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지체로 살아가기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을 많이 상실하고 있음은 이미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나 그 상실에 대한 감각조차도 없다면 이것은 치유가 꽤 어려운 중병인지 모른다. 교회 본질 중에서 필자의 주관에 따라 몇 가지 돌아봤으면 한다. 우선 그 첫째가 교회 공동체성의 상실이다.

현대인들의 탈권위(脫權威)현상과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다원주의 등은 개인의 삶과 교회 생활에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느 교회에 공식적으로 소속되고, 교회 구성원들과 깊은 사귐을 가지며,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통치 받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 신앙 생활의 동기도 개인의 종교적인 위로와 필요를 따라서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현대교회는 계속 도시교회 구성원들의 유동성(流動性)과 익명성(匿名性), 편의성(便宜性)을 충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당연한 결과로 교회의 영성이 죽고, 말씀의 권위가 떨어지며, 하나님의 권위도 추락하고 있다. '교회는 성도의 공동체이며, 성령의 코이노니아'라는 근본을 뿌리부터 상실하고 있다. 결국 교회는 일종의 종교집단과 사회적인 모임으로 전락(轉落)하는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찍 프란시스 쉐퍼가 지적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현대교회는 복음을 회복하고,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기대하기보다는 인간의 입맛을 당기며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 끌어 모으려는 판매촉진(세일즈) 전략과 경영 차원의 목회 기교를 무비판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교회의 경영 기법, 목회 철학, 조직, 목표 등을 살펴보면 드러난다. 좋은 건물과 초현대식 시설, 화려한 프로그램, 초대형주의를 내세우며 사람들의 필요를 최대한 충족시킬 때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둘 수 있겠으나 그곳에 더 이상 주님은 임재하지 않으시는 두려운 현상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행복하고 유익하게 할 수 있느냐"를 교회와 진리의 기준으로서 삼는다. 순식간에 교회를 옮기며, 교회 쇼핑 현상은 더욱 흔해질 것이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과 주님의 권위로 자신을 먼저 점검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교회는 더욱 인간적인 방법, 세상의 철학에 얽매이며 그것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성경적이고 좋은 교회라고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誤算)이 될지 모른다. 오히려 진지한 성경 공부와 값을 치르는 적극적인 예수 제자의 신앙생활을 촉구하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위험 부담은 각오해야 한다. 사실 본회퍼의 말처럼 주님의 제자가 되라는 죽음으로의 소명에 대한 도전은 거짓 제자들을 떠나게 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요 6:66). 물론 정반대로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자들은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 시대는 적당하게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살 수 없는 시대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을 싫어하고 버리면, 하나님도 또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다. 지금 현대교회의 영적 상황이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과 똑같으며, 그 중에서도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왕국을 펼치심도 여전히 같다. 따라서 복음과 삶이 아닌 것으로 현대인들을 교회당 건물로 끌어내려는 짓은 거부되어야 하며, 현대교회의 비복음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말씀으로 분별력을 갖고,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성경의 권위와 내용을 궁극적인 가치로 인정하는 복음주의적인 입장으로 교회의 풍조와 사상의 흐름을 엄밀히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팔아 줄 세일즈맨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방법론자들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채워진 사람들을 원하신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70년대 중반 이후에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고 놀랍게도 우리는 유럽과 미국의 서구교회 전철(前轍)을 아무 걸러냄 없이 그대로 답습(踏襲)하는 어리석은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더욱 우리는 복음을 담보 삼고, 신앙 변질을 용인하며, 독특한 샤머니즘까지 혼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원론(原論)으로 되돌아가 교회를 비추어 봐야 한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영구불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고, 이 시대의 교회 현상을 점검하며, 새포도주인 복음을 끊임없이 변화를 계속하는 문화라는 포도주 부대에 어떻게 담아 현대인들에게 마시우게 할지를 생각하는 현실적인 노력과 미래적인 전망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존재 양식과 하나님 나라의 원형질(原形質)은 공동체(Community)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 아래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여 연합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교회를 공동체로 디자인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구속의 완성을 성취하시는 신비스런 방법이다. 성령의 공동체이며 '코이노니아'인 교회의 본질이 회복될 때만 교회는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 화해의 대행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해야만 한다.

공동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사귐, 나눔, 섬김이다. 성경의 단어로 말하면 '코이노니아'이다.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은 너무 빈약하다 못해 거의 빈사(瀕死) 지경이다. 성도의 '코이노니아'가 없고, 교인의 단순한 집단이 되어버렸다.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나타나고 자본주의의 생존 경쟁이 교회의 철학으로 여겨진다. 점점 인스턴트 교인들이 늘어나고, 핵가족 풍조와 개인주의의 발달, 도시사회의 폐쇄성과 여가 중심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교인들도 당연히 교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는다. 교회의 보편적 성격인 공동체성이 사라지고 대형교회의 버스를 이용한 교인 훑어오기가 유행하는 이유이다. 다른 영세한 교회의 앞을 지나는 타지역의 교회버스, 또 세든 임대교회와 그 옆에 우뚝 서 있는 대형교회 사이에서 우리는 사랑의 나눔과 섬김이 있으며, 교회 공동체성과 연합을 통한 일치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예수님이시라면 오늘날의 이런 현실을 어떻게 보실까?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목회자와 교회는 오직 초대형 교회로의 격상(格上)을 꿈꾸며 최선을 다한 헌신(?)을 한다. 장신대 이신건 교수의 말처럼 "진정한 거룩은 예배, 그리스도의 말씀의 수납, 그분의 뒤를 따름, 그로 인한 사도적 고난과 가난의 감수, 끝없는 회개와 순종에로의 결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사하심" 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스타일을 고집한다. 교회 성장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룩한 삶을 호소하기보다는 가급적 평안한 삶을 호소한다. 신자들도 역설적 표현으로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만을 구한다.

안락과 평안, 개운함은 이 시대 교회의 모토이자 예배의 특징이다. 그렇지만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성장과 성숙은 오직 성령님의 사역에만 의존한다. 성령은 우리의 최선을 원하시나 아울러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동시에 얻으려는 우리의 욕심이 포기되지 않으면 교회는 절대 하나님 나라를 이뤄 갈 수 없다. 교회 공동체는 성령 안에 있어야 하며, 성도는 성령의 코이노니아 안에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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