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교회현장과 신학교육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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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교회현장과 신학교육의 관계
  • 최명근 목사
  • 승인 1999.11.1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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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1/11) 신학연구위원회 공개심포지움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제자들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3년 동안 훈련시키셔서 사도로 임명하시어서 장차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갈 목회자가 되도록 하셨다.  교회가 서기 이전에, 이를테면 복음전파와 신학교육이 먼저 있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었고, 그 자체가 교회의 시작이었다.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세움과 동시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아볼 사역자들을 길렀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공식적으로 목사인 선교사가 입국한 것은 1885년이었다.  그 후 많은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하였고 선교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신학교를 세운 것은 장로교의 경우에는 1901년에 평양에 장로회신학교를, 감리교의 경우에는 1905년 서울에 협성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성결교의 전신인 동양선교회는 1911년 서울에 성서학원을 설립하였고, 1908년에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에서는 1910년에 성경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구세군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목회자를 양성하였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 pp. 150~151.>

신학교는 독립적인 이념을 가지고 교육하는 기관이 아니고 교회가 세운, 교회를 위한 학교이며, 교회를 이끌어갈 목회자를 길러내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이란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과 내일의 교회사역은 신학교가 어떤 교역자를 배출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신학교가 교회가 바라는 목회자를 배출하고 있으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다른 말로 하면 신학대학(원)의 커리큘럼이 현재 교회에 적합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교육의 문제점

오늘날 한국에는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신학교가 50개교이며, 무인가 신학교가 270여 개나 된다.  해마다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신학생의 수는 무려 6,500명이나 되며, 그 중 학력인정교에서 배출되는 졸업생은 불과 1,5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실정이다. <목회와 신학 제27호(두란노서원, 19991, 9), p.43.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개선책.">

무인가 신학교의 경우 대부분 강의실과 도서관 등이 아주 빈약하다.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김기홍 교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무인가 신학교의 경우 대부분 강의실과 도서관이 아주 빈약하였다.  조사에 응한 41개 학교 중 17개는 도서관이 아예 없었다고 한다.  장서가 만권 이상 되는 학교는 6개교에 불과하였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의 수는 대부분 부족하였으며, 그나마 교수 자격자도 부족하였다고 한다. <김기홍, 한국신학교 실태조사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1994), pp.3~4, 21.>

이렇게 열악한 환경 가운데 제대로 교육이 될 리가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가를 받은 신학교의 경우에는 무인가 신학교보다는 교육환경이 좀 나은 편이지만, 학생 수에 비하여 교수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대부분의 학교의 경우에 1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1) 신학교의 난립으로 인한 교육수준의 저하
(2) 신학교가 오늘의 교회 목회에 적합한 사역자를 배출하고 있는가?
(3) 신학교와 교회의 협력문제와 더불어
(4) 신학대학과 대학원(M.Div.)의 커리큘럼 문제는 시급히 조정되어야 할 문제이다.  신학대학 출신 신학도들이 신대원에서 동일한 과목을 이수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므로 그 과목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결과적으로 시간낭비만 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신학교육에 있어서 크게 거론되는 문제는, 오늘의 신학교가 교회가 바라는 목회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신학교가 하나의 신학을 배우는 전당이 되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교역자를 훈련시키는 학교가 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신학교를 신학을 배우는 전당으로 생각할 때에는 교회를 위한 사역자들을 양성해야 하는 책임은 약해지게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학교가 교회사역자를 훈련시키는 곳이라고 할 때, 신학을 지켜나가야 하는 책임이 약화될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신학교가 이 두 가지를 다 하고자 할 때에는 신학교의 책임이 너무 과중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 둘을 상호 연결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목회와 신학, 19991년 9월호. 조종남,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개선책.">

신학교육에서 이론적인 면만을 강조하게 되면, 목회자 양성에 하나의 위기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학교육이 그 시대의 문제에 상관치 않고 목회현장의 문제들에서 완전히 고립된 교육을 해오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시대의 문제들을 미숙한 채로 다루어 문제해결을 가져오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실제적인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또 하나의 우를 범하게 된다.  그들의 관심과 생각은 오늘의 세상일에 있다.  즉, 오늘의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관여하고 관심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사회복지문제, 정치적 개혁문제, 더 나아가서 사회혁명문제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구령사역에 등한히 하게 된다.

이런 이중구조 속에 과연 오늘의 신학교육은 어떻게 시행해야 할 것이며, 어떻게 이 양자의 문제를 조화시켜 나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1. 신학교는 진리탐구의 장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의의를 달 수 없을 줄로 안다.  신학교에서는 성경진리를 바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바른 진리가 세워지지 못하면 신비주의로 빠지거나 자유주의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진리를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신학교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이다.

2. 신학교는 경건의 장이 되어야 한다.

신학은 경건에서 시작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기도와 함께 시작하는 학문이며, 경건에서부터 시작하는 학문이다.  경건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순수한 이론적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진리를 계시하신 하나님께 나의 전 인격을 바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건은 단순히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지혜이다.

신학은 경건을 실천하는 실천적 학문이다.  죄악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고통을 담당하고 부활하심으로서 인간을 구원한 하나님의 역사현장이 우리가 연구해야 할 신학의 내용이다.  첫 사도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순교를 각오하고 주님의 교회를 세운 것은, 바로 이러한 신학적 내용의 깊이를 그들의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고통받는 역사의 현장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밝히는 작업이 신학의 작업이다.

신학이란 머리의 학문이 아니라 몸의 학문이다.  단지 현상학적 범주를 취급하는 학문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인간의 구원을 다루는 생명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이란 단순히 이론적인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인 학문이다.  따라서 신학도가 된다는 것은 신학을 자기 삶 속에서 경험하여 실천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목회와 신학, 1992년 3월호, p.35. 김지철, "신학도의 길.">

신학이란 상아탑 속에서 고고하게 쌓아가는 학문 자체만으로서의 길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세상의 악과 투쟁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며 교회를 섬기고 바르게 세우기 위한 실천적인 학문의 길이다.

이 두 영역은 상아탑에서 해결된다고 하기보다는 사회와 문화가 교류하는 현장에서 신학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신학도들의 마음과 영혼에서 찾아야 할 대답이다.  신학교육은 성경 속에 나타난 지식전달이나 정보교환이 아니고, 이 지식을 구현해야 할 신학도들의 인격교육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육성시키면서 어느 한 곳을 교실로 삼아 가르치기보다는 그들과 함께 동거하면서 삶의 현장 속에서 체험케 하셨던 것이다. <목회와 신학, 19991년 9월호, pp.65, 66. 김의원, "신학교는 교단신학을 이끌 선구자다.">

신학도는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로 불러내어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고 세상사람들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인도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볼 수 있다.

3. 신학교는 교단신학을 이끌 센터이다.

(I) 신학교의 교육이념


신학교의 교육이념은 여러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교는 신학자를 양성해야 하는 사명이 있으며, 사회를 향한 전문사역자, 기관사역자들을 길러내며, 선교를 위한 선교사들을 배출하며, 목회자를 양성하는 사명이 있다.  그러나 공통된 부분은 '목회자 양성'이다.  신학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바로 '목회자가 되라'일 것이다.  신학교는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개혁주의에 입각한 목회자 양성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합당한 목회자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성경적 원리"와 이 원리를 꽃피워야 할 토양, 즉 "교회현장"이 함께 연구 검토되어 신학교육의 전반에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목회원리를 현장에 시행하는 과정에서 3년, 또는 7년의 신학교육을 받은 신학도들은 쉽게 '원리 '와 '현장'의 이중구조 때문에 당황하게 된다.  현재 학교에서 교육되어지는 과정을 보면, 신학도들에게 있어서 대부분 단지 목사가 되기 위한 방편으로 요구되는 학점을 취득하는 일이요, 현장은 교육전도사로 일하면서 몸으로 익혀나갈 뿐이다.  문제는 학교에서 배운 '원리 '가 '현장'에 적용시키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오랜 기간동안 배웠지만, 현장에 나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말들이 나오곤 한다.  원리와 현장의 깊은 괴리가 빚어낸 문제라고 본다.

목회자 양성에 있어서 가져야 할 기본 이념은 '성경적 원리' 연구와 이 원리를 적용시켜야 할 '목회현장' 연구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얻어낸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됨과 동시에 사회의 구성원으로 삶을 영위하는 회중의 심령 속에 심어지고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꽃피워야 한다는 말이다.

신학교육은 성경에서 찾아낸 신학적 원리와 아울러 목회현장인 한국사회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꽃피워야 할 학문으로 보아 신학과 현장의 사회과학이 연계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신학원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현장이라는 구조 속에 뿌리를 내리자는 것이지, 토착화 신학이 이야기하듯이 신학적 원리를 변형하여 현장에 토착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하나님의 계시이지, 인간의 '고백적'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Ibid.>

한국이라는 현장을 깊이 고찰해 보면, 한국사회는 급변하는 변혁을 겪고 있지마는 교회는 사회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이나 사회변혁의 동기와 과정을 연구하기 보다는 교회라는 특수한 틀 속에 안주하는 듯이 보인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교회가 이미 하나님의 종과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포기했다는 말이 나오곤 한다.  이 난제를 해결하려면, 개혁주의에 입각한 신학원리를 확립함과 동시에 이 원리가 적용될 현장연구도 병행해야 하며, 신학원리를 목회현장인 이 사회에 잘 적용시켜 나갈 수 있는 실천방안이 연구되어야 한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정치불안, 경제불안, 윤리부재의 타락한 사회불안, 성윤리문제, 가정의 파괴, 청소년문제, 교회비리문제, 전도의 어려움..  등 목회현장의 변화에 대처하는 역동적인 커리큘럼이 필요하다.

(2) 교단의 정체성을 위한 과목들

신학교의 역할은 교회를 위한 복음사역에 투입할 사역자를 육성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해외선교를 위한 선교사 육성기관이다.  그러므로 신학교는 졸업생들이 나아가서 일할 목회현장의 면밀한 연구와 이에 대한 효율적인 프로그램 운영이 필요하다.  현장을 떠난 획일적인 반복교육은 무의미하다.  실제로 교회현장과 선교현장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을 위하여 성경적인 근거와 실제적인 이론과 실천방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필자는 신학교에서 이런 점들은 보완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몇 가지로 제안해 보고 싶다.

- 조직신학

조직신학은 본교단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목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과목은 교수나 신학생들의 전유물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신학생들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과목을 이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만큼 신학 용어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니 신학교에서 배운 중요한 교리가 교인들에게는 전달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직신학은 분명히 본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교인들도 알아야 할 과목이다.  우리가 믿는 신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조직신학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교회가 몇 교회나 될까?  과연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가?

우리가 목사로 임직받을 때나 장로, 집사, 권사로 임직받을 때에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 및 대소요리문답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믿고 따르겠습니까?" 라고 서약을 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런데 임직받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권사가 과연 그 내용을 알고 있는가?  과연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 임직받는 목사도 과연 그 내용을 한번이라도 읽어보고 서약하는가?  너무나 현실과 괴리된 교리가 아닌가?  또 그 내용을 가르친다면 얼마나 이해할 것인가?

그러므로 조직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제는 한국교회도 선교 110년이 넘는 성숙한 교회가 되었는데 한국교회가 과연 선배들이 가르쳐준 과거의 어려운 용어로 된 신학용어를 그대로 답습해야 할 것인가?  이해하기 쉬운 현대어로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울러 목회현장에서 조직신학을 쉬운 용어로 누구나 알기쉽게 가르칠 수 있는 요약 해설서가 필요하다고 본다.

- 칼빈주의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주장하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이 칼빈주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졸업을 한다면 어떻게 개혁주의 보수신앙을 가지고 목회할 수 있겠는가?  물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이 칼빈주의 원리에서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실제로 구체적으로 칼빈주의를 모른다면 그것은 하나에 구실에 불과할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과 사상을 구체적으로 체계있게 배운다면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최소한 기독교 강요는 읽고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포괄적인 칼빈주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오늘 이 다원화된 시대에 목회하는 목회자들에게 꼭 필요한 분야이다.

예를 들면 칼빈주의 정치관, 경제관, 사회관, 윤리관, 문화관, 선교관 등 다양한 학문적 접근이 가능하며 그것은 실제 목회에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주장하는 신학교에서 모든 신학도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수나 시간이 배려되어 있지 않고 선택과목 중의 하나로 밀어버린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 청교도주의

칼빈주의의 실천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 청교도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복음을 들고 왔던 선교사들이 대부분 청교도 정신을 가졌던 선교사들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청교도 하면 일년에 한 번 추수감사주일에 설교할 때 예화로 한 번 인용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요즈음 미국에서도 청교도주의에 대한 재조명이 한창이다.  한 시대의 신학과 신앙을 이끌었던 그들의 신학과 사상과 삶은 어떠했는지, 또 그것이 오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하는 것은 오늘날 목회자들에 매우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신학교 커리큘럼에는 청교도 신학이 전혀 배려되어 있지도 않다.  이 과목은 분명히 필수과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목회현장에서의 문제들

- 설교학


전달되지 않은 진리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복음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전달기능(communicating)은 매우 중요하다.  전달하는 기능으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설교이다.  신학교에 설교학 과목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설교학 과목이 제기능을 다하고 있는가 하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학생들을 한 교실에 넣고 설교의 원리는 이것인데 각자 목회현장에 나가서 알아서 적용하라는 식이 오늘의 교육이다.  그러나 목회현장에서 그들을 지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실정이다.  설교학을 단순한 이론 뿐만이 아니라 설교의 작성과 설교자의 태도와 발음, 그리고 전달방식 등 목회현장에 나가서 적용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되지 않을까?  한 교실에 너무 많은 학생들을 수용해야 하는 관계로 실습이 어렵다면 그룹별로 하든지, 아니면 비디오로 녹화해서 학생 개별적으로 지도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설교테이프라도 녹취하게 해서 듣고 평가를 한다든지 하는 어떤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교수가 부족하다면 설교학 분야에 조예가 깊은 목회자들 중에서 강사로 초빙을 해서라도 설교자와 목회현장에 괴리감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미국 달라스 신학교에서는 설교학 전용 강의실에 비디오 장치가되어 있어서 모든 설교는 녹화해 설교자 자신이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설교학 시간에는 한 반에 14명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설교도 5분 정도가 아니라 30분 분량의 설교 6번을 실습하고 철저히 평가받은 뒤 졸업한다고 한다. <목회와 신학, 1994년 2월호, p.92. 장두만, "달라스 신학교 이렇게 교육한다.">

미국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도 설교연습 시간에 자신이 설교하는 것을 비디오에 녹화하여 설교가 끝난 다음, 담당 교수가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학생의 장점과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여 현장감을 높여주고 있다고 한다. <목회와 신학, 1994년 2월호, p.57. 박용규, "미국신학교육과 우리의 현실.">

RTS에서도 설교연습시간에 동일하게 설교를 비디오에 담아서 같은 클래스의 학생들 앞에서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교수가 장단점을 들어 평가하며 시정해야 할 부분들을 일일이 지적하여 교정하도록 여러차례 반복하여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현장에 나가서 담대하게 분명하게 설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RTS 출신들이 목회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가는 교회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목회하는 교회를 통하여 모교인 신학교를 힘있게 지원하고 있어서 신학교가 크게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본다.

- 전도학

신학교에서 전도학 과목은 모든 신학도들이 배워야 할 과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전도학 과목이 선택으로 되어있고, 그것도 목회현장에서 사용되기는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실제로 전도할 때 무엇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전도의 접근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목회현장에서의 전도는 담임목사가 훈련시키지 못하고 거의 다 선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전도훈련에 의존하게 되는데, 사실 그것도 몇 주씩 강사들을 여러 명 초청하고 전도학교를 운영하는데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다.  상당한 재정을 들여서 전도학교를 개설하여 훈련을 받아도 전도훈련 강사들이 떠나면 본교회에서 지속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동역하는 부교역자들이 전도훈련에 참여하여 지도자 훈련을 받아도 그들은 얼마 있지 않아 그 교회를 떠나게 되고 새로운 부교역자들이 부임하게 되면 또 다시 전도훈련을 시켜야 하는 입장이다.  또 그 전도훈련도 목회현장에 상당한 이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목회현장에서 시행될 수 있는 전도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지속적으로 실시될 수 있는 전도훈련의 모델을 연구하여 실제로 신학생들에게 전도훈련을 시켜서 본 교단 교역자라면 누구나 전도자로서 무장을 하고 목회현장에 나갈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예를 들면, RTS에서는 M.Div. 과정에 있는 신학생들에게 한 주간, 혹은 두 주간 동안 목회현장에 가서 전도폭발훈련을 받게 하는 것을 보았다.

- 제자화 훈련

최근 제자화 훈련을 통해 크게 성장하고 있는 사랑의 교회에 자극을 받아 나름대로 제자화 훈련을 실시하고 앞으로 실시하려는 교회가 적지 않다.  이 제자화 훈련도 신학교에서 미리 배워서 익힌 다음에 목회현장으로 나아가야 효율적일 텐데, 이미 수 년 동안 목회를 하다가 중간에 접목을 시키려고 하니까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제자훈련에 대한 확신도, 목회철학도 제대로 서지 못한 상태에서, 제자훈련을 실시하는 교회가 부흥되니까 나도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어정쩡하게 실시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음을 본다.  제자훈련이 무엇이며, 왜 실시해야 되는지, 어떻게 실시해야 될 것인지에 대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 소그룹 성경공부

목회자는 누구나 목회현장에서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될 것인가를 물을 때에는 대답이 궁색해진다.  소그룹 성경공부반의 조직과 운영과 가르치는 기술과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한데 어디서 이런 것들을 배우고 익힐 수가 있을 것인가?  그냥 무턱대고 시작하면 되는 것인가?

사실 성경공부도 가르칠 만한 변변한 교재도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목회자 자신이 각자 나름대로 교안을 만들어서 가르치던지, 아니면 타교단에서 실시하는 성경공부 교재를 사용하는 실정이다.  예를 들면, 성경전체를 조감해 보는 성격의 교재, 벧엘성경공부, 크로스웨이 성경공부 등을 사용하고 있으며, 혹은 각 권별  주제별로 되어 있는 선교단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교재들을 나름대로 가르치고 있는 실정인데, 이것도 신학교에서 연구 제공해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상담학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교인들에게는 문제도 다양하다.  목회현장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가지고 오는 교인들의 고충을 어떻게 덜어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는 간단치가 않다.  개인의 가정문제, 자녀문제, 직장문제, 대인관계의 문제, 개인의 윤리문제, 질병의 문제... 수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목회자가 상담자로서, 문제의 해결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 기독교 윤리학

오늘날 이 사회는 윤리가 무너진 사회라고 한다.  이 무너진 윤리를 누가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학교도 사회도 손들어버린 윤리교육을 누가 시킬 것인가?  우리 기독교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기독교 윤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신학교육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실제적인 연구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가정문제 : 오늘날 성결하지 못한 가정생활로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어서 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그 사이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소위 결손가정으로 인하여 수많은 청소년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다.  가정을 건전한 가정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어떤 방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신학교 내에 가정문제에 대한 전문가를 두어서 가정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신학생들로 하여금 그 과정을 이수하게 하고, 사전에 오늘날 가정의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거기에 대처하기 위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신혼부부를 위한 교육, 이혼한 가정에 대한 교육, 기타 문제있는 가정을 위한 치유의 사역이 필요하다.

청소년문제 : 얼마 전 KBS2에서 "교실이 무너지고 있다"는 제하의 방송이 나간 적이 있다.  그 보도를 시청한 분들은 아마도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필자도 이렇게까지 학교교육에 심각성이 있는 줄 몰랐었다.  전혀 인격교육이 안된다는 것은 알았으나, 학교 교과과정을 이수하는 교육마저 안되고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수업을 진행하지 못할 정도로 교실은 무너지고 있었으며, 방과 후에 학생들의 생활지도는 더더구나 생각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10월 30일에 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사건으로 무려 55명의 청소년들이 죽었으며 78명의 청소년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오늘날 청소년들을 향한 마수의 손길은 끊이질 않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문제를 외면한다면 교회도 설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시급한 청소년 문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교회도 대책을 나름대로 세워야 하겠지만 전문 신학교육의 장인 신학교에서 보다 심도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청소년 연구센터를 설립하여 청소년 문제 전문가들을 확보하고 그들을 위한 신앙교육의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그들을 지도할 지도자들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 교회 목회는 성인 목회는 어느 정도 되고 있다고 생각되나, 청소년을 위한 목회는 대단히 미약한 실정이다.

동성애 :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생소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동성애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동성애가 어떤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왜 나쁜지, 어떻게 시정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환경오염 : 타락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지배권을 올바르게 드러내도록 요청받고 있다.  만일 생태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자원이 고갈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

낙태, 영아살해 : 의과대학 졸업생들은 전통적으로 졸업식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Hippocratic Oath) - 이 선서의 기원은 2천년 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를 맹세한다.  또 제네바 선언(The Declaration of Geneva, 1948년 9월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의학총회에서 채택된 선언문으로 거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토대로 하여 만든 것임)은 많은 의과대학에서 졸업생 선서로 사용하고 있다.  이 선언에는 "나는 수정된 그 순간부터(from the time of conception) 인간 생명에 대한 최고의 경외심을 유지하겠습니다."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의과대학에서는 이 구절을 바꾸어 "나는 인간 생명에 대한 최고의 경외심을 유지하겠습니다."로 바꾸어 버렸다. <Francis A. Schaeffer, The Complete Works of Francis A. Schaeffer, vol.5. A Christian View of the West. 프랜시스 쉐퍼 전집 제5권 기독교와 사회관,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4, p.398~400.>

물론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신성함이라는 충분히 발전된 개념은 그리스 사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해 왔던 유대-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계관은 근거없는 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서 나온 유일한 진리인 것이다.  이 가르침은 사회의 종교적 기반을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법적, 정치적 기반도 형성하였다.  금세기에 들어와서 유감스럽게도 이 사상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 낙태문제는 사회에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어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왜 기독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가?

안락사 : "타인의 선택에 의한 죽음" : 생명이란 수태부터 자연사 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 생명을 출생 이전에 파괴하고 있다면 어찌 다른 목적으로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않겠는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또는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로 태 속에 있는 태아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가 다른 인간, 특히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완전하다고 생각되며, 또는 사회적으로 어쩌면 성가신 존재일지 모른다고 여겨지는 노인들을 죽일 권리를 가정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자의적으로 재분류되어 비인격으로 처리될 다음 후보자들은 노인들이다.  증가하고 있는 반가정적 감정과 낙태율, 의학적 발달에 따른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해서 젊고 튼튼한 사람들에 비해서 늙고 연약한 사람의 비율이 정상적으로 커지게 됨에 따라 이런 경향은 점점 증가하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회를 계도해 나가며,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인가?

- 기독교 교육

개신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민중들을 교화시키고 깨우쳐주는 일에 앞성서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복음을 전하여 준 선교사들은 일찍이 학교를 설립하였다.  1885년에 아펜젤라가 세운 배제학당,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 등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선교사들의 이런 사역은 우리나라에 기독교 교육을 받은 새로운 지도자를 양성하는 터전을 이루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한국교회는 그 시작부터 교육사업을 강조하여 왔으며, 어떤 점에서는 교회가 개화교육의 선구자로서 사화교육과 일반교육을 이끌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는 교육을 교회의 기본 사역으로 삼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기독교교육은 기독교학교 교육보다는 주일학교 교육으로 이해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학교교육은 일반학교에 내어주고 교회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기독교학교 교육은 그 존재의미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실시하는 주일학교 교육은 이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주일학교 학생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교육환경마저 대단히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다.  무엇인가 그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한국 교회의 장래는 어두워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주일학교 교육에 대한 관심의 결여, 잘훈련되지 못한 지도자와 교사, 열악한 교육환경, 교육할 수 있는 교과서의 미비 등으로 주일학교 교육은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주일학교 교육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주일학교 교육의 전문가 양성, 교육 자료의 개발, 교사훈련 등을 위한 신학교의 관심과 연구, 그리고 신학생들의 훈련이 요청된다.  총회적으로도 전문적으로 이 문제를 연구할 수 있는 교육국이 필요하다고 본다.

- 경건의 훈련

신학교육에 있어서 경건의 훈련은 대단히 중요하다.  신학교에서의 경건의 훈련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모이는 정기적인 예배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신학생들을 위해 시행되는 새벽기도회가 그것이다.  모두 대중집회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나마 기숙사에서 생활하지 않는 신학생들은 새벽기도회나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 기도의 시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경건회를 인도하는 설교를 맡은 분들의 준비가 소흘하다는 평을 듣는다.  한시간, 한시간이 소중한 시간인데 좀 더 충분한 준비가 요청되며 필요하다면 목회하는 유능한 영력있는 목회자들을 자주 초빙하는 것도 경건회를 활성화시키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필자가 제안하고 싶은 경건의 시간은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어우러져 함께 기도하는 소그룹 형태의 기도회를 가지고 피차 인격적인 교제의 시간도 가졌으면 한다.  RTS에서는 매주 금요일 정오에 교수와 학생들이 5, 6명 정도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기도의 시간과 교제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어느 교회나 수련회장에 모여서 기도회를 가지기도 한다.

문제점에 대한 개선 방안

이런 여러가지 문제들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실적으로 교과과정상 신학대학원에서 모두 다루기 어렵다면, 이수학점을 늘린다든지, 장신과 같이 졸업 후 목회현장에서 필요한 과목들을 의무적으로 이수하게 한 후 강도사 고시를 치루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필수적으로 이수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본 교단에서는 목회대학원에서 목회자들에게 연장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미 신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된 목회자들을 위해서는 위에 제시된 여러가지 문제들을 그 교육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학교의 교수확충이 필요하며, 교수들에게 연구할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해 주어서 연구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신학교와 교회의 유대관계가 절실히 요청된다.  자칫 교수들은 현장감을 상실할 우려가 있고, 또 목회자들이 현장에만 너무 치우치다 보면 진리를 파수해 간다는 점에서 소흘히 되기 쉽다.  이 양자를 조화있게 균형 발전해 가려면 신학교와 교회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이 양자 모두가 주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든든한 교회 건설을 위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힘써야 할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교수들이 목회자와 협력하여 오늘 한국교회들을 위한 갖가지 필요한 교안들을 개발하며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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