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화 물결 속의 한국교회

세계화(globalization)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우리 사회도 세계화 물결에 깊이 그리고 폭넓게 합류하고 있다. 이 물결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거부한다고 사그러들 것도 아니다. 다만 대세로 등장한 세계화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진실에 더 가깝게, 더 깊게, 더 넓게 부합하도록 불고를 새롭게 트고, 때로는 교정하고 개선하는 역동적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 중요한 신앙고백적 자세라고 믿는다.

이런 역동성의 리더십을 과제로 설정하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상황인식의 선결과제가 있다. 세계화라는 이름의 패러다임이 역사적 현실로 등장한 것이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적 변화의 부산물 내지 결과현상이라는 점이다. 탈냉전은 무엇보다도 동구권 사회주의 블럭이 일시에 총체적으로 붕괴되고, 이념적으로는 소위 자본주의적 자유세계의 일극체제를 변모된 현실이다. 우리가 익히 경험하여 알고 있던 동․서 냉전갈등 이라는 적대적 양극체제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단지 2차대전 이후 시작되어 80년대 말로 형태상 막을 내린 양극체제 시대에도 세계화의 틀은 존재해 있었다. 양극갈등 이라는 내연적 틀을 견지한 채 외면으로는 국가단위의 합종연횡이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의 결집으로 나타났었다.

이전시대의 세계화를 우리는 흔히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 시대라 부른다. 국제화를 지탱하던 한 축인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이념적으로 단극의 국제화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냉전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했던 또 다른 갈등구조인 세계도처의 빈부갈등 곧 “남북갈등”이 나 홀로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철두철미 자본주의적 자유 시장경제가 세계를 휩쓸면서 오로지 적자생존 방식의 시장경쟁이 삶의 방식으로 등장했다. 자본과 기술의 우위를 점하는 축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보는 형태로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초국가적 형태로 세계시장을 독점한다. 냉전시대의 빈부격차 보다 훨씬 벌어진 빈익빈, 부익부의 틀 속에 접어든 것이다. 이 틀 속에 군사적, 정치적, 심지어 가치관의 힘마저 동승하는 형식이 되었다.



한국사회는 이러한 세계사적 패러다임의 변모과정에 다행히 유리한 입장에서 동참할 수 있어왔다. 한반도의 분단이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세계적으로는 때 지난 냉전갈등을 겪고 있지만, 사회․경제 및 문화 일반의 상황에서 예컨대 세게 11번째의 무역대국으로 부상했고, 특히 정보기술 산업의 발전으로 나름대로 부국지향의 생존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중진국을 넘어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는 단계에서 상승과 하락곡선을 그어가면서 무진 노력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세계화 속에서 빈부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현상은 한반도의 경우를 보면 명확하게 검증할 수 있다. 적어도 경제문제에 관한한 남한과 북한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좁아지기는커녕 넓어만 가고 있고 또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세계화의 긍정적 특징 중의 하나인 정치적 민주화 내지 자유화의 물결 역시 한국에서는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정치적 자유를 상당부분 유보하거나 희생시킨 바탕위에서 경제성장을 주도해왔던 군부독재가 막을 내리고 정치적 민주화가 실현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세계사적 탈냉전시대의 등장시점과 일치했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경제성장이 일정수준에 달하면 정치적 자유에 대한 열망이 커지면서 민주화가 발동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도 역시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다만 오늘의 한국 상황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상생적으로 조화시키는 과정 곧 부정적이었던 것은 청산하고 긍정적이었던 것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약간의 혼란을 겪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미래 지향의 상생적 조화에 국민이 합의하면 상생의 축복이 임하겠지만, 부정적 갈등과 일방적 승리에 몰입하는 한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전환기에 살고 있다고 본다.

2. 교회의 양극화와 교회 안의 양극화

2.1 냉전체제 속의 양극화


아직은 냉전시대에 속하던 지난 70~80년대에 양극화의 극복이 사회 전반의 화두와 관심사로 부각했었다. 예컨대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중간집단>의 양성과 훈련이 바로 하나의 실례일 것이다. 급격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노사갈등, 대규모 이농현상과 도시 밀집이 빚어낸 도농이완 현상 과 대도시의 중심부-주변부 갈등, 이와 맞물린 계층 간의 사회적 심리적 괴리현상, 권위주의적 정치체제하에서의 체제옹호와 반체제투쟁의 극단적인 대립현상 속에서 양극단을 중재하는 “화해자”의 역할과 동시에 양극화가 빚어낸 인간다움의 삶의 상실을 극복하는 “인간화”의 과제가 중간집단의 핵심으로 제시되었었다.

이 시절의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룩해 냈다. 개발독재가 추구했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의 물결과 정비례하는 급격한 교인 성장을 이루어 냈다. 성장주도의 경제의 뒤안길에 생겨나는 인간소외와 정치적 억압은 교회 안에서 “위로와 안식처“를 찾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의 교회성장은 교회의 ”흡인력“(pull) 보다는 오히려 사회가 교회로 ”밀어낸 힘“(push)에 기인했노라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교회가 이 시절 교인들을 향하여 또 사회를 향하여 화해와 인간화에 진력할 수 있었는가에 관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에 근접하다고 평가하고 싶다. 한쪽에서는 사회의 구조적 인간화를 도외시한 채 개인의 복음화에 매진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개인구령을 도외시한 채 반체제 행동주의의 사회구원에 주력했었다고 본다. 이 점이 교회 내부의 또 다른 양극화의 한 모습이었다.

2.2  탈냉전 시대의 양극화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탈냉전의 상황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냉전체제의 상황과 성격을 달리한다고 본다. 하나는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적대적 냉전대결이 종식되었고, 한반도에서도 냉전의 종식까지는 아니나 남북 간의 적대적 반목 일변도에서 벗어나 “생산적 경쟁구도 속의 대결”로 변모된 점이다. 또 하나는 탈냉전은 곧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무한경쟁의 “세계 시장경제” 체제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에 한국사회가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다. 물론 외국의 선진민주국들과 비교하여 급격한 민주화의 성취로 충분히 소화하지도 또 실험하지도 못했기에 일견 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생산적인 긍정요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우리는 쓰라린 홍역을 치러야 했다. 소위 IMF 위기를 맞으면서 양적성장 일변도의 부실경제가 철퇴를 맞고, 질적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 엄청난 구조조정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빠른 외환위기 극복의 여세를 몰아 현재 세계 11번째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다.

탈냉전화와 민주화의 영향은 교회의 삶에도 크게 미쳤다. 한국교회 내의 신학적 내지 신앙노선상의 대립 또는 양극화 현상의 배경에는 남북대결 속의 이념갈등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 속칭 반공주의를 정치무기화 한 비/반민주적 정치 현실에서 자의든 타의든 체제순응과 체제타파 사이의 메우기 힘든 극단적 대결까지 치닫기도 했다. 보수와 진보, 에반젤리칼과 에큐메니칼의 대립의 배경도 그러했다.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이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면서 동시에 정치와 사회의 민주화가 급속도로 진척되면서 교회집단간의 지나간 대립 및 대결이 쌍방의 일부 극단주의적 부류를 제외하고 나면 거의/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 외환위기를 전후한 한국경제 구조의 변혁과 때를 맞춰 등장하기 시작한 교회성장의 둔화 내지 제자리걸음 현상, 냉철하게 말해서 일부의 감소현상은 바로 양적성장 위주의 “성장위주의 신앙생활”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신앙의 질을 높이는 “성숙한 생활신앙”을 구현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해야 하리라고 본다. 이 양자 간의 간격은 상당히 크다.

3. 교회 내의 양극화 현상과 극복의 과제

3.1 교회의 “정체성”과 “사회성”사이의 양극화


교회는 분명히 세상의 복판에 자리한다. 세상의 삶에 참여한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사명으로 삼는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하심이 그 바탕이다. 그리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헌신한다. 선교와 봉사의 실체로 나선다. 이것을 가리켜 교회의 세계내적 존재 곧 “사회성”(sociality)이라 부른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에 몸담고 살되 세속적 모습으로 살지 않고 세상을 초월하는 삶을 산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을 넘어서 산다.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요 구현체로 살아간다. 세상의 역사와 공존하지만 동시에 종말적 공동체로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identity)이다. 세상 속에 내재함과 세상을 초극함을 동시에 지니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로 살아간다.

오늘날 교회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여러 종교의 하나로 치부되고 있는 느낌이다.  일반적인 사회구성체론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교회의 실존의 근거와 목적에서 보면, 교회는 당연히 종교 그 이상이어야 한다. 예컨대 무한경쟁의 시장경제가 기본적으로 “인간중심”의 그것임을 선언하고, 시장과 시장경제의 “인간화”에 헌신해야 한다. 빈부격차의 무한대 확산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의 무소불위 행진에 윤리적 제동과 신앙고백적 저항을 발해야 한다. 기업의 불의한 횡포에는 신앙윤리의 이름으로 분연히 맞서야 하지만, 노조의 반윤리적 집단이주의적 행태 역시 신앙윤리의 이름으로 냉혹한 비판과 교화에 나서야 한다. 정치영역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지난 시절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미명하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독재권력의 시녀 역할로 떨어져서 교회의 교회됨을 스스로 포기했던 과오는 청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헌신적 비판적 참여로 민주화를 이끌어 낸 공로에 심취한 나머지, 민주화된 오늘날에서도 과거의 저항적 예언자성 만을 고집한 채 미래지향의 공동체적 대안모색에 인색한 정치적 오만은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미래 희망에 동참할 수 있는 출구를 제시하지 않은 채로 심판 위주의 “과거청산” 관련 작업이 바로 그 실례에 속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합의된 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한국교회가 교회의 공공성, 곧 “공적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담당하는 차원에서 가칭 <기독교 정치윤리 연구소> 같은 것을 세워 기독교 신앙에서 본 정치적 행동과 윤리적 규범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각종 정치적 현안에 대한 찬반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방식의 단발적 참여도 필요하겠지만, 중장기적 차원의 원칙과 지평을 제공함으로서 교회의 공신력을 책임성 있게 표명함은 물론 기독교 신앙인들의 정치윤리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본 가치관 형성과 확산의 과제는 경제세계에서도 똑같이 필요할 것이다. 가칭 <기독교 경제윤리 연구소> 설립 운영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기관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 책임적 공공성을 띤다면 다양한 기관들이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 심층토론과 건설적 합의의 폭과 가능성을 심화하고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는 점증하는 인구구성에 있어서 고령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심각한 저출산의 문제는 한국사회 전반의 지속적 생산력, 국가 안보력, 연령별 인구 적정비율의 저하 등의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출산 장려대책에 효율적으로 동참함과 아울러 차별없는 인간중심의 사회구성에 걸맞게 국내입양 활성화 방안, 점증하는 국제결혼을 통해 생기는 혼혈아들의 적극적 사회수용을 추진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도 세계화 속의 세계시민화 형성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또 고령화와 저출산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가정의 가치 저하” 현상에 눈을 돌려야 한다. 가정 내에서 조차 고령의 부모가 베이비 씨팅 말고는 원하든지 또는 밀려서든지 노소간의 가정 공동체 형성이 급진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교회는 이점과 관련하여 예배와 여러 다양한 활동을 통해 가정 구성원들의 주기적 만남과 우의를 다져줄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사회는 물론 교회의 공동체는 건강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3.2 교회들의 “화해된 공동체”를 위하여

교회 내의 양극화 현상 가운데서 시급히 극복해야 할 과제로 두 가지를 제시해 보려고 한다. 하나는 신학교육과 목회현장의 점증하는 괴리현상이고, 또 하나는 한국교회들 상호간의 극심한 빈부격차 현상이다.

첫째로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의 심대한 구조개혁이 필요하다. 오늘날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 기관 모두가 세계적 지평에서의 전문영역별 학술적 업적경쟁은 물론 산학협동 방식 등을 통한 실천적, 실무적 전문인을 양성해야 하는 생존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다. 대학이 사회를 지성적으로 이끌어도 가지만, 동시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인력을 효율적으로 공급해줄 수 있어야 한다. 신학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여기서 일단 신학의 학문적 발전의 문제는 접겠다. 단순한 번역신학의 틀을 넘어 글로벌 스탠다드에 필적할 만한 신학학문이 보수든 진보든 활발하게 진척되기를 바랄 뿐이다.

신학대학과 목회현장의 협동에 관한 문제가 있다. 목회현장의 요구는 다양하고 크다. 흔히 국민소득 10,000$을 분기점으로 하여 사회일반의 의식과 삶의 방식이 변한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과거의 급격한 교회성장이 멈추거나 오히려 감소추세를 보이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경제소득으로 말하면 1만불 시대를 시작한 90년대 중반부터라는 사실을 단순히 상황적 우연으로 평가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현장 목회자들의 새로운 결단과 함께 교회구성원들의 영적 심리적 위로와 기대를 최대한으로 충족시키며 효율적으로 목양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소득상승은 물론 이와 비례하여 생활방식과 사고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결국 “성숙한 목양” 과 “질좋은 목양”의 요구일 것이다. 과거처럼 소품종 다량생산이 아니라 다품종 소량생산이 새로운 현실이다. 요구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제안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이다. 하나는 신학대학/신학교의 과감한 구조조정이다. 질적 경쟁의 과정에서 기본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의 교육기관은 폐기 내지 흡수 등의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신앙적 열성과 헌신적 사명감만으로는 미래의 목양을 이끌 수 없다. 목회자 양성이라는 백화점식 교육이 아니라 전문영역을 개발한 전문점으로 탈바꿈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배와 찬양, 목회상담, 노인복지 목회, 청소년 목회사역 등등의 전문화를 통하여 현역 목회자들의 재교육 과정은 물론 신학생 및 평신도들의 전문훈련 기관으로 변신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 교회간의 빈부격차 해소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 경제계의 구성이 재벌, 대기업, 중소기업, 영세산업으로 나뉘듯이 한국교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 이다. 모든 교단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고민은 소위 미자립 또는 영세한 교회의 분포가 절반을 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줄어들기는커녕 늘어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신학 졸업자들의 공급과잉과 개척교회 건립운동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단 마다, 교단의 노회/지방회/연회 마다 개척전도 지원 내지는 미자립교회 지원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역부족이다. 여기서 위의 신학교육 기관들의 경우 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방안이 있을 건이라고 본다. 하나는 난립한 교회들을 일정한 지역단위별로 통합하는 방안이다. 교단내서는 물론이지만, 초교파적인 협력으로 일정한 협상의 틀을 합의한 바탕에서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이상론이라 들릴지 모르나, 곧 이어 닥쳐올 현실일 것이다. 또 하나의 제안이 있다. 교단 차원에서도 물론이지만, 개교회들이 일종의 가칭 <자립지원 은행>을 설립하여 엄밀한 심사와 실사를 통해 자립가능교회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되 시혜적 지원이 아닌 장기 저리의 융자 방식으로 지원하자는 것이다. 이 은행은 또 앞서 언급한 합해진 교회들의 목회자 지원금으로도 일정부분 할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급격한 양적성장은 세계교회가 모두 부러워했다. 아마도 서구 교회처럼 국교화 내지 국민교회화라는 일종의 기독교화 현상을 제외하고 자발적 선교현상으로는 역사상 초유의 성장력을 보였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겸손하게 분석해 봐야할 것이 있다. 우선 한국교회의 급성장 물결은 한국교회의 경제적 급성장 과정과 그 괘도를 같이한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동력이 멈추고 제자리걸음 내지 오히려 둔화하고 있는 현상은 바로 양적 경제성장 물결이 철퇴를 맞던 외환위기 시절의 현상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코 우연일 수 없는 상황은 바로 국민소득 1만 불로 진행하면서 양적 경제성장에서 질적 경제 발전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듯이 교회성장도 이때를 전후하여 양적 교회성장주의가 멈추고 질적 신앙성숙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질적인 삶에 대한 욕구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와 자유 욕구로 분출되고, 경제적으로는 부의 축적 자체보다 질적 행복의 추구를 변화되고, 신앙적으로는 기복주의적 황금만능주의에서 질적 신앙성숙과 그에 걸맞은 행복과 축복의 염원으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보겠다.

이런 일련의 변화과정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삶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뚜렷하게 엿볼 수 있다. 소위 물량적 성장주의가 때 맞춰 등장한 엄청난 정보기술의 발달과 맞물리면서 기술적 편리함과 기능주의적 효과를 만끽하게 된 반면, 인간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향수와 기대가 그만큼 커지고 있다. 성경말씀 대로 하면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소박하나 절실한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빵이 모자라 빵의 축적을 노래해야 했단 시절의 기복주의는 인간의 행복추구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낼 수가 없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진실로 추구하려는 욕망과 기대가 충천하고 있다. 이 둘은 상호 분리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동일하지도 않다. 일만 불 소득수준 이후에 모두가 공감하는 경험적 결론이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가치관을 삶 속에 대안으로 제시해 주어야 한다. 빵을 축적하는 방법을 신앙생활 속에 주입했던 빈곤시절의 가치관 말고, 어떻게 빵을 나누며 “스스로” 그리고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지를 가르쳐주는 복지시대의 새로운 가치관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된 소식이고, 이것을 모두가 갈구하고 있다.

4.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모습 - ‘심포니적 교회’

세계화 시대의 오늘과 내일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심포니적 교회” 라고 생각한다.

4.1 다양성을 살려 합일에 이르게 하는 교회이다.

심포니는 다양한 음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화음이다. 아름다운 합창이 그것이다.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가 제각기의 소리를 내는 화음이 아름답다. 다양한 악기들이 각기 제소리를 제대로 내면서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의 합주가 아름답다. 합창이나 합주는 획일화된 소리가 아니다. 여럿이 모여 하나를 만들어 낸다. 교회가 하나의 심포니적 공동체라 한다면, 목회자는 그 교회 심포니의 지휘자 역할을 맡게 된다. 교회 구성원들 각자의 달란트를 최선으로 기능발휘하게 도와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살리는 달란트들의 화음을 아름답게 이끌어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교인들의 다양성은 신분, 연령, 성별, 학식, 가치관, 생활방식, 신앙의 관점 모두를 포괄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교회는 몸은 하나이고 지체는 여럿이라는 점, 지체는 몸에 붙어 있고 몸의 자양분을 먹고 공생공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4.2 상생의 엮어냄을 구현하는 교회이다.

합창이나 합주의 지휘자는 단원들로부터 지휘에 순종하고 적극 협력할 만한 전문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권위있는 전문성을 인정받아야 단원들의 다양한 음을 화음으로 엮어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권위주의가 아니다. 권위에는 자발적인 승복과 협력이 뒤따르지만, 권위주의는 내적 거부와 반란을 내포한다. 목회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배하려드는 권위주의는 이해가 상통하면 친위대 비슷한 충성집단의 형성을 가능케 하지만, 이해가 다를 경우 집단적 반발을 초래한다. 권위주의적 리더십은 순종자는 끌어안으나 불순종자는 제거한다. 때로는 교리적 언설을 내세워, 때로는 성직의 불가침성을 내세워, 때로는 성서말씀 해석의 독단적 권위를 내세워 위로부터 평정하려 들지만, 아래로 부터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상생을 위해 엮어내기 보다는 일방의 생존을 위해 타방을 잘라내고 억압한다. 한국교회 가운데서 분출되는 교회내분이나 갈등의 원인 중 바로 목회자의 권위주의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고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다양한 지체를 엮어내는 네트워킹의 권위는 지체가 속한 몸통이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아는 전문성이다. 목회자 스스로가 몸통이라거나 몸통의 대행자라는 착각을 즐겨하는 권위주의는 성서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비전문적 아마추어리즘이다.

동시에 교인은 심포니 교회의 귀중한 연주자들이다. 연주하는 악기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다. 그만큼 주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다양하다는 뜻이다. 모든 달란트는 교회의 덕을 세우며 선교하고 봉사하는 심포니속의 달란트이지 혼자 무대에 서는 솔로의 그것이 아니다. 지휘자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홀로 자신의 악기소리를 시끄럽게 내거나 몇몇 악기 소리만을 독주하듯 내게 되면 심포니는 엉망이 된다. 솔직히 말해서 지휘자의 전문성과 역량이 중요한 만큼, 심포니 주자들의 전문성과 열성이 중요하다. 어설픈 아마추어리즘이야 말로 교회의 공동체성을 파괴한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연주이기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시편의 말씀대로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시 133:1)바로 그것일 것이다.

우리가 부여받은 교인들 각자의 재능과 직분은 바로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롬 8:28)은총의 집합체로 살아간다. 상호간에 속으로부터 진실로 내통하는 속사람의 네트워킹이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외형적인 율법처럼 돌판에 새겨진 계율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사랑과 헌신의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4.3 복음의 진수만을 붙드는 한 우물 파는 교회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교인들이 그리스도와 진지하게 접목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데에서 나온다. 접목의 핵심은 예배이다.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목회자의 근본이 바로 접목작업이다. 근자에 들어 “경배와 찬양”이라는 새로운 예배 스타일이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있다. 그 깊은 뜻을 헤아려 존중하고 싶지만, 교회들마다 시연되는 현실을 보면 실망스럽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이기 보다는 참여자들의 자기충족의 이벤트 같아 보일 때가 많다. 어찌 보면 찬양의 모습이 너무도 어설픈 성가 노래방 같기도 하다. 출연자와 목회자의 모습은 이런 경우 엔터테이너로 보이기도 하고, 그 미성숙과 어설픔 때문에 차라리  이보다는 훨씬 세련된 세속 전문공연장을 찾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들게도 한다. 하나님께 진솔하게 경배하고 기쁨을 축복으로 받기보다 스스로 즐기면서 자축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경험한다. 이런 기술적, 기능주의적 예배 기획 속에서 설교는 복음의 진수를 전달하기보다 감미로운 개그로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진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성장이 멈춘 뒤에 스며드는 불안감이 이해는 된다. 일종의 신학적 엔터테이너로 변신해서라도 교회를 성장시켜야한다는 강박관념도 동정은 간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떠들썩한 장터에서 웃고 울리며 약을 파는 약장사가 없어도, 노래방 닮은 찬양이 없어도, 조용한 “그대만의 명상”을 가능케 하는 예식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천주교나 불교를 보라. 물질적 풍요속의 정신적 빈곤을 진심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 시끄러운 장터 같은 예배는 “손님”을 끌 수 없다. 예배는 감성적 예능 시연이 아니다. 소박한 복음의 전파요 그것으로 얻는 잔잔한 감동이 필요하다. 순수성과 전문성, 그것이 바탕이 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이 조용히 그러나 진지하게 말씀으로 함께 하신다.

우리 교회들이 심각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고려하고 반성해야 할 현실이 있다.  2004년 「한국갤럽」이 전국을 상대로 종교와 신앙부분에 관한 여론조사를 했는데 중요한 것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1997년의 경우 한국민의 종교별 신자수는 개신교(20.3%), 불교(18.3%), 천주교(7.4%)순이었다. 이것이 2004년에 들어와서는 불교(24.4%), 개신교(21.4%) 천주교(6.7%)순으로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성장이 괄목하다는 점이 하나이고, 기독교는 개신교의 경우 1.1%성장과 천주교의 경우 0.7% 감소라는 현상이 다른 하나이다. 솔직히 말해서 개신교의 경우 예나 지금이나 교인들의 수평이동은 점증하나는 현실이고 또 교회의 적을 이중 삼중으로 등록된 채 지워지지 않고 통계에 잡히는 점을 생각한다면 개신교인 숫자는 훨씬 적을 것이라 생각한다.  1만불 소득 시대와 정보기술시대의 인간의 삶을 처음에 언급했지만 복음전파와 신앙생활에 있어서 진지함과 솔직함을 원하는 현대인의 바람을 우리들 교회가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4.4 영성의 깊이를 회복하는 교회이다.

합창이나 오케스트라의 경우 단원들이 착용하는 복장이 있다. 평복이나 캐주얼 복장으로 연주하는 특이한 옥외공연이나 특별행사의 찬조출연의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음악회의 권위와 전통은 음악성과 함께 연주복이 지니는 상징성에 묻어나온다. 한국교회 강단의 목회자 가운도 바로 이런 상징적 가치가 있다. 그런데 교파별로도, 교단별로도 통일된 게 없다. 각양각색이다. 다양해서 좋긴 하다. 공통분모가 있다면 한국교회 목회자 가운은 미국전통의 대학용 가운이라는 점이다. 가운의 소매에 학위표시까지 한다. 진짜 학위도 있지만 소위 가짜 학위도 부끄럽지 않은 듯 표시하고 있다. 설교 목회자의 권위는 대학의 학술강연자의 그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진실로 목회자적 영성과 진실을 상징화 할 수 있는 목회가운을 함께 개발하여 착용하자고 말이다. 아예 가운을 벗어던진 평복의 설교자나 예배 인도자도 늘어나는 추세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가운을 착용하고 말씀과 성례전을 엄숙하고 진지하게 집행하겠다는 전제라면 그에 걸맞은 복장이 필요하다고 본다. 문명과 기술이 발전하고 현대화 될수록 아름다운 전통의 맛을 만끽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과 사회의 기본심성이다. 경건함과 영성을 겸허하게 담은 복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복식의 상징성만큼 심오한 영성의 담지자가 이 시대의 목회적 리더일 것이다.

목회자 직분의 목양적 상징성을 보다 선명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천주교나 정교회의 경우 목회자의 상징적 권위를 목회자 개개인의 설교능력이나 도덕적 수준유무 보다 “성직” 자체의 권위에 두고 있다. 개신교의 경우는 목회자 개개인의 능력과 인품으로 개별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양자의 경우 다 장․단점이 있다. 다만 개신교의 경우 목회자 개개인의 인격적 권위만큼이나 목양적 직분의 공동체적 상징성을 이제는 보완해야 할 때라고 본다. 목회직의 특수성 내지 특수한 상징성이 다원화 사회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목회할 수 있는 특징이 되리라 믿는다.

교인들의 경우도 상징성은 마찬가지이다. 정부당국이나 사회단체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려면 누구나 특별히 요구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정장을 하게 된다.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장중한 음악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옷매무새도 마찬가지 이다. 분위기 또한 그와 상응한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우리들끼리 모이는 집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o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준비며 필요한 상징적인 복식의 준비는 어떤가. 화려한 패션쇼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경건함과 진실을 담은 상징을 찾자는 말이다. 예배는 엔터테인먼트일 수 없다.

5. 십자가 우물에서 부활의 생수를 제공하는 교회

심포니 교회화 했지만 그 교회의 핵심에는 몸되신 그리스도이 십자가가 있다. 요즈음 교회에 가보면 대형 스크린을 제단에 설치하느라 제단의 십자가가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아니면 아예 가리워진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십자가는 교회가 탄생한 출신지이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십자가는 그저 상징이 아니라 신앙적 삶의 뿌리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악과 죽음을 이긴 생명과 승리의 부활을 담는 그릇이다. 십자가 속에 부활의 광채가 담겨 있다. 부활의 기쁨을 교회가 예배를 통하여, 설교와 봉사를 통하여 스스로 맛보며 전파해야 한다.

심한 지체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한 어머니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에게는 작고 예쁜 십자가 하나가 있습니다. 원한 것도 바란 것도 아닌데 좋다고 가질 수도 싫다고 버릴 수도 없는, 웃으면 웃어서 슬프고, 울면 울어서 슬프고 잠들면 잠들어서 슬프고, 너무 작고 예뻐서 가슴 저린 나만이 안고 가야할 아주 작고 예쁜 십자가 하나가 있습니다.” 이런 작고 예쁜 십자가를 지니고 사는 부모들의 심정은 마치도 온전치 못하고 죄 때문에 장애자가 된 인간들의 모습을 가슴에 부여안고 치유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백적 심정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걸머지신 크고 험한 갈보리 언덕위의 십자가는 부활의 생명을 탄생시킨 십자가이다. 그분은 우리보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명하신다. “작고 예쁜”십자가 말이다. 그 속에 담긴 부활의 생수를 찾아 마시라고 하신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허위이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무의미하다. 부활의 생수를 담은 십자가가 우리의 삶이요 교회 공동체이어야 한다.

우리 민족공동체의 십자가는 분단의 철조망이다. 분단의 우물에서 통일의 생수를 마시고 싶다. 전쟁과 가족 이산의 아픔을 딛고 평화의 재회의 기쁨을 맛보고 싶다. 참혹한 죽임과 냉전적 대결의 상징인 판문점이 통일을 통하여 생명과 화해의 상징인 “새 판문점”으로 전환될 희망을 가져본다. 비무장 지대가 평화와 화해의 동산으로 뒤바뀐 미래를 꿈꾼다. 분단의 아픔을 흘려보내는 임진강이 통일과 평화의 기쁨을 흐르게 하는 강물로 변화 할 것을 기도한다.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라” - 주님의 십자가 우물에서 영광된 부활의 생수를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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