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1장 13~14절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단에 수종하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를 입고 밤이 맞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전에 들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한국 교회가 서 있는 삶의 자리는 한 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전환점이다. 우리를 향해 질주해 들어오는 새로운 천년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대 이데올로기를 떠받들고 있는 두 기둥이 무너짐으로 냉전체제라는 거대한 건축물이 붕괴되어 버린 폐허의 한 가운데서 열리고 있다. 과학기술과 기계론적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두었던 대립과 성장을 추구하였던 산업기술 문명은 지구환경 뿐만 아니라 인간생명이 근거하고 있는 본질 바탕 자체를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제2의 물결의 신드롬이었던 근대화 열풍은 지역공동체의 해체화 과정이었을 뿐 아니라 소중한 삶의 가치들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산업화 과정은 우리들의 삶이 기초하고 있었던 전통적 가치들을 파괴하였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상품화시키고 소유적인 것으로 대체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자원, 에너지, 자본, 노동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산업사회는 모든 것들을 시장가치로 대체시켰고 경쟁, 대립, 성장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냈다. 지금까지 냉전구조물에 가리워 보이지 않던 세계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축적된 자본과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보가 부(富)를 만들어 내는 전대미문의 역사가 열리고 있다. 이미 세계는 제3의 물결의 신드롬에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제2의 물결과 한국 교회 성장

제2의 물결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추어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 없는 성장을 이룩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도 한국에 있다. 세계 50대 대형교회 가운데 한국 교회가 22개(1998. 8월 뉴욕타임지)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들 중 거의 반 수에 가까운 교회가 한국 교회에 속하고 있는 셈이다. 선교 100년 만에 4700만 인구의 25%에 달하는 1200만 명, 좀더 정확히 말하면 900만에서 1천만 명의 신도를 가진 교회로 성장하였다.

한국 교회의 양적 질적 성장 배경에 대한 설명은 논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한신대 박근원 교수는 "한국 교회 형성과 발전의 과제"란 글에서 "우리 민족의 심성에 있어서 종교적 공백 현상과 한국근세사의 민족적 위기를 직면할 때마다 민족의 여망에 그리스도교가 긍정적으로 부응할 수 있었다"는 데서 한국 교회 성장의 기본적인 배경과 요인을 보고 있다. 이성희 목사는, 서서히 몰락하는 조선조 말기에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국민정서는 나라가 바뀌면 종교도 바뀌는 것이 좋다는 종교 심리가 쉽게 기독교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무엇보다도 교육사업, 의료선교, 농촌계몽 등을 통해 한국민족의 개화를 촉진시켰던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전략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선교가 식민지의 역사와 관련된 반면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식민지화 위협에 처했던 한국을 서구 선교사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교가 쉽게 뿌리 내린 요인이 되었다는 역사가들의 평가도 있다. 한국민족 가운데 기독교가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 가운데서 민족의 고난을 함께 나누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의 슬기가 한국 교회 성장에 기여하였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 구체적인 예는 일제식민지하에서 교회가 민족 독립운동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한국 교회는 8.15 해방 후 이어진 6.25 민족상잔의 비극 가운데서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여전히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가는 보루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1960년대부터 10년마다 교회 성장은 배가되었으며 1980년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성장은 한편으로는 보리고개를 벗어나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던 경제성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수십 년간 지속된 군사독재체제하에서의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불안과 병행을 이루었다. 안보와 반공을 정치권력의 연장으로 수단화하는 긴장 속에서 국민정서가 종교를 선호하게 됨으로 교회성장에 청신호가 켜진 것이라고 분석한 사회학자들도 있다.

모든 희생을 치르고라도 근대화를 이룩하겠다는 군사독재에 맞서 순교자 정신으로 민주화와 인권을 우선 순위에 놓고 투쟁했던 교회민주화운동도 한국 교회 성장에 한 몫을 담당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천주교의 양적 급성장에서 입증된다. 카톨릭은 80년대를 양적 성장의 황금기라 부른다. 1984년 말 카톨릭교인은 185만이었는데 1989년 260여 만 명으로 급성장하였다. 5년 동안에 무려 75만 명이 증가한 셈이다. 그 원인은 천주교의 복지시설과 의료시설 운영을 통한 헌신적인 선교활동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유신체제 이후 1987년 6.29 선언까지 "정의구현 사제단", "카톨릭 농민회" 등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 민주화를 위한 교회의 적극적 참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초기 신앙 선배들은 한 영혼의 구원을 향한 뜨거운 전도의 열정과 신앙과 민족사랑을 일치시켜 실천하였다. 이들의 헌신과 믿음의 열정이 오늘의 한국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급성장이 빚어낸 병리현상

우리 모두는 한국 교회의 경이로운 성장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교회를 놀라게 한 교회성장은 우리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준다. 그러나 급격한 한국 교회의 성장은 그 자체 안에 많은 병리 현상을 지니고 있음이 사건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한신대 김이곤 교수는 대교회주의의 배경에는 번영과 힘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다고 말한다. "대교회주의는 나치즘적 독일식 기독교 운동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신학적 오류의 소산이며 대교회주의 내부에는 번영신학과 힘의 논리 신학이라는 것이 배수진을 치고 있다."

이성희 목사는 그의 책 {미래사회와 미래교회}에서, 한국 교회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병리현상을 진단한다.

첫째, 대형교회에서 교인들이 익명성을 즐긴다는 것이다.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교인들은 교회의 돌봄을 원하지 않으며 동시에 교인으로서 책임도 회피한다. 이 익명성 때문에 대형교회가 모이는 교회로서의 기능은 가능하게 하지만 흩어지는 교회의 기능은 그 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 성장 배후에 결과론적 사고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 중요시하는 비신앙적 비윤리적 교인이 양산된다. 윤리적인 평가보다 결과에 의존하다 보니 비윤리적으로 번 돈일지라도 많은 헌금을 하면 신실한 교인으로 인정받는 교회 풍토는 교회의 대 사회 신뢰도의 추락 원인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결과만이 아니라 동기와 과정까지도 정의롭고 선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강조점이다. 과정을 외면한 결과론적 사고의 팽배로 일부 목회자는 기능적, 기술적 목회를 하면서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목회의 본질, 교회의 본질에서 이탈하고 있다.

셋째, 또 다른 병리현상의 하나로 기복적 신앙을 들고 있다. 교회성장 신드롬은 개인주의적이고 기복적이며 타계주의적인 신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신앙은 신앙 자체를 비역사화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역사 속에 살면서 비역사적 신앙생활을 지향하게 한다. 기복신앙은 한국인의 종교심리의 심층 가운데 있는 요소로서 교회 성장의 지반을 제공하였다. 성경도 인간에게 복을 선언하고 약속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은 제사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다. 따라서 인간이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넷째, 한국 교회 성장이 몰고 온 병리현상은 개교회주의와 교파지상주의이다. 한국 교회는 여러 교파로 갈가리 나뉘어져 있고 자기 지역교회의 재산과 마당을 늘이는 데 눈이 어두어 전체 교회가 지향해야 할 비젼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의식의 결여 현상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 전통을 이어받는 개교회가 윤리보다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둘 사이에 균형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교회구성원들의 대부분이 신앙의 실천적 측면에는 별 관심이 없고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동기가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아니라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병리현상은 한국 교회 자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한국 사회 안에서 한국개신교회의 위상을 결정하는 요인들로 작용하고 있다. 장로 교회만도 150여 교파로 나누어진 교회들이 지향하는 교파중심주의 선교, 개교회 성장 중심주의, 내실 없는 거품 현상 등은 사회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경원시되는 주요 원인들이 되고 있다.

성공회대 손규태 교수는 한국 개신교회의 신뢰성 위기와 선교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는 지난 30년 간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서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패와 투쟁하는 운동에도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교회 안팎에서 그 신뢰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특히 카톨릭 교회와는 달리 노동운동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개신교는 앞으로 억눌리고 약한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선교 전선에 동참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회는 오늘날 심각한 신뢰성 위기와 더불어 선교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같은 논평은 한국 교회 전체가 겪고 있는 위기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던 진보적인 교회도 많은 진통을 겪고 있다. 민주화 투쟁을 통해 사회 속에 은혜로운 구조(Die gnaedige Struktur)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던 교회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독재체제와 맞서 싸우는 가운데 선두에 서서 싸웠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독재자들의 행태와 세속의 질서가 그들 가운데 깊숙히 들어와 있을 뿐만 아니라 투쟁 초기 그들이 가졌던 신앙의 열정과 복음의 정신이 많이 퇴색된 것을 깨닫고 스스로 놀라고 있다.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한 평신도 지도자는 진보 진영이 처한 위기 상황을 "우리를 억압했던 자들은 물러갔는데 우리는 우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보수진영뿐만 아니라 진보진영도 닫힌 율법주의적 틀 안에 갇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증이라고 생각한다. 닫힌 진보는 닫힌 보수와 마찬가지로 역사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계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에는 열린 진보와 열린 보수가 필요하며 둘은 상대편을 향해 항상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서로가 가진 은사를 가지고 서로의 약점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형비리사건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자화상

급격한 성장을 거듭해온 한국기독교는 카톨릭을 포함하여 교인 증가 둔화현상 내지 감소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인 수의 감소에 있지 않고 성장일변도를 지향해 왔던 교회구조가 지니고 있는 모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끊일 줄 모르고 터져 나오는 한국사회의 대형 비리사건에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처한 부패구조가 밑바탕에서부터 폭로된 삼풍백화점 붕괴원인을 제공한 소유주가 한국개신교를 대표하는 교회의 교인이었다는 사실에까지 소급해 갈 필요가 없다. 최근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고급 옷 로비사건을 비롯하여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의 MBC-TV 방송중단 사건, 그릇된 종말론 추종신도들의 집단가출 충격, 신애양 사건에서 보여진 사이비 이단의 부도덕성과 폐해, 모교단 감독의 비리시비, 모교단의 교단장 선거 부정시비와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구속된 그리스도인의 모습들은 오늘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임을 부인할 수 없다. 특별히 신문의 머리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고급 옷 로비사건에 연루된 네 여인들의 위증과 거짓말이 폭로됨에 따라 그들이 주장했던 의견의 정당성의 전거로 삼았던 하나님의 이름과 성경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공신력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신뢰성이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한국 교회는 뼈를 깎는 회개와 자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을 찾아내어 근본적인 치유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나님이여 통치하소서

쉴 사이 없이 목적지향적인 삶과 투쟁으로 점철된 각팍한 삶을 살았던 야곱은 조상들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그가 이룩한 업적과 소유와 그에게 속한 권속들을 얍복나루 건너편으로 보내고 칠흙같은 밤에 홀로 남아 하나님의 천사와 밤을 세워 생과 사를 건 싸움을 벌였다. 그 격렬한 투쟁 가운데서 환도뼈가 위골되는 아픔과 함께 낡은 존재가 가차없이 부서지고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맞아들였다. 낡은 모습대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려는 야곱을 하나님은 내버려 두지 않고 그를 공격해 온다. 그리고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낡은 모습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낡은 옛 사람의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야곱처럼 지금까지 이룩한 업적과 성과, 권속 모든 재산을 얍복나루 건너편으로 보내고 칠흙같은 어두운 오늘의 현실의 한가운데서 새롭게 거듭나려는 몸부림과 투쟁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태어나야 한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처절한 투쟁 가운데서 한국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축복은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통치하소서! 이다. 이같은 새로 태어남을 통해 인간의 죄와 욕심으로 점철된 권력과 증오의 역사를 청산하고 하나님 뜻(통치)에 따라 새 역사를 만들어 가는 180의 전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새롭게 태어난 야곱이 위골된 환도뼈로 인하여 절뚝거리며 무한한 미래의 지평이 열린 약속의 땅으로 전진하여 가는 길 위에 브니엘의 아침햇살이 환히 비추었다. 얍복을 지나 새로운 탄생을 통해 브니엘의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거듭남의 역사를 위해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이 거듭남의 역사는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신학을 이끌어 왔던 신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독일 남부 경건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Chiristoph Blumhardt) 목사는 그리스도인은 두 번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첫 번째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두 번째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속으로 나아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틀을 가지고 한국 교회의 현실을 관찰해 볼 때 보수와 진보진영 안에는 회심의 사건이 총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복음주의 진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일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속으로 나아가 불의한 세계를 개혁하는 일을 소홀이 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두 번째 회심을 불신앙으로 경계하면서 복음의 능력을 개인 영혼의 구원과 교회의 영역에 제한하려는 수구적인 태도가 닫힌 보수진영의 모습이 아닐까. 에큐메니칼 진영에 속한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속으로 나아가 이 세계를 은혜로운 구조로 변혁시키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일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상대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나 승리감과 기쁨보다는 싸늘한 냉기류가 이 진영을 지배하고 있다.

왜 그럴까? 여러가지 분석과 평가작업을 거쳐야겠지만 이 세상의 악의 세력과의 치열한 투쟁을 하는 과정 가운데서 신앙의 정체성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속의 가치관과 행태를 닮아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이 그들이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독재자들의 가치관과 행태를 닮아버린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열린 진보의 믿음에서 출발했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낡은 가치관에 의해서 전도된 나머지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의 정열을 상실해 버린 모습이 닫힌 진보의 모습이 아닐까.

신앙의 사회적 차원

한국 교회가 새로운 천년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신실한 동역자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닫힌보수와 닫힌진보의 틀을 깨고 나와 열린보수와 열린진보로서 만나 일치를 이루어 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위해 함께 동역해야 한다고 믿는다.

양 진영이 한국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교회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각자가 발전시켜 온 적극적인 은사는 서로 나누고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는 뼈를 깎는 환골탈퇴의 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복음주의 진영이 극복해야 할 과제는 두 번째 회심을 이루기 위한 신학적 지평과 성서해석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성서가 전하는 복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회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믿는 자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연결지어주는 신앙의 관계, 회개와 세례로부터 오는 새로운 삶, 은혜로부터 오는 구원의 메시지는 모두 개인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성서의 이와 같은 개인구원에 대한 메시지의 우세는 신앙의 사회적 차원과 책임을 등한히 하고 개인구원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개인구원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신앙의 입장은 개인이 구원되면 거기에 따라 자동적으로 사회가 새로워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같은 생각은 두 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

첫째, 신학적인 측면에서의 비판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포되었고 현재도 진행중인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가담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이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주(主)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주(主)되심을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일꾼으로 활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역사의 종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재적 하나님 나라는 모든 형태의 불의(不義)를 물리치고 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믿음의 행진의 동력이 된다. 다른 한편 초역사적인 하나님 나라의 신앙은 인간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유토피아주의에 떨어질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현재 진행되고 있으며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同役者)이다.

둘째, 사회적 측면에서 고찰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오랫동안 사회생활이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이 맺는 관계의 총체적 집합이므로 개인윤리와 새회윤리 사이에는 별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개인구원은 자동적으로 사회구원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는 라인홀드니버가 그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에서 지적했듯이 엄연히 구별이 있다. 그에 다르면 인간의 도덕성은 개인대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는 비교적 잘 드러날 수 있지만 집단 대 집단의 관계에 있어서는 드러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국가적 이익이 상충되는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과 도덕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이익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하는 나라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즉 개인의 결단과 선의지는 사회구조와 조직에 대해서는 아무런 힘이 없으므로 사회문제의 근복적인 해결은 제도와 조직의 혁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개인이 달라지고 선해지면 거기에 따라 사회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사고이다.

개인들이 맺는 관계의 총체적 집합이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은 결정적으로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임을 밝혀내는 데 미 시카코 대학 철학부 조지 미드(George H Mead)가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영어의 "I"와 "Me"를 영어문법에서 말하는 주어와 목적어의 구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체아와 사회아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자아(自我)는 반성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대상화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만이다. 즉 나에 대한 나 자신의 의식은 다른 사람의 태도를 나 자신에게 받아들임으로써, 즉 다른 사람이 본대로 나를 보고, 들은대로 듣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한대로 말함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경우를 관찰하면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 어린이는 부모 혹은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키워주는 사람들의 역할을 모방하고 따름으로써 자아를 형성해간다. 어린이가 자라며 모방하는 대상은 그의 주변에 있는 밀접한 사람들에 국한되지 않고 넓게는 사회전체가 그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개인이 사회의 요구에 응할 때에는 개인의 고립된 사건이나 활동을 우연하게 혹은 단편적으로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원화된 행동 패턴을 따르게 된다. 즉 개인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규칙, 습관, 풍습, 도덕에 관련된 규정들에 따라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게 된다. 이처럼 일반화된 규범으로 화한 사회적 현실을 Mead는 "일원화된 타아들(Generalized Others)"이라고 불렀다.

Mead의 자아형성에 미친 사회적 영향에 대한 탐구를 요약하면 자아(自我)는 개인의 사회적 경험에서 출현하며 자아형성에 있어서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구조와 제도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해지는 것은 기독교가 강조하는 거듭남이란 개인의 심정적 결의와 변화만이 아니라 개인의 의식구조로 내면화된 자아의 사회적 측면까지도 포함한 자아의 전체적인 거듭남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참된 거듭남이란 "I"만이 아니라 "Me"까지도 포함한 자아의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식사회학자 피터버거(P. Burger)는 그의 책 "사회학에의 초대(Invitation to Sociology)"에서 미 남부 개신교 근본주의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하고 있다. 남부의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간음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춤추지 말라", "도박하지 말라" 등 개인적인 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사회정의에 대해서는 매우 등한시하고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특히 남부지방은 흑인 노예제도의 본산지임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의 비 인도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예제도를 죄로 규정하면 흑인 노예제도 위에 건설된 남부 사회제도의 유지가 위협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버거는 남부개신교 근본주의에 있어서 보편적인 인류사랑을 가르친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적 신앙은 백인의 사회적 특권을 보장하는 사회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역할밖에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해진 것은 참된 의미에 있어서 믿음에 의한 중생(重生)은 자아(自我)만이 아니라 사회아(社會我)의 측면까지 포함한 전체아의 총체적인 거듭남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서 사회아의 거듭남이 전제되지 않는 회심은 한 인간의 삶의 총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중생(重生)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형비리 사건에 연루된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예외 없이 사회아(社會我)의 거듭남을 강조하지 않았던 교회들에 속한 사람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보수진영에 속한 교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두 번째 회심을 위한 복음선포와 선교의 구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진영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와 같은 문제의심각성을 인식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두 번째 회심을 위한 교회개혁운동에 뛰어들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복음과 상황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지성인들은 열린 보수에 속한 사람들로써 한국기독교의 새로운 위상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진정한 중생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는 선각자라고 확신한다. 복음으로 무장된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인 자아의 중생을 서두르게 될 때, 한국기독교의 모습은 전혀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리라 믿는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되는 지각변동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민족중흥이냐 복음의 전진이냐

이제 우리는 진보진영에 속한 교회들이 처한 정체성의 위기에 대해서 검토해야 할 차례다. 진보진영이 처한 정체성의 위기와 닫힌 구조에 대해서 다각도로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간단히 몇가지 기본적인 문제만을 다루고자 한다.

진보진영이 처한 정체성의 위기는 보수진영이 자유주의적인 경향성을 띠고 있는 신학과 교회들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영역 가운데 현재한다고 생각한다. 발제자가 속한 기장교단의 신학의 흐름 가운데 자유주의 신학의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단신학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은 칼 바르트의 신학을 통해서 구체화된 신정통주의 신학 노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 연구에 있어서 역사비평학을 한국에 소개하여 자유주의 신학 논쟁의 불을 당겼던 김재준 목사가 지향했던 성서연구 방향은 영감에 의한 성서연구 방법이었다.

칼 바르트가 그의 {로마서주석}(1922)의 서문에서 밝혔던 것처럼 그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비평학을 도구로 사용하였으나 그가 선호하는 방법은 영감에 의한 성서연구방법이었다. 그는 역사비평학을 유일한 성서연구의 도구로 주장했던 불트만 학파의 성경 해석이 빚어내는 복음의 상대화에 대해서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김재준은 성서해석의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역사비평학의 방법을 소개하였으나 그가 지향하는 신학은 역사비평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신정통주의 방향이었다. 근본주의 신학이 지배하고 있던 한국 교회의 풍토 속에서는 칼 바르트와 김재준의 신학은 자유주의신학으로 매도되었다. 아직도 이와 같은 고정관념이 한국 교회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진보진영에 속한 신학자들에게서 발전된 민중신학은 불트만 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이 주종을 이룬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민중신학은 군부독재가 지배하는 어두운 역사 속에서 민중의 고난을 직시했던 신학자들이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세상을 읽는 과정에서 탄생한 신학이다. 고난으로 점철된 한국 역사의 연장 선상에서 전개되었던 군부 독재가 빚어 낸 민중의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찾고자 하는 한국 신학자들의 주체적인 신학 창출을 위한 몸부림이라는 데서 민중신학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더 나아가 민중신학자들이 선교의 구체적인 실체로서 민중 사실을 발견한 것은 커다란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유럽 기독교를 시민종교(die buergerliche Religion)로 격하시켰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신학 방법론의 영향 가운데서 발전된 민중신학은 그 자체 안에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발제자는 칼 바르트와 본회퍼를 통해 전개되었던 신정통주의 신학이 올바르게 한국의 상황 속에서 접맥되었다면 이 신학의 맥락 속에서 민중(하나님의 백성) 신학이 탄생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 신학의 맥락 가운데서 한국신학이 전개되었다면 교회 개혁만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참여의 신학적 지평이 확보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정통주의 신학의 맥을 이어가는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카이로스의 때에 슬기롭게 응답하지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창조적인 신학의 그릇 속에 담으려는 몸부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칼 바르트와 본회퍼가 지향했던 신정통주의 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들은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서 불타올랐던 복음의 진정한 정신이 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인 문화 기독교(Der Kulturprotestantismus)와 민족중흥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해 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칼 바르트는 문화 속에 해체된 복음을 복원하고 하나님 없이 신학을 하려는 신학자들에 맞서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학을 재건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참된 진리를 향한 구도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신학과 교회의 위기 가운데서 바르트를 그의 스승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처한 독일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은 히틀러라는 악령이 등장하여 종교개혁의 위대한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교회를 국가기독교의 틀 안에 가두고 복음을 민족 중흥의 이데올로기로 격하시키려는 음모였다. 견딜 수 없는 일은 대부분의 교회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이와 같은 계획된 음모에 그대로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속한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서있는 것을 간파하였다. 즉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민족 중흥을 위해 기도하면서 2천년 역사의 복음의 전통을 배반할 것인가, 아니면 2천년 역사의 복음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 조국을 배반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택했던 결단은 조국을 배반하고 복음의 전진을 위해서 예레미야가 걸었던 순교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의 결단은 복음의 선포와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하는 구원의 삶이 본질적으로 위협을 받는 상황 속에서 내린 고백신앙(status confesionis)을 통한 성전 선포였다. 이를 통해 그는 총체적인 붕괴의 위기에 처한 독일 교회를 구출할 수 있었다.

진보진영에 속한 교회가 처한 위기는 독일 국가 교회에 속한 지도자들이 취했던 태도와 같이 신앙의 정체성이 총체적으로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신앙고백(status confesionis) 없는 현실 타협적인 기독교 현실주의의 태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신앙 고백과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더 악한 것을 피하고 더 나은 것을 선택하는 근사적 접근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발제자는 이와 같은 신앙의 태도로 교묘하게 민중들을 속여가며 위기 상황을 모면해 온 기독교 현실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지도자들을 "복음을 변화시킨 위대한 사람들"이라는 말로 개념화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한국장로교의 전통 가운데는 독일 고백교회 운동에 뒤지지 않는 위대한 고백신앙 운동의 맥박이 고동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는 이 위대한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닫힌 진보로 전락한 진보진영의 교회는 한국 교회사 가운데 찬란히 빛나는 status confesionis의 전통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현실 타협적인 방법으로 교묘하게 복음을 상대화 시켜왔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얍복강가의 씨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열린 진보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현금 한국 신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로 대표되는 문화신학은 복합종교의 상황 가운데 처한 한국 기독교의 선교적 과제라고 사료되나 진리에의 열정보다는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강조함으로 결과적으로 복음의상대화를 초래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진보신학자들을 자처하는 신학자들이 복음 선포를 통한 현실의 개혁을 지향하기보다는 위험 부담이 없으면서도 개방적으로 보이는 문화신학에로 도피하고 있는 것이 진보진영이 처한 또다른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다.

고백신앙(status confesionis)을 통한 거듭남

발제자는 한국 교회의 성장에 따른 병리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진 한국 교회의, 온전성을 상실한 신앙양태에서 보고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의 편향성을 분석하고 이의 극복을 위한 방향을 모색하였다. 같은 신앙의 전통과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이어 받은 개신교회가 보수와 진보라는 양대 진영으로 나누어져 복음의 통전성을 상실하고 닫힌 율법주의 체제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21세기라고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야곱처럼 모든 업적과 소유, 권속들을 얍복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구체적인 결단을 할 때이다.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 상황은 적당한 갱신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총체적인 회개와 개혁을 요구하는 고백신앙을 요구받고 있다. 고백신앙(status confesionis)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어떤 상황이 복음의 올바른 선포와 구원이 근본적인 위협에 직면할 때 이를 복음으로 저지하기 위한 신학적인 대응을 말한다. 독일 고백교회가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위협에 직면하여 1933년, 바르멘에 모여 바르멘 신학선언을 한 것은 복음의 선포와 구원이 위협에 처해 있음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그리스도인들이 섬겨야 할 주(主)로 고백한 것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은 1982년, 캐나다 오타와 총회에서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Aportheid Politic)을 합리화하는 어떤 신학도 이단으로 규정하는 고백신앙(status confesionis)을 선언하고, 인종 차별을 지지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회원권을 정지한 바 있다.

발제자는 얼마 전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대형 비리에 연루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 한국기독교의 자화상을 보고 목회자들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하나님과 국민 앞에 우리 자신을 고발합니다"라는 제하의 선언문을 발표한 것은 양심 있는 목회자들의 이 시대를 향한 고백신앙(status confesionis)이라고 믿는다.

발제자는 고백 신앙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요엘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요엘 선지자는 그가 활동하였던 시대 상황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으로 판단하고 위기 상황을 고백신앙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가 활동하였던 때(주전 400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으나 힘겹게 가꾸어 놓은 곡식들이 곤충들과 메뚜기 떼에 의하여 초토화되어 먹을 것이 거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이 처한 위기는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인간의 희락도 말랐다"(욜 1:2)는 말 속에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위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막강한 이민족이 침략(1:6)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행복과 평화의 상징인 포도원과 무화과나무를 초토화시켰다.

이와 같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 요엘은 민족의 정신적인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고 곡하며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로 모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것"(1:13~14)을 외친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켜 민족이 처한 처참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2:12~13) 그들이 지은 죄를 총체적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는 사건이 없이는 그들이 직면한 위기 국면을 도저히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을 요엘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요엘은 마음을 찢고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질 약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2:19).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이 가슴을 찢고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될 때 물질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영의 축복을 내려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렇게 될 때,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욜2:28) 이라는 것이다.

요엘 선지자가 민족이 처한 총체적인 위기 가운데서 고백신앙으로 돌아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회복함으로 그들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비전을 선물로 받았던 것처럼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진 한국 교회가 마음을 찢고 회개함으로 이 민족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의 책임과 과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열린보수와 열린진보로 거듭난 한국 교회에게 맡겨진 이 시대의 사명은 무엇인가?

새로운 복음의 발견과 더불어 새로운 인간과 새 교회 탄생을 가져왔던 종교개혁운동은 불의한 세계를 은혜로운 구조로 바꾸어 가는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새롭게 탄생한 사람들이 불가피적으로 영향을 받게 될 잘못된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일을 일차적인 선교의 과제로 파악하였다. 그 결과 개혁운동은 새로운 도시의 탄생을 가져왔던 것이다.

발제자는 오늘 한국사회를 봉건주의적 유교신분 자본주의 사회라고 부르고 싶다. 유교신분 사회가 빚어낸 권위주의와 약육강식의 시장경제가 야기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양극화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 은혜롭지 못한 사회구조 가운데서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탐욕을 한껏 채우고 힘없는 사람들은 역사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밀려나고 있다. 정경유착 부정부패 인권유린 성범죄 등 헤아릴 수 없는 사회범죄가 매일 터져 나오고 있다. 정의롭지 사회 구조의 모순 가운데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리고 막가파, 지존파와 온갖 부조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발제자는 한국사회야말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교과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사회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성이 있는 그대로 인간의 죄성이 통제를 받지 않고 개방된 채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 체재하는 동안 유럽인들의 오만을 관찰하면서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던 기억이 새롭다. 유럽인들은 매스컴에 보도된 한국사회의 비정한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한국사람들을 동정하면서 그들은 마치 특별한 종류의 사람들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발제자가 생각했던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같은 죄인(罪人)이라는 사실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을 거친 민주주의 전통을 먼저 이룩한 유럽사회는 인간의 욕망과 이기성을 통제하는 사회적 법적 장치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경우들이다. 인간의 죄성을 깊이 인식한 선각자들은 힘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지 못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제도와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것을 발제자는 인간의 욕망을 냉동시켜 놓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우리 사회에서 발현하고 있는 인간들의 탐욕과 이기성은 아직 냉동되지 않은 채 표호(豹虎)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선교적 과제는 있는 그대로 개방되어 버린 인간의 악마성과 본성을 냉동시키는 것이다. 실로 새로운 사회는 변화된 새로운 사람들이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악마적인 본성을 냉동시키는 길은 다수의 선한 사람들의 출현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인권과 권리가 침해받지 않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이룩해 내는 일이 급선무이다. 종교개혁과 민주주의 전통을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서구 교회는 표호하는 인간들의 탐욕과 이기성을 냉동시키는 데서 선교적 과제를 보았고, 인간의 죄와 악마성이 통제되고 자유와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한국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떠오르는 말이 있다. 그것은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우리들 모두는 진흙탕 가운데 있다네. 그러나 우리들 중 몇 사람들은 별들을 바라보고 있다네(We are all in the gutter, but some of us are looking at the stars)."

한국사회의 진흙탕 속에서 터져 나오는 모순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여기 모인 사람들은 별들을 바라보는 몇 사람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불현듯 머리를 스쳐가는 성서의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향해서 십자가상에서 드렸던 주님의 비정한 음성이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성수대교 붕괴사건 이후 마음 속으로 다짐한 바가 있다. 그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악마의 일에 가담하고 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의 통치의 영역을 넓히는 일에 참여하고 있느냐를 늘 의식하면서 살아가자는 결의였다. 그 후 나는 사무실 벽면에 "너는 오늘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치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구호를 부착하고 매일의 삶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의 역사에 참여하는데 쓰임 받기를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한국 교회에게 맡겨진 선교적 사명은 봉건적인 유교 신분 사회를 그리스도의 법이 통치하는 은혜로운 구조로 바꾸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과제를 창조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한국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그 동안 잘못된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보다도 100년 앞선 얀 후스(Jan Hus)를 중심으로 한 체코의 종교개혁의 모토는 "세상의 상태는 변화될 것이다(status mundi renobavitur)"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활동하는 곳에는 불의한 이 세상의 상태가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고,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외침이리라. 새천년을 눈앞에 둔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교회 성장과 축적된 복음의 역량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를 은혜로운 구조로 변혁하기 위한 개혁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뎌야 한다고 믿는다. 이 일을 위해 무엇보다도 열린보수와 열린진보의 만남과 연대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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