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토론을 위한 자료로 만들어진 것이며 완성된 논문이 아닙니다. 무단 복제나 직접 인용을 삼가 주십시오.)

기독교에 입문도 못했고 교회 내부 사정도 모르는 사람이 양극화 해소를 위한 교회의 대안이라는 어마어마한 주제에 관해 교회사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발표를 맡는다는 것은 극도로 무모한 짓입니다. 제가 감히 이 자리에 나오기로 한 것은 사회 양극화 현실이 우려할 만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문제의식의 공유와 그러한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고 극복하는 데는 교회만큼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집단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울대 학부 시절의 학우요, 서울대 동료로서 평소 존경해왔던 한완상 박사가 자리를 같이 한다는 말에 선뜻 응낙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어느 일간지가 그 분은 진보진영의 대표로, 저는 보수진영의 대표로 발표에 나선다고 쓴 것을 보고 새삼스레 놀랐습니다. 저 스스로는 자신을 보수라거나 진보라거나 하는 식으로 분류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일 동안 서울대에서 뿐 아니라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에서 한국사회의 인간화와 민주화를 위해 같이 노력했던 저희 두 사람이 어느 틈에 서로 다른 진영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양극화 문제의 한 단면임을 깨달았습니다. 양극화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 못지않게 그것을 보는 시각과 인식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말씀입니다.

2002년 월드컵 주최국으로서 우리가 4강의 쾌거를 이룩했을 때 우리는 세상에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듯 했고 세계인들의 흠모와 경탄의 대상이었습니다. 제게 특히 감격스러웠던 것은 4강의 고지에 올랐다는 사실보다도 세계 방방곡곡에 퍼져 있는 우리 동포 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쳐 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해방 전에도 후에도 한 번도 없었던 일이며 목메어 외치는 그 함성 속에 지난 반세기, 아니 한 세기 반의 고통과 갈등과 울분이 용해되어 사회통합과 평화 통일을 향한 새로운 희망과 힘으로 솟아나는 듯 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3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다시 깊은 갈등과 좌절, 불안과 치욕의 늪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경제불황과 높은 실업률 속에서도 불로소득으로 부자가 된 일부 철없는 기득권층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희희낙락하며 외국으로 빠져 나갈 꿈만 꾸고 있고 뼈 빠지게 일 하고도 생활고와 사회불안 이중의 중압감에 시달려야 하는 일반 서민들의 분노와 냉소는 권력이고 돈이고 지식이고 무엇이고 가진 덕분에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짙어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 60% 이상의 국민이 자기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여론 조사에 응답하며 건전한 주인의식을 표명했던 시절과는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한편에서는 마치 내일이라도 통일이 이룩되어 겨레의 모든 꿈이 손쉽게 실현될 수 있을 듯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한반도기를 흔들어 대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국민은 굶어 죽어가도 핵무기로 세계를 협박하고 있는 북한이 아니라 그 눈치를 보게 된 우리 대한민국이 먼저 공중분해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대한민국을 세우고 이끌어온 주역들 다수가 국가권력이 지원하는 기구에 의해 민족반역자로 낙인찍히고 있고 평화교육 이름으로 반미 교육이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뿐 아니라 대한민국은 일찍 사라졌어야 할 나라라는 취지의 발언이 학자적 양심의 표현으로 비호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를 보는 외부 전문가들의 눈은 찬탄이 아니라 의혹과 우려, 심지어는 경계와 경멸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일본 어느 우익 단체에서는 지난 가을에 벌써 대한민국에서 국가해체현상이 일기 시작했다는 대내용 보고서가 나온 실정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나라란 어떤 나라입니까? 계층 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근본적 질문들에 대한 답이 엇갈리고 있으며 일시적이며 현명한 정책으로 해소될 수도 있는 계층 격차 문제를 마치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우리 체제의 고질적 병폐인 양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양극화 현상의 복합적 구조

양극화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위기를 간략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입장이 갈리는가에 따라 그림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앞서 말씀드렸듯이 한 완상 박사와 제 입장은 "보수"와 "진보"라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언론에서 분류되고 있고 실제로 정당 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견해에서는 갈릴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기본 이념과 철학에서 우리 두 사람의 입장이 과연 다른 것인지는 전혀 확인된 바 없습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이 잘 되기를 바라느냐 아니냐 하는 질문에 이르면 이견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장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양극화가 격화되는 듯한 현상이 이는 이유는 그러한 현상을 자연스레 낳게 되는 경제사회적 현실의 발생에도 있겠지만 양 쪽을 가르는 기준의 모호함과 그 결과 발생하는 오해와 불신에도 있다고 봅니다. 오랜 시일 동안 우리는 노동자에 대한 관심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몰아 부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모든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함으로써 그것의 참 의미를 왜곡시키는 일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마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로 연관이 있을 수 있는 두 가지, 또는 여러 가지 일들 사이에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전체의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경향도 짙어졌습니다. 두 가지 경우 다 결국은 흑백론적 시각이나 나무만 알고 숲은 보지 못하는 단세포적 사고로 귀착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경우, 황우석 사건의 불행한 전개에서도 보았지만, 사회 전체가 선동선전 작전에 쉽게 넘어갈 수 있게 되고 그 결과로 더 깊은 오해와 불신이 생기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입니다. 양극화 현상을 진단하고 그 것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현상이 중층적 복합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구조를 해체해 구체적 사안들과 연결지어 부분별로 검토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념갈등의 허상과 실상

지금 현재 극우로 분류되며 가장 강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투사 집단들이 우려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헌법 정신인 자유민주주의와 사유재산 보호의 원리가 훼손되면서 이념적 혼란이 일고 있고 그러한 혼란을 배후에서 획책하는 것이 북한의 김일성 집단이라는 것이 공산주의 북한과 싸우면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피를 흘렸던 그들의 생각입니다.

우리 정부나 집권층의 공식 입장은 물론 그러한 주장에 대한 전면 부정입니다. 어느 대통령도 여당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국민에게 위임받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정 입법안이나 정부시책이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 원리의 훼손이라는 비판이 일면 그 때의 반응은 "냉전적 사고"를 버리고 색깔논쟁을 중단하라는 반격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갈등과 불신이 깊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냉전이 종식되었고 색깔 논쟁은 끝났다"라는 허구 또는 속임수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냉전은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유럽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자본주의 세력의 일방적 승리로 종식되었습니다. 한 때는 냉전의 종식이라는 말이 갖는 그러한 의미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남한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획기적 발전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혔고 북한은 "실패한 국가"의 표본이었기 때문입니다. 불과 5~6년전 까지도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 가능성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논의되기도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났다는 안일한 생각은 환상임이 곧 들어났습니다. 북한이 실패를 자인하고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처럼 개방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대신에 국민은 굶어도 핵을 만들어 세계를 위협하는 더 큰 문젯거리로 등장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민주화의 성공 시점이 유럽의 냉전종식과 맞물리면서 반세기 이상 억제되었던 이념갈등이 표면화 될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남북한의 사정이 전혀 대등하지 못한 실정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체제논의에서 역설적이게도 오랫동안의 지하투쟁 경력을 가지고 있는 좌익은 극히 소수이지만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적 도구로 중무장하고 고도로 세련된 선동, 선전 기술과 조직망을 구비하고 있었지만 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승리를 확신하며 자만에 빠져있던 우익에게는 그러한 대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념투쟁은 공개석상에서 솔직한 이론적 문제제기를 통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냉전은 끝났다"라는 연막 속에서 약자의 인권보호나 부정척결을 위한 개혁, 또는 민족통일이라는 누구도 거부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현수막을 걸어 놓고 구체적 정책대안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었습니다. 사학법 개정안이나 보안법 폐지안 등 특정 사안들이 헌법 정신을 위배하는 함의를 가지고 있거나 대한민국 국가안보에 직접적 위협이 된다는 보수세력의 지적은 집권세력의 불가항력적 고집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무서운 "냉전적 사고는 버려라"는 좌파 인터넷 세력의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조성되는 은근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지한. 대화의 통로가 막히고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은 기정된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전직 국무총리 여러분이 한꺼번에 거리 시위에 나서고 김수환 추기경이 눈물까지 흘리는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언론계에서 마저 주요 일간지들은 우익으로 기울고 방송은 좌익으로 기우는 기이하고 불건전한 양분화 현상이 일어났고 정부는 공공연하게 방송편을 들며 신문의 발행부수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기에 까지 이르렀지만 여기서도 내세운 명분은 언론 개혁이었습니다. 항상 내세워지는 명분은 인권 보호, 부정 척결, 계층 간 격차의 해소 등 누구도 거부하기 어려운 보편적 대의였지만 실제로 그런 법안이나 정부 시책이 표방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적합하고 국가안보나 민주주의 이념체제의 근간을 흔들어놓는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염려는 없는가에 대한 신중한 검토와 토론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 국가보안법 폐지안의 경우나 사학법 개정안의 경우나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국민의 정신이 아름다운 명분에 집중되어 있는 사이 그들이 의심하지 않는 심대한 국가 구조적 변혁이 추진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거듭되는 것을 보면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던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를 좌익정권으로 보고 불신하고 저항하게 되는 것은 예기하기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양극화 심화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체제 변혁이 솔직하고 공개적인 이념논쟁을 거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집권세력에 의한 날치기 식으로 추진된다는 것은 참으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쯤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계몽주의의 같은 뿌리에서 나온 사상체계임을 인정하고 공론조성을 통한 점진적 개혁으로 복지국가나 사회민주주의 이상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계층 간 반목과 갈등의 원인을 구조적으로 제거하고 국가 발전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시도를 해볼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숙해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사회주의 이상과 배합이 될 수 있고 평등주의적 사회 이념이 국가종교의 인정과도 같이 갈 수 있는 예는 북구의 선진국들에서 모범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사회주의와 상반되는 이념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가난의 세습"이니 하는 자극적인 표현을 쓰며 부자들을 공격하는 것이 마치 사회통합과 번영을 이룩하는 길인 듯 그야말로 냉전시대의 계급투쟁론적 의식구조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으니 기득권층이 보수화되고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나라는 가난한 농부로 태어난 정주영이 세계적 재벌을 이룩하고 최고학력이 상업고등학교인 사람들이 연거푸 대통령이 될 수 있으리만큼 이미 열려있는 민주사회인데도 마치 사회 불평등의 심화가 정책의 실패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체제자체의 이념적 결함에서 오는 듯한 환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세계화는 경제가 작동하는 원리와 산업화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역사적 추세를 말하는 것이지 사회주의와 같이 이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보수와 개혁 양쪽이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그러한 추세에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문제이지 외면하는 것은 안되며 북한이 "실패한 국가"로 전락한 것도 그 것을 모르고 폐쇄 체제를 고집해 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대북 정책과 통일문제

사회체제를 변혁하려는 어떤 시도도 우리나라에서는 체제 파괴 기도로 이해 또는 오해되고 보수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북한의 존재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제 개혁을 향한 움직임은 북한과의 관계나 통일 논의를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렵고 그 두 가지 일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고 인식되는가에 따라 찬반의 입장을 첨예하게 갈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극도로 이기적이며 무분별한 반동적 기득권 세력을 논외로 할 때, 대한민국 국민임에 자부심을 느끼는 대다수의 생각있는 사람들은 개혁은 사회변화에 맞추어 부단하게 추진되어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시의 적절한 개혁이 사회통합에 기여하고 체질강화에 기여한다 함은 상식입니다. 개혁정치에 대해 강한 저항이 이는 것은 그것이 북한에 대해서 뿐 아니라 다른 이웃들에 대한 우리의 상대적 입장을 약화시키고 대북관계에도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생길 때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포용정책은 북한에 대한 대한민국의 절대 우위를 상정하는 가운데 출범한 정책입니다. 남북 상호간에 적대의식을 버리고 북한이 정상국가로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는 길이고 흡수통일 보다도 비용이 적게 드는 평화적 공존의 길이라는 발상이 1994~5년의 핵 위기를 겨우 넘겼던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가졌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도발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있었습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국민의, 특히 현 집권 세력의 대북 의식은 어제까지의 주적이 핵보유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걱정하기보다 오히려 속으로 반길 정도의 맹목적 신뢰로 대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북한이 만들어낸 반미 구호들을 여과없이 그대로 쏟아내고 있으며 이제 민족의 적으로 규정당하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끌어내리려는 움직임까지 가시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북한의 대남 적대 전략에서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공공연하게 비방적이었던 대남 구호를 "민족공조"라는 매혹적인 구호로 대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핵으로 협박하면서 우리 내정에까지 공개적으로 간섭하려는 듯한 오만함을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입니다. 일부 우리 정치인들은 한번 김정일을 만나는 것이 큰 애국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듯한 정치 효과를 가진다고 믿고 있는 듯 행동하니 그 쪽이 오만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평양의 모란중학교는 남한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자기학교는 미군 장갑차에 사고를 당한 미선이 효순이의 영정을 모셔놓고 명예 졸업장을 주었다고 공공연하게 자랑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힐러리 미 상원의원이 지적했듯이 기이한 역사망각증에 걸린 것입니다.

햇볕정책이란 냉정하게 따져 볼 때 통일에 대한 막연한 염원과 전쟁에 대한 공포, 낭만적 민족주의, 정치인들의 야심, 그리고 통일이나 대북관리 비용을 최소화 할 수 있다는 이기적 타산의 야합으로 출발한 것이지 치밀하게 계산된 사전 준비를 거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붕괴위기에 직면했던 북한의 민족공조를 내세워 남한에서 필요한 지원을 받으며 내부적으로 남한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공공연한 적대정책을 계속하는 것보다 체제 경쟁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고 그러한 복합적 야합의 결실이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6.15 남북정상회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측에는 화려한 연출 뒤에 숨어있는 대비가 없었고 개방된 민주주의 체제에만 익숙한 우리 국민은 북한 체제의 비밀스런 작동방식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방비 상태였던 것입니다.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때로는 달성하는데 익숙해졌던 사람들은 대북관계에서도 고통과 희생없이 대박이 터지는 길에 들어선 것으로 착각하고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까지 나서서 그러한 환상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러한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직면하지 않고는 나라와 민족을 가장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서로 폭력으로 대치하는 상황에 까지 이른 지금의 위기가 내란과 전쟁으로 연결되는 것은 방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봅니다.

우선 반세기가 넘게 서로 다른 이념을 표방하며 전쟁을 포함한 대치관계 속에서 살아 왔으며 현재 전혀 다른 경제적 역량을 갖고 있는 두 개의 정치체제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민족공조"라는 구호를 내세운다고 하루아침에 청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상식 밖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믿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분단으로 맺힌 한이 너무도 깊고 우매하게 추진된 반공정책의 피해가 너무도 커서 조속한 평화통일에 대한 기대와 염원이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산가족 장면의 연출효과에 도취되어 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오가는 것을 민족공조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허용하지 않는가를 묻는 것을 잊습니다. 북한의 정치와 사회에 관한 지식과 정보의 절대 부족 또한 큰 원인입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또는 6.25 전쟁 중에 북한식 공산주의의 실상을 직접 체험해 본 세대가 물러가고 평화와 번영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에게는 설명이 없이 교조적으로 주입되는 반공 교육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오히려 북한을 동경의 대상으로 만드는 역작용이 생긴 것입니다. 세계 공산주의 체제가 종말을 맞고 있던 80년대 말 우리나라에서는 주사파 세력이 결속되는 이상현상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대북 관계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무비판적 사고와 맹신이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유신과 5공 시절 정치적 탄압을 받으며 지하에서 유통된 친공적 선전 문헌에 일찍부터 노출되었던 민주화 세력은 대한민국은 헌법에 담겨 있는 이상이 아니라 직접 목도하는 개탄스런 현실로만 평가하는 반면 공산주의나 북한의 선전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른바 "내재적 접근론"이라는 것을 내세워 김일성 김정일의 폐쇄적 독재 체제가 하는 일은 무조건 변호하는 병적 심리구조에 빠져 버린 것 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강조했던 폐쇄적 민족주의 교육이 친북 반미적 시각 형성에 크게 도움이 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북 간 적대감을 해소하고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며 우리의 국민적 이익과 상충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어쩌면 제법 큰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대북 포용정책은 도덕적, 정치적 정당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남북 간의 이념적, 정치적 이질성과 심각한 경제 수준 격차 문제를 접어둔 채로 "연합"이니 "연방"이니 하는 말을 꺼내며 정당 간 또는 정부 당사자 간 원칙적 합의를 통한 통일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극도로 무책임하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한 내 분열을 감수하면서까지 북과의 통일을 추진하겠다는 의도가 없다면 핵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적 공존단계를 거치며 체제 간 이질성을 완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기 전에 형식적 통일을 이야기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민족공조"라는 구호에 현혹되는 선량한 국민들은 그것이 북한중심의 통일안의 가면임을 알지 못합니다. 개방된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한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어느 나라에게나 필수적인 국가안보기구들 마저 급속하게 약화시키고 있는 반면 북에서는 "민족공조"와 "반미"를 내세워 남한을 내부로부터 분열시키는 공작을 하기 위해 고도로 훈련되고 경륜 있는 전문요원들을 가동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전문가들 아니고는 알 수 없습니다. 구체제가 평화를 지키는데 성공하고 보니 이제 정말 늑대가 나오는데도 그 말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경제력만 있으면 걱정할 것 없다는 안이한 발상도 문제입니다. 정치권력 앞에 돈이 무력하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부터 우리 정부는 북한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북한동포들의 인권문제도 거론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상황이니 그러한 눈치보기가 어디까지 가야 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아직도 반공법 남용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우리 지식인들 일부는 반공정책 자체를 죄악시 하며 대한민국의 역사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자학적 역사관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단의 피해가 이중 삼중으로 나타나는 증후입니다.

역사 해석의 문제

북한의 선전이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하고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영역이 역사해석과 역사교육입니다. 여기에서도 지도자보다도 민중, 중심만 아니라 주변부의 역할에도 주목하고, 서구중심의 역사관에서 탈피하여 주체적 시각을 정립하며, 특히 친일 잔재 청산을 통해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자는, 역사학의 발전과정에서 당연히 나타나는 건전한 요구들이 북한의 의도적 역사 왜곡 시도와 맞물리면서 극심한 혼선을 빚으며 심한 갈등과 오해를 낳고 사회 분열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어느 정치 세력이고 사회공동체이고 이상이 없이 출발하고 유지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만 현실과  표방하는 이상과의 사이에 거리가 있기 마련이며 이상을 실천에 옮기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의 도덕적 지적 자질에서 차질이 빚어지고 그런 과정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이해관계와 시각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역사도 갈등과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경우는 없습니다. 이념 갈등, 정치노선상의 차이, 계층 간의 대립, 세대 간 갈등이 불가피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그 해소를 위해 정치가 필요한 것이며 다양한 욕구의 분출은 탈근대화, 탈냉전시대 민주화된 사회의 특징이기도하고 사회가 생동감에 넘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우리 대한민국은 자랑스런 역사를 이룩해 왔습니다.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라가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불구였으며 가난에 찌들었던 약소국가 대한민국은 세계가 알아주는 부강한 민주국가로 발돋움 하는데 성공했고 국제 사회에서 자주적 행보의 폭을 넓혀왔습니다. 분단이 한으로 남아 있고 억압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북한 동포의 처지가 아픔과 수치심의 근거가 되지만, 국제적 동조를 얻어내며 우리의 주도로 그들을 도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우리의 힘은 성장했습니다. 공산주의 소련이 아니라 미국의 자본주의 세력권 안에 위치함으로서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함은 공산권에 편입되었던 국가들이 모두 소련이 붕괴하자마자 체제변환을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대사 교과서들은 대부분 우리의 역사가 미국의 사주를 받는 구 친일세력의 놀이판으로 부패와 잔학의 연속이었고, 반대로 북한은 애국투사였던 김일성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 수립되었고 민중의 편에 서서 친일파를 철저히 단죄했기 때문에 도덕적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듯 기술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젊은 시절 게릴라 전투에 참여한 적은 있을지라도 그것이 해방에 기여한 효과는 무시할 만 한 것입니다. 국내에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던 박헌영 보다 친소적일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스탈린은 소련군 대위였던 그를 내세운 것이며 6.25 전쟁은 김일성이 미국을 자극할 것이 두려워 주저하는 스탈린을 설득시켜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 등은 편리하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열리는 인민대표회의에 참가가 허용될 정당대표들의 분포도 소련의 정치국에서 결정되었고 북한의 헌법은 스탈린이 직접 검토했다는 사실을 북한을 정통적 민족주의 세력으로 보는 사람들은 무시하며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보다 우선적으로 김일성의 사진을 교과서에 싣고 영웅 취급을 합니다. 결국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한 정권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이며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사료들에 의해 세계 전체의 공유물이 된 역사적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거짓으로 점철된 북한 선전의 영향력으로 밖에 달리 설명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친일 청산이라는 정치적 프로젝트가 강한 비판과 의혹의 대상이 되는 것도 그것이 바로 북한이 오랜 기간 동안 내세워온 선전 선동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입니다. 반미적 시각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을 비판할 때 비판하고 외교에서고 국방에서고 가능한 한 독자적 노선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주 외교나 국방을 목표로 하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적 우방인 미국을 악마로 묘사하는 어리석음은 북한의 노선을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추종하는데 나오는 것이지 정상적인 학문적 또는 교육적 행위로 볼 수는 없습니다.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나 마찬가지로 힘이 닿는 데까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 것이고 우리는 그 세력의 그늘을 활용함으로써 우리의 국가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노력을 해왔던 것 뿐 입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지향적으로 역사를 해석하며 화해와 평화를 위한 역사를 쓰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고 동맹이나 우호관계도 시간에 따라 변화하기에 마련이지만 어떤 특정한 나라, 더구나 침략에 대해 우리 국민과 나라를 방어해 주었던 나라를 전쟁 중 발생했던 몇몇 불상사를 근거로 해서 악마로 묘사하는 것은 북한의 은밀한 선전 선동의 도구 노릇을 하는 것임을 "민족공조"라는 말의 최면에 걸린 사람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존재이유를 부정하고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이러한 교묘한 선전 전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양극화의 발생도 불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과 허위 사이의 절충이란 위선이지 진실일 수 없으며 이념적 양극단 간의 원칙 없는 기계적 절충은 기회주의일 뿐 진정한 화해의 바탕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도덕적 정열과 지적 냉철함을 구분할 줄 아는 자세와 능력입니다.

교회의 대안

양극화 현상을 그 것의 대표적 축인 이념갈등과 남북한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저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이제 교회의 대안은 무엇인가를 처방하는 일은 엄격히 말해 전문가이신 여러분들의 몫이며 제 권능 밖의 일입니다. 다만 주어진 제목이 제목이니 만큼 몇 가지 제 생각을 사족으로 붙여보겠습니다.

종교는 정치가 아니며 정치를 대행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가 감당해야 할 교육은 영성 교육이지 지성의 배양도 아닙니다. 따라서 양극화 문제를 보는 시각도 정치나 일반교육에서 보다는 달라야 하고 처방도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며 역사의 장에서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 의무를 스스로 짊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단기간에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영성의 배양에만 만족할 수는 없고 보다 더 직접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현실적 대응도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양극화 현상이 돌이킬 수 없는 내란의 불행한 사태로 치닫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길게 정신사적 안목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서 이념적 양극화가 국가의 위기, 민족의 재앙으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격화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사회 전체가 급격한 경제사회적 변화 속에서 너무도 오랫동안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외면하고 물신주의에 젖어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는 이념적 좌우 양쪽 간에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기회주의나 냉소에 빠져 산술적 중용을 지키는 사람들 보다는 차라리 이념적 선택을 분명히 하는 사람들에게 구제 가능성은 더 있다고 봅니다. 전자 가운데는 골수 친북 세력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고  후자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는 위험은 안고 있다 하더라도 도덕적 정열, 곧 소명의식과 그에서 나오는 용기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대칭적 동질집단을 이룬다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소명의식이 자기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했음을 깨달을 때 그들은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없지 않고 양극화 대신 평화와 화해의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다시 앞장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왕년의 학생운동 투사들이 성실한 직업인과 가정인이 되거나 종교인이 되는 예도 종종 봅니다.

양극화 현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집단과 집단 간의 대립만 주로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그 집단들은 모두 다수의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치적, 이념적 입장을 같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덕적 지적 자질에는 큰 차이가 벌어집니다. 심지어는 같은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인간적으로 똑같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대결과 투쟁은 성실한 사람들 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랑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지성 대 반지성이지 이념이나 계급적 혹은 민족적, 국가적 소속이 아닐 수 있음을 교회는 깨우쳐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일본인 가운데도 스기하라씨 같이 유태인들을 나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국의 명령을 어긴 사람이 있는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민족이나 계급 또는 특정한 지도자를 우상화 하는 경향을 제어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에 따르는 책임의 문제를 일깨울 수 있을 것입니다. 양극화 현상이 위험해 지는 것은 추상적 명분론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특정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복종의 습성이 발동될 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양심과 양식에 대한 호소로도 교회는 양극화 해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젊은 시절 오도된 교육과 판단부족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섰던 것을 뒤늦게 깨닫는 사람들 가운데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정으로 악랄한 짓을 하게 되는 사례를 많이 봅니다. 헛된 자존심이나 가족에 대한 체면 때문에 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을 교회는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양극화를 조장하는 수밖에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념적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가 취해야 할 가장 큰 결단은 어느 쪽이 관념적 견지에서나 결과론적 견지에서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가 하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모든 힘을 쏟는 일일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 북한의 김정일 체제는 맑스주의 체제도 아니고 김일성 부자를 신격화하는 사이비 종교집단 같은 성격을 드러냅니다. 스탈린도 박헌영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농업사회였던 북한에서 사회주의가 바로 성취될 수 있다고는 믿지는 않았다는 증거가 있고 전 근대적 가부장적 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시도되었을 때 기형적 독재체제가 발생하는 예는 북한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여러 곳에서 목도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집요한 선전 선동 공세와 그 체제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앞잡이가 되었던 무책임한 지식인들 덕분에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북의 체제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보장하는 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하고 있고 대한민국보다 민족의 정통성을 성공적으로 지켜왔다고 믿고 그 체제가 낳은 비인간적 결과가 현재 어떤 것인가는 애써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약자의 편에 선다는 면에서도 공산주의 이론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표면적 유사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인간관과 인간이성에 대한 숭배, 곧 무신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계급투쟁을 설파하는 정치이념이 신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의 교리와 공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약자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약자에 대한 찬미와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연결되어서는 안됩니다. 북한의 동포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에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체제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것은 위선과 기만의 극치일 것입니다.

황우석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서 끔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복 실험을 통한 검증이 필수적인 정밀과학 분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면 감정이나 이해타산의 개입이 훨씬 더 쉽고 결과의 사전 검증이 불가능한 정책과학이나 정치 분야에서 국민이 속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인간과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영역에서 실수나 거짓으로 일이 잘못 된다면 원상 복구란 불가능하고 피해는 사회나 국가의 붕괴 같은 끔직한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황우석 교수가 영웅으로 떠올랐던 경로와 통일을 향해 우리 사회가 최근 움직이고 있는 궤적을 보면 우려할 만한 구조적 유사성이 발견됩니다. 첫째, 황 교수는 매우 중요한 연구에 착수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에 성공함으로써 온 세계의 기대를 모으고 노벨상까지 받았던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둘째, 황 교수의 연구가 빨리 진척되어 난치병 환자의 치료에 적용되고 전망이 불투명한 국민경제에 활력소가 되기를 바라는 국민적 열망과 기대는 평화통일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비등한 것이었습니다. 무비판적이고 관대한 지지세력이 형성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셋째, 그러한 국민의 열망이 식기 전에 그것을 개인의 야심을 충족시키는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는 유혹이 발동하고 성급한 기대 충족 욕구는 도덕적 양심과 지적 경계심을 마비시킵니다. 여러 사람이 열심히 돕지만 서로 간 솔직한 정보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가설이나 개연성을 마치 사실인 양 포장하고 그에 상반되는 정보는 차단해 버리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설득시키는 현상도 황우석 사건과 우리의 통일정책 추진과정에서 똑같이 나타납니다. 의도적 속임수인지 단순한 도덕적, 지적 해이냐의 경계선이 모호한 것도 비슷하게 보입니다. 네번째,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벌리고 있는 흥청거리는 이 굿판에서 손쉽게 이득을 취하려고 등장한 인물들이 세튼 교수와 논문의 데이터를 본 일도 없다는 공동저자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북한과 북한의 선전선동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 온 "지식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체사상의 저자인 황장엽 전 북한 대외총비서가 핵을 개발했다고 선언한 북한의 대남 붕괴 공작은 가속화되고 있음을 경고하고 온 세계가 북한이 위조지폐를 생산하는 범죄국가라고 규탄해도 우리는 변명을 해주기에 급급합니다. 젊은 과학자들의 경고가 들리지 않고 MBC의 사실 추적이 엄청난 저항에 부딪쳤으며 오늘날까지도 황 교수 지지세력이 만만치 않은 것도 똑같은 사회심리적 현상들입니다. 민족공조라는 최면술에 걸려 눈이 감기고 귀가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을 것입니다. 세튼 교수는 거짓이 들통 나려 하자 재빨리 도망치려 했고 나머지 공동저자들도 책임전가에 정신이 없지만, 북한은 끝까지 남아있다가 깨어진 굿 판에 남은 재화를 챙기려 하거나 아니 어쩌면 아예 주인들을 몰아내고 굿판을 송두리째 장악하려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황우석 사건의 경우 다행스럽게도 우리 젊은 과학자들과 언론이 정황을 포착했고 서울대 조사 팀이 사실을 솔직하게 밝혀냄으로써 우리 사회가 자정능력을 가지고 있을 보여주었고 뒤늦게나마 피해의 확산을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역할을 담당할 세력은 교회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입니다. 어서 빨리 "민족공조"의 환상에서 깨어나 중국의 지원을 받는 북한 체제로 사실상 흡수되는 쪽으로 나라가 흘러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러한 흐름을 되돌리도록 국민을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갈라섰던 민족끼리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궁극적으로 통일까지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경로로건 엄청난 희생의 대가가 필요함을 각오해야 하지만 우리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은 피 흘려 쟁취한 자유와 민주주의입니다. 양극화의 해소는 이 엄청난 위험에 대해 국민을 일깨우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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