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종교개혁 379주년을 맞는 해이다. 사제의 신분이었던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항의문을 제시하며 개혁을 외쳤을 당시를 떠올리며 오늘 우리는 한국교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중세교회는 성경을 이탈하여 성도들을 오도하고, 정통성을 망각한 채 교회의 올바른 개념을 변질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종교개혁은 성직자의 타락과 교회부패를 말소시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영성을 회복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우리는 중세 교회의 잘못과 오늘의 교회속에서 발견되는 중세 교회적인 잘못을 생각하고 분석함으로써, 교회개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로마 카톨릭은 그릇된 교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스콜라 철학에 합리주의와 일반적 도덕주의를 끌어들였다. 이런 모습은 현대 교회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원조라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오도하는 인본주의 신학과 전위신학 내지는 사신신학, 민중신학 및 다원신학과 맥을 통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목회자들은 이같이 그릇된 신학과 신앙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하고, 성도들을 올바로 지도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루터는 '올바른 신학의 정점이 아닌, 잘못된 신학에서 멀리 떠나가라' 고 천명했는데 이는 그의 개혁의 주 내용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교회성장이나 부흥이란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신앙과 신학상의 잘못은 슬쩍 눈감고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들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큰 오류이다. 목적과 방법이 뒤바뀐 교회 정의는, 반드시 재정립이 필요하다. 이같은 오류는 잘못된 신학교육과 저질 신학교의 난립으로부터 발생한 현상으로 인식되며, 한국사회의 물량주의적 풍조와 사치성이 교회에도 침투한 증거이다.

예루살렘 교회나 아시아 일곱교회등 초대교회들은 교회규모나 성도 수, 교회예산과 같은 상황에 연연하지 않았다. 초대교회가 신앙의 순수성과 교회의 정통성만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현재 우리의 상황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성직자이거나 평신도이거나 간에 교회를 말할 때 교회의 신학과 신앙보다도 가시적인 부분만 들어 평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같은 잘못에 대하여 계속적인 개혁의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신앙고백의 재정립을 부단히 전개해야 한다. 교파주의, 독선, 물량주의, 신비의 요소와 갖가지 부정부패를 과감하게 일소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는 우리만이 건전하다고 하는 독선과 배타성을 거부해야 하며, 동시에 교회의 양적부흥이라고 하는 가시적인 일에만 힘을 쏟거나, 이를 위해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인 요소까지 수용하는 경향을 당연히 버려야 한다.

또, 중세 교회는 성찬이나 세례외에도 견신제, 혼배성사, 고해성사, 종부성사를 하고, 속죄부를 주는등 인간의 죄를 신부의 권한으로 용서하여 주었고 이는 또 부패에 이용되었다. 이는 성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접근케 된다고 함으로 성직자의 권한을 하나님의 절대권과 동일시 하고 만인 제사장설을 정면으로 부인한 것이 되었고 이로써 비성경적 작태들이 유발하게 된 것이다.

중세시대 성직매매를 주목할 만하다. 당시는 성직을 경매했는데, 그래서 성직은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의 몫이었다. 또 인명 보류세라고 하는 것이 있어, 늙은 성직자가 죽기를 기다리는 성직자들이 세금을 냈는데, 그가 젊었으면 좀 싸고 늙으면 그 보류세가 더 비샀으며 고위 성직자들은 이를 착취의 도구로 삼았다. 만약 어느 고위직이 한자리 비면 그 하위직이 전부 한칸씩 전원 이동하기 때문에, 그 수가 많을수록 돈을 많이 챙길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교회가 비면 그 자리를 공석으로 두어 그에게 지불되는 생활비를 고위 성직자가 가로채기도 했다. 중세시대의 타락한 성직자들은 바로 이런식으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여기에 반대하면 죄명을 씌워서 면직했다. 그래서 마틴 루터도 파문을 당한 것이며 1518년 1월에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는 오늘에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돈봉투가 오가는 행위들은 지금도 교단내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 이에 대해 갱신을 부르짖는다면 변화가 가져다 줄 불이익을 우려해 그럴 듯 한 명분으로 반대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는 교회갱신을 위해 모인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길목에서 진리를 외치다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무서울 정도의 독선과 배타가 진리의 길을 가고자하는 자들을 죽게 했지만, 이 행진을 결코 막을수 없다는 것이 중세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보여준 역사의 교훈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천동설을 고수하려는 성직단으로부터 종교재판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사형장에서까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외쳤고, 지금의 우리는 그 진리의 최후 승리를 보는 것 아닌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대부분 건전한 부흥을 하고 있으나, 역시 적지 않은 교회들이 할 일을 잊고 부패의 대열에 서있는 현실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성경만이 유일한 절대진리이며, 하나님 전에서 만인이 제사장이라는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는 종교개혁의 참된 정신이다. 법 이전에 있는 이 불문율이 중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도화된 타락한 교권이 개혁을 외치는 자의 목에 칼날을 휘둘렀으며, 그 교권을 지키기 위하여 개혁의 움직임을 유형무형의 방법으로 탄압하였고, 가진 자와 권세있는 자의 대변자로 전락해 버렸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언자적 소명을 가지고 계속적인 개혁에 몸바쳐야 할 것이다.

피텐베르그에 있는 대학교의 문위에 새겨있는 당시 루터의 외침은 오늘도 세계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고 있다. 젊은 신학자의 개혁의 용단은 오늘 우리에게 부단히 요청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그리고 본 교단과 한국 교회의 갱신에 한 계기를 마련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다. 이 헌신의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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