회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평소에 갖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 지면을 통하여 베트남 교회의 진면목을 몇 가지 항목을 통하여 소개할 기회를 가져 감사한 맘을 가진다.

2. 베트남 개신교회의 시작

베트남은 처녀 선교지가 아니라 이미 기독교회가 있는 지역이다. 현지 교회는 C&MA 선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 세 가정이 정식 선교사로 입국한 해, 곧 1911년을 개신교 원년으로 잡고 있다. 1926년에 신구약 성경이 간행되었고, 1927년 9명의 현지인 목사가 배출되고 “베트남복음성회”라는 이름의 총회가 출범함으로 민족 교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는 프랑스 식민 지배, 일본의 태평양 전쟁 등으로 혼란한 때였다, 연이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대프랑스항쟁, 1945~1954), 2차 인도차이나 전쟁(월남전, 1964~1973), 월남 패망(1975.4.30), 공산 치하의 사회주의 통합 과정 등의 전쟁과 사건을 겪으면서 교회가 부흥의 꽃을 활짝 피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공산 체제가 바뀌지 않은 지금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긴 여정을 통과한 베트남 교회는 순수한 복음주의 전통에 선 보수주의 신앙의 모습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순백한 교회의 모습으로 성숙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또한 은밀한 가운데 양적으로도 퇴보하지 않고 도리어 몇 배나 성도가 부흥하게 된 교회 성장 역사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3. 베트남의 공인교회

분명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인교회”라는 용어가 주는 선입관이 있는 것 같다. ‘공산국가에서 교회가 공인 받으려면 어용이 되거나 적어도 친정부적인 성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공인교회라는 말 속에서 연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중국의 삼자교회와 비슷하겠지’하고 생각하는 경향성이 있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베트남에서의 공인교회는 실상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 1975년 공산화 이후 도시의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는 많은 교회가 폐쇄되고 신학교까지 폐교되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고발되었고 설교한 자나 장소를 제공한 자들은 벌금을 물거나 감옥에 가야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이 되어 베트남의 사회주의 경제가 파산 직전에 이르고 민심을 장악하기 어려워지자 “도이머이(개혁) 정책”을 펼쳐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고 사유재산을 일부 허용하기 시작하고 민심 수습 차원에서 종교에 대한 법령을 제정하여 일부 종교의 자유를 복원해 주었다. 이 때 닫혔던 교회가 다시금 문을 열게 되었다.


▲ 2007년 5월 2일 호찌민 주변 남부지역에 있는  칸호이 교회에서 복음주의 총회 신학교 산하 지역 신학 보충 과정 개강예배를 드리고 있다.  ⓒ 심바울 선교사

199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다시 모임을 허가 받은 교회가 많아졌다. 철저한 사회주의 집단농장체제와 무신론의 공산주의 정치 속에서도 예배를 끝까지 사수한 성도들이 모여 있던 지역의 교회는 기회를 얻어 다시 교회 건물을 돌려받고 십자가를 달 수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의 공인교회는 이런 핍박과 박해 속에서 “예배사수 전통”을 가진 성도들이 교회를 되찾은 성도들이 모임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이런 공인교회의 대부분이 “베트남복음성회(Vietnamese Evangelical Church)”에 속한 교회들이다. 2007년말 현재 약 59만여 명의 신자가 교단 내 통계로 보고되고 있다.

4. 베트남 가정교회 태동의 요인들

1990년대 초반이 되자 가정교회들이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외국에 대한 개방 정책으로 인해 외국 교회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여 비밀리에 그리고 측면에서 가정교회의 개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외부에서 들어 온 선교사역에 의한 교회 개척 이전에 이미 가정교회의 태동을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배경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첫째로, 정부가 마지못해 공인해 준 교회들은 1975년 이전에 있었던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교파나 신자들의 모임은 원천적으로 합법적인 모임 허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 가정교회(혹 지하교회)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둘째로, 1990년대 오순절 계통의 신학이나 기타 선교사 및 해외 선교회를 통해 복음이 유입되면서 베트남 교회 내에서 소위 “방언 파동”을 겪게 된다. 공인교회 목회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1970년대의 신학을 배운 전통교회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인교회의 대부분이 사회주의와 싸워 교회를 지키려 애쓰면서 동시에 그 당대 교회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사수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예배찬양 형태나 교회 내에서 방언 기도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따라서 방언을 체험한 일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 따로 모이게 되었다.

셋째로, 정부에 의해 여전히 목회 활동을 제지당하고 있는 목회자 중 일부, 단기 코스로 신학을 공부하여 급하게 지도자가 된 새로운 형태의 목회자들에 의해 가정교회 그룹이 보다 다양하게 성장하거나 분립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넷째로, 또 흩어졌던 신자들 가운데 아직 합법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공인교회에 속하지 못한 신실한 신자들을 중심으로 가정에서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다보니 가정교회로 성장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다섯째로, 소수부족 모임의 대부분은 공인 받기가 아주 어렵다. 종족주의가 기독교와 결합되는 것을 꺼리는 정부의 정책 때문에 그 동안 소수부족에 수백 처소의 예배 모임이 있어도 공인을 해 주지 않고 있었다. 이들 소수부족 처소 모임 중 다수는 베트남복음성회의 공인교회의 처소로 모임을 갖거나 아니면 지하교회 그룹의 계열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 조금만 베트남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들 속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셨으며 지금은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를 눈여겨 보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 유성문

가정교회의 규모나 통계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정부는 합법적인 교단의 신자만을 통계로 잡기에 그렇다. 현재 최근 1~2년 사이에 새롭게 공인된 교단을 포함하면 약 100만 명 가까운 신자가 개신교인 등록 수이다(북부베트남복음성회 12만 명, 남부베트남복음성회총회 59만 명, 기독연합회(가정교회연합) 30만 명, 침례교 2 교단 2만 명, 기독전도회 2만 명, 장로교 7천명, 메노나이트 5천명 등). 그리고 아직 정식 공인을 받지 않은 가정교회 그룹들을 현지 교회 지도자들은 공인교회의 20~30% 정도가 되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 전체의 개신교 신자 수는 어림짐작으로 적게 말하면 120만 명, 여유있게 말하면 최대 150만 명까지 된다고 추산할 수 있다.

5. 종교법인(교단) 공인화 과정

17도선 이북의 북부 지역에 베트남복음성회(북부) 총회는 가장 먼저 공인된 개신교단이다. 일찍부터 교단 지도자였던 터 목사와 호찌민 정부와의 가까운 관계 및 1988년 종교에 대한 법률 제정에 의해 하노이 신학교 개교를 허락 받아 1기생을 배출한 뒤 문을 닫았다. 현재 15개 공인교회가 있으며 교세는 남부에 비하여 아주 열악한 편이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200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베트남복음성회(남부) 총회가 공인되었다. 이전까지는 교회가 종교 시설을 되찾고 모임을 공인 받은 반쪽짜리 공인교회였는데 이제는 개신교를 대표하여 종교의 자유 및 기타 교회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종교 법인이 허락된 것이다. 연이어 2003년도에는 신학교가 재개교 되었는데 이는 1976년 신학교가 폐쇄된 이후 27년만의 일이다. 지금까지 베트남 교회의 리더십은 한 세대 동안 새로운 목회자 배출 없었는데 이제 새 시대에 걸 맞는 합법적인 목회자를 훈련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04년도에 “신앙, 종교에 관한 법령”에 따라서 가정교회도 새롭게 공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이 법령에 의하면 정확한 신자 명부와 그 동안의 종교 사역 경력 등 필요한 서류를 종교성에 올려 실사를 거친 후 교단을 공인해 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07년 9월에 200여 교회 2만여 신자의 교세를 기독전도회가 합법적 종교법인으로 공인 받았다. 2007년 10월을 전후하여 기독남침례회, 기독은혜침례회(8,400명), 베트남 장로교회(50교회, 7,000명), 메노나이트교회(80교회,5,000명) 기독연합회다.(가정교회 연합, 30만명) 등이 교단 공인 받기 직전 단계인 종교 활동 허가서를 정부 종교성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제는 베트남에서 공인교단이라고 하면 한두 개 교단을 가리키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다. 베트남 정부의 개방화와 국제화, 민족주의 중심의 공산주의 체제 유지 등의 영향으로 현지 교회들의 종교적 자유가 예전에 비해 조금씩 자유의 반경이 더 넓어지고 있는 추세라 말할 수 있다.

6. 베트남 교회의 장점

베트남 공인교회는 중국 삼자교회와는 달리 친정부적이거나 공산주의에 타협하여 인정받은 교회가 아니다. 순수한 신앙과 복음주의적인 교회로 베트남 개신교의 정통성을 보존하고 있는 주류 교단이 바로 베트남복음성회다. 가정교회도 있지만 그 지도자들이 대부분 베트남 복음성회에서 자라고 배출된 인물들이기에 베트남 개신교 안에서 장점을 논할 때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리라고 여긴다.

베트남 교회는 근본주의 신학과 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이 있었던 시기인 1911년도에 미국의 선교사들에게서 복음주의 신앙을 전수 받았다. 뿐만 아니라 식민 통치와 전쟁을 경험했다. 1975년 공산화가 되고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출범으로 철저한 소련식 공산주의를 모델로 한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었을 때, 대다수의 교회와 신학교가 폐쇄되고 종교 활동이 금지 당하고 제한된 한 세대 동안 신앙의 혹한기를 거치면서도 일사각오로 예배드리는 모임을 끝까지 사수하였다. 결국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에 빼앗긴 교회당을 되찾는 등 예배 사수를 위한 거룩한 전투를 계속 감당해 온 역사가 바로 베트남 교회가 걸어 온 길이다.


▲ 베트남 복음성회 성경신학원 기숙사 전경. 열악한 환경이지만 여기에서 차세대 베트남 교계를 이끌 교회 지도자가 배출되고 있다는 것이 안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감사하기도 하다. ⓒ 심바울 선교사

따라서 베트남 교회, 특히 베트남복음성회(남부) 교회는 다음과 같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① 순수한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교회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② 사회의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굳건히 인내한 복음 사수의 자부심이 있다.
③ 전쟁의 고통과 공산주의 체제의 한계를 극복한 지도자들이 교회에 건재하다.
④ 성경에 대해 깊이 알고 성구 암송하는 자들이 많다.
⑤ 교회 밖에서의 전도에는 익숙하지 않으나 교회로 초청하는 일에는 열심이다(종교활동은 반드시 종교시설에서 하도록 제한하는 법적 규정 때문에). 
⑥ 외국 교회의 지원(주로 교회건축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자치, 자전의 의식이 위축되지 않는다. 형제교회로서의 당연한 도움이라고 여긴다.
⑦ 개신교 공인 이후 정부에 교회의 옛 권리들을 복권하는 일에 열심이다. 
⑧ 합법적인 절차를 따르거나 법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교회 개척 및 설립에 열심이다.
⑨ 타의로 한 세대 동안 신학교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인해 어려움도 있었으나 반면에 새로 재개원한 신학교 안에 자질이 뛰어난 인재가 많이 축적되어 있다.

7. 베트남 교회의 양적인 부흥 - 고난 속에 건강해지고 성장한 교회의 표본

1911년 미국 C&AM(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소속의 미국 선교사들이 중부 다낭 지역에 들어오므로 베트남 개신교 역사가 시작되었다. 10년이 지난 1921년에 183명의 신자를 얻었는데, 50년이 지난 1961년에는 32,823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다.

특이한 것은 1975년 공산화 전후에 10만 명의 신자(세례교인 53,425명)가 있었는데, 25년 동안 정부의 공인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계속 부흥하였다. 통계상으로 베트남복음성회가 공인받은 2001년도 4월 집계에 의하면 898개 교회(처소 포함)에 366,903명(세례교인 149,551명)이니 정부의 방해와 어려움 가운데에서 오히려 신자 수가 3배 이상이나 늘어나는 “공산 치하에서의 조용하지만 뜨거운 부흥”이 있었다.

그리고 3년 후인 2004년 교단 집계에 732개 교회, 329개 처소, 518,436명 신자로 늘어났고, 또 3년이 지난 2007년 말 통계에는 904개 교회 1,590개 처소, 588,249명 신자(세례교인 277,694명)로 보고될 정도로 교회마다 새 신자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2007년 1년 동안 처소모임으로 개척되어 모임을 갖고 있는 처소가 160곳, 새롭게 공인된 교회로 등록된 곳이 29곳이나 된다. 예전에는 새롭게 교회 개척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이젠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교회 설립 조건이 맞으면 교회를 세우고 공인을 받을 수 있는 단계가 된 것이다.

1965년~1975년 사이의 통계를 분석해 보면, 전쟁 중에서도 해마다 세례 받는 자들이 대략 1,300~1,600명 정도씩 세례자가 배출되었는데 비해 2007년 한 해 동안 9,665명이나 세례를 받았다고 보고하고 있는 점이 아주 고무적이다.

또한 경제적 요인으로 사회가 빠른 속도로 개방되고 있는 최근 6년 사이에 221,134명의 새 신자가 늘었고, 세례교인 128,143명이 증가했으니 양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특이한 것은 2001년 이후 3년간 신자수가 급증했고, 2004년 이후 3년 동안은 공인된 교회 수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에 현지 교단을 통한 합법적인 교회 개척(처소 설립 및 공인)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이상의 통계를 중심으로 종합해 보면 아래와 같은 도표를 만들 수 있다.

<표1.> 베트남 복음성회 신자 통계표 (위의 3가지 통계 자료를 취합하여 만든 표)

8. 베트남복음성회의 총회 조직 및 신학교

총회 임원의 임기는 4년이다. 2001년 2월에 1975년 공산화 이후 역사적인 첫 총회를 모였다. 이후 4년에 한 번씩 임원 선출을 위한 총회를 모인다. 상근임원으로 7인(총회장, 제1부총회장, 제2부총회장, 총서기, 부서기, 총회계, 부회계)과 위원 16인이 선출되어 총회 운영위원회(Ban Tri su)를 구성한다.

2003년 3월에 신학교가 재개교 되었다. 새롭게 총회가 구성되면서 제일 시급한 문제는 목회자 양성 문제였다. 그래서 신학교 재개교 문제를 최대의 현안으로 삼았다. 애초에 매해 100명 정원의 4년제(학사과정) 신학생 모집을 신청을 했으나 2년 가까이 정부가 인가를 지체하더니 첫 해 신학생 정원을 50명, 2년에 1번 모집 하도록 수정된 안으로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2003년 공산화 이후 세대의 첫 신학생 (1기) 50명이 공부를 시작하여 2006년 10월 31일에 졸업하였다. 이들은 임직목사로서 목회자가 비어 있던 교회에 우선적으로 부임하였다. 다행히 2기생부터는 원안대로 100명 정원을 모집할 수 있게 되어 현재 2기생(2005년 입학) 100명, 3기생(2007년 입학) 115명이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정부로부터 인가된 2년 보충신학과정(Truong Than Hoc Bo Tuc)을 8곳에(다낭,냐짱,플레이쿠,반메투옥,닥농,달랏,빈프윽,호치민) 운영하여 총회 인준 목회자 양성 과정을 운영 중이다. 이 과정이 정부의 인가를 받은 합법적 목회자 양성과정이기에 정규 신학과정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목회자 수를 보충하고 주로 소수부족 목회자나 시골 지역의 목회자 수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각 지역마다 50명 전후의 인원이 공부하고 있는데 주로 단기간 집중 교육과정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며 대부분 나이가 든 목회자 후보생이나 소수부족 전도사가 많이 등록해서 공부하고 있다.

9. 닫는 말

그동안 베트남 교회를 찾아 온 한국 교회의 방문자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시각이 많았다. 심지어 여기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베트남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앞에서 뒤를 돌아보고 있거나 단에 올라 가르쳐야 하는 자리를 먼저 찾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조금만 베트남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들 속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셨으며 지금은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를 눈여겨 보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홍해를 건너고 나서 여호와를 찬양했던 것처럼 베트남 교회를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베트남은 선교사가 드러내 놓고 설교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답답한 지역이지만 위의 사실을 생각하면 베트남 교회당 안에 들어가 앉아 있기만 해도 은혜가 넘친다. 처음에는 선교사가 강단에 서지 못하는 환경으로 좌절하고 불안해 했지만 지금은 강단 아래 지키고 앉아 있는 그 자리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받고 있다. 언어가 다르고 형식이 다르지만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큰 일’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열에 불타는 한국 교회 입장에서는 베트남 교회가 무조건 도와주어야만 하는 선교지의 보잘 것 없는 한 교회로 비추어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베트남 교회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그런 연약한 교회가 절대 아니다. 현대사의 굴곡진 역사 때문에 교회의 하드웨어가 열악하고 힘들 뿐이지, 교회의 전통과 정신은 뿌리 깊이 살아 숨쉬고 있는 교회가 베트남 교회다.

우리가 물질로 헌금으로 베트남 교회의 경제적인 부분을 돕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형제 교회로서 함께 나누는 것이다. 동시에 상호 배우는 작업 중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나눔과 섬김이기도 하다. 결코 베트남 교회는 일방적인 구제나 도움을 주기만 해야 하는 그런 미성숙한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 교회가 베트남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교제하는 가운데 베트남 교회와 함께 하셔서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배워야 할 점들이 더 많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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