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차] 세 가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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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세 가지 소리
  • 김태일 목사
  • 승인 2001.08.2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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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1) 교갱협 제6차 영성수련회 새벽기도회

로마서 8:18~28

지난 여름 수련회로 강릉에 가는데 고속도로가 많이 막혔습니다. 왜 이렇게 막히는지 한참 지나가서 보니 반대편 길에서 사고가 났는데 그걸 구경하느라고 제가 달리는 차선의 차들이 밀려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구경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특히 공짜 구경을 좋아하지요. 역사 기록에 보면 선조 때 일본에서 공작을 보내왔는데, 한강 백사장에 놓고 백성들이 보도록 했더니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만 이렇게 구경을 좋아하는 것인가요? 누가복음 23장 48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도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는 것을 좋아하고 보는 것을 쫓아가게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얘기하듯이 성도는 보는 것을 쫓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 중에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보는 것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오히려 듣는 것을 쫓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소식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소명의식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세 가지 소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소리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듣고, 또 다른 사람들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피조물의 탄식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첫 번째 소리는 피조물들의 탄식하는 소리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과 22절을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피조물들이 고통 가운데서 탄식하고 있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지난번 저희 노회 목사님들이 모이셔서 말씀들을 나누시던 중에 화장터 얘기가 나왔습니다. 요즘은 화장하고 남은 뼈들을 그전처럼 쇠절구로 빻지 않고 냉면기계를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쇠절구로 빻든 냉면기계로 가루를 만들든,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인생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만 허무합니까?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허무한데 굴복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 필립은 "우주 전체는 하나의 거창한 탄식의 심포니를 연주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우주적인 탄식의 심포니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느니라" 여기 나오는 세상은 코스모스, 바로 우주입니다. 어떤 분이 만일 우주에 우주인이 있다면 그들에게 전도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별로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만 중요한 한 가지는 누구든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한 가지는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만민'은 바로 로마서의 '피조물'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온 피조세계의 고통스런 탄식소리를 들으면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모든 동역자 여러분 이 피조세계의 거대한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천하 만방에 전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개척교회에서 전도사님이 없는 고등부를 혼자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고등부라고는 하지만 처음에 갔을 때는 여학생만 딱 두 명 있었습니다. 고등부를 하면서 한 명, 두 명 늘다가 나중에는 한 30명쯤 모여서 아주 재미있게 잘 했습니다. 그런데 고등부 학생 중에 부회장 여학생이 있었는데 당시 영등포여상에 다니며 아주 똑똑하고 상냥하고, 한 마디로 버릴 것이 없는 그런 모범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학생이 저한테 "선생님, 저 병원에서 사형선고 받았어요. 머리가 아파서 세브란스 병원에 갔더니 급성뇌암이래요." 하는 겁니다. 그러고는 통증이 오면 먹으라고 했다고 진통제를 한 움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우리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대학 2학년 때 처음 믿음을 가졌는데 그 때만 해도 참 열정적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자고 하며, 만약 못 고치면 우리나라의 모 목사님이 능력있다고 하시니까 그 목사님을 찾아가서 안수기도 받고 고치면 된다고 위로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마침 부흥회 기간이었는데 지금은 목사가 된 고등부 회장인 고3 남학생과 그 여학생과 함께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길 간절히 바라며 밤을 새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이 저한테는 매우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밤새 철야를 했기에 좀 자고 학교에 가야만 했습니다. 남학생은 이미 학교에 갔고 그 여학생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자꾸만 저더러 좀 더 있다가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학교에 중요한 시험이 있으니까 조금 자야 될 것 같아 학교 시험 끝나면 빨리 와서 또 기도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목사님 사택에 들어가서 잠을 잤습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본당에 가보니 그 여학생이 안보였습니다. 어디 갔나 하고 이리저리 찾아보니 의자 밑에서 죽으려고 약을 몽땅 털어먹고는 뒹굴고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님과 그 아버지가 급히 와서 학생을 들쳐 업고 나갔고 저는 그 곁에서 따라 나가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가 "이럴 바에는 죽어라! 죽어!" 하며 죽어가는 딸한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버지는 군인이셨는데 이 딸은 밖에서 낳아 데리고 들어온 딸이었습니다. 위로 언니 둘이 있었는데 이 동생을 많이 구박했다고 합니다. 그런 가정 형편과 사정도 모르고 그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지금이라도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쳤으니 저는 자격 없는 교사였습니다.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뇌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이상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머리가 아프다고 하니까 간호원인 교회 자매들이 약을 주었던 겁니다. 이 자매는 저를 속였고 주위 사람들도 새까맣게 속였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밤샘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하고 울부짖으며 통곡했습니다.

그 사건이 제가 신학교에 가는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저는 자격있는 교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허무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벽제 화장터를 그 때 처음 가 보았는데, 엊그제까지도 팔팔하던 애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화로에 넣고 스위치를 켜는데 못 견디겠더군요. 고등부 학생들은 울고불고 정말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퍼뜩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불에 태우겠느냐?"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어렸을 때 시골에서 방에 군불을 때는데 그 때 아버지께서 방 쓰레기를 다 같이 태우시면서 제 손톱 깎은 것도 같이 태우곤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의 시신을 태우겠느냐?' 그러고 보니까 손톱이 길어서 잘라버리는 것이나 생명 떠난 육신이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만 하면 인생의 허무와 같은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소식은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그 때 영구차를 타고 불광동 고갯길을 넘어오면서 보니까 창밖으로 젊은 남자 두 명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마치 저는 육지에 있고, 그 두 사람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저한테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두 사람은 지금 막 죽어가고 있기에 조금도 지체할 수 없이 밧줄을 던져서 건져주어야 되는 상황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찬송가 258장 "물 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가 터져 나왔습니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물속에 빠져간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 이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 여학생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는 해마다 성탄 전날에는 새벽 송을 돌았습니다. 근데 그 학생의 부모님은 믿지 않으시는데 처음으로 자기 집에도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청년들 한 20여 명이 갔습니다. 가는 동안 이 학생은 우리가 가면 문 열어주신다고 했다며 들떠 있었습니다. 그 집 앞에 도착해서 성탄찬송을 부르는데 문이 안 열렸습니다. 한 곡을 부르고 두 곡을 부르고 계속 불러도 문은 안 열렸고 그 학생은 문을 열어달라며 문을 두드리고 소리 질러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저희는 민망한 마음으로 그 학생을 달래주며 다른 집으로 갔습니다.

그 애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 성탄절 때 문만 열어줬어도 그 애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애가 죽고 나서 그 학생의 언니 두 명이 저희 교회를 나오게 되었는데 개척교회이니까 오자마자 성가대도 하곤 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새벽 송을 돌 때 다시 그 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집이 가까워질수록 저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언니들한테 물었습니다. "작년 성탄절, 새벽에 댁에 갔었는데 문을 안 열어주셨는데 혹시 소리를 못 들으셨느냐?"고 했더니 "글쎄.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 때 왜 안 열어줬어요? 그 때 문만 열어줬어도 동생이 죽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렇게 어린 나이에 한 줌의 재로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요." 하며 외쳤습니다.

그 언니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사랑하기 어려운 동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랑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세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날 새벽 저는 그 대문 앞에서 부른 찬송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합니다. 정말 그렇다고 깊이 공감하며 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하여라" 기독교의 복음이 아니면 이 죽을 인생들에게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성도들의 탄식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들어야 할 두 번째 소리는 23절~25절에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성도들의 탄식소리입니다. 목사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목사라는 직분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새벽기도만 어려울 줄 알았는데 설교도, 심방도, 인간관계도 어렵고 무엇보다도 교회적으로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 장로님들이 목사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전에 천마산 기도원에 갔을 때 어느 교회인지 여 집사님들이 식당에 잔뜩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목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처럼 출세를 할 수도 없고, 돈을 벌 수도 없고, 게다가 번 돈을 쌓아놓을 수도 없고, 자식한테 유산을 상속할 수도 없고... 여러 가지를 들어가면서 목사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그런 목사가 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전도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목사와 전도사만이 아닌 모든 성도가 겪어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고린도후서 5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노라" 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가 왜 탄식하는가?'입니다. 23절에 보면,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 머레이는 이 탄식을 사망의 고통이 아니라 출생의 고통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요한 칼빈은 이 소망 있는 고통을 해산의 고통에 비교했습니다. 성도는 고통과 아픔, 눈물과 슬픔이 없는 세계를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주적인 탄식소리를 들으면서 소망을 갖고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인간 최대의 소망은 시편 17편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라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이 '깰 때'는 내생(來生)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비전이고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지만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탄식은 하되 그 탄식이 우리 몸을 구속하는 그 날을 기다리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성령님의 탄식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들어야 하는 소리는 로마서 8장 26절 이하에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탄식소리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중요한 점은 성령께서 왜 탄식하십니까? 우리의 연약함, 바로 나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계신 성령께서 내 연약함을 보시면서 내 속에서 탄식하신다는 것을 아시죠? 26절에 보면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놔두고 다른 것을 기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절에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육체의 가시가 자신에게서 떠나기를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했던 것은 자고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이천 년 역사를 지나고 보니 그 당시 사도 바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육체의 가시를 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고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서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자고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사도 바울이 있었겠습니까?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기도제목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어떠한 기도제목이든지 간에 성령님께서 나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그 탄식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 8장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성령님의 탄식하는 기도 속에 있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성도의 죄악까지도 그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유익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사시는 동안 어떤 일이 있으셨습니까? 내게 있었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고백하실 수 있으십니까? 우리 모두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때 그것까지도 내게 선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문제까지도 선으로 인도하실 줄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십시다. 이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목회자는 다른 누구보다도 모든 고난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사람들입니다.

작년 어느 날인가 수요예배를 마친 직후에 성도 한 분이 저에게 기도를 요청해 왔습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아기가 없어서 시험관 시술을 몇 차례 했는데 실패했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술을 하려는데 몸이 약해서 아기가 생겨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저희 교회는 수요예배를 마친 뒤에 구역장 성경공부를 하는데 조금 지체하게 하고 본당 옆에 있는 신입가족부실에 가서 권찰님과 셋이서 말씀을 한 군데 보고 짧게 기도하고 나왔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기도를 응답하셨는데 세 쌍둥이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 쌍둥이 중에 한 명이 약해서 인공유산을 시켜야 할 상황이라고 수요예배 후에 한 번 더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걱정이 되었던지 그동안 한 번도 교회에 나오지 않던 남편까지 같이 나왔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참 판단하기 어려웠는데, 그 약한 아기가 안쪽에 있어서 인공유산을 시키다가 잘못하면 다른 아기까지 다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산모는 저에게 "목사님, 아기를 뗄까요? 말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목회하는 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할 수도 없고, 생각을 해보니까 위독하다면 모를까 낙태를 권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야기 끝에 "저 같으면 낳겠다!" 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니까요. 그 말에 힘을 얻었던지 수술을 안 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이후에 약한 아이는 자연적으로 유산되었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사진에서 감쪽같이 없어졌다고 했답니다. 이걸 보고 그 성도의 남편이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다며 저희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그 쌍둥이가 태어나고 백일잔치도 했는데 제가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일 그 가정이 그런 고난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 남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현대의 어떤 종교에서는 악이나 고난은 실제가 아닌 환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정신적으로 컨트롤을 잘하면 그런 것은 능히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환상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이 겪는 고난은 실존적이며 실재적인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고난 너머에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신령한 음성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되며,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의 탄식소리를 듣는 사람들입니다. 인내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날까지 참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4장 17절을 함께 보고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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