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와 시민운동

시민사회에 대한 정의를 대체로 현대 서구사회가 봉건시대에서 탈피하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혁명적 변화 과정을 통해서 터득한 개인의 자율적 자립과 대중적 참여의 중요성을 토대로 하는 다원적 인간공동체라고 일단 정의를 해놓겠다. 여기에는 한없는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차원에서 논의될 과제다. 이와 같은 시민사회는 한 특정한 상태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 사회 안에서 다양한 집단의 시민들이 여러가지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 집단행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규정한 "행복"을 추구하며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사회적 이익집단을 망라해서 시민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강문규씨는 그의 "시민참여의 시대<강문규, 시민 참여의 시대 (도서출판, 한울 1996) P.72.>"에서 시민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시민운동은 이미 주어진 이념체계나 계획된 개혁구도에 의해 조직되어 발전해 나가기보다는 현대적 관리사회체제 속에서 민중이성들이 되찾고자 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의지에 입각한 볼런티어리즘에서 출발한다." Volunteerism은 우리 사회에서는 보편화된 개념이거나 체험은 아니지만 점차 그 성격과 본질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발적으로 행동하며 참여한다는 뜻인데 Volunteerism 자체가 반드시 개혁지향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시민 운동에 본질에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속성과 성격은 서로 다르기도 하고 때로는 상반된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가령 예를 들면 환경 운동가들과 팔당호 상류주민들이나 최근에 있었던 환경단체와 그린벨트 주민들과의 충돌 같은 것도 한 예라 할 수 있다. 우선 몇 가지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시민운동이 전국적으로 조직화된 운동이 있고, 둘째 지리적으로 제한된 지역사회의 시민복지를 위한 여러가지 활동, 셋째 특수한 전문적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운동으로서 환경, 소비자권익, 교육제도, 의료 제도, 국민건강, 윤리재건, 경제정의, 청년, 여성, 노동, 농민 등등이 있다.



진보적 시민운동론

우리 사회운동사를 고찰할 때 30년간 계속된 군사독재체제하에서 인권, 사회정의, 민주화를 주장하던 사회운동을 총칭 재야라 했다. 재야의 상당부분은 정치세력화 내지는 정치적 사회세력화를 구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중의 적지 않은 부분은 소위 진보적 사회운동의 이념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서 민정이양을 거치면서 정치지배 체제의 성격이 달라지면서 민중운동이 주변화되면서 보수적 민간정부 하에서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세력의 일부의 분화과정이 전개되었다. 조회연 교수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조희연,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비판실천담론의 복원과 재구성을 위하여 (도서출판, 당대 1998) P.231.>.

"민주화의 과정이 진전됨에 따라 그리하여 군부정권의 혁명적 퇴진이 아니고서도 '자유로운' 정치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됨에 따라 정치적 지향의 분화가 확대되게 된다. 정당 정치영역의 분화는 어용관계 야당이 아닌 '투쟁인' 제도 정당의 분화로 나타나게 되며 시민사회의 분화는 민중적 운동 형태와 시민적 비변혁적 운동 형태의 분화로 급진적 지향의 운동과 온건한 지향의 운동의 분화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조희연 교수와 같은 진보학자가 지적하는 것은 반드시 모든 시민운동 조직이 모두가 체제내적 온건 비진보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현재의 시민운동 안에서 진보적 조직들이 다양하게 존재할 때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실질적 연대가 가능하며 동시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조희연 op cit., p.257.>. 결국 이와 같은 관점은 결론적으로 80년대의 운동이 개혁의 주도적 세력이 없음을 확인하려는 입장이고 보수적 민간 정치 체제하에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분화되었음을 강조하며 시민과 민중의 차별화가 쟁점이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는 여러 갈래로 진보진영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조교수는 향후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민주화가 동시적으로 진전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정당한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조희연, op cit., p.261.>.

"필자가 상정하는 진보적 시민운동이건 기존의 온건한 시민운동이건 간에 시민 운동의 위상을 민중운동과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견해에 대해서 필자는 반대하며, 그것은 다분히 친체계적인 이데올로기적 합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양자를 대립시키는 견해가 잘못된 이유는 첫째, 현재까지 시민적 비판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국가권력의 민주화의 과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으며(국가보안법 등) 또한 현재의 시민사회의 공간이 불안전하고 '시민'전체가 여전히 보수성을 지니고 있고 민주화의 과정 속에서 시민자신이 민주적으로 변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지적해야 할 사실은 80년대의 저항세력의 핵심을 민중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생각해야 할 문제는 시민, 민중의 분화를 넘어서는 다양한 연대의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국가를 초월한 지구적 시민운동

우리는 지금까지 단일민족국가로 자처해왔다. 그것도 아시아 대륙의 한 모퉁이의 cul-de-sac 상황에서 폐쇄적 발상에 비롯된 것인지, 혹은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에서 자기보호의 집념 때문에 배타적인 문화가 형성된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우리들은 외부와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필자가 80년대 후반에 아시아기독교협의회에 봉직하고 있었을 때 뚜렷한 이유없이 일방적으로 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가 폐쇄되고 싱가포르에서 퇴거해야 했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 때에 이 아시아의 기독교 국제 기구의 사무실을 서울에 설치해 볼 생각이 있어 당국과 협의해 보기도 했고 주변사람들과 의논했던 일이 있었다. 당국은 기독교 국제 NGO의 성격을 이해하는 능력도 없고 우선 NGO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었던 그때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특이성을 강조하면서 이 세상에 공통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보편 성의 가능성을 될 수 있는 대로 부인하려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의 세계를 관찰할 때 평화 인권 환경 개발(Development) 자본과 같은 문제가 점차 지구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아무리 한국식 민주주의 논쟁을 하더라도 지구적 차원에서 보편적 가치 관이 형성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자체 안에서 자발적으로 민주화의 과정을 심화시킬 수 있었을 때 그리고 자율적 시민 사회가 확립되었을 때 타 시민사회와의 연대가 형성되어 갈 수 있다. 아직 아시아의 상황은 거기에 확실히 도달되어 있지 않은 측면도 있으나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 있는 민주화 인권 평화 등등의 문제는 이미 일국 중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확인되고 이것이 지구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보편적 문제를 중심으로 시민사회운동의 지구적 연대를 통해서 지구 시민사회의 개념과 경험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리차드 포크(Richard Fork)교수는 지구시민사회를 세가지 측면에서 관찰하고 있다.

(1) 지구시민사회는 지구적 시야를 통해서 세계의 전체 인류의 복지 내지는 복리에 대한 관심을 근거로 하여 행동하며 작동하는 모든 Actor 들 여러가지 관계, 네트워크 및 투쟁을 의미한다. 사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IMF 신탁통치하에 놓여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 유럽, 일본의 세 축이 도전하고 있는 세계경제의 실체는 그들의 세계화의 구호는 결국 그들이 어떻게 하면 자국의 자본을 효율적으로 지 구적 자본확산과 이동을 실현하느냐에 그 관심이 집중된다. 경제 강대국의 자본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2) 지구시민사회는 암묵가운데 개개인이나 인 간 집단의 기본적 인권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3) 지구시민사회의 또 다른 측면은 민주주의를 위한 개별적 투쟁을 보다 더 일반적 인권지향과 결집시키는 과정이다.

UN과 시민운동

20세기 후반에 와서 NGO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이 용어의 기원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체로 NGO는 Non Governmental Organization이라는 뜻이고, 특별히 전문적이거나 특별한 관심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때로는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으나 정책결정과 집행과정이 독립적인 단체를 말한다. 학술단체, 원조기구, 교회 직업적 조직, 평화 군축을 위한 단체들이 NGO다.

1945년에 제정된 유엔헌장에서 국제적 외교의 현실에서 인정받은 용어가 되었다. 헌정기조에 NGO와 UN 사이에 협력관계(Consultative relation)를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경제사회문화 부분에서 뚜렷하다. 현재 세계적으로 800여 개의 NGO가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관계의 본질과 내용은 1968년 경제사회 위원회의 결의문 1296에 명시되어 있다. 근대의NGO의 활동은 NGO대회 (Conference of NGO)와 UN 사이에 존재하는 협의 관계를 통해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CONGO는 3년마다 선출되는 20개 단체가 그 집행을 책임지고 있으며 중요한 관심사는 UN기구 안에서 인권, 군축, 개발, 여성, 청년, 마약, 다국적 기업, 비식민화의 문제를 담당하는 위원회와 연계되어 있다. 이 위원회는 제네바 뉴욕 비엔나에 분산되어 있다. UN에 의하여 승인받은 NGO는 UN 의 여러 회의에 참여할 수 있고 구두로나 서면으로 발언할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NGO들이 UN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소집된 식량, 여성, 환경, 사회발전 등등의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NGO 대표들이 별도로 회의를 소집하며 비판적 참여를 주도하기도 했다.

아직 우리나라의 시민운동단체들은 이와 같은 세계적 차원의 NGO활동에 적극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지는 않으나 점차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CONGO가 세계대회를 한국에서 소집했었을 때도 한국 시민운동 간에 그 준비라든지 내용에 대한 활발한 토의가 진행되지 않았던 것도, 결국 어떤 의미에서 지구시민사회의 의식이 밑에서부터의 운동이라기보다는 엘리트 중심의 위로부터의 운동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민운동의 개혁목표

앞부분에서 언급된 바대로 6.29 광장의 민주주의 지향의 열의는 아직 식지 않았고 민주주의 심화에 대하여 충족되지 못한 부문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크게는 정치적 민주화에서부터 시작해서 학원의 민주화, 직장의 민주화, 정당의 민주화, 그 리고 언론의 민주화, 심지어 정부출연 기관인 각종 국책연구소와 나아가 사기업체에 이르기까지 가계각층에서 민주화와 자율화의 요구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조창현, 한국지방자치의 이상과 실현 (도서출판 문원, 1995) p.29.>.

"어떤 이는 한국의 별명이 ROTC라고 했다.  이것은 Republic of Total Corruption이라 한다. 사회전체 어느 구석을 들여다보아도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과장된 표현이라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한국 사회에 요청되고 있는 것은 총체적 개혁이다. 그것도 민주적 개혁이어야 한다. 제6공화국, 일명 문민정부도 민주개혁을 시도했었다. 그것도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고 위의 의지가 흔들릴 때 그 개혁은 중단되었다. 이제 국민의 정부에 대한 개혁적 기대는 이 정권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또 정권 자체의 능력의 한계를 훨씬 능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개혁의 방향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문민정부의 부담이었던 과거역사 청산이라는 명제에 얽매인 과거 지향적 사정에 그쳐서는 안된다.

극히 상식적인 판단이기는 하나 국민의 정부의 행정 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지방자치제인 것 같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행정을 밑에서부터의 행정, 시민들의 삶의 터전에서 가장 가까운 데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게 한다는 중대한 전환이라 하겠다. 지방자치의 Protagonist는 중앙정부가 꼭 해야할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행정을 지방으로 분산, 이관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작은 중앙정부를 이룩하고 관이 주도하던 행정을 뒤집어 놓은 결과를 가져오면 민의 차원에서 행정을 시행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지방자치제가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민주주의 심화의 한 수단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절대화된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과 같이 중앙집권적 정권의 부패현상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해진 현상이다. 지방자치는 결국 우리 나라가 새로 태어나게 되며 새로운 차원에서 훈련된 시민들을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총선을 앞둔 오늘의 한국의 상황을 볼 때 총선시민연대가 제기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공천과정의 비민주성에 대한 비판을 보더라도 우리들의 과제가 얼마나 산적되어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가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시민운동단체의 중앙집권적 형태에 대한 비판이다. 지방자치시대의 시민운동의 형태는 어떻게 정착되어야 할 것인지는 앞으로 심도있게 고민해야 할 과제인 것 같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충청도의 어떤 군수는 지역의 시민운동단체들의 군 행정에 대한 감시와 문제제기가 도저히 권위주의적 지방행정의 책임자로서는 인내할 수 없는 업무방해로 간주하며 시민단체들을 빨갱이들이라고 규탄하며 경찰의 날 공식 행사에서 빨갱이들을 방치하는 경찰을 규탄했다고 한다. 이것이 결국 군청과 시민단체의 갈등으로 번져 버렸고 제3자의 개입으로 진정되었다고 한다. 지방자치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는 행정가와 지역시민 양쪽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군수도 민선이고 보면 시민이 뽑은 사람이 군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떻게 공천되고 어느 당에서 공천을 받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공천과정에서 지역을 완전히 배제되고 중앙에서 공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선의 틀을 걸쳐왔지만 과연 그것이 지방자치를 통한 지역시민의 지지기반을 확립한다는 데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시행착오를 걸쳐 가면서 지방자치제는 우리사회의 민주정치와 행정에 뿌리내릴 것이다. 시민운동의 자율성과 자주성과 재정의 문제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과거에 중앙정부가 선별적으로 특혜식 재정지원을 해오던 관변단체는 이미 그 공정성을 상실한지 오래다.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시민단체가 자 체적으로 재정문제로 회원의 협력을 얻어 해결하는 길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정부는 공익적 차원에서 직접지원보다는 간접지원 방식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여당과 시민운동 일부에서 추진 중인 시민단체 지원기금의 발상은 신관변단체 창출의 오해의 소지가 농후하다. 이것이 정부와 집권당을 위시한 정치권이 아직 시민운동의 역할이나 시민사회의 본질을 인식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운동의 중요한 거침돌이 되어있는 "기부금품 모집 규제법"이 폐지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다.

맺는말 : 기독교인의 참여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대 사회참여 개념은 주로 봉사다. diakonia의 개념은 여기에서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이 봉사의 개념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뜻으로 이해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구약성서의 섬김의 뜻은 노동, 봉사, 예배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섬김은 예배에서 비롯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출애굽 7:16에 볼 것 같으면 :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신 주께서 나를 임금님에게 보내셔서, 나의 백성을 보내어 광야에서 나에게 예배하게(나를 섬기게) 하라고 이르셨는데도... "

섬김이라는 말은 예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섬기는 종은 결국 예배를 바치는 종이라는 말이다. 기독교의 diakonia의 개념은 이 말이 히브리 사람들의 섬김의 뜻에서 직접 유래되지 않았고 70인역에서는 섬김을 diakonia로 한번도 번역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약에서 같은 뜻으로 통하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의 이 웃을 섬기는 경우에도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듯이 그들을 섬긴다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히브리전통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예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행위보다는 집단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동시에 예배하는 각자가 방관자가 아니라 주체로서 참여하고 있고, 공동체에 적극 참여하는 가운데서 주님과의 만남을 체험하며 이웃과의 관계의 본질을 깨닫는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줄곧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신앙공동체의식이 이원론적으로 절대화되어 있고 배타적이다. 세상을 저주의 대상으로 여기고 종교를 신비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가르쳐 왔다. 분명히 우리들의 신앙공동체는 인간공동체(human community) 안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의 변증적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참여 의 뜻을 찾는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나라세우기에 대한 기대를 당연히 가지게 됐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수평이 넓어지면서 그만큼 시민들의 민주주의의 구체화에 대한 기대 또한 강해졌다. 이번 총선의 예비과정에서부터 공동화 되어버린 정치개혁, 그리고 기득권 챙기기에 급급했던 여야정당의 선거법개정을 통한 담합, 국민의 열광적인 낙천운동에 대한 반응에도 아랑곳 없이 치루어버린 비민주적 일뿐만 아니라 불법적이라고 규탄받는 공천과정, 이런 것들이 결국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을 국민들 마음 속에서 일어나게 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심오한 심정으로 총선에 임하게 되었다. 우리의 구체적인 선택은 오로지 한가지, 낙선운동뿐이다. 이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신념은 아니다. 다만 이것이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유권자의 주체의식을 강조하며 민주주의의 원칙인 시민의 권력감시와 참여사회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의 지름길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런 뜻에서 기독교인들도 모든 시민들과 함께 낙선운동과 유권자 권리찾기 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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