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세계관인가?

▲ 리차드 미들톤 등저, 황영철 역, IVP, 2001-04-30, 272쪽, 8000원
80년대 한국사회는 큰 소용돌이가 치는 문자 그대로 격변기였다. 정치, 경제, 노동, 문화 분야에서 격심한 변화가 있었고 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는 모든 게 혼돈스러워 보였다. 갖가지 이데올로기가 곳곳에서 분출했고 극과 극의 이념 대립과 세계관의 충돌은 끝이 없어 보였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배어 있는 캠퍼스에서 돌을 던지자니 용기가 없었고, 무관심하자니 정의감이 허락지 않았다. QT(경건의 시간)나 그룹 성경공부 등으로 다져진(?) 기독교 신앙은 마르크스주의나 유물론 앞에 한없이 작아보였다. 또 갖가지 세계관에 대한 효과적인 기독교적 변증도 어려워 보였다. 고민스러웠고 실망스러웠다. 2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해 왔다는 것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뭔가 설명해 주어야 했으나 설명이 어려웠다. 뭔가 잘못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처럼 혼란스러워 할 때 나를 구원해 준 책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 변혁, 그리스도인의 비전'(리차드 미들톤, 브라이안 왈쉬 공저. IVP)이란 제목의 책이었다.

은혜와 율법, 믿음과 행위, 영과 육신,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 등 극단적인 이원론의 흙탕물 속에 빠져있던 나에게 이 책은 가뭄 속의 단비와도 같은 책이었다.

이 책은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이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쓴 사이어( James Sire)는 세계관을 "이 세상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 혹은 가정"이라고 정의했다. 왈쉬는 이 책에서 창조-타락-구속으로 이어지는 성경적 세계관을 제시하면서 물질주의와 향락주의, 과학과 테크놀러지에 대한 맹신, 문화적 퇴폐현상과 같은 현대 사회 문제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성경적 태도인지 돕고 있다.

특히 잘못된 성/속 이원론이 교회를 지배할 때 우리는 굉장히 심각한 신앙의 오류에 빠져들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타락한 이 세상은 곧 불타 없어지고 우리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식의 신앙관은 자칫 우리로 하여금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를 갖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지금의 우리 기독교의 문제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 의사, 농부, 사업가, 혹은 음악가가 부족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기독교적인 의사, 농부, 사업가, 음악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기독교적 사업가를 기독교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 혹은 세속적인 회사를 경영해서 번 돈으로 기독교 사역자들을 지원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인 음악가를 종교적인 혹은 영적인 노래만을 부르는 사람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미션 스쿨을 잘못 이해하고 교회 안 나가는 사람(학생)을 교회 나가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쯤으로 여긴다면 이것은 학교가 세워진 원래의 목적을 굉장히 망각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업가는 자신의 사업 목적은 무엇이고 이윤의 역할은 무엇인지, 또 자신의 사업이 환경문제에 민감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기독교적 음악가는 최대한의 인간성을 발휘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운율과 화음을 찾아 발굴하고 만들어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학교의 목적은 수많은 예수쟁이(?)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기 보다는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본다.

이처럼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이 지금 다시 거론되어야 하는 이유는 세계관 운동이 한때의 유행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성경적 세계관이 필요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적 세계관을 공부나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또는 지적인 측면과 동일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태도이다.

케리 토마스는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케리 토마스, CUP)는 책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이끄는 9가지 영적 기질을 말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금욕주의나 열정주의, 행동주의는 우리가 잘 실천하고 있는 영적 기질들이지만 그 중에 가장 약한 게 있다면 지성주의 영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성의 중요성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폄하하는 형태의 기독교는 성경적 기독교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80년대 대학시절 내가 활동했던 선교단체에서 한결같이 추구했던 목표가 있었다. 바로 '지성사회의 복음화'였다. 그러나 지난 해 이 선교단체의 대표를 만났더니 우스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지성사회의 복음화'가 아니라 '복음사회의 지성화'가 필요한 때라고. 무엇을 말하는가.

여전히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다. 세계관 공부가 한국적 상황에서 발생한 기현상은 분명히 아닐 것이고 세계관 공부 또한 유행이 돼서는 안된다. 87년도에 이 책이 발간돼 오래된 책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책이 담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은 경제 성장주의에 끌려가고 있는 듯한 한국 교회에 여전히 큰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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