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고통에 대한 치열한 사유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박혜경 역, 좋은씨앗, 2014-05-10, 232쪽, 9000원
내가 이 책을 펼쳐들 당시만 해도 나는 이 책의 저자가 바로 그 사람, 그러니까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IVP 역간)의 저자인 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세계적인 기독교 철학자로서 칼빈대학 철학교수를 역임했고, 하버드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옥스퍼드대학교‧ 네덜란드자유대학교에서 방문 교수로 활동했고, 현재 예일대학교 석좌교수로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철학과 신학을 폭넓게 다루면서 형이상학‧ 미학‧ 정치 철학‧ 인식론‧ 신학‧ 종교 철학 등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러니까, 세계적인 학자로서 냉철하고 분석적이며 신학적인 글을 쓴 저자와, 참척의 슬픔에 몸부리치는 고통과 사유를 담아낸 글의 저자가 쉽사리 오버랩되지 않은 것이다.

한창 상실과 결핍, 고통이라는 주제에 대해 씨름하고 있을 즈음, 나는 기독교 서점의 ‘고통’이란 섹션 앞에서 노닐다가 이 제목을 발견하였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글은 ‘통곡의 벤치에 앉은 이들과 함께’라는 서문의 제목으로 막을 올린다. 이 책은 1983년, 스물다섯이라는 인생의 절정기에 등반 중 추락사로 목숨을 잃은 아들을 기리며 쓴 단상 묶음이다. C. S. 루이스의 [헤아려본 슬픔](홍성사 역간)과 박완서 선생의 [한 말씀만 하소서](세계사)라는 책들과 비견될 만한 글이다. [헤아려본 슬픔]은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후에 같은 병으로 아내까지 잃은 저자의 격정적인 슬픔과 하나님과의 맞대면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면, [한 말씀만 하소서]는 한국 어머니의 억척스런 자식 사랑과 참척의 끔찍한 고통이 전혀 정제되지 않고 드러난 글이다. 앞의 두 책이 문학가들의 감정적, 정서적 표현이 절절히 드러난 책이라면, 이 책은 오랜 시간 훈련된 철학자의 글답게 가장 혐오스런 고통 앞에서도 감정의 절제와 논리적 사유가 드러나는 책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세 책 모두 궁극적으로 삶과 죽음, 고통, 인간과 하나님이라는 본질로 귀착하며 읽는 이들을 깊은 깨달음으로 이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1부 - 꽃은 시들어도 향기는 겉에 남는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 “꽃은 시들어도 향기는 곁에 남는다”는 아들의 죽음을 전화로 전해 들은 순간부터 아들을 땅에 묻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흠칫할 정도로 감정은 배제되어 있다. ‘슬프다’, ‘억장이 무너진다’, ‘원망스럽다’,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다’ 같은 감정적 표현을 배제하고 아들의 스러진 인생과 수포로 돌아간 목표와 계획을 꼼꼼히 되짚어보고 장례를 행하면서 스치는 생각과 사유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다.

“그 따스한 유월에 나는 나 자신을 묻었다. 소리가 나는 줄에 매달아 뜨겁고 메마른 구멍 속에 인부들이 내려놓은 것은 바로 나였다”(P.69).

2부 - 상처 입은 사랑은 특별한 사랑이 된다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들이 죽은 사건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갑작스런 사고 이후 얼떨떨한 상태를 벗어난 직후부터, 이제 남은 이에게 남겨진 몫은 ‘전쟁’이다. 고통과의 전쟁, 슬픔과의 전쟁, 고독과의 전쟁, 의미와의 전쟁이다. 매순간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전쟁’이다. 그는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아 나선다. 물론 기독교 철학의 대가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맛보는 경험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끝나 버렸다. 내 실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그 무엇인가가 끝이 났다. 내 삶은 그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졌다. … 이제 내 실존의 원음은 슬픔이 되어 버렸다”(p.81).

그는 상실과 슬픔에 대한 책들을 뒤지며 그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그러나 거기에선 ‘합리화’라는 허탈한 방식만 찾아질 뿐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얼굴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삶에는 고통 이상의 것도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일깨워 줄 것이다.…그러나 에릭이 죽었다는 사실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죽음의 악마적인 끔찍함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p.91).

그의 성찰에는 ‘본질’(inscape)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모든 죽음에도 그만의 ‘본질’이 있고, 모든 애통함에도 그만의 ‘본질’이 있음을 역설한다. 모든 슬픔은 사람들을 분리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아무도 다른 이가 느낀 슬픔 그대로를 느낄 수는 없으며, 각자의 역동적인 슬픔은 다른 사람의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애통에 잠기지 않은 다른 누군가가 애통에 잠긴 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그때 손을 내민 자는 스스로 행복한 순간인 줄 알아야 한다는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손을 내민 사람들의 슬픔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음을 인정하며 타인의 슬픔에 더 깊이 다가서게 되는 ‘연대’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하나의 깊은 성숙의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으로 여겨진다.

3부 - 애통하는 자는 새 날을 꿈꾼다

아들의 죽음을 맞이하여 자신과 아들, 그리고 죽음 자체에 몰두하던 단계를 지나, 내적인 갈등과 고뇌,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감과 과거 자신의 모습에 대한 깨달음을 거쳐, 마지막 3부 “애통하는 자는 새 날을 꿈꾼다”에서 저자는, 마침내 세상의 고통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나아가 하나님의 고통을 깨닫고 그 고통에 참여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간다.

“세상의 고통은 나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전에 나는 슬픔이 이토록 클 수 있는지 몰랐었다. 반 년 전쯤 친구의 스물세 살 된 아들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친구가 느끼는 슬픔의 깊이를 헤아리려고 애썼다. 나는 이제야 그때 내가 친구의 슬픔에 전혀 동참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사람이 느끼는 고통에는 그 사람만의 깊이가 있다. 어떠한 사람도 다른 사람의 고통에 온전히 참예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이전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p.123).

그리고 마침내 … 그는 죽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게 된다.

“세상의 상처를 향한 연민으로 우리의 고민이 커지지 않는다면, 주변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확장되지 않는다면, 선하심에 대한 감사가 활활 타오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통찰력이 깊어지지 않는다면, 중요한 일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 굳건해지지 않는다면, 새 날을 기다리는 아픔이 강렬해지지 않는다면, 소망이 약해지고 믿음이 사라진다면, 죽음의 경험을 통해 무언가 선한 것을 얻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죽음이 우리를 이긴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여, 자랑하라.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의 패배를 온몸으로 살아내려고 애쓰리라. 나의 삶 가운데 내 아들의 죽음이 마지막 단어가 되지 않도록 하리라. 그러나 내가 일어설지라도 내 아들의 죽음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내 몸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의 부활이 그 상처를 지우지 않을 것이다. 그 상처는 나의 흔적이 되었다. 누구든지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p.156). 그리스도의 상처가 자신의 상처가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신의 부활이 됨을 진정으로 깨닫는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바로 자신의 뼈와 살인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과 상실, 고통을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래, 숙고하는가. “믿으면 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을 성경 메시지의 핵심인 양 믿으라고 판치는 세태 속에서, 이 책은, 죽음을, 상처를, 상실을, 고통을, 더 자주, 더 깊이 묵상할 것을 권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가 일부러 그렇게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책은 이미 저자의 손을 떠나 독립적 개체로서 메시지를 던진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너무 얕고 경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깨달음도 얕고 경박할 수밖에 없다. 헌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 아닌가. 바로 그 핵심에 놓인 것을 깊이 묵상하고 영과 육으로 이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넓고 얕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상실과 고통에 처한 자들이 있다면 이 책을 손에 쥐어 주고 싶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경지의 삶에 도달할 그들 곁에서 조용히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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