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8/24) 교갱협 제9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아무리 어려워도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이 절망적이어도 교회가 살아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교갱협 현장에 와보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한국을 쓰시고 한국을 축복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번에 간암 수술을 5번째 받았는데 첫 번째 수술을 받을 때는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두렵지는 않지만 교인들이 많이 걱정되었습니다. 내가 간암으로 수술한다는 소식을 교인들이 알면  얼마나 당황하고 힘들어 할까! 그 걱정 때문에 우리 장로님들이나 목회자들, 교인들에게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제 주치의가 삼성병원에서 몰래 수술을 하자고 했는데 요즘에 몰래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아내가 그때 미국에 있었는데 아내한테 연락을 해서 수술할 곳을 찾아보기로 하고 쉬러 간다며 미국으로 가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세 가지 깨달음

그때 제가 한 세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온누리교회를 어떻게 하나? 내가 만약에 수술을 받고 항암제를 맞고 교회에 못 돌아오면 온누리교회가 작은 교회가 아닌데 다음에 누가 목회를 하는가? 제 나이가 아직은 후계자를 생각할 나이는 아니지만 이런 일을 부딪치고 나니까 사람 준비를 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꼭 암이 아니어도 교통사고로도 죽을 수 있는 것인데 예견된 죽음은 아니지만 그런 일에 대한 생각을 안 하고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생각하게 해주신 것은 내가 떠난 이후에 온누리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굉장히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내가 수술을 받는데 우리 아들이 옆에서 기도하고는 “아버지 수술 잘 받으세요.” 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내가 수술을 잘 받을 게 없었습니다. 잘 해줘야 잘 받지요. 내가 수술을 잘 받겠다고 되는 게 아니라 수술하는 분이 잘해줘야 잘 받는 거지요. 또 명의(名醫)가 집도한다고 해서 수술이 다 잘되는 게 아니라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산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인생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지는 거고, 기회가 주어져서 목회하는 거지 내가 잘한다고 잘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가슴속으로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고, 주어진 기회에 은혜로 수동태로 살아가는 것이지 인생은 능동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생각했던 것은 과연 내가 목회하는게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병이 매년 재발했습니다. 일년에 한 번씩, 재발하고 또 재발하고 그래서 이번이 다섯 번째 재발입니다. 의사선생님도 당황하고 저도 당황하고 그리고 친구들이나 지인들한테 또 수술한다는 말을 하기가 좀 창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장로님들이 와서 “목사님 이번 수술은 수술이 끝난 다음에 교인들한테 말하지 말고, 목사님이 약한 것을 교인들한테 고백하십시오.”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약한 것을 고백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그동안 네 번 다 안했었거든요. 수술 끝나고 돌아와서는 잘 끝났다고만 했습니다. 기도해 달라는 말은 차마 못했었는데 장로님들의 말을 들어보니까 그 말이 맞았습니다. 교인들도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나중에 알게 되면 섭섭하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장로님들 말대로 그렇게 하기로 하고는 주일 예배 때 강단 위에 무릎을 꿇고 장로님들과 목사님들이 나와서 안수하게 하고 전교인들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이번에 이 일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 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내가 강하고 잘나고 목회에 성공하면 주님의 자리가 없지만, 내가 약하고 부족하며, 실수할 때 주님이 강하게 해주신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성도님들이 열심으로 기도해 준 것을 수술과 그 이후의 치유과정에서 너무 너무 생생하게 느꼈습니다. 제가 지난번 네 번째 수술할 때는 의사가 한 시간 반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했었는데 이번에는 딱 25분 걸렸습니다. 조형제를 넣고 사진을 촬영해서 정확히 암을 보고 항암제를 넣는데 딱 25분, 의사도 저도 모두 다 놀랐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기도는 관념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역시 기도는 오픈해야 합니다. 감추면 안 됩니다. 약하면 약한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이것을 오픈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고난을 겪으면 거품이 빠진다는 것입니다. 군더더기가 빠집니다. 비전에도 믿음에도 군더더기와 거품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섞으며, 내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시련을 겪고 가난해지고, 병들고, 실패하면 거품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제가 이번에 수술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음식조절이었습니다.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의사가 먹으라고 한 양의 음식만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3주 만에 6kg이 빠졌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내가 목회를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그 비전과 사명이 무엇인가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집중하게 되는데 제게 있어서 남아있는 것은 교회였습니다. 저는 감히 자랑하고 떳떳하게 말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24시간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제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저는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목회는 생명 걸고 해야 합니다.  목회는 힘들면 돌아가고 적당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회가 무엇이 문젠가 하면 지식의 문제도, 정보의 문제도 아닙니다. 생명을 안 거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약을 정리해 보면 예수님의 꿈이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십자가를 지는 꿈입니다. 그 분의 생애 전체, 말씀, 사역, 그분의 모든 것들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간 겁니다. 그 길을 피하지 않고, 그 길을 외면하지 않으며, 그 길을 가신 것이 예수님의 꿈이었고 길이었습니다. 또 하나가 있다면,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 그 분의 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 지상에 남겨주신 선물이 하나 있다면 그의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이며, 제도적이며, 교파적이고 교리적인 그런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교회인 것입니다.

저는 지난 19년 동안 이 교회론에 기초해서 온누리교회를 세워 왔습니다. 성경적 교회론이 있어야 목회철학이 나오며, 목회철학이 있어야 예배와 사역과 설교와 가르침과 선교와 전도가 실 풀리듯이 풀리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론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론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능력도 없습니다. 저는 이 교회론이 목회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랑하는 게 하나 있는데 우리 교회를 어느 누구보다도 제가 제일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먼지가 있는 것까지 다 아니까요, 구석구석 화장실과 부엌까지... 그만큼 교회를 많이 생각합니다.

과연 주님의 교회란 무엇일까?  저에게 교회에 대한 좋은 모델을 보여준 곳은 중국의 처소교회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모택동 치하에서 선교사들이 다 쫓겨나갔고 교회도 폐쇄되었지만 교회가 없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중국 처소교회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충격과 도전을 받았는데 1,000만 명이 넘는 처소교회가 일곱 개가 있고, 그들은 전부 네트워킹되어 있으며, 삼자교회가 약 1,400만 명 됩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약 8,400만 명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옥에 가도 중국 사람이 많고, 천국에 가도 중국사람이 많다는 말을 누군가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 사람들한테 충격을 받았는가하면, 그곳에는 성경도 없고, 교회도 없고, 목사도 없고, 신학교도 없는데 진짜 하나님의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처소교회 지도자 한 분이 제가 일본에서 집회하고 있을 때 찾아와서는 간절히 하소연하기를 한국의 좋은 선교사님들이 중국에 많이 와있는데 그들은 왜 교파의 교회를 만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로 와서는 자기 세력만 확장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파에서 보냈으니까 그럴 수밖에는 없겠죠. 그러면서 저한테도 꼭 kingdom church를 하라고 하더군요. 저한테 꼭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저는 그 분의 얼굴에서 살아있는 교회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또 충격을 받은 것은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를 보면서 였습니다. 봉수교회 말고 진짜 순교자의 가족들로 세워진 지하교회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 분들로부터 편지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놀라게 하는데 그곳에는 목사도 없고, 장로도 없고, 신학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잘된다는 것과, 신학교가 없으면 오히려 교회가 순수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한테 북에서 온 편지 중에는 요즘 자칭 예수라는 사람이 여기저기에 나타나서 혼란스럽고, 말세가 되면 자칭 예수라는 사람이 생기는데 그 사람이 옳은지 그른지를 모르겠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지난 번에 돌아가신 김삼열 목사님이 북한에 가셨을 때에 20대 남자 두 명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어떻게 세례까지 받게 되었는지가 김 목사님께는 상당한 의문이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 청년들의 엄마가 모세의 엄마와 같이 비밀리에 신앙교육을 시켜서 신앙고백까지 하게 되었는데, 목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렵게 어렵게 연결을 해서 자기 아들 둘이 김 목사님이 묵고 있던 고려호텔에 와서 세례를 받게 한 것이었습니다.

탈북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기독교 순교사는 새롭게 쓰여져야 할 정도로 기가 막힌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게 진짜 교회이며,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이 직접 목회하는 교회입니다. 제가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은 외형적 온누리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인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두 가지 질문

저는 교회에 대해서 항상 두 가지를 질문합니다. 교회는 정말 주님의 꿈이시고, 이 시대의 희망과 대안이 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한 우리의 대답이 있어야 됩니다. 교회가 살면 세상이 살고, 교회가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너지기 때문에 레즈비언, 게이, 포스트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등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새롭게 둑을 세우면 그것은 숫자도 아니고, 제도도 아닙니다. 중국에 있는 처소교회와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처럼 살아있는 교회, 순교하는 교회, 생명을 거는 교회들이 몇 개만이라도 있으면 죄악의 물결을 막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고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정치적 절망과 경제적 난관, 교육의 부재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대안은 교회뿐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제도적인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꿈꾸시는 바로 그런 교회들이 순교적인 각오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미국은 마틴 루터 킹 이후에 순교자가 없으며, 한국도 교회는 많이 컸지만 순교자가 없습니다. 정말 순교의 각오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갱신의 길은 누군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 병들어 죽든, 배고파 죽든, 매 맞아 죽든, 감옥에 가서 죽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순교의 피를 뿌리지 않고는 절대 다시 살아나는 법이 없습니다.

두 번째 나의 질문은 이상적인 교회는 존재하는가? 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교회는 존재할 수 있는가? 저는 확실하게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껍질을 벗자. 껍데기를 벗자. 기득권을 벗자.’ 이 제도적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 분이 외롭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처럼 과연 로마를 변화시켰던 교회의 실체가 존재하는가? 그 모델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어떤 지역에서 목회를 하든,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든, 그것이 캠퍼스건, 노동자의 세계건, 또 선교지건, 시골이건, 도시이건 어디든 간에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교회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가르켜 사도행전적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역사상 실체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교회는 DNA이기에 실체가 안보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적 교회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경험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의 한 10가지 중요한 요소를 갖추면 사도행전적 교회의 실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1.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 (행 2:1~4)

첫째는 사도행전적 교회의 제일 중요한 실체는 성령으로 잉태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해산되었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1~4)

그리고 그들은 다락방을 뛰쳐나갔습니다. 성령이 약속대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120명의 무리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성령은 첫째 공간에 옵니다. 봄바람이 불면 들에 꽃이 피고 가을바람이 불면 낙엽이 지는 것처럼, 성령의 바람이 불면 성령의 꽃이 핍니다. 둘째로 성령의 불은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합니다.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들의 머리위에 있더니, 저희의 앉은 곳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현상과 역사가 일어나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여러분 교회의 장로님들이 모두 다 성령세례 받고 성령의 능력을 얻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의 장로님은 하나님의 음성, 성령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되겠습니까?

사도행전적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던 것처럼, 그런 성령의 역사가 실제로 경험되고, 이야기되고, 그 역사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목사님들 모두 성령의 충만한 설교를 하며,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능력있고, 그렇게 안수하고 그렇게 말하고 또 치유하고 회복하는 능력이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게 핵심이고 본질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사람이 보이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너무 똑똑하면 골치만 아픕니다. 교회는 똑똑하기보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2. 예수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 (행 2:42~47)

두 번째는 사도행전 2:42~47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교제하고, 떡을 떼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하는 것을 경험하고 느끼는 그런 공동체, 그런 관계의 형성, 그것이 제자훈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든, 일대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든, 큐티라는 표현을 사용하든 간에 그런 게 있단 말이죠.

 

3. 기적을 체험하는 교회 (행 3:1~10)

세 번째, 사도행전 3:1~10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이 되어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을 만났는데 구걸을 하니까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내게 없지만, 내가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고 걸으며 찬송하며 성전에 들어가더라.”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이 앉은뱅이같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좋았을까? 체면이나 자존심이 중요할까? 사도행전적 교회는 날마다 기적을 경험하는 교회입니다.

병든 자가 일어난 것도 기적이지만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예수 믿는 것도 기적 아닙니까? 제가 지난번에 제주도에 있었는데, 오래 전 CBMC 전국대회 주강사로 약속했었는데 수술을 받고 의사 선생님이 비행기는 가능하면 타지 말라고 하는데도 취소가 잘 안되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도 다녀가셨다고 해서 취소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제주도를 갔습니다.

제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약 3,500명이 집회를 했는데 둘째 날 제주도의 예수를 믿지 않는 실업인들 700여 명을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갑자기 그분들에게 만찬을 해드리고 전도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아침 7시에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떠나려 하는데, 2005년에 중국 북경에서 열리는 전세계 CBMC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번에 35명이 참석을 했는데 그 중 대표가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이번에 온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실업인이 따라 왔는데 그 중에 여섯 명이 어제 설교를 듣고 세례받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설교가 끝나자마자 세례를 받겠다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나중에는 한 명이 더 와서 일곱 명이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며, 의논한 결과 중국 정부로 부터 핍박을 받을 가능성이 굉장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고 세례받기로 한 것입니다.

교회에는 날마다 이런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세례받는 수가 날마다 더하더라. 예수 안 믿던 사람이 믿고, 세례 안 받은 사람이 받고,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변하는 그런 간증들이 매일 있는 것입니다. 이게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4. 고난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 (행 4:1~4)

네 번째, 사도행전 4:1~4에 보면 사도행전의 특징은 고난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제가는 고난이며, 흩어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도 흩어지고 깨졌습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정면돌파합니다. 고난 중에 성장하는 교회, 고난 중에 성숙해지는 교회, 고난 중에 부흥하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최대 위기는 안정권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이번에 미국의 뉴송교회를 담임하는 ‘데이브 기븐스’ 목사가 저희 교회에 왔었습니다. 이 사람의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고, 아버지는 미국 사람입니다. 어머니는 한국에 있을 때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미국의 군인과 결혼하여 자기를 낳은 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온갖 천대와 구박을 받고 맞으며 살았답니다. 자기 아버지는 딴 여자랑 사는데 남편한테 사랑을 받아보려고 삯바느질까지 해서 자동차도 사주고 집도 사주고 했는데 결국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도망가 버렸답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화가 나서 매일 술을 마시고, 약에 손을 대고 하는데 ‘기본스’는 그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어머니에게 좋은 차도 사드리고, 좋은 집도 사드리고 하는 것이 자신의 평생 비전이었답니다.

근데 어머니가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의 아메리칸 드림은 끝이 났고 어머니에게 잘해주고 싶었던 자기의 비전도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 때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기도하는 중에 ‘나를 위해 살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신학을 하고 주님의 종이 되어서, 지금은 얼바인에서 3,000명이 모이는 다민족교회, 특별히 중국과 코리안의 평균 20~30대들이 모이는 미국에서 아주 성공적인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부흥이 되어서 땅도 많이 사고 헌금도 많이 준비되어 있고 한데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교인들에게 우리 교회가 위기의 시간에 접어들었기에 40일 금식을 하기로 선포하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자고 했는데 70%가 참여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40일 금식을 60~70%가 참여했는지 놀라우시죠? 미국식 기도는 한국식 기도하고 달라서 일명 빨대금식이라고 합니다. 빨대로 먹을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먹어도 됩니다. 우유도 마시고, 생식도 먹고, 햄버거도 갈아서 먹고, 그렇게 40일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쉬운 것 같으세요? 아닙니다. 그것도 어렵습니다. 그렇게 금식을 하고나서부터 교회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안정하다는 것은 위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안정하기를 원합니다. 편안하기를 원해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가 안정권에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이 흩어 버렸습니다. 이 지상에서는 안정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중요한 코드는 고난이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고, 굶고, 매 맞고, 쫓겨 다니고 그게 사도 바울의 생애였습니다. 그러한 고난 중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5. 소유를 나누어 쓰는 교회 (행 4:32~37)

다섯 번째로 사도행전 4:32~35에 보면 지상교회에 살면서 가장 위대한 믿음은 물질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극복하는 것, 소유를 극복하는 것, 이기심을 극복하는 것, 그것이 초대교회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싸우고 헤어지는 것이 예수님 때문일까요? 물질 때문일까요? 복음을 사수하기 위해서 싸웁니까? 그런 분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보기 어렵습니다. 많은 싸움을 보면 재산싸움이고 기득권 싸움이고 권력다툼입니다. 국회보다 저질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킵니까? 초대교회가 능력이 있었던 것은 물질의 유혹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돈에 얼마나 예민한지 세상보다 더 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돈 가지고 사람을 후려치고 조종합니다. 세상에서 먹는 것 가지고 사람 조종하는 게 제일 치사하고, 돈 가지고 사람부리는 것은 웃기는 겁니다. 그건 사도행전적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하고 전통이 있고 멋있어도,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재물의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도행전적 교회가 아닙니다.

 

6. 순결과 거룩을 꿈꾸는 교회 (행 5:1~11)

여섯 번째 특징은 정직과 순결과 거룩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 얘기의 포인트가 뭡니까? 베드로가 말하길 “언제 헌금하라고 했느냐?” 헌금 안한들 하나님이 그거 가지고 화내시느냐, 왜 헌금한다고 하고는 속이느냐 아닙니까? 그리고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즉사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저를 포함해서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교회의 본질은 거룩이라는 겁니다. 교회의 본질은 정직이며 교회의 본질은 순결입니다. 이런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이고, 그런 교회가 능력이 있습니다. 물질을 이길 수 있고 명예와 세상의 권력을 이길 수 있는 그런 힘은 어디서 오는가? 순결의 힘이며, 정직의 힘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 부분에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문화적으로 지혜로운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상대적으로 그것은 그렇게 큰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순결과 거룩과 정직을 말하는 것은 이방인처럼 외롭고 고독하고 힘든 일이지만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과연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 이것을 해낼 능력이 있을까? 오늘 같이 거짓말 하고 신용불량자가 400만이 넘치는 이런 사회에서 교회가 이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수가 있을 것인가? 정말 정직한 국민을 만들어내는 영적 산실이 될 수가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모르게 이미 그런 거짓말과 위선적인 문화, 불법을 행하는 문화 속에서 그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였던 것 같은데 그 나라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우리는 더 이상 축첩(蓄妾)하지 말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내를 몇 명 얻는 것이 그 문화에서는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이기에 일부일처(一夫一妻)로 간다는 것이 그 문화적 배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도덕적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하여 제거했던 사건은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습니다.

 

7.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교회 (행 6:1~7)

일곱번 째는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6:3~7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사람들이 서로 싸울 때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택하여, 우리는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고 리더를 세우자” 고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도행전적 교회는 몇몇 사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리더십을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 리더십을 나누지 못하는 부분에서 빨간등이 켜져 있습니다. 그래서 리더십 싸움이 생기고, 목사가 독점하느냐, 장로가 독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잡으면 절대 놓지 않습니다.

여러분, 목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아니라 성도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하루 24시간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믿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먹고 애를 쓰지 않으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킵니까? 그러나 평신도들은 매일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목사는 뭐하는 사람이냐면 그 평신도들을 코치하고 감독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감독이  그라운드에 서는 것 봤습니까? 선수가 잘 못한다고 감독이 뛰어 들어가면 그 게임은 끝난 것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목사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불행한 것은 큰 교회, 좋은 교회는 그 교회 담임목사가 유명하지 그 교회의 평신도가 유명하지 않습니다. 이러니 세상이 변하겠습니까? 이제는 평신도들에게 리더십을 돌려주고, 믿어줘서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드림팀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사도행전적 교회는 평신도들에게 영적 권위를 주고, 그들을 제자훈련 시키고 리더로 세워서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창의적 모델과 전통적 모델이 있는데 전통적 모델은 플레이그라운드에서 목사가 뜁니다. 권투 같은 것이지요. 목사가 뛰고 관객은 교인이며 무대는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스타플레이가 좋아하는 것은 많은 관객입니다. 이게 전통적 모델입니다. 반대로 선교적이고 창의적인 모델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세상사람들이 관객으로 보는 가운데 선수된 교인이 뛰는 겁니다. 목사는 그들을 코치하며, 감독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패러다임이 다릅니다.

 

8. 이방인을 가슴에 품는 교회 (행 10:17~23)

여덟번 째는 이방인을 가슴에 품는 교회로 사도행전 10:44~48에 보면 베드로는 절대로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도 답답해서 드라마를 하십니다. 보자기를 올렸다 내렸다 올렸다 내렸다 를 세 번이나 합니다. 하나님이 시켜도 NO 하니까 베드로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난 그런 일을 해본 적도 없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가 하라는데 왜 그러냐는 거죠.

우리도 이런 게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전통과 역사의 관행에 묻혀서 해야 될 일을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면서 세계관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믿음의 세계가 깨지고 그 사람의 패러다임에 전환이 온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예수를 가장 잘 믿고, 전통적이라고 생각 했던 그 패러다임이 깨지는 것이죠.

교회의 본질은 끼리끼리 노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가슴에 품는 것이며, 다른 민족을 가슴에 품는 것입니다. 나와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백인이나 흑인이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진정한 사도행전적 교회는 문화와 언어와 모든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라 할 찌라도 가슴에 껴않고 하나가 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해야 될 가장 시급한 것은 탈북자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제가 탈북자를 열심히 도와보는데 문화적으로 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압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그들을 품으면 하나님께서 복주십니다. 우리 한국 백성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가슴에 품고, 탈북자들도 가슴에 품고, 조선족도 가슴에 품읍시다. 여러분과 수준이 다른 사람을 가슴에 품는 것,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9.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교회 (행 13:1~3)

아홉번 째는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화려했고 찬란했던 예루살렘 교회는 자취가 없어졌습니다. 하루에 3천 명씩 예수를 믿었고, 남자만 5천 명이었으며, 그 외에 허다한 수가 있었다면 그 교회의 인원은 분명히 3만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인구밀도와 통신수단 등, 그런 인프라가 있는 상황에서 3만 명이 넘는 것은 초대형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주역을 만드는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이끌어간 교회는 작고 외소했지만 세계 선교의 꿈을 품었던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대형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꿈도 아니길 바랍니다. 저도 본이 아니게 큰 교회를 하는 사람이지만 큰 교회는 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도 한 30개 교회로 다 쪼개서 분산을 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끌고 간 것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이 첫 선교사로 떠난 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를 처음 세울 때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기도하고 교인들에게 선포하기를 우리가 13장을 공부할 때는 선교사를 한 명 파송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사례를 받지 않고 선교사님에게 먼저 사례비를 보냈습니다. 그 때 첫 선교사가 김우정 선교사였고, 그 다음이 한정국 선교사님이었습니다. 13장을 공부하는 날, 김우정 선교사님 부부를 초청해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선교사로 정식 파송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교인 한 명이 찾아와서 말하길 “목사님, 그것은 사도행전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3장은 바울과 바나바가 갔습니다. 담임목사가 가야 합니다.” 제가 그 말에 얼마나 쇼크를 받았겠어요. 난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도행전적 교회는  담임목사가 떠나는 교회였습니다. 부목사가 떠나는 것은 사도행전적 교회가 아닙니다.

제 아내는 뉴질랜드에서 신학을 할 때 선교사로 가겠다고 선교단체 10곳에 편지를 보냈는데 다 거절당하고 저한테 시집을 왔습니다. 제가 선교지인가 봐요. 저는 정말 선교사로 가고 싶어서 매번 선교에 대한 꿈을 꿨는데 못 갔습니다. 가려면 아프고, 가려면 폐병 걸리고 당뇨 생기고, 고혈압 있고 기분이 나쁘고 그래서 그냥 우물쭈물 목회를 하게 된 거예요. 저희 교회 치과의사 선생님이 50대에 연변에 갔는데 그 분이 어느 날 잠깐 귀국을 했어요. 그래서 만나는데 “목사님, 온누리교회는 다른 사람한테 맡기시고 목사님은 절 따라 오세요. 그러면 병이 다 낳을 거예요” 병이 낳는다니까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여러분, 담임목사가 다 갈 수는 없지만 안디옥교회의 모델은 바나바와 바울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가장 가치있는 투자를 했다는 것이지요. 선교란 가장 가치있는 것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Secondary를 보내는 게 아닙니다. 목회 할 것 다 하고 남는 돈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좋은 사람, 아끼는 사람일수록 내보내야 합니다. 내 심복, 나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내보내는 용기와 결단이 선교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이 28장까지 있는데 선교가 13장부터 마지막까지입니다.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는 얘기로 꽉 차있다면 우리 교회도 전도 이야기와 선교 이야기로 꽉 차야 합니다. 선교사님이 가고 들어오고, 이야기 듣고, 교인들이 선교에 미치고 하는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10.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행 28:30~31)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적 교회는 사도행전 28:30~31입니다. 이 마지막이 참 신비스럽습니다. 드디어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게 되었고 그는 로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셋집에서 2년 동안 찾아오는 사람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도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게 끝입니다. 미완성입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바울과 2년 동안 성경 공부했던 사람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집으로 돌아갔을까? 성경공부로 끝났을까? 아니예요. 그들은 불덩어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그들은 성령의 역사와 그 기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교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을 보면 사도행전은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성령 받은 사람은 다 사도행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9장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도행전적 교회를 끌고 가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

지금까지 열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이 사도행전적 기준에 의하면 얼마나 비슷합니까?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사도행전적이냐? 두 세 사람이 모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시골에 있건 서울에 있건, 선교지에 있건 오지에 있건 간에 우리의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삶과 가치관,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목표가 사도행전적 목표와 비슷하다면 그건 사도행전 29장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세상을 뒤집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잊혀질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제가 섬기는 교회가 사도행전적 기준에 의해서 설명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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